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단편 - 납득할 수 없는 이유
원투왼어퍼굳히기 2014-12-31 17
차례.
*프롤로그
1. 이세하 - 납득할 수 없는 이유
2. 이슬비 - 그녀의 경우...
3. 이세하 - 그 이유?
*에필로그 - 유정의 시선
*프롤로그
날 둘러싸고 있는 차원종들에게서 불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르르르르...
내가 지금 느끼는 압박감이 나자신의 불안한 심리 때문인지, 아니면 차원종이라 지칭되는 이 이름모를 괴생명체들의 존재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대로 움직일 뿐. 살육과 파괴만을 일삼는 차원종들에 점거된 건물 내부는 부서진 내부구조물과 허물어진 건물벽에서 나온 콘크리트파편들로 아수라장이었지만 이리저리 새어나갈 틈은 분명 있었다. 평소 날 괴롭히던 잔소리쟁이 여자들을 피해다니던 실력이 이런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난 재빨리 포위를뚫고 나와서 다시 포위되지 않게끔 주위하며 차원종들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위험에서 벗어나, 자신들에게 겨눠지는 내 검을 보자 녀석들이 몸을 사리며 주의를 기울이는게 보였다.
이자식들, 가만보면 자아고 뭐고 생각없이 다 때려부수기만 하는 녀석들같지만 괴물들주제에 은근히 지능적이다.
지네들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생기니까 마냥 달려들지 않는 것 봐. 하긴, 이정도 지능은 있으니 단체로 이런 대형건물하나 붙잡고선 시위할 수 있는거겠지?
놈들과의 대치가 길어지면서, 내 머릿속에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계산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움직이며 어떤 기술로 싸워야 할지. 그런 와중에도 머리 한구석엔 내가 이곳 건물 안에 들어와야만 했던 진짜 목적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 슬비녀석이 상황만 놓고 보면 '고생을 사서하는군, 바보'하고 핀잔을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난 지금 이 고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확인해야만 할게 있단 말이다.
아아, 왜였더라...? 내가 바로지금 이 위험을 자초했던 이유가...
그래, 그건 4일전에 있었던 '그 일'이 시작점이었던 것 같다.
*****
1. 이세하 - 납득할 수 없는 이유
세하가 위험에 처하기 4일전
D급 상황구역에서 대기중이던 검은양(Black Lambs)팀 요원들에게 임무가 내려졌다. 신생 클로저팀의 기량 확인과 차원종 탐색이라는 이유로 신서울과 차단된 구서울을 잇는 국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폐빌딩 건물 부근에 잠입탐색을 펼치는것이 바로 그것.
검은양은 임무가 하달되는대로 즉시 움직였다. 수사라 해서 차원종들과의 전투가 없을 지는 모르나 전투가 주가 아닌 탐색이 주목적이니, 임무는 간단하고 성과는 괜찮으리라 - 다들 그렇게 느꼈다.
변수로는 모든 클로저팀들이 그렇듯 검은양도 다섯 멤버가 임무를 수행했어야 겠지만, 5번째 멤버인 미스틸테인은 급작스런 인력차출로 인해 그 소년의 고향땅인 독일로 장기파견되어 없었기에 팀 리더인 이슬비를 포함 이세하, 서유리, 제이 넷만이 임무수행을 해야하는 것이였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을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임무가 하달된 그곳은 지역 한가운데에 있는 대형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때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던 시내 한복판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네명의 팀 요원들은 벽돌바닥사이에 듬성듬성 자란 잡초처럼 드물게 한두마리씩 보이는 저급 차원종들을 처리하며 지역에서 제일 컸던, 지금은 차원공의 공세로 폐건물이 된 백화점 빌딩에 잠입했다.
그리고 모두가 위험을 간과하며 한없이 건물 내부에 들어섰을때, 매복해있던 차원종 무리가 기습을 가한 것이다.
모두 방심했었고, 그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던 실수였다. 훗날 세하는 이 때 무기력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한탄했다.
그대로 차원종들과 전투를 벌여 때려잡는다는 선택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나마 세하와 유리만이 정말 기적적으로 찰과상 등의 경상만으로 건물에서 탈출에 성공했지만 팀의 가장 연장자인 제이는 치명상을 피하지 못해 전치 2달이라는 중상을 입었고,
결정적으로, 팀의 리더 슬비가 빠져나오지 못했다. 온통 괴물들로 점철된 차원종 천지 폐건물속에서.
