흩어지는 양떼 -27(2)-
엘세이드 2015-10-17 6
*[주의] 전편이 있습니다.
전편을 보시면 이해가 더욱 잘 되실겁니다.
이 작품은 '엘세이드' 와 'PhantomSWAT' 의 합작입니다
[흩어지는 양떼 -1-]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436
[흩어지는 양떼 -2-]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articlesn=1459
[흩어지는 양떼 -3-]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7&n4articlesn=1469
[흩어지는 양떼 -4-]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3&n4articlesn=1574
[흩어지는 양떼 -5-]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609
[흩어지는 양떼 -6-]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633
[흩어지는 양떼 -7-]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4&n4articlesn=1652
[흩어지는 양떼 -8-]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4&n4articlesn=1701
[흩어지는 양떼 -9-]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articlesn=1744
[흩어지는 양떼 -15-]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articlesn=2790
[흩어지는 양떼 -27(1)-]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Title&strsearch=%ed%9d%a9%ec%96%b4%ec%a7%80%eb%8a%94&n4articlesn=6008
"당신, 독에 감염된것 처럼 보이는군요."
잠깐 세하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뭐라고? 독?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는 내용이었다.
"독이라고요?"
"네. 독이요. 치명적인...아니, 치료는 가능한것 같습니다만."
상처 부위 때문에 잘 걷지를 못하겠는지 남자는 일어서려는 듯 한 행동을 몇번 하다가 곧 신음소리와 함께 주저 앉았다.
"무슨 말이죠? 자세히 설명을 해주세요."
세하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입꼬리가 웃자 기묘한 모습이었지만, 남자는 재미있다는듯 말을 이었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그리고 지금 제가 무리하게 당신들을 공격하지 않으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당신이 만일에 하나 SS
급 차원종을 사살한다는 목표를 달성할 경우를 믿기 때문에 말씀드리죠. 차원독(dimension poison)입니다."
"차원 독?"
생소한 단어였다. 물론 어디선가 들어보기는 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있을만큼은 아니었다. 아마 클로저
기초 수업때 공부한 것 같지만, 당시에는 강연이고 뭐고 게임기만 붙잡고 열중하던 때였으니, 그가 기억할리 만무했다.
"네. 차원종 중에서 위상력을 독의 형태로 바꿔 인체에 해로운 역할을 하게 만드는 공격 방식은 아십니까."
벽에 간신히 등을 기대며 말하는 남자에게 세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정도는 그 역시 알았다. 아니,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미 그가 상대한 차원종 중에서는 B급 차원종부터도 독을 살포하거나 맞으면 신경쪽이나 위상력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위상력이 담긴 탄환을 발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놈들에게 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간단한 것들과는조금 다르다는 투의 남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차원종이 만들어내는 것은 그런 단순한 신경 독같은 것들 뿐만이 아닙니다. 개중 강력한 개체들은 아직까지도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독같은 것들을 만들어 내지요. 그 중 가장 골치아픈건, 잠복기중 아무런 영향을, 심지어 평상시와 똑같은 느낌으로 생
활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없는 독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 그 독을 치료받지 않으면 심장마비로 죽죠."
그의 이야기는 황당무계했다. 어쩌면 지금 남자는 그에게 거짓된 정보를 흘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떠한 이득을 위해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건지 몰랐다. 어쩌면 후속 추격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한 세하는 다음 순간 건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살짝 거머쥐었다. 의식적으로 그의 우위를 강조하려는 행동이었다.
"정확히, 그게 뭐죠?"
그의 말에 남자는 잠깐 그가 건블레이드에 얹은 손을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경계하지 않아도 되요. 나는 오히려 당신이 SS급 차원종을 상대하러 간다는 말에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우리 마을이
한번 외부인으로부터 습격을 받고 이동한 이곳은 당신들 말대로 SS급 차원종의 여파 때문인지는 몰라도 강력한 차원종들이
때때로 근처를 어슬렁거립니다. 그걸 없애주겠다는데, 마을을 지키는 저로써야 부담을 더는 일이죠. 신용은 가지 않습니다만."
그말을 듣고도 세하는 건블레이드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는 잠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당신 몸에서 이질적인 위상력이 느껴집니다."
남자는 천천히 한쪽 손을 뻗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하는 건블레이드를 뽑을 뻔 한 자신의 손을 호되
게 나무랐다. 이미 그는 기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것도 부상당한 상대에게.
그렇지만 그는 전혀 거리낄것 없다는듯 그에게로 손을 뻗은 채 천천히 아래로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세하의
심장부분을 가리키고 있다는것을 느꼈을때, 세하는 다시 한번 건블레이드를 뽑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저자는 위험했
다.
"푸른색...아니, 검군. 칠흑같이 새카만..."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남자는 이윽고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쥐기 시작했다. 검지손가락만 남기고 모든 손가락이 접히
자, 세하는 자신의 심장이 창에 관통당한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당신의 몸에 돌아다니는 위상력이 제게는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마을에서 어쩌다 가끔 보았던 차원독 특유의 색이 보이는
군요. 대게 독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심장으로 천천히 파고들죠. 당신은 워낙 위상력의 질이 높아 조금 진행속도가 더뎌지는
모양입니다만."
이해할수 없는 말에 세하는 건블레이드를 반쯤 뽑았다. 이것은 그에게 지금까지 느끼던 공포를 무마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세요. 시간을 끌려는거라면, 상대를 잘못골랐어요. 지금 간단하게 내가 이해할수 있는 설명을 하세요. 그렇지 않
으면 당신이 시간을 끈다고 판단하고 두 다리 모두를 잘라버리겠어요."
18살이 된 소년이 할 수 있는 말 치고는 끔찍한 발언이었지만, 결코 각오가 되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세하는 정말로 그럴 셈이
었다. 남자의 말로는 결코 공격의사가 없다고 했지만, 추격부대가 따라온다면 자신의 품 안에서 축 늘어진 소은과 같이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었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 남자의 얼굴에 띄워진것은 미소였다.
"시간을 끈다니요. 당신들을 추격하기 위해서 저밖에 따라오지 않았던것은 가장 빨리 당신들을 사살하거나 체포하기 위함이었
습니다. 저 말고는 위상력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의심을 하시니 대답해 드리죠. 독은 몸 가에서부
터 천천히 심장으로 흐릅니다."
한검의 말은 아직 세하가 이해할 정도로 구체적이지 않았기에 다시 한번 물어보려 하던 세하보다 그는 더 빨리 말을 이었다.
"이건 의사가 아닌 제 시야, 위상력을 볼 수 있는 사람으로써 말씀드리는겁니다만, 이 마을에서도 당신과 같은 차원 독에 감염
된 사람이 있었죠. 그때 그 사람의 것이 아닌 위상력의 색이 독이 주입된 부분과는 상관 없이 손끝, 발 끝부터 위상력의 다른
색이 어른거립니다. 그리고 천천히, 마치 혈관을 타고 흐르는것처럼 그건 심장쪽으로 다가갑니다."
한검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당신은 위상력의 질이 좋아서인지, 일반 사람보다 침식속도가 덜하군요. 심장까지 독이 도달하면 그때부터 타는듯한
고통과 함께 각혈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심장에 다다랐을때, 대부분 정신 착란과 함께 심장마비, 혹은 쇼크사하더군요. 그들
이 어떤 원인으로 죽었냐고 묻는다면 모르겠습니다. 독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독에 걸려 치료받지 못한 사
람들이 죽는것은 봤습니다만, 치료받지 못한이들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번도 본 적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몸에 들어온 독
은 제 동료와는 다른 칠흑같이 검은색입니다. 이건 또 다른 걸지도 모르겠네요."
