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 깎던 여인
레반테인 2015-01-01 12
벌써 40여 분 전이다. 내가 갓 전직한 지 얼마 안 돼서 구로역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신강고로 가기 위해 구로역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파티로 던전을 돌던 중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열심히 평타를 치던 여인이 있었다. 남들이 열심히 스킬을 쓰고 있을 때 혼자 열심히 평타와 반전으로 비트를 모으고 있었다.
“다른 스킬도 좀 써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스킬 하나 가지고 잔소리하겠소? 싫거든 다른 유저랑 파티를 하우.”
대단히 무뚝뚝한 여인이었다. 차마 다른 스킬을 더 써 달라고 하지도 못하고 잘 따라와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녀는 잠자코 열심히 비트를 모으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모으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평타 치고 저리 평타만 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비트수 제한에 걸려 더 못 모을 것 같은데, 자꾸만 더 모으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저기 있는 게쉔펜스트에게라도 사출해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클리어 제한 시간이 다가와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모으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사출좀 해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모을 만큼 모아야 딜이 되지, 재촉한다고 반전 쿨이 빨리 돌아오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파티원들이 싫다는데 무얼 더 모은다는 말이오? 여편네, 외고집이시구먼. 남은 클리어 제한 시간이 없다니까요.”
여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파티 가서 돌으우. 난 안 돌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나갈 수도 없고, 퀘스트는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모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반전비트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모으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모으던 것을 숫제 옆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오브젝트를 때리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보스방에 입장해서야 비트 뭉치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보스에게 사출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비트수 제한에 걸려 다 모아져 있던 비트다.
퀘를 놓치고 다음 퀘를 깨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사냥을 해 가지고 파티가 될 턱이 없다. 파티원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평타만 되게 친다. 퀘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여인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여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작전지역에 파견나온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여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팬티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여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그 여편네를 떼어놓고 다음 던전을 돌았더니 다른 파티원인 가슴큰 여인네는 아까 전 판이 이쁘게 돌았다고 야단이다. 자기가 이리저리 왔다갔다 베고 총쏘면서 딜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파티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여인네의 설명을 들어 보니, 아까 그 여인이 10공절이란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여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