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강고 후일담 - 재와 먼지의 만담 -

성정체성에눈뜬아이 2015-09-09 6

늦은 밤의 대공원 광장은 적막감에 싸여 있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강대한 위상력을 가진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손길을 거부한 채

서로의 피를 튀기는 난투극을 벌였던 장소였던 그곳은 이미 벌쳐스의 수거반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던 덕분에

군데군데 깨진 바닥과 부러지고 뽑혀나간 가로등과 나무들을 제외하면 차원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잿빛 머리의 소년은 어린아이가 흘린 구슬이라도 찾는 듯 한 표정으로 바닥을, 풀숲을 훑어가고 있었다.

소년이 뽑혀나간 나무 둥치 아래에 손을 뻗었다. 소년은 뭔가의 껍질 파편을 집어들었다.

소년의 입가에 아이 답지 않은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애쉬. 거기서 뭘 하는거니?"


앳된 소녀의 목소리. 소년은 뒤도 안 돌아본 채 대답했다.


"응. 흥미로운 게 있어서 말이지."


한 줄기 청량하지 않은, 먼지를 가득 머금은 것 같은 바람과 함께 소녀가 한 명 나타났다.

애쉬라는 이름의 소년과 묘하게 닮은 듯 닮지 않은 분위기의 소녀는, 소년의 입가에 걸린 미소처럼

나이에 맞지 않는 퇴 폐적인 색 기를 품고 있었다. 소녀는 나른한 듯 기지개를 켜더니, 소년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봤다.

소녀는 짐짓 놀란 첫 너스레를 떨었다.


"어머. 그건 우리 귀여운 번데기가 박살나고 남은 조각 아니니? 아직 여기 남아있었구나."
"그래. 어차피 인간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조금만 위상력을 집중해도 찾을 수 있는 조각들도 놓치곤 하니까.

하지만...내겐 더 좋은 일이지."


소년은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한 때 인간이었던, 그리고 한 때 차원종이었던 것의 파편을 내려다봤다.

순간 파편이 꿈틀대더니, 거미의 다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잠시 칼의 형태로 바뀌더니 재가 되어 흩어졌다.

 소년이 혀를 차더니, 양 손을 마주쳐 재를 털어냈다.


"흐응- 애쉬는 여전히 쓸데없는 짓을 좋아하는구나? 어차피 클로저도 아닌 인간 따위 변해봤자 딱 그 정도밖에 안 되는걸.

칼바크 턱스처럼 말이야."
소녀가 야유하듯 말을 던져댔다. 소년은 의아하다는 듯 소녀를 바라봤다.
"설마,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더스트. 너는 칼바크 턱스를 꽤 마음에 들어 했잖아?"
"으응. 얼굴 하나만은 마음에 들었거든. 그래서, 내 손으로 망가뜨려줬지만 말이지. 꺄핫."


소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누나, 더스트는 마음에 든 것을 망가뜨리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소년, 애쉬도 마찬가지였지만. 소년은 약간이지만 자기 혐오를 담은 이죽대는 미소로 더스트를 바라봤다.

소녀는 금방 소년의 눈에 담긴 의도를 알아챘다.


"그 표정. 그만 하지 그러니. 네가 그런 눈으로 바라보 지 않아도, 그 분홍머리는 건드리지 않을 거야.

조금이지만 마음에 드는 구석도 있고 말이지. 어차피 내가 건드리지 않아도 네 손으로 부숴놓을 거잖아?"
"쳇. 이래서 서로 마음을 안다는 건 귀찮단 말이지."


소년의 과장된 제스쳐에 소녀가 웃었다. 정말로 즐겁다는 듯. 사실은 전혀 즐겁지 않다는 듯한 웃음을.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소녀의 눈길이 다른 곳에 고정됐다.

운 좋게 뽑혀나가지도, 부러지지도 않은 가로등의 전등갓 위에, 보라색 조각이 걸려 있었다.

소녀가 손을 뻗자 조각이 소녀의 손에 날아들었다. 소녀가 조각을 어루만졌다.


"흐응. 헤에....어머, 이거. 그 우정미라는 애네?"


소년이 조각에 손을 뻗었다.


"안 줄거야~"
"확 꿀밤 한대 때려버린다?"


잠시간의 장난스럽지만 살벌한 실랑이 끝에 소녀가 조각을 내밀었다.

소년이 잠시 조각에 손을 대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소년의 입에서 나온 건 순수한 감탄이었다.


"음, 생각보다 대단한걸?"
"그치? 아무래도 유하나보단 우정미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했을 것 같아."


소녀가 조각을 다시 내려다보더니 에잇 하고 힘 주는 시늉을 했다.

조각이 잠시 떨리더니, 조금 전과는 달리 이렇다 할 변화 없이 먼지가 되어 소녀를 덮쳤다.


"흣, 콜록 콜록! 이거 재수없게 끝까지 이러기야? 누가 용군단 패거리 아니랄까봐."
"하하하. 이젠 먼지에도 공격 당하는거야?"


소년의 비웃음 섞인 말에 소녀가 째려봤다. 소년은 더 비웃는 대신 다른 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조각에 든 감정 에너지는 거의 소멸된 상태였어. 설마 한번 빼앗긴 감정을 다시 구축할 줄이야.

유하나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됐을지 궁금해서 와 봤지만, 이젠 우정미쪽에도 흥미가 가는군."
"흥. 아무래도 상관 없잖아? 그런 자의식 과잉에다 가슴만 큰 애 따위.

어떤 모습으로 완성됐든 간에 우리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하는걸."


소년은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먼지]같은 가슴을.

굳이 소감을 말 하는 대신 소녀가 투덜대는 모습을 더 바라보기로 했다. 잠시 후,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이제 갈 시간이야. 유희도 좋지만, 일도 해야지."
"어머 뭐래. 자기가 여기 와 놓고선. 덮어씌우기야?"


소년과 소녀는 투닥거리는 한편으로 소형 차원진을 전개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발 밑에서부터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재중 메세지가 꽤 와 있겠어. 이제 배신자 검은 용도 막바지일테니 말이지."
"그러게 말이야. 선대는 꽤 마음에 들었는데. 어쩌다 그런 함량 미달이 옥좌에 앉았을까?"
"옥좌...라고 하니 말이지. 우리 뜻대로 진행되면 검은양의 누군가를 그 자리에 앉힐 수도 있겠어."
"꺄핫, 그럼 난 세하가 좋은걸. 꽤나 봐줄 만한 모습으로 변할 것도 같고. 그 아줌마가 화내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 같고 말야."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어슴프레하게 새벽이 찾아온 대공원에는 다시금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가로등과 나무들마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2024-10-24 22:39:0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