한검은 입술을 한번 적셨다. 마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S급의 이름모를 차원종 하나가 습격했을때, 동료 위
상력자가 위상 독에 감염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죽었다. 마을에는 그 덕분에 위상 독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딱히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은 없었다. 사실 치료 방법은 간단했다. 위상 독은 그저 '페베르(phabale)'이라는 이름의 흔
한 위상력을 인공적으로 가공한 화학물질을 삼키거나, 주사로 감염체에 투약하면 되었다.
페베르라는 것 은 차원전쟁때 위상력자들의 위상력을 인위적으로 추출해 가공한 치료제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차원종의 위상
력들과 반하는 성질로써 위상력으로 인한 신경마비 부터 모든 차원종들의 독은 어느정도 한계치를 넘지 않는 이상 페베르라
는, 그 약품을 발명한 의사이자 저명한 클로저의 이름을 딴 치료제를 일정 기간동안 정기적으로 투약하는것으로 치료가 가능
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약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은 상당히 고난도의 의학분야이며, 그건 당연하게도 한검이 지키는 마을에
는 바랄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동료가 차원독에 감염 되었을때마다 온 몸이 찌그러지는듯 한 무력감을 느꼈었지만, 지금 마을에 들이 닥쳤던 불청객에
도 그것과 같은 독이 감염되었다는것은 도대체 어떤 하늘의 뜻 일까.
아니, 잘못 판단했다. 그의 동료가 감염되었던 것 보다 더 강력했다. 저 소년의 위상력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침식 속도는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확연히 느렸다. 대부분 일주일 정도면 침식은 종료되었고, 사망에 이르렀지만 소년의 침식 속도는 마치
푸른 위상력이 완강히 버티듯 그것을 침식하려는 검은 위상력을 막아내고 있었다.
"치료제는 당신이 이 산에서 벗어나야겠군요. 유니온 보급품중에서도 쉽게 구할수 있는 약입니다만, 이런곳에서 그런걸 찾는
건 금을 찾기보다도 어려울겁니다. 물론, 저희들의 마을에도 그런건 없습니다."
세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저 남자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하지만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시
간이 없었다.
"침식이 언제 완료되는거죠?"
잠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관찰하듯 세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곧 있어 그는 대답했다.
"2일...아니, 3일 후. 그정도 되겠군요."
3일. 사흘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시계가 초침을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의 말을 믿어
야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그 의심이 사실일 경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정말로 없었다.
"왜, 그런걸 나에게 알려주는거죠?"
세하의 말이 허공을 울렸다. 녹슨채 이곳 저곳이 처참하게 낡고 부서진 복도에 울린 그 소리는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 아래에
차가운 공기 속을 춥다는듯 몇번 맴돌았다.
"...솔직히, 나는 당신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한검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그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나이프가 박혔던 다리는 욱신거렸
지만, 사실 그쯤이야 위상력을 운용하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투로 소모한 위상력의 여유분이 돌아오자, 다시 백색
의 빛무리가 그의 몸을 감쌌고, 세하는 그 즉시 건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SS급 차원종을 상대하러 간다면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북쪽으로. 위로. 차원종을 유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순간 세하의 건블레이드를 든 손이 떨렸다. 그것이 어떤 감정에 의한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다음 순간, 남자의 목소리는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어차피 당신이던, 당신의 동료던, 이 숲에 흩어져 있던 요원들이던 SS급 차원종을 격파하기에는 무리라는걸 압니다. 당신들
도 알겠지요. 그러니까 우리 마을 사람들,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이들을 살리는 셈 치고 북쪽으로 차원종
을 끌고 올라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세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 건블레이드를 겨누었지만, 어느새 저 멀찍이 튕겨져 나갔던 숏소드로 궤적이 어긋난 건블
레이드를 알아 차린 순간, 그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신들을 죽일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점에서 당신들은 아직..."
남자는 그대로 숏소드를 한바퀴 빙 돌리더니 하프 코트사이에 가려진 검집에 그것을 정확하게 꽂아 넣었다. 코트 깃이 새벽의
차가운 바람을 머금어 흔들렸다.
"이용 가치가 있습니다."
계단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남자에게 다시 검을 겨눌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세하는 그가 왜 그렇게 쉽게 졌는지. 아니, 그렇
게 쉽게 져 줬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래, 그에게는 망할 이용가치가 있었다.
"왜, 내가 그렇게 할거라고 생각하죠? 나는 당신들에게 SS급 차원종을 유인할 수도 있어요. 더 해볼까요? 대한민국을 SS급 차
원종과 싸움붙일수도 있겠죠. 그런데도 내가 그렇게 할거라는 보장이 있는건가요!"
점점 고양되는 말투는 끝에가서 끝내 고함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복도의 반쯤 부서진 문을 열었
다. 막 그가 잠깐 멈추었을때, 그의 대답은 변함없이 정중한 어투로 돌아왔다.
"당신이, 당신의 눈이 그렇게 하리라곤 생각되지 않는군요. 뼛속까지 약한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리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풀리려는 다리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세하는 비틀거리다 소은이 안겨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용 가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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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후에 건물에서 소은을 끌어 안고 나온 세하는 계속 길을 걸었다. 기절한 사람의 몸무게는 무거울만도 하건만, 그런것 조차
도 느끼지 못할만큼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이용 가치라. 그는 입속에서 씁쓸한 맛이 감도는것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래, 정말로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더라도 SS급 차원종에게 이기지 못할것이었다.
그의 몸이 반조각나던, 수천갈래로 찢겨 죽던,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던, 그는 죽어버릴것이었다. 차원종이 인질을 잡는다는 내
용은 금시 초문이었다. 그래, 그만 혼자 그렇게 되기 위해 그는 이렇게 슬비와 유리조차 어쩌면 인질로 잡혀 위험할 수도 있는
마을에 두고 왔다.
어차피 자신을 따라온 이상 바리케이트 안으로 들어간다는것은 무의미했다. 당장에 반역 클로저로 몰려 사살당할 것이었다.
차라리 그러느니 마을에서 그나마 상황을 보게 하는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가 남긴 쪽지의 내용에는 사실 작별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짧은 문구 말고도 자신을 걱정말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그래, 걱정 해 보았자 쓸모가 없으니까. 그는 터져나오는 쓴웃음을 감출수가 없자 웃었다. 게게 웃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추한
노파의 웃음소리처럼 들려 그는 더욱 크게 웃었다.
"하하..."
그래, 추격하던 남자도, 마을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어 사랑하는 이들과 같이 지켜주고 싶은 이들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만한 힘, 상황 판단력등을 갖추고 있었기에 세하를 SS급 차원종에게 미끼로 던지게 만들었다. 독에 관련된 이야기가 사실인
지는 몰라도, 그 말을 믿고 가야만 하는 그의 상황은 비참하리만큼 선택권이 없었다.
힘이 없었다.
그의 나약함의 인과라고 할 업보가 드디어 그의 어깨를 본격적으로 짓누르기 시작했다.
슬비는? 그녀의 소명이 차원종을 끝없이 죽이는 복수였다면, 그녀는 이제 마을에서 자신이 죽어버린 후에 감금될것이거나, 마
을을 지키는 클로저로 활동하게 될 확률이 컸다. 유리는? 가족에게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는 한에 오열할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이 생길줄 어렴풋 짐작했음에도 가족보다 세하, 그를 선택했다는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이면서도 동시에 비참한 일인지 세하는 생각했다. 두 소녀의 인생은 힘 없는 자신에 의해 그토록 망가질 것이
었다. 물론 원인이야 그녀들, 검은 양과 다른 수습 요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대한민국 정부와 유니온이었다. 그렇지만, 그렇
지만 그들이 그러했더라도 그 자신이 힘이 있으면 되었을 일이었다.
