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이 클로저라니?! 3화(상)
최대777글자 2015-08-29 0
“...어라?”
한동안 멍때리고 있다가 정신이 들고보니 이상한 곳에 와 있었다. 주변에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스치며 지나간다.
‘여긴... 강남이잖아?’
“아! 세준오빠!”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 곧바로 뒤를 웬 처음보는 여자가 나를 향해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누... 누구?”
“에이~ 장난치지 말고~”
‘핫, 잠깐만... 얘는 내가 대학생 때 꼬셨던 영희잖아...?! 이게 어떻게..’
“세준오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심각하게 생각하던 중, 또다른 여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미나?!”
그 후에도 내가 예전에 꼬셨던 여자들이 달라붙어 내 팔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애초에 양 팔을 잡혀서 당겨지고 있으니...)
“...세준?”
한참동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매우 익숙하고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내 주변에 있던 여자들도 전부 어디론가 가버리고 내 몸은 본능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지.... 지수?”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지수가 서 있었다.
“하하하.... 날 두고 바람이나 피고 있었던 거야?”
“자, 잠깐...”
갑자기 지수가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건블레이드를 꺼내들었다.
“어? 어어?!”
“벌집으로 만들어줄까, 아니면 별모양으로 썰어줄까?”
“아니, 최소한 목숨만은 살려줘...”
“그렇지! 별빛에 담가 버릴 삐리리리리리~”
“...?”
“삐리리리리리~”
“...??”
지수의 입에서 벨소리가 울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떠진 눈에 보인 것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집의 천장과 항상 저주해오던 아침햇살이었다. 나를 악몽속에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구해준 건 다름아닌 내 휴대전화였다.
“...여보세요?”
“일어났군.”
핸드폰을 집어들고 수신버튼을 누른 후에 귀에 가져다 대고 말하자 데이비드의 짧은 말소리가 들렸다.
“목이 꽤 잠긴 걸 보니 방금 막 일어난 것 같은데.”
“네가 전화해서 깬 거야. 무슨 일이야?”
“그게... 상황이 조금 심각해졌어.”
용건을 묻자 데이비드의 목소리가 한층 진지하게 깔린다. 덜 깬 잠이 한꺼번에 확 달아나는 듯한 기분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악몽을 꾼다면 잠이 달아나는 건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제 강남역 인근에서 차원종이 출연했던 거, 기억나지?”
“그야 당연하지. 네가 말했던 검은양팀이 차원종들을 다 처리하고 특경대들이 차원문 억제기까지 설치했잖아.”
“그랬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문제라면 어떤?”
차원문 억제기가 고장났다거나, 아니면 차원문 억제기가 정상적으로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원종이 출현했다거나. 두 개의 경우가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강남에는 한동안 차원문이 나타나지 않았었지, 그래서 차원문 억제기를 그동안 사용할 필요가 없었어. 그런데 이제와서 그걸 갑자기 기동시키려고 하니까 기계가 고장나버린거야.”
‘다행히도 억제기가 고장난 거였군.’
만일 차원문 억제기가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원종이 출현한 상황이었다면 이쪽으로 건너온 차원종이 A급 이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행히도 지금은 아직 차원종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우... 어제 한 번 차원종들이 나타났으니 그 주변 위상대기가 불안정하겠네. 특경대나 클로저들이 꽤나 바쁘게 움직여야겠는데, 순찰 되게 귀찮을 텐데...”
“음, 그런데 문제는 지금 클로저들이 순찰을 돌 수 없어.”
“...왓?”
갑작스러운 데이비드의 말에 당황하여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글이 아닌 영어를 사용해버렸다. 세종대왕님께 사과하는 건 조금 후로 미뤄두고 우선 지금은 내가 들은 게 사실인지를 물어보기로 하자.
“그게 무슨 소리야?”
“차원전쟁 이후로 클로저들의 수가 많이 줄었어. 그래서 클로저 하나하나가 중요 인력이니 잃을 수는 없으니까 C급 이상의 차원종이 나타났을 때만 투입이 가능해.”
“무슨 그딴 억지가...”
‘다시금 윗사람들의 어이없는 사고방식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절로 머리에 쑤시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한동안 일반인, 그것도 백수처럼 생활하다가 다시 이런 골치아픈 일에 관계되니 약간 후회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금고에 돈이 거의 떨어져갔는데.
“대충 네가 나한테 뭘 시킬지 알 것 같다.”
“만일 C급 이상의 차원종이 나타나고 검은양 팀이 도착하기 전에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게 전부 검은양 팀의 책임이 될 거야.”
“허이구... 그러니 내가 대신 순찰을 돌라는 얘기군.”
“그래.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하는 건 몰래 행동해야 한다는 거, 잊지는 않았겠지?”
“안 잊었어, ‘양치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며.”
“다행이군.”
내가 중요한 주의사항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안 데이비드가 안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그걸 벌써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 이놈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아... 그냥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강남을 순찰하면 되는 거지?”
“그전에 형이 들러야 할 곳이 있어.”
“어? 어디?”
내가 해야 할 일을 확인차 질문하자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시간의 광장이야.”
“시간의 광장이면... 그 유명한 대형 쇼핑몰 얘기하는 거냐?”
“어. 3년 전에 차원종이 습격해서 지금은 망하고 위험구역까지 되어서 민간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야.”
‘우와, 엄청 불쌍하잖아.. 그 쇼핑몰...’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아무렇지않게 말하고 있는 데이비드가 내심 엄청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될 놈일세...
‘국장이기엔 아까울 정도인데?’
“아무튼, 거기는 왜?”
개인적인 의견은 제쳐두고 우선 궁금한 걸 질문하기로 했다.
“시간의 광장에 가면 보급품 상자가 하나 있을 거야. 상자에 들어 있는 보급품을 챙긴 후에 순찰임무를 맡아주면 돼.”
“보급품...? 요원복이랑 가면이 다인 줄 알았는데.”
“물론 형이라면 그걸로도 충분하겠지만 그 안에 있는 물건을 형이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어.”
‘내가 그 안에 들어있는 걸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뭐... 알았어.”
의문스러운 말이 신경쓰였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안에 있는 물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통화를 종료하고 요원복을 찾았다.
“...여기있군.”
옷장에서 찾아낸 요원복을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 옛날 취향에 맞게 준비했다더니... 진짜로 딱 맞췄구만.’
은색의 체인을 달아 거친 느낌을 주는 디자인의 블랙진, 다리고 얼마 되지 않았는지 매끄럽게 펴져 있지만 접힌 자국은 없는 흰색 와이셔츠, 검은 바탕에 은빛을 띄는 자크가 신선한 느낌을 주는 가죽재킷, 하나같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 입을 것 같은 옷들뿐이었다. 그 옆에 검은색 가죽장갑은 좀 이상했지만.
‘나 같은 아저씨가 이런 옷들... 입어도 되는 걸까...’
.
.
.
“...결국 다시 시작인가.”
요원복으로 갈아입은 후에 창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오른발로 창틀을 딛고 바깥을 보자 푸른 하늘에서 자유롭게 바람에 몸을 맡기며 떠다니는 구름들과 외출금지령 때문에 소문과는 정 반대로 한산한 강남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왼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썼다.
“가볼... 아, 참.”
사이킥무브를 사용하기 위해 발쪽에 위상력을 모으다가 문득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라 가면을 벗고 창문에서 내려왔다.
“아무리 바빠도 볼일은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