남겨진 셋은, 누구도 서로를 위로하지 못했다.
세하가 위험에 처하기 2일전
난 아까서부터 마음 한구석이 뒤숭숭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바로 그 사람을 본 순간부터였어.
흰색 양복 차림의 그 남자는 상부에서 내려온 대체관(代替官)이라고 하던데 비리비리한 외모에 첨부터 주변사람들에게는 물론 유정누나에게도 고압적으로 구는게 첫인상이 완전 메롱이었다.
꼭 그런게 아니더라도 그 인상 나쁜 사람이 우리에게 그다지 좋은 소식을 전해주러 온 것 같진 않았다. 이 의견은 서유리와도 일치했다. 유리도 그 아저씨 별로라나. 여하튼 그 후부턴 자꾸 속이 편치 않은게 아까부터 속에 뭔가가 얹힌 느낌이었다. 오늘아침은 아예 먹질 않았으니 적어도 이게 과식으로 인한 급체의 일종은 아니리라.
"그래서 생각한 게 엿보기야?"
"시끄러. 너도 따라 보려고 왔으면서 뭘."
난 내옆에서 태클을 거는 유리에게 핀잔을 주며 살짝 열려진 문틈으로 들여다보이는 손님 접대용 방을 주시했다. 안에선 유정 누나와 예의 그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남자의 모습은 그가 앉아있는 등받이소파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고 유정누나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 대체 무슨얘길 하길래?
그 때, 옛 한때 백화점이었을 폐빌딩 건물에서 슬비를 놓치고 우리만 빠져나온 후로 지금껏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혼자 남겨진 슬비를 그대로 내버려둘수는 없으니까.
애초에 임무수행을 위해 우리 검은양 4명밖에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남겨진 병력은 지금은 없는 슬비와 부상당한 제이씨를 제외, 나와 유리 둘뿐이었고 둘이서 다시 그 폐빌딩으로 가는건 무리라는 유정누나의 판단하에 신서울의 본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곳 지역은 신서울로부터 거리가 좀 있는 곳이기에 지원병력이 내려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사이에 나와 유리, 유정누나는 함께 가상의 작전을 구상하며 폐빌딩에 붙잡혀있을지 모를 슬비 구출 계획을 짰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상황이 아주 절망적이지는 않다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희망은 있을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근거없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던것 같다.
세상만사 생각대로 돌아가는일 없다고... 금방 차원종 대응의 특무대와 추가 클로저들이 내려올것을 기대했던 나였지만 대차원종용 특무대같은소린 고사하고 하루하고도 이틀을 꼬박 기다리고나서야 저 대체관 남자 혼자서 덜렁 내려온 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지. 적어도 옆에 자기 수발들어줄 비서 한명은 끼고 왔으니까!! 그것 참 농담으로라도 '저 싸움의 '싸'자도 모를것같은 사람들이 슬비 구출 작전에 협력해 줄 든든한 전력이 되어주겠군!!' 이라고는 도저히 말 못 해줄 것 같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어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놓았다. 방금 저 남자, 뭐라고 한 거야??
"뭣?! 방금 저 남자, 뭐라고??"
"쉿!! 조용히 해봐!!"
같이 엿보던 유리도 그 말을 들었는지 즉각적으로 반응해 보였고 난 내가 방금 들은게 잘못된 것이거나 남자가 분위기 띄우려고 던진 농담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는다. 방 안의 유정누나가 입을 열었다.
"바, 방금 무슨 말씀을..."
"제대로 못 들은것같아 다시 말해주겠습니다. 김유정 요원, 대 차원종용 클로저스팀 검은양은 이시간부로 해체이며, 무소속이 된 이세하, 서유리 수습요원은 이곳 지역 차원종 소탕건이 추가로 해결될때까지 잠정 대기입니다. 잊지 말아주시길."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이건 말도 안돼요!!!"