그렇게 존경하면서도 증오하던, 사랑하면서도 멸시하던 어머니 알파 퀸처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세하
를 말로 내 던질 수 있을만큼 강한 남자처럼 강하지 못하다는것은 지금 있어 그에게 크나큰 죄였다.
그에게는 지금 힘이 없었다.
그래, 유리의 가족은 생계문제에 큰 어려움이 닥칠 거다. 슬비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채 세월을 썩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원흉은 그였다. 계속해서 머리 주변을 무언가가 맴돌며 그에게 속삭였다. 모두 다 네 죄야.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어느새 천천히 걸음을 멈추어버리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는듯 후들거렸다. 몇 발자국 걷지 못해 완전히
다리의 힘이 다 빠져버린 그는 앉기로 결심하고 주변에 가까운 곳에 앉을만한 곳이 없는지 둘러보았다. 걷고 있는건 대로였지
만, 쉬는것조차 대로에서 쉰다면 이 시가지 어딘가에 살고 있을 차원종에게
눈에 띄이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마침 몇걸음 앞에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아주 작은 골목길 비스무리한 공간이 눈에 띄
어 그곳에서 소은의 상태를 볼 겸 쉬어가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그의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숨을 쉴때마다 바람빠지는듯한
쉭쉭 소리와 함께 숨 쉬기가 곤란했다. 아까 뽑아버린 단검이 직격한곳이 그의 폐였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앰플을 그 자신에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남은 신체 회복 앰플은 대략 두병하고 절반쯤 남았다. 그렇지만 소은의 상처
가 워낙 심했기에 자신에게는 정말 출혈이 컸던 허리부분에 한숟갈정도의 앰플을 발라놓았을 뿐이었기에 다시 상처가 갈라지
려 하는지 통증도 엄습해 왔다. 소은을 안고 녹초가 되어버린 채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소은을
땅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대로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웃옷을 벗어 소은의 옆에 깔고는
그녀를 그 위로 옮겼다. 앰플 두병 반이면 그다지 많은 양도 아니었다. 위상회복기능의 앰플은 자그마치 네병이나 있었지만,
신체 회복 앰플은 사실 만능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상처 부위에 바르고 먹인다는 것 만으로도 많은 양이 소모되는게 신체
회복 앰플이었다. 실제로 아까 소은에게 사용한 양이 두병이었다.
그는 소은의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상처를 보자 이상하게 가슴속에서 끓어 오르는 느낌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 있는 앰플 한병을 꺼내어 소은의 상처 부위에 조금씩 조금씩 붓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먹일수
있다면 좋겠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먹여도 되는지는 잘 몰랐기 때문에 그는 바르는것밖에 할 수 없었다. 허리에
길게 난 상처와, 어깻죽지에 난 깊은 상처. 이곳저곳에 난 조그만 상처들이 세하의 눈마저 괴롭히는듯
가슴 깊은곳이 아파왔다. 어느새 그녀의 상처에서 그렇게 흐르던 피는 멎었지만, 잘못하면 앰플로도 회복되지 않아 흉이 질 수
도 있었다. 문득 그녀도 자신처럼 이곳에 죽으러 왔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아 그깟 흉이 뭔데 그녀 본인도 아닌 자신이 걱정
하나 하고 그는 쓰게 웃었다. 문득 고개 들어 밖을 보자 밖의 안개는 점점 더 그 깊이를 더해갔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마치 옛
이 도시에서 살던 이들의 망령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하는 잠깐 숨을 골랐다. 폐가 욱신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는 자신의 허리를 내려다 보았다. 수평으로 깔끔하게 베여진 상처는 다행히 내장까지 흘러 나올 정도의 데미
지를 준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처치는 필요해 보였다. 소은의 회복을 위해 앰플을 전부 소모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단
앰플을 아껴야 했다. 그는 배낭을 뒤 져 이윽고 붉은 십자가 표시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응급 의료팩을 찾아 내었다. 방수처리
가 된 겉 포장을 뜯자 약간의 붕대와 소독약, 실과 바늘등이 나오는것을 보고 그는 주저 없이 소독약의 뚜껑을 따 상처 부위에
부었다.
"크으윽..."
업습하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고통을 견디기 부족해 그는 벽을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약간 찢어진 장갑에
서 피가 배여 나왔다. 잠깐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는 다시 치료 팩에 밀봉된 실과 바늘을 꺼냈다. 상처를 꿰매야 했다. 바늘에
실을 끼워 첫 바늘을 찌르자마자 엄습하는 통증은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견뎠다. 꿰메는 도중 몇번이나
정신을 잃을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마지막 바늘까지 꿰메고 그 위에 역시 한 숟갈정도의 앰플과 소독약을 섞어서 치료 팩에 들
어있던 패치 비슷한 것에 발라 상처 부위에 붙였다. 소독약과 앰플을 같이 써도 될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없는것보단 나을 것
이라 생각하고 그는 여전히 욱신거리는 폐에도 조금의 앰플을 부어볼까 생각하다 이내 그만 두었다. 폐에 구멍이 났는데 앰플
을 붓는다 하더라도 그건 폐에 물이 차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앰플에 대해서는 그것이 상대적으로 민감한 폐에 들어가도 되는
지 어쩐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그정도에 만족하기로 하고 한숨을 돌렸다.
GPS를 켜보자, 배터리 잔량은 이제 20퍼센트 정도가 남겨진 채 그것은 켜졌다. 깜박이는 목적지 표시는 그가 걸어서 한시간
정도 가면 될 거리였다. 무심코 크게 숨을 들이 쉰 그의 코로부터 들어온 싸늘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흠뻑 적셨다. 검푸르다는
표현과 푸르다는 표현을 이젠 절반쯤 섞어놓은듯 한 우중충한 하늘에는 심지어 먹구름마저 껴 있음에도 늦가을, 아니. 이제는
겨울이라고 불러야 할 계절의 공기는 맑고 찼다.
몇분이 흘렀을까. 그는 다시 소은의 밑에 깔린 웃옷을 걸치고 소은을 안아들었다. 안는것은 업는것보다는 불편했지만, 업었다
가는 배쪽으로 이어진 그녀의 상처가 다시 벌어질지도 몰랐다. 물론 그녀의 배낭에 있던 치료 팩으로 어느정도 상처를 봉합하
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이었다.
그 뒤로는 털이 곤두설만큼 경계를 해야 한다는 마음과는 달리, 몸은 축 늘어진. 기분 나쁠정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채 그는 걸음을 옮겼다. 가끔가다 아스 팔트 도로가 도대체 어떤 일 때문인지 붕괴되어 있는 곳도, 크게 갈라져
마치 크레바스같은 구덩이가 생긴 곳도 있었지만 그런것들을 제외하면 그다지 걷는데 불편한 요소는 없었다. 하얗게 변한 숨
이 하늘로 올라가는것을 보며 그는 자신이 숨을 쉰다는것이 이리도 신기한지 몰랐다는 사실을 느꼈다. 날씨는 정말 추웠고, 그
는 잠깐 길 옆에 서서 가방을 연 다음 방수시트를 꺼내 소은에게 덮은다음 마치 이불을 감싸고 안듯 다시 들어 올렸다. 체온이
떨어지는건 위험했다.
한참을 정적속에 잠긴 도시 속을 걷던 그의 머릿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생각들이 교차해, 그것들이 마치 앙금처럼 뭉쳐저 가라
앉아버리는 무거운 마음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라는듯 시커먼 먹물같은 형상같은 무언가가 계속 떠다녔다.
의미없는 숨을 반복하는것도. 의미없는 걸음을 반복하는것도, 의미없는 생각을 계속하는것도 모두 다 지금의 그에게는 힘이
들었다. 도망칠까 생각했지만, 도망칠곳 조차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것을 보아 아마 지금 그가 느끼는것은 고립감일지도 몰
랐다.