나는 옆에있는 유리가 깜짝 놀랄만큼 격하게 문을 밀치며 소리쳤고, 바로 놀랍다는 듯 내게 향하는 대체관과 유정누나의 시선을 받았다. 얘기를 몰래 엿듣는것도, 남이 대화하는도중 큰소리로 중간에 가로막는것도 대단한 실례라는걸 알고있지만 방금 저 남자가 꺼낸 말은 실례라고 할 선을 넘어섰다.
"추가로 김유정요원은 팀 검은양 관리요원직에서 보직 이동될 것이며 이후 인사이동에 대해선 따로 연락이 있을 것이니 마찬가지로 대기하시길. 그럼."
저 남자가 기어이 쐐기를 박고 가는군? 우리 팀의 관리요원직을 맡은 유정누나의 자리가 비는것은 그것이 곧 팀의 해체를 뜻했
다. 난 다짜고짜 자기할말만 다 하고서 또 멋대로 자리를 뜨려하는 그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검은 양이 해체라니, 무슨 소리죠? 본부에서 보내준다던 특무대는 어떻게 된 거예요? 네? 설명을 듣기 전까진 전 한발자국도 못 움직여요!!"
"세하야!!"
유정누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오더니 날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다 설명해줄게, 그때까지 잠자코 있어. 상부에서 나오신 분이니 무례를 범하면 안 돼!!"
그러더니 어느새 남자는 콧방귀를 뀌며 자기 비서와 함게 사라져버렸고 유정누나는 '높으신 분'이라는 그 대체관을 배웅하러 부리나케 달려갔다. 나는 마음한구석이 착잡해지는걸 느꼈다.
"세하야..."
옆에서 보고있던 유리가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걸어왔지만 난 대꾸해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대체관이라는 남자가 우습다는 듯 나를 흘겨보던 모습과, 날 밀어내던 유정누나의 얼굴이 머릿속에 자꾸 오버랩되어 보여졌다.
내가 아닌 그를 편드는 유정누나의 그 처신을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하고 있지만, 머리와 반대로 몸은 솔직해서 난 짧지만 배신감에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아무리 뭐라고해도 이 부분에 대해선 설명이 필요했다. 앞서 언급됬던 우리 팀의 '해체'에 관한것까지, 전부 다!!
***
그 재수없는 대체관이란 사람이 돌아가고, 유정누나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1:1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지금 난 유정누나가 앉아있는 사무실 책상 앞에 서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해주세요! 대체 아까 그 대체관이란 사람이 한 말이 무슨 뜻이에요??"
유정 누나는 항상 생글생글 웃던 고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한 팔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리고 난, 아마도 그녀의 그런 근심 서린 표정에서 일이 뭔가 잘못 되어가고있다고 반쯤 예측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더 복받쳐서 소리쳤다.
"다짜고짜 검은양은 해체된다니, 특무대는 어떻게 된 거에요? 본부에서 온다던 지원은??"
"세하야, 일단 진정해. 진정하고 얘기를 들어. 다 말해줄 테니까."
곧이어 그녀에게서 듣게된 얘기는 나의 기대와, 내 머릿속의 슬비 구출작전 시나리오를 그 원천서부터 무너뜨리는 것들이었다. 그 일단 그 간접적인 원인은 우리에게 있었다. 지금 싸울 수 있는게 나와 유리 둘뿐이라는 것.
기본적으로 하나의 클로저스 팀에선 작전수행을 위한 최소전력으로 3명이상의 클로저를 기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클로저스 팀은 발굴해내기 힘든, 귀한 클로저 요원들로 하여금 적은 인원만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게 하기 위해 최소3명, 최대5명의 클로저들로 구성되는게 일반적인 일이다. 우리 검은양만해도 지금 이자리에 없는 사람들까지 모두 합하면 다섯이니까.
하지만 미스틸테인은 독일에 파견나가있고 제이씨는 부상으로 작전수행이 불가능한데다 슬비는 차원종 소굴에 갇혀있는 상태다.
결국 여기서 차원종들과의 전투를 상정한 정상 임무수행이 가능한건 나와 유리 둘뿐이 남지 않으므로 3명이라는 최소인원 규정에 어긋나 작전수행이 불가능하다.
대게 전투현장에서 이런식으로 인력이 빠지면, 유니온 본부에서 인원이 부족한 팀에 대체할 다른 클로저 요원들을 보내서 임무수행을 속행토록하는게 일반적이다. 이틀 전에 있었던 본부에의 지원 요청도 그것을 바랐던 것이었으니.
하지만, 본부에서는 우리 기대완 다르게 추가 클로저를 보내주지 않았고 예의 대체관이 혼자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듣게 된 해체이유는 그냥 어이가 없었다.
본부의 판단이 그러길, 둘밖에 남지않은 검은양 팀에 인력을 차출해 팀을 존속시키느니 그냥 팀을 해체시켜버리고 남은 인원, 그러니까 나와 유리를 다른 인원이 부족한곳에 때려넣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빈자리는 아예 새로운 클로저 팀이 와서 그 임무를 대신할 것이란다. 아까의 대체관은 바로 이 새로 오게될 팀의 관리요원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전력이 다빠져나간 팀을 재활용하는 것보다 이미 만들어져있는 새로운 팀을 배치하고, 남아있던 인원은 잡아찢어 다른 공백을 메꾸는 용도로 쓰는게 수지타산에 맞다는게 본부로부터의 메세지다.
"그리고, 3일 뒤에 올 새로운 팀은 슬비가 희생되었던 폐건물을 대상으로 섬멸전(殲滅戰)을 펼칠 예정이야."
"말도 안 돼요!!!"
탕!! 나는 격해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그녀의 책상을 두손으로 내리쳤다. 쭉 간과해오던게 있었는데, 앞선 본부에서의 전언(傳言)을 설명한 대로라면,
불과 어제까지만해도 우리가 생각해오던 슬비 구출에대한 여부가 완전히 없었다. 거기다 슬비가 갇혀있을지 모를 그곳에서 섬멸전을 펼친다니!!
"본부에선 슬비를 이미 죽었다고 판단하고 작전상에서 아예 제외시킨 모양이야. 안타깝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렸고, 나는 잠시 말문이 열리자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이 있다.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는다고 자기네들이 필요해서 작전에 투입시킨 요원이 위험해지자 위험을 감수해야할지 모르는 구출보다는 그 지점을 송두리째 날려버린다는 듣는 입장에선 가히 어이탈출하는 전략을 짜 놓은 것이다.
그것은 남겨져 듣는 입장인 나나 서유리에게도, 아직 갇혀있을 슬비에게도 가혹한 처사였다.
"유정 누나. 뭔가 말을 좀 해보세요. 네?"
유정누나는 그것을 끝으로 불길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지금으로썬 그것은 내게 남아있던 일말의 희망조차도 앗아가버리는 행위였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했던 우리에게 내려진 처우가 겨우 이런거라니, 저는 납득할 수 없어요."
"납득을 해야 해, 세하야. 상부로부터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우리는 그 명령을 제어할 권한이 없고..."
"하지만!! 슬비가 아직 남아있잖아요. 제이씨는 다쳤어도 목숨이라도 구했지만 슬비는 이대로가면 섬멸전의 희생양이 되어 형
체도 없이 날아가 버리고 말거라구요!!"
"슬비는 죽었어. 잊어버려."
예? 지금 뭐라고? 난 잠깐 말문이 막혔다. 지금 내앞의 유정누나가 뭐라고 한 거야?
"처음부터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어. 남겨진 팀원인 너희에게도 관리요원인 나에게도 희망적인 시각이 필요했었으니까. 차원종은 우리같은 지성을 가진 종족이 아냐.
파괴와 살육만을 일삼는 괴물일 뿐이지. 그런 괴물들 사이에서 갇혀 남겨진 슬비가 무사할 것 같아? 슬비가 잡혀있다던지 하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던 놈들이었으니까, 이젠 잊어버려, 그녀는."
난 충격을 받았다. 유정누나와 우리는 한때 한솥밥을 먹으며 지낸 사이다. 그랬던 그녀가 한 팀이었던 슬비를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난 그 말을 머릿속으론 받아들였을지 몰라도 몸으론 납득하지 못해 계속 반발했다.
"이럴 수는 없는거에요!! 오기로했던 지원도 없고, 유정누나도 손을 떼겠다면 저 혼자서라도 슬비를 구하러 가겠어요!!"