인간은 그를 수단으로 대했다. 단 한번도 목적이 된 적은 없었다. 유니온에서는 클로저들을 소모품 취급했고, 대한민국 정부,
이우현이라는 자로부터는 정치적 본보기로써 모든 사회에서 쫒겨났다. 그리고 이곳, 힘겹게 살아가는 이 마을에서조차 그를
마을에 필요한 물자정도로 취급했을 뿐, 그가 그 뜻에 반하는 행동을 취하자 그에게 곧장 추격자가 따라붙었었다. 그리고 심지
어 그 추격자 마저도 그를 수단으로 대했다.
결국 이제 원점이었다.
SS급 차원종을 제거하는것만이 그가, 아니. 모두가 행복 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그 방법이라는것이 불가능했다. 그래. 더
이상 끊임없이 쳇바퀴처럼 도는 사고를 멈추고 싶었다. 그는 숨을 다시 크게 들이 쉬었다.
원망, 집착, 미련. 그리고 다른 어떤것들이 새벽안개와 함께 그를 물들였다. 그리고 그때, 그의 귀에 작지만 확실한 소리가 들
려왔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지만, 다음 순간 그것은 더욱 크고 확실하게 들려왔다.
"키에에에에에엑!"
찢어질듯한 목소리로 울부짖는 사냥 개시의 알림이 그의 귀에 날아들었다. 그 순간 새벽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조차 않는 폐허
가 된 고층 빌딩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같은것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빌딩 한군데가 아니라 하늘을 찌를듯 높은 빌딩 에
서 전부 그것들의 형상이 보였다. 어른거리는 형체들은 기괴하게 소리지르며 그들끼리 무언가 의사소통을 하는것 같았다. 하
지만 곧 그 시끄러운 포효들 사이로 안개속을 꿰뚫고 날아오는 검은 형체를 그의 눈은 포착했다.
곧장 다리를 반바퀴 돌려 몸의 중심을 무리하게 이동시키며 그것을 피했고, 곧장 그가 피하자마자 그가 있던 자리를 뚫어놓은
회색빛 위상력의 잔상이 연기처럼 피어오른 채 지면에 박힌 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창은 그의 눈에 익숙한 것이었
다. 그림자처럼 검은, 그리고 심연처럼 어두운 그것은 슬비와 유리, 그리고 그를 야영지에서 습격했던 차원종의 무기였다. 키
릭거리는 이상한 울음소리도 놈들의 것임이 뒤늦게 그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자리를 이탈해야 한다는 생각에 곧장 땅을 박찼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통증이 그에게 엄습했다.
"큭!"
그 혼자였다면 덜했겠지만, 무리한 체중 이동의 결과는 다시 상처부위가 갈라진다는 결과로 나타났다. 다시 흐르는 피가 소매
밖으로 흘러나오는것을 보며 세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별 수가 없었다. 놈들을 따돌리지 못한다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그
가 본 형체만 하더라도 스무마리 남짓 되어보이는 놈들을 상대해 낼 재간은 그에게 없었다. 땅을 박차고 위상력을 발현. 땅에
압축되듯 뭉쳤다가 터져 나가는 위상력의 반동이 그의 몸을 때렸다. 위상력으로 그의 다리쪽을 감싸며 충격에 대비. 꽤나 성공
적으로 이루어진 사이킥 무브는 그를 다음 순간 수십개의 블록을 지나치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소리가 멀어졌고, 그의 발은 땅
에 몇미터 정도 미끄러지며 착지했다. 그리고 그는 최대한 빨리 소은을 안고 뛰기 시작했다. 위상력으로 소은을 조금 들기 편
하게 조치를 취한다음, 그는 안개 속을 뚫고 달려갔다.
분명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용한 시가지 속에 메아리치는 놈들의 울음소리는 끊임없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 역시 더 이상
의 사이킥 무브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위상력 회복 앰플에 어느정도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남발하다가는 금방 동이 날 것이
뻔했다. 흐릿하지만 뚜렷이 느껴지는 지면의 흔들림은 놈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는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이를
악물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지만, 그의 초조한 질주는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욕설과 함께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제 기랄!"
못해도 40층정도는 되어보이는 고층 빌딩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뚝 끊어져 그대로 지면에 박혀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함
이었지만, 그 이상한 모습을 따지기 전에 먼저 그것이 넘어진 자리가 그의 앞길을 막아버렸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급히 돌아갈
수 있는 골목길을 찾아보았지만, 정신없이 안개속을 달려오다 보니, 미처 둘러보 지 못했던 주변 풍경은 참혹했다. 빌딩이 무
너지면서 다른 건물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인지 수많은 건물들도 쓰러진 채 박살이 나거나, 아니면 그 형체를 거의 온전히 유지
한 채 본래 설계사가 의도하지 않았을 수평으로 땅에 뉘어져 있었다. 당연히 돌아갈 길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 혼자라면 어
떻게든 기어 올라가겠지만, 소은을 안고는 무리였다. 물론 그가 사이킥 무브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과도한 위상력 사
용으로 인해 바닥이 난 위상력을 긁어 모아 다시 한번 사이킥 무브를 해봤자 그것이 먼 거리를 이동할수 있을리가 없었고, 게
다가 위상력을 극한까지 소모하면 나타나는 극도의 피로감은 그를 이 차원종이 득시글거리는 공간에서 무방비 상태로 만들 것
이었다. 결코 현명한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거니와, 또 다른 문제를 이야기 하자면 위상 앰플의 회복력은 그다지 빠른 편이 아
니었다. 물론 자연적 회복과는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빨랐지만, 한 병을 마시고 5분이 지나야지 그가 가진 위상력의 반절 정도
를 간신히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한동안 미 친듯이 주변을 뛰어다니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있나 살펴 보았지만, 골목길이란 골목길은 모두 이어질 듯 하면서
도 결국 건물의 잔해나 파편, 혹은 건물 그 자체로 막혀있었다. 막 확인하지 않은 마지막 건물 모퉁이를 돌아 마지막 골목길마
저도 막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세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가 갈리는 부드득 소리와 함께 뺨에서 땀방울이 한방울 흘러 내렸
다. 이렇게 허무하게. 허무하게 죽을수 밖에 없나? 물론 소은을 놓고 행동한다면 어쩌면 그는 살 수 있을지 몰랐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그녀에게 신경 써야 할 앰플이나 치료 킷등의 모든 물품은 죄다 그가 짊어지고 있었다. 체력적인 소모도 덜할 것이
었고, 무엇보다 활동이 더 편해져 효율적일 것이었다. 당장에 이 건물도 기어 올라 넘을수 있을터였다. 그렇지만 그는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것 자체가 죄악처럼 다가와
짓누를정도로 이미 그는 그녀는 그에게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점점 땅이 크게 울리며 검푸른 새벽 하늘 지평선 저 멀리서부
터 희끄무레하게 점의 형태로 놈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을때, 세하는 구석진 건물 하나를 골라, 소은을 잠깐 한 손으로 끌
어 안고 다른 손으로 건블레이드를 꺼내어 건물의 문에 힘껏 휘둘렀다.
'쾅!'