내가 말하자, 유정누나는 순간적으로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돼. 감정에 북받쳐서 멋대로 행동하지마, 이세하. 이성이 아닌 감성에 따른 돌발행동은 용납하지 않아. 이건 관리요원인 내 권한이야."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콰앙!!! 난 유정누나를 냅두고 결국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문을 열고보니 바로 옆에 서유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마 우리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것이겠지. 편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서 주고받았던 그 꺼내기도 싫은 대화내용을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될 테니까.
난 앞서 걸었고, 그런 내 뒤로 유리가 종종걸음으로 뒤따라왔다.
"저기, 세하야..."
"말걸지 말아줘... 지금 말하고싶은 기분 아냐."
본부로부터의 반응은 차갑다. 지원은 없고, 유정누나마저도 마지막엔 부정적으로 나오니 더이상 아무말도 하고싶지 않았다.
갑자기 그 녀석이 보고싶었다. 나보다도 작으면서도,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도도함만큼은 하늘을 찌르던 분홍빛 머리칼의 계집애. 하지만, 그녀는 지금 내 옆에 없었다.
세하가 위험에 처하기 1일전
'저기 있지, 만약 내가 없었다면 너희는 어땠을 것 같아?'
얼마 전에 서유리가 이런 이야기를 화두로 꺼낸 적이 있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시기는 아마 일주일 전쯤이던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뭐, 시작은 반 장난이었다. '만약 내가 없었으면 내 주변의 사람은 어땠을까?' 아주 가끔씩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상념 같은 것,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단지 유리가 그것을 나와 슬비가 다같이 있는데서, 생각에서 직접 말로써 얘기를 꺼낸 것 뿐이었다.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난 대충 대꾸한 것 같았는데. 왠지 뭐라고 했는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 내가 같은 팀으로 너희와 안 만나고 없었다면... 어땠을까?"
대신 그 녀석과 나눈 대화만큼은 정말 선명하리만치 기억난다. 이슬비는 유리가 얘길 꺼낸 직후 부끄러운듯 약간 주저하듯이 말했고, 난 거기에 가차없이 대답했었거든.
"아아... 네가 없었으면 정말 평화로웠을 것 같아. 게임한다고 핀잔주는 사람 없지, 시도때도없이 옆에서 나한테 땍땍거리는모습 안봐도 되지..."
반쯤 장난이었지만, 그 말로써 나에게 돌아온 대가는 참혹했다. 내 손에서 떠나갈 줄 모르던 게임기가 갑자기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슬비녀석의 손으로 날아간 것이었다.
"악!! 내 게임기가!!"
"이세하. 게임기, 압수야."
"어어? 너 지금 뭐하는거야? 지금 막 보스전하던 참인데!!"
"보스전이고 나발이고 알 게 뭐야. 게임기 속의 보스와 같이 저세상으로나 가버려, 바보."
"너 말 다했냐! 지금이라도 안늦었으니까 얼른 그거 내놔! 캐릭터 죽는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평소에 있었던 웃기는 해프닝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 때의 그 반쯤 장난이었던 일이 머릿속에 자꾸만 그려졌다...
***
하루가 또 흘러갔음에도 변한건 없었다. 잠정적 대기라는 명목으로 나와 서유리는 임시 숙소에 갇혀 있어야했고 난 지금 할짓이 없어 손에 있는 게임기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밖에도 못나가고, 대기동안은 일도 안시키니 할수있는거라곤 이렇게 시간을 태우는것밖에 없던 것이다.
"...재미없어."
내가 게임기를 하고있는건지 게임기가 날 붙잡고 노는건지 분간이 가지 않아 혼자 괜히 끙끙거리다, 보스전을 코앞에 두고 난 게임기를 소파 위로 홱 집어던졌다.
지금 아무렇지않게 태워지는 이 시간이 슬비에겐 당장 다급한 눈앞의 일분일초가 될 것이란 상념이 떠오르자 게임에 집중은커녕 재미가 따라올 리 없었다. 새삼 유정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차원종은 우리같은 지성을 가진 종족이 아냐. 파괴와 살육만을 일삼는 괴물일 뿐이지. 그런 괴물들 사이에서 갇혀 남겨진 슬비가 무사할 것 같아?'
왜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을까. 슬비가 막연히 무사하길 바라는 맘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그 말을 하는 유정누나에게 대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냉정하게 머리가 식은 지금으로선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폐건물에서 탈출하던 그 때, 슬비는 리더로서 모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차원종들을 제일 끝에서 견제하다 둘러싸였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봤을땐 괴물들만 보였을 뿐 그녀의 모습은 보질 못했었으니까.