녹슬어 더이상 열리지도 않을 듯 한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갔다. 그의 예상대로 그 건물은 사람들이 살았던 빌라
같은 곳이었던지 10층정도 되는 건물곳곳에는 평범한 아파트 복도 구조처럼 이곳저곳에 문이 나있었다. 10층이라면 예전에 실
시되었던 정부의 고층화 계획, 그러니까 전면적으로 저층 건물을 폐쇄-재개발 하기 위한 정책에도 어긋났다. 차원종에 의해 살
아남은 이들이 더욱 좁은 토지로 몰렸기 때문에 실행된 정책이었지만, 이 먼지 가득한 건물 안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듯 묵묵히 콘크리트 건물 특유의 싸늘함을 풍기고 있었다. 그대로 홀스터에 수납된 권총을 드로우. 정조준이 아닌 한 손으로
조준한채, 어렵사리 손전등을 벨트로부터 뽑아 입에 물었다. 발전이 되지 않고, 반투명 유리로 덮인 창문들에 들어오는 빛만으
로는 실내 확보가 어려웠다. 혹시 이런곳에 차원종이 도사리고 있을수도 있었기에, 굳이 일일히 복도 전부를 확보하는데에만
벌써 20분 이상은 흘렀을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아파트의 복도가 긴 편이 아니었기에 금방 확보를 마치고 10층까지 걸어서 올
라간 세하는, 권총을 잠시 홀스터에 절반쯤만 꽂아 놓고 주머니에서 서바이벌 나이프를 뽑았다. 여러번 험하게 굴려서인지, 약
간 휜것같이 보였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것을 디지털식 도어락에 대로 있는 힘껏 위상력을 불어 넣어 후려 치자마자
스파크와 함께 어이없을정도로 간단히 도어락은 열렸다. 아니, 파괴되며 통쨰로 나가 떨어져 문이 열려졌다라고 하는 편이 정
확한지도 몰랐다. 그대로 나이프를 집어 던지고 권총을 뽑아 실내를 조준했지만, 생명체의 기척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먼지가
가득한 실내만이 묵묵히 그를 반기고 있었다.
마치 그린듯한 평범한 가정의 주거지였을 그 집은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먼지도 많이 날렸기에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
지를 짐작케 했다. 여러 방문을 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차하면 발포할 생각으로 권총을 겨누었지만 어느 방에도 차원종의
모습은 없었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남은 방을 열어보자, 의외로 다른 방과는 다르게 먼지가 별로 쌓이지 않은 방이 드러났다.
침실이었는지 제법 큰 침대가 놓여 있는 방은 바로 창 밖을 볼 수 있는 구조의 방이었는데, 아마 베란다로 연결된 듯 했다. 그
미닫이식 유리가 조금 열려진 채 녹슬었다는게 왜 이 방에 환기가 되어 먼지가 없는지 알려주었다. 세하는 침대로 다가가 소은
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는 배낭에서 그녀 몫의 침낭을 꺼내어 나이프로 침낭의 옆구리부분을 찢었다. 그리고 여
러차례 활용했던 방수시트를 꺼내어 그 위에 덮는것으로 그럭저럭 이 추운 온도에도 버틸수 있을만큼 두꺼운 이불을 만들어
소은의 가슴께까지 올려 덮었다. 벌써 놈들이 근처까지 왔는지, 강철바닥을 차는것같은 이상한 소리가 근처까지 다가왔다. 놈
들의 몸에 돋아난 갑주가 아스 팔트 바닥에 부딛히면 꼭 저런 소리가 났었다. 그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배낭
에서 자신의 방수 시트를 꺼내 조금 손으로 뜯어 내었다. 그리고는 엉망진창으로 수납이 되어 있는 배낭을 뒤 져 가까스로 마
을에서 슬쩍 한 펜을 꺼내었다. 마을에서 유리와 슬비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도 이 펜으로 편지를 썼었다는걸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감에 의지해 글씨를 써 두었다. 고맙다는 말과 그녀의 앰플, 무기등은 침대 옆에
두었으니 가져가길 바란다는 말도 써 놓았다. 아마 그녀가 이 글을 읽고 있을 쯤이면 자신은 죽었을 테니, 더 이상 미련을 가지
지 말고 탈출하라고. 유리와 슬비 역시 데리고 탈출 하라고 썼다. 쓸 면적이 부족하자 종이를 뒤로 뒤집어 더 글을 쓰기 시작했
다. 한검이 그에게 했던 이용 가치라는 말의 의미와, 자신이 죽어도 SS급 차원종을 북쪽으로 끌고 갈 터이니 아마 마을에 가면
유리와 슬비를 풀어 줄 거라고 쓴 그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이 정도의 인삿말로는 부족했
다. 그래,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는 펜을 움직여 한 문장. 짧고도 짧은 한 문장을 썼다. 그리고 마침 그 문장을 쓰자
잉크가 다 되었는지 흐릿한 빛 속에서 더 이상 볼펜의 잉크가 시트에 묻지 않는걸 보고는 그 타이밍이 얼마나 절묘한지를 잠깐
생각한 그는 웃었다. 그가 이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처음으로 짓는 조용한 웃음인지도 몰랐다. 배낭에서 소은의 옆에 반병
남은 앰플을 제외한 신체 회복 앰플과 한병을 제외한 모든 위상 회복 앰플을 놓고서, 그녀의 미약한 숨이 흘러나오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 아름다운 얼굴은 너무나도 병약해 뵈어 툭 건드리면 부서질것만 같이 섬세해 보였다.
실제로도 그녀의 신체적인 특징이 벌써부터 이렇게 색소를 잃어간다면 그녀의 생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었다. 서른...
아니, 길어봐야 마흔까지일 것이다. 현대 의학기술이 발달해 100세까지는 웃길정도로 가뿐히 사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나이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문득 속에서 끓어 오르는 검은 무언가가 요동치는것을 느끼고 그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잠깐 그는 손을 뻗어 흐트러진 소은의 머리를 정리했다. 곧 있으면 깨어날 징조인지, 점점 혈색도 정상으로 돌아오
고 호흡 역시 안정된 그녀의 뺨을 살짝 스친 그의 손은 믿을 수 없는 온기에 놀라는듯 했다. 서늘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체온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있어 형용할수 없는 사람의 체온 이상의 것을 선물했다. 그는 그 손가락을 천천히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
다. 아아. 이렇게 다른 이의 체온이 부서질것만 같이 느껴지던 적이 언제였던가. 곧 있으면 사라져 버릴 이 손 끝의 체온 역시
도 그가 끝까지 지키지 못한 이들 중 한명의 체온이 될지도 몰랐다. 울렁거리는 속이 진정되기도 전에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
었다. 침대 앞에 무릎을 꿇은 그의 모습위로 검푸르게 빛나는 새벽 하늘의 빛이 조용히 내리비쳤다. 먼지가 마치 아름다운 공
예품이라도 되는듯 하늘하늘 떨어지며 춤췄다. 그의 입은 천천히 움직였다. 너무나도 천천히. 느긋하게 움직이는것도, 여유를
부리는것도 아닌, 마음 속 깊이 담아둔 무언가를 말하느라 그의 입은 마치 급하게 음식을 먹다 체한것처럼 느리고 둔했다. 그
조차도 잘 들리지 않을만큼 작은 입모양으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끝냈을 때에야 그는 천천히 걸어 나가 방문을 닫았다. 그
리고는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다시 닫았다. 도어락이 뜯겨져 나갔으므로 다시 저절로 열리려 하는 문을 손으로 부여 잡고 그
는 한쪽 손으로 문틈을 천천히 눌렀다. 곧있어 손이 닿은 부위는 연기가 나기 시작하며 점점 달아 올랐고, 급기야는 녹아 문턱
과 용접이 되기 시작했다. 그 행동을 모든 문틈과 문이 닿는 부분, 그리고 아까 부숴버렸던 도어락이 있던 부분까지 세하는 간
단하게 용접하는데에 성공했다. 이제 문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차원종이 진심을 담아 부딛히면 박살날 것
이었지만, 그 전에 소은이 깨어날 것임이 뻔했다. 아까의 그녀의 상태를 보면 머잖아 그녀는 의식을 되찾을 터였다. 그는 가벼
워진 배낭을 다시 고쳐 매고는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벌써 키릭거리는 소리는 코 앞까지 다가왔다. 막 1층에 도달했을때, 그의
눈에 들어온것은 곧게 펼쳐진 대로에 쇄도해오는 차원종들의 무리였다. 스무마리, 마흔마리...쉰정도는 되어 보이는 차원종들
은 마치 검푸른 새벽 하늘 속에 움직이는 이물질처럼 번들거렸다. 평소같으면 그대로 도망쳐야 할 수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자
신이 놈들과 상대했던 그 순간을 떠올려 본다면, 더더욱 이 수를 상대하는건 무리였다. 그렇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건블레이드
를 뽑아들고 있었다. 그는 건블레이드를 새삼 훑어보았다. 검은 도신에 검은 손잡이겸 개머리판으로 통일된 건블레이드의 앞
에 위치한 흰색 블레이드(Blade) 부분은 곧 다가올 전투에 대비하는듯 새벽 하늘의 빛 속에 날카롭게 빛났다. 총신, 총열이 내
장되어있을 무거운 검의 무게는 그의 손아귀에 마치 딱 붙어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듯 느껴졌다.