그리고 저급한 짐승수준의 지능밖에 없는 차원종들이 슬비를 인질로 사로잡아 우리를 위험한 함정에 끌어들인다던가 불합리한 거래를 걸어온다던가 하는 생각같은걸 할수 있을리가 없다. 아마... 그대로 현장에서 어떻게 됐을 것이다. 차원종들에 의해서, 어떻게든...
"제엔장..."
나도모르게 입밖으로 쓴소리가 새나왔다. 가만히 앉아 이런 상상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래, 슬비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인정하기 싫지만 시간이 지나면 인정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에나 시달리며 이렇게 가만히앉아 그녀의 죽음을 애도나 하고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무기를 꺼내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조금만 기다려, 이슬비.'
멋대로 행동하지 말라던 유정누나의 경고는 안중에 없었다. 혼자서라도 가서 놈들을 다 쓸어버리고 슬비의 시신이라도 수습해 올 심산이었다.
설령, 내 힘이 부족해 거기서 놈들에게 쓰러지게 된다고 해도, 적어도 슬비녀석과 같은 땅에 뼈를 묻는다는 위안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비장한 각오로 밖으로 나서려는데 나는 몇발자국도 채 가지 않아 서유리와 마주쳤다. 그녀는 내가 이럴줄 알았다는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녀석, 설마 날 기다린건가?
"어딜 그리 가려고 하시나, 이세하 씨?"
"아아... 잠깐, 햇빛받으며 산책이나 좀 하려고."
"...지금 해질녘이라 태양이 지고있거든? 그리고 금방 어두워질텐데 산책한다고? 무기까지 꺼내들고 나와서?"
정말... 눈치하나는 정말 빠른 녀석이다. 이미 내가 뭘 하러 나온건지 알고 있겠지. 난 바로 본론을 말했다.
"비켜, 난 지금 놈들을 다 때려잡으러 갈 참이니까. 날 막으려면 널 못 쫒아오게 만들고서라도 갈거야. 막지마라."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걱정하지 마. 안 말릴테니까 그리고 적어도 너 쓰러질때 옆에 나 한 사람은 있어줘야 덜 외롭지 않겠어?"
"나 지금 장난하는거 아니다. 잘못하면 죽을수도 있어. 슬비를... 가서 그녀석을 사지에 내버려두고 혼자 살아온 댓가를 치르는 건 나 하나로 족해."
"나도 장난 아니야. 너 혼자만 죄책감에 괴로운 줄 알아? 나도 슬비생각으로 잠 한숨 제대로 못 잤어. 친구가 죽었는지 산지도
아직 정확하지 않은데 나머지 한명까지 죽으러 간다는걸 마냥 내버려두고 봐줄 만큼 난 비양심적이지 못하다고."
큭,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팀 검은양(Black Lambs)에는 나만 있는게 아니었다. 잠시 잊고 있었어. 서유리는 평소에도 슬비녀석과 사이가 좋았던 친구였다는 걸.
"살아 돌아올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말린다고 해도 넌 따라올거지?"
"물론이지!!"
유리는 당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벌써부터 양손에 각각 총과 칼을 꼬나쥐고 있는 모습이 자기는 언제라도 준비ok!!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와 서유리는 늦은 시간에 나가는 게 유정누나의 시선을 피하기 좋으리라는 판단 하에 다음날 새벽 숙소를 몰래 빠져나왔다.
가면서 난 생각했다. 상부에서는 슬비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고 그녀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마지막까지 임무수행을 위해 힘썼었다.
그것은 반 명령에 의한 것이었든, 그녀 스스로의 의지였든 어찌됬건 사실이다.
슬비는 어쩌면 위에서 이렇게 버려지리란걸 생각지도 못하고 희생되었을 수도 있다.
난 그러한 가정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만약 진실로 그렇다면,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그녀의 곁에 적어도 내가 있어줘야하지 않겠는가?
***
"하아앗, 공파탄(攻破彈)!!"
퍼퍼퍼펑!!! 무기에서 뿜여져나온 푸른 탄환이 코앞의 괴물 하나를 분쇄시켰다. 하지만 자기 친구들이 죽던말던 전혀 신경안쓰고 이어서 내게 돌진해오는 차원종들 때문에 난 계속 피해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사전에 유리와 상의한 대로 폐건물로 진입한 나는 차원종 떼를 몰고다니며 건물 내부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그런 내 모습은 시선을 끌기 충분했고 이곳 백화점을 점거하고있던 수많은 차원종들이 아파트단지에 들어온 소독차량을 쫒아다니는 어린애들처럼 나를 쫒아오고있었다.
"공파탄!!"
퍼펑!! 다른쪽으로 간 유리가 잘해주고 있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내목숨부터 보전하는게 급선무니까. 죽을 각오로 온 건 맞다만, 이런 이름모를 괴물들한테 둘러싸여 세상 하직하고싶은 맘은 티끌만치도 없다고!!
"슬비야!!!!! 있으면 대답해!!!!!!!!!!"
처음엔 그녀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때의 현장에 도착해 이런 숨가쁜 추격전을 반복하다보니 문득 그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딱히 증명할만한건 없었지만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슬비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미련이 마음을 비집고나와 생각으로서 내 머릿속에 발현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그냥 막연하게 살아있기를 바란다는 거다!! 살아 어딘가에 숨어서,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기를!!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내가 데리러 왔으니까, 숨어있으면 대답하라고, 이슬비!!!!!!!!!!!!!"
그때였다. 마침 옆으로 지나가려던 붕괴된 지면의 잔재가 마치 마법처럼 벌어지며 안으로 어두컴컴한 통로가 보였던 것은. 당시엔 몰랐지만, 바로 그곳이 전투로인한 내부구조물 붕괴로 바닥에 묻혀버렸던 건물의 지하라는걸 난 나중에서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몸이 내 의지와 관계없이 그 지하로 홱 빨려들어가는걸 느꼈다. 뭐냐, 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은!! 마치 슬비녀석의 염동력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난 어두운 지하로 떨어졌고, 돌아보니 내가 들어온 입구가 순식간에 다시 잔해들로 틀어막혀지는게 보였다. 난 설마라는 가정이 점차 현실로 올라오는것을 느꼈다. 이런 거대한 염동력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서 내가 알기론 딱 한명뿐이었던 것이다.
"뭐야, 너. 어떻게 된거야?"
신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내 머리위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그 순간만큼은 난 신께 감사드렸다.
2. 이슬비 - 그녀의 경우...
문득 정신이 든 이슬비는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예전같이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걸어다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평소 꾸준히 해왔던 트레이닝은 이런 극한상황을 상정한 것이었으니까, 당황스러울 것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가 없어 시간상으로 정확이 지금이 어느 때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녀가 있는곳은 빛이 전혀 새어들어오질 않아서 바깥이 낮인지도 밤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외따로 격리된 듯한, 한 때 백화점이었던 이곳 폐건물의 지하(地下)가 바로 그녀가 현재 위치한 곳이었다.
하늘이 보우하사인지, 습격받은 당시 차원종들을 피해 지하로 도주할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차원종들이 지하로 추격해 들어오는걸 막기 위해 염동력을 써서 건물의 잔해로 지하 입구를 자기 손으로 틀어막았기에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되려 스스로를 가둬버린 셈이다.
일단 살아난것에 감사했다. 시계를 겸하던 통신장비가 전투중 훼손된 때문에 시간을 알 수 없었던 슬비는 시간개념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계속 지하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흘러가는 시간을 가늠해오고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대충 예상해보면 이렇게 갇힌지로부터 대충 4~5일쯤 된 것 같았다.
그기간동안 그녀는 무의식 속에 휴대하고 다니던 한끼 분의 조제식품과, 본래 식품코너였던 지하에서 판매하던 식수만으로 버텨왔다. 다른 판매하던 식품들은 모조리 유통기간이 지나버려 먹으니만 못한 것들뿐이었다.
솟아날 구멍같은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슬비는 곧 지원병력이 올 거라고, 몸을 추스르며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의지력이 5일간이나 어두컴컴한 지하, 그것도 바로 위층이서 차원종들이 돌아다니는 극한상황에서 자신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 의지력은
슬비 자신이 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꺾여나가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의 폐쇄성 또한 그녀의 의지를 조금씩 잠식해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면, 위쪽에서 괴물들이 이따금 무언가를 하는 듯 난잡한 소리가 들렸다.지하로 들어오려는 시도를 하는 것일까...?