눈앞으로 쇄도하는 차원종들의 수에도 상관없이 그의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욱신거리던 상처도, 조금씩 찢기고 더러워
진 요원복 코트가 차가운 바람에 실려 펄럭이는걸 보자 놀랍게도 조금 가라앉은듯 잠잠했다. 그는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점점 더 닥 쳐 오는 놈들의 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공기는 찼고, 세상은 검푸르게 보였지만, 그럼에도 검은 형체 속
빛나는 붉은 눈은 똑바로 그를 향해 적의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다리는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 다음 다리 역시
내딛고, 다음 걸음 역시 내딛었다. 천천히, 하지만 점점 빠르게 걸어가는 그의 몸에는 어느새 푸른 너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건블레이드를 한번 옆으로 뿌리고는 그 궤적의 옆으로 퍼져나가는 위상력은 그 주변을 둘러 싼 새벽안개를 물리치며 푸르게
포효했다.
"하압!"
짧은 고함소리와 함께 그는 그대로 차원종들에게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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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호각이었다. 아니, 호각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한명이서 다수의 차원종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건 호각이 아
닌, 선전이었다. 과격한 사선베기에 방어를 하려 막은 창째로 뒤로 튕겨져 나가며 차원종 하나의 뒤에 위치한 몇마리의 차원종
도 튕겨 나갔다. 뒤이어 그의 등 뒤에서도 몇마리의 차원종이 달려들었지만, 그대로 뒤틀린 총구에서 격발된 산탄에 의해 수없
이 많은 불꽃을 튀기며 날아갔다. 갑주에 의해 불꽃은 화려했지만, 데미지는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을 것이었다. 놈들이 밀려난
곳으로 달려가며 그는 여태껏 사용하지 않았던 혁대의 뒷부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M87위상 수류탄이라고도 불리는 그레네
이드 탄은 차원전쟁 당시에 사용하던것을 개량하고 개량해 만든 최신버젼의 대 차원종 용도의 수류탄이었다. 한 손에 그것을
움켜 쥐고서 그는 온 몸의 위상력을 더욱 강하게 순환시키며 건블레이드에도 위상력을 불어 넣었다. 환호하듯 그 우직할정도
로 튼튼한 건블레이드의 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검이 몸을 이끌듯 그의 몸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수한 푸른 궤적이 뒤따
랐고, 조각나는 차원종의 머리나, 창의 조각이 뒤를 이었다. 더욱 강하게, 더욱 강하게. 아직 멀었다. 그는 검을 옆으로 흩뿌려
탄피를 배출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다음 탄이 약실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다음 순간 가장 많은 놈들이 몰
려 있다고 생각하는곳에 그는 몸을 날렸다. 건블레이드에게 최고출력의 위상력을 전달. 그대로 몸을 띄운상태에서 건블레이드
를 격발하자, 지금껏 들어보 지도 못했던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마치 제트엔진을 단것처럼 가속했다. 그대로 검을 휘둘러 앞
에 닥 쳐온 놈의 머리를 날리고는 그대로 그의 발 및에 건블레이드를 꽃아 넣었다. 휘몰아치는 위상력이 지면을 녹일듯 불태웠
다. 그리고 그는 다른 손 하나로 공간을 휘저으며 그대로 검을 빼 올렸다. 지면에서부터 폭발적으로 빼 올린 건블레이드에게
이끌리듯, 마치 보이지 않는 손길에 튕긴것마냥 그 주변에 있던 차원종들은 그에게 날아왔다. 즉시 몸을 날림과 동시에 수류탄
을 가운데에 투척. 이탈 후, 건블레이드를 사선으로 들어 충격에 대비했다. 차원종들은 서로 영문을 모른채 이끌렸다는것을 이
해하려 필사적인지,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차원종들의 몸이 찢겨져 날아가는것이 보였다.
어마어마한 푸른 화염과 함께 공간이 폭발하기라도 한것 마냥 아지랑이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원종을 이끌었던 기술같이 위
상력을 운용하는 천재적인 방식은 그만의 특기였다. 가망이 없어보이는 싸움도 어느새 하면 할 수록 자신감을 그에게 불어 넣
어주었다. 그렇지만 검을 휘두르며 미처 대비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것을 그는 다음 순간 뼈져리게 느껴야만 했다.
"커허...억..."
폐에서 빠르게 빠져나가는 숨이 고통스러웠다. 어깻죽지를 보니 다쳤던 곳을 다시 찌르는 형태로 창이 그의 왼팔을 꿰뚫고 있
었다. 묵직한 무게감은 창째로 그에게 매달린 차원종의 무게였다. 그 무게 때문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검을 **듯이
휘두르며 놈을 떼어놓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를, 차원종들은 원한 것인지도 몰랐다. 뒤이어 다른 창 두개가 그의 옆구리와 왼
다리 허벅지를 스쳤다. 피가 튀기며 엄청난 격통이 그에게 밀려 들어왔다. 온몸에서 땀은 비오듯 흘렀고, 점점 검의 놀림도 둔
해졌다. 명백한 오버페이스(overface-체력적인 고갈이 자신의 육체적 한계보다 높은 상태로 이루어진 것)의 증거였다. 점점
밀리면서 그는 어느새 자신이 소은이 있는 건물 쪽으로 밀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더욱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렇지만
역부족이었다. 잠시간은 분전했지만, A급,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차원종과의 전투는 점점 그에게 열세로 기울었다.
"크아아아악!'
짐승같이 소리지르며 악에 받혀 검을 휘둘렀다. 빠르게, 강하게. 어림도 없다. 어림도 없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다시 크게 원을 그린 건블레이드가 무식하리만큼 빠르고 강하게 내찌른 창을 쳐 날리고 산탄을 퍼부으며 궁지에 몰린 사자처
럼 무섭게 저항했다. 하지만 스무 마리가 넘는 차원종들을 죽여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정도의 다른 차원종이 그에게 쇄
도하는 느낌은 절망 뿐이었다. 그의 뒤로는 죽어도 보낼 수 없었다. 소은에게는 죽어도 보낼 수 없었다.
"제발!"
검을 들어 하늘로부터 크게 내질렀다. 달려든 차원종 하나가 날아가버렸다. 다시 검을 그의 허리께에 돌려 격발과 함께 추진력
을 얻으며 추격. 놈의 목에 공중에서 검을 꽃아 넣었다. 마지막까지 적의를 보내는 붉은 눈이 지상으로 떨어지자 그대로 공중
에서 검을 중심으로 몸을 회전시켜 위상력을 폭발시켰다. 거의 웬만한 전투기 수준으로 빠르게 쇄도한 그의 검에는 벌써 세마
리나 목이 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땅에 발을 디딘 순간, 다시 반대쪽 옆구리에 창이 찔린것을 느끼고는 전류가 흐르는
듯 한 느낌과 함께 그는 균형을 잃었다. 하지만 넘어짐과 동시에 발을 하늘로 치켜 들어 그대로 덮쳐 찌르려는 차원종의 턱을
차버린 후 홀스터에서 권총을 빼어들고 그대로 사격개시. 총염과 함께 푸른 위상력이 담긴 탄환이 차원종들의 급소들을 향해
날아갔다. 원을 그리듯 주변의 접근한 차원종을 향해 내 쏜 권총탄이 드디어 다 되었는지 강렬한 반동을 멈추고 슬라이드 스
톱. 그대로 탄창을 빼어 버리며 권총을 부상당한 왼팔로 옮겨 잡고 건블레이드를 든 다음 왼팔을 수평 상태에서 직각으로 교차
시켜 총의 지지대 역할을 만든 후 그대로 격발. 세번의 격발 후 탄환이 다 되었음을 알리며 쉘이 떨어지자마자 권총의 탄창을
빼어 장착 후 슬라이드 스톱을 해제. 다시 불을 뿜는 강렬한 9mm의 반동이 그의 왼팔을 조각낼 정도로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
러면서도 그의 다른 팔은 건블레이드를 장전하는데에 충실했다. 이윽고 마지막 탄창까지 소진을 완료. 두번째로 슬라이드 스
톱한 권총을 집어 던지며 그는 건블레이드를 휘둘러 공격해 들어갔다. 남은 차원종은 아직도 두 손으로 꼽기에도 많았다. 급히
왼쪽으로 들어오는 창 하나를 포착. 서바이벌 나이프를 혁대에서 뽑아 재빨리 왼손으로 방어했지만, 쩡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
께 그의 귀 옆에서 서바이벌 나이프가 조각난 채 날아갔다. 불행중 다행인지, 뺨과 귀에 조그마한 상흔정도밖에 남기지 않은
채 나이프는 파괴되었다. 그래도 귓불이 화끈했다. 그것이 자극이 되었는지, 아니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만든것인지, 더더욱
빠른 검격. 휘몰아치는 푸른 위상력이 차원종들의 시야를 메웠다.
"제발...제발!"
두번째로 같은 말을 외치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의 말은 어느새 의식 저편으로 아득하게 사라지며 그에게 극한상태의 무리한
운동능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삐걱거리면서도 그 명령에 충실했다. 몸을 연료로 하는듯 어느새 그의 위상력은 그를
잡아먹을듯 폭발적으로 타올랐다. 차원종들이 그 기세에 놀란듯 주춤거렸지만, 그 틈에도 어느새 세하의 건블레이드는 춤추고
있었다. 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검격은 거리낄게 없다는듯 진로에 위치한 것들을 모조리 부숴놓고 있었다.
"내게서 더 이상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지 말아줘!"
소리친다. 고함지른다. 애원에 가까운 절박함은 그의 위상력에도 전달되는듯 끊임없이 푸른 화염이 넘실댔다. 그대로 검을 휘
둘러 쇄도하는 놈의 창을 쳐내고 가까이 스쳐 지나가는 놈의 머리를 향해 건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손으로라도 막아보려는듯
갑주가 둘러쳐진 날렵한 손으로 그것을 방어해보 지만, 차원종의 머리와 함께 손도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의
다리에서는 힘이 풀렸다.
'큭!'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무릎꿇은 세하는 점점 창을 앞세운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놈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얼굴
에는 무표정 이상의 적의만이 어른거릴 뿐, 그에게의 동정심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건블레이드를 앞
으로 쭉 뻗었다. 점점 걸음을 빨리하며 그에게 창끝을 들이대는 놈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다음 순간 들린것은 귀를
찢어버릴듯 한 총성이 아니라, 허무하리만치 자그마한 쉘이 배출되는 소리였다. 탄약 소진.
'하하하..."
허탈감에 웃음이 배어나왔다. 그는 건블레이드를 옆에 내려 놓았다. 이제 끝이었다. 자신, 이세하는 이곳에서 차원종에게 죽음
으로써 이 죄를 씻어내지도 못한 채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그래, 후회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그에게 쇄도하는 검
은 창날은 곧바로 그의 미간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최후를 알리는 끔찍한 파쇄음이 그의 귀에 들리기 전에
쩌엉 하는 위상력과 위상력이 부딛히는 특유의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초록색의 위상력. 설마 하며 눈앞의 차원종을 바라보
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정확히 머리의 갑주를 꿰뚫은 기다란 화살에 빛나는 초록빛 위상력을
잡아보려는듯 손을 몇번 허우적거리더니 곧 쓰러져 버렸다. 그는 고개를 위로 돌려 소은을 대려다 놓았던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그곳에서 초록빛의 꼬리를 끌며 날아드는 음속의 속도의 화살이 그에게 돌진하던 두번째 차원종에게 쑤셔 박히는것
을 보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비명을 질렀다.
"소은누나!"
머리는 아직 어지러웠고, 몸은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 듯 이곳저곳이 저려왔다. 그렇지만 그녀는 다음 화살을 석궁 시위에 걸
었다. 다시 한번 스코프로 목표를 조준, 탄도학, 약점사격의 기본을 자동으로 계산하며 발사. 왼쪽 눈을 꿰뚫은 화살에 맥없이
쓰러지는 차원종을 보며 그녀는 지체없이 다음 화살을 장전했다. 시야는 흐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는 조금 회복한듯 보이
는 위상력을 아낌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발사한 화살의 초록색의 잔상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한번 저격. 이번엔 아직도 그녀
쪽을 바라보는 세하에게 창을 던진 차원종을 포착했었던 그녀의 눈이 예상했던 창의 궤적에 정확히 그녀의 화살이 끼어들어
창을 튕겨 내었다. 저격의 귀신이라도 불가능할 정도로 정밀한 사격이었다. 위상력자의 메리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로 대단
한 사격솜씨였다. 남은 화살은 세네개 남짓. 남은 수의 차원종은 급히 세어본 결과 열. 그녀는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들려온 교전의 총성과 함께 눈앞에 보인 쪽지를 읽고 나서는 더 이상 그녀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다음 탄을 장
전. 위치에너지의 최대치에 다다른 화살이 막대한 운동에너지로 전환된 시위에 의해 기다란 총신을 스쳐지나가며 쏘아졌다.
초록색 잔상으로 허공에 상흔을 남기며 또 하나의 차원종의 두개골을 부숴놓았다. 갑주로 덮여 확실히 두개골인지는 모르겠지
만 아마 급소부분은 맞는듯, 고꾸라지는 놈은 더 이상 지켜볼 가치가 없다고 판단. 그녀는 두번째 화살을 들고 화살의 끄트머
리 깃부분에 손가락을 대었다. 깃조차 철로 만들어진 완벽한 철시(鐵矢)의 형상은 놀랍게도 그녀가 화살 끄트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위상력을 불어넣자, 마치 전자회로같이 규칙적이고도 복잡한 수평의 미로가 그 얇은 회로 안에서 초록빛으로 빛나기 시
작했다. 그녀는 위상력을 불어넣으며 아찔함을 느꼈다. 그 정도로 이미 그녀의 조금이나마 회복된 위상력은 소진 위기가 닥 쳐
온 것임이 틀림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손가락 끝으로 위상력을 집중시켜 화살에 불어 넣었다. 조금 후 그녀는 그
대로 활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둑이 터지기 일보 직전처럼 화살은 불길하게 초록빛의 빛무리를 자욱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흡
사 드라이아이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흰 연기처럼 흘러 나오는 그 빛은 곧 소은의 손가락에 의해 당겨진 방아쇠의 명령에 따라
날아갔다. 그리고 이번엔 조금 다른 일이 발생했다. 날아가던 화살이 정확하게 차원종의 목을 꿰뚫자마자 갑자기 화살이 초록
색의 빛무리를 더욱 강하게 분출하며-
'파앙!'
폭음. 상당히 큰 폭발이었다. 아까 세하가 던진 M87그레네이드 탄에 비했을때 전혀 손색 없는 폭발이었다. 하지만 다른것은 뿜
어져 나온것은 그녀 고유의 위상력 색인 초록색이었다. 그 덕에 남은 차원종 중 대여섯 마리가 폭발에 휩쓸렸다. 다 죽은건 아
니지만, 땅바닥을 기며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전투 불능 상태였다. 남은 화살은 두발. 그녀는 다시 화살을 장전했다. 흐릿한
시야속에 스코프의 둥근 원 가장자리에 세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를 조금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출
혈이 엄청났다. 이미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피는 물론 어깨와 허리에 난 상처에서도 벌컥벌컥 계속 피는 쏟아져 내리고 있었
다. 몸에 창이 두개나 꽃혀 있었고, 하나는 도중에 부러져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칠만도 하건만, 그는 이를 부서져라 문 채로 끝
까지 일어서려하고 있었다. 고통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듯 몇번이고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서려 하는 그의 모습이 휘청거릴때
마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도 무언가가 휘청이는듯 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 얼어붙어있던 무언가가 뜨겁게 요동치는듯 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거의 넝마나 다름없는 후드를 뒤집어 썼다. 그리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다시 한번 화살을 장전하
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기합도, 비명도, 고함도 없이 그는 계속 일어 서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존재를 발견한
나머지 차원종들을 저지하기 위해 그러려는걸 알게 된 순간, 그녀는 스코프를 그녀가 있는 건물로 향해 쇄도하는 차원종에게
돌렸다.
그녀, 소은은 저 소년이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녀가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그
리고 자리잡고 있는지는 더더욱.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구체적인 생각을 띄려고 할때마다 그녀는 꾸욱 그것을 밀어 넣었다. 잠을 자거라. 지금까지 잊었던 감정
은 다시 떠올리지 않아도 되. 깊은 잠을 자라.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깊고 차가운 잠을. 여기서 깨면 지금껏 널 잠재웠던 나는
뭐가 된다는 말인가.
차가워라. 냉정해라.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 일으키던 그녀에게있어 감정은 속죄였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은 죄악이었다.
그녀의 죄. 사람을 죽였다는 죄. 그 죄책감만으로도 그녀의 인간 관계가 부서지기에는 충분했다. 인간에게, 동료에게, 나 자신
에게 냉정해라. 감정은 잠을 자게 해라. 그 추한, 살인을 했을때 복수를 했다는 기쁨이 먼저 찾아오는 순간 그녀는 토할것만 같
았다. 사람을 죽이고 기뻐하는 그녀에게 소은은 두려워 했다. 그리고 그 광기에 ** 감정이 다시는 들지 못하도록 잠을 자게
해야 했다. 그것이 이유였다. 그녀가 감정을 들어내지 않는 이유였다. 감정을, 잠에. 영원한 잠에.
달려오는 차원종. 그 역시 그녀에게 화살이 얼마 남았는지 알고 있다. 그녀의 상태가 나쁜것도 알고 있다. 도저히 전투를 할만
큼 회복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것을 증명하듯 그녀의 시야는 흐렸고, 왼쪽 다리는 벌써 감각이 사라졌다. 온몸은 아팠지만,
그녀는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위상력을 불어 넣었다. 초록색 위상력이 타오를 정도로 밝게 빛나며 화살에 빨려 들어갔
다. 혼절할정도로 몸의 기운이 빠졌지만, 위상력을 마지막까지 불어넣은 화살은 점점 더 밝게 타올랐다. 완전히 화살자체가 하
얗게 보일정도로 빛날때 쯤 되자, 그녀는 그것을 시위에 매겼다. 화살을 시위에 거는것만 하더라도 몇번이나 혼절할 뻔했는지
몰랐다. 비틀거리며 손이 시위에 화살을 걸자 마치 발사할 준비가 끝났다는듯 초록빛이 환호하며 어두운 방 안을 밝게 비추었
다. 그리고, 그녀는 화살을 조준했다. 조금만 있으면, 조금만 있으면 된다. 정신을 차려라. 정신을 차려야만 한다. 절대로 의식
이 날아가게 두지 마라. 정조준. 숨을 떨어뜨린다. 이제는 가까운 거리라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조준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태산
을 드는것만큼이나 석궁이 무겁게 느껴졌다. 위상력이 그녀의 몸에서 모조리 소진되자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다. 정신조차 혼
미한 상황에서 그녀는 잠깐 스코프에서 눈을 돌려 세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일어나기 위해 자신의 피웅덩이 속에서 몸부림
치는 그를 보고 그녀의 엷은 입술은 어느새 그녀의 이에 짓씹히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그녀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스코프를
재차 조준. 상대가 달려오는 거리와 탄속을 예측. 지상으로 45도 이하 각도의 사격이므로 탄도학 계산은 의외로 간단했다. 스
코프의 보조 조준선에 예측된 위치를 조준.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발사되지 않았다.
손가락부터 힘이 빠져 나가는 듯한 체력은 어느새 그녀의 머리까지 빠져나가버린듯 어지러웠다. 그 가벼운 방아쇠를 당길수
없었다. 더 이상 눈을 뜨는것조차 힘들었다. 세상이 둘로, 아니 셋으로 나뉘어서 흔들렸고, 온 몸이 마비된듯 감각이 없었다.
막 의식이 깜박거리며 끊어지려는 순간이 영원하게 느껴졌다. 마치 끊임없는 구멍으로. 끝이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어가는 그
순간이 마치 영원할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혼탁해진 청각 사이를 비집고 울부짖음이라고 할만큼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소은 누나! 피해요!"
목소리. 아아, 그래. 그의 목소리였다. 냉기밖에 없던 그녀를. 사람을 증오하며 자신을 혐오하던 그녀를. 소은을 부르는 목소리
는 그녀의 속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기어코 건드리고야 말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그 끝없는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손에 아직도 석궁이 들려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손가락에. 이번 한번만 말을 들어달라고 애원하며 힘을 쥐어 짠다. 조준은 이미
엉망이었다. 방아쇠를 당기는것만으로도 실신할것만 같이 고통스럽고 피곤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더욱 이를 악물었다. 다른
한손마저 그 위에 덮고는 죽을 힘을 다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보았다면 마치 죽기 직전의 시체가 손을 모아 기도하는것처럼 보
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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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먼저 머리를 땅에 90도로 박고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엘세이드입니다.
근데 왜 지금 완결이 아니냐고요? 그건 말입니다. 묘사가...생각보다...길어져서...가독성....을...높이기 위한...방편...으흠!흠!
그냥 때리지만 마세요. 지금 이거 치느라 오른 손목이 나갈것 같아요.
진짜 죄송합니다. 27-3화는 무조건 끝입니다. 끌려고 해도 완결이 아닌 이야기를 넣을수도 없네요. 다음 마지막 완결은 아마도
피아노곡과 함께일겁니다. 즐겁게 보셨나요? 보셨다면 비평과 감상평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조회수는 몇백인데 비평은 별로 없어 아쉽네요. 어떤점은 재밌다, 이런 문체는 어떻게 수정하면 좋겠다. 어떤점은 이렇
게 하는게 어떤가 말씀해주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노력할텐데요....흠흠.
그럼,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