'내가 여기 5일동안 있었다고 치고 계산해보자.'
그녀는 생각했다. 세하, 유리, 제이는 무사히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이후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걸로 추측컨대 차원종들로부터 도주는 했으되 그들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걸 예상할 수 있었다. 가령 부상이라던가...
하긴, 생각해보면 스스로 방패막이가 됐어도 그 많은 차원종들 사이에서 상처 하나 없이 귀환은 힘들었을 테지. 그래서 그들만으로 안되기에 본부로부터 지원을 요청했을거라고 가정했다.
요청을 받자마자 본부에서 특무대를 소집하는데 한나절, 다른 클로저들을 차출해내는데 하루, 신서울에서 이곳 작전지역까지 내려오는데 반나절. 작전 구상, 실행까지 걸리는데 또 반나절.
지원병력이 제대로 움직였다면 못해도 그녀는 이틀 전에는 이곳으로 다시 차원종 소탕을 나선 특무대에 의해 구조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철저할 사람들이 지금껏 올것같다는 기미도 느껴지지 않는건... 다른 불길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본부로부터의 나의 구조 계획이 처음부터 없었다던가.'
왜 아니겠는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던가 하는 명목으로 소수의 전력이 버려지는건 전장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말로만 들을 땐 못느꼈지만 정작 그 당사자가 되고나니 불공평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속으로 불평한다고 없던 지원병력이 땅에서 솟아나 달려오는 일따윈 없을테니까.
슬비는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두 무릎을 팔로 끌어모아서 앉았다. 바닥은 차가웠고, 스스로가 생각한 불길한 가정(假定)이 들어맞는듯 하다고 느끼자 삽시간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녀는 다른 팀원들을 떠올렸다. 칠칠치 못한 성격에 만날 골골대지만 그래도 가끔은 어른스러운 제이, 활발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항상 먼저 자신에게 다가와주던 서유리. 그 때 무사히 잘 도망쳤을까? 그리고...
이세하. 지금 슬비는 그녀석이 가장 보고 싶었다. 리더인 자기 말은 죽어도 안 들으려하고, 결국 틈만나면 서로 아웅다웅하게 되는 어찌보면 앙숙과도 같은 사이였지만 세하는 알게모르게 그녀를 신경쓰고 안보이는곳에선 가장 먼저 나서서 생각해주는, 그런 녀석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기 숙소에서 한가하게 게임기나 붙잡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지. 왜 자꾸만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까?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볼 수만 있다면, 그녀는 세하의 얼굴이 가장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얼마 가지 않아 이루어졌다. 슬비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여겼다. 아니면... 얄궂은 신이 벌이는 운명의 장난인가...??
"뭐야, 너. 어떻게 된 거야?"
난 잠시 두 눈을 껌뻑거려야 했다. 밝은 데서 갑자기 어두운곳으로 끌려오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암적응이 끝나자마자 나는 내 눈앞의 슬비를 확 얼싸안고말았다.
"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살아있었구나!! 다행이야, 난 지금껏 네가 어떻게 된 줄 알았어!! 역시 유정누나가 틀렸었던 거야!!"
다행히도 슬비는 어둠 속에서도 별 탈 없어 보였다. 잠을 제대로 못 이룬건지 약간 헬쑥해진 얼굴은 내 격한 감정표현에 부끄러운 때문인지 약간 붉어져 있었다.
"뭐야... 그럼 죽기라도 했을줄 알았어? 난 보시다시피 멀쩡해. 며칠동안 잠도 잘 못자고 뭐하나 먹지 못하긴 했지만."
하하... 그럼 지금껏 슬비녀석은 한 끼도 못 먹은건가. 살아서 조우했다는 기쁨도 잠시, 갑자기 가엾으면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은 우리때문에 지금껏 이 고생을 감당해내야만 했던 것이다.
"가엾을 리가 없잖아? 사람은 음식이 따로 없어도 물만있으면 한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어. 며칠 굶은 것쯤은 아무것도 아냐."
"아, 그러셔?"
방금 내 생각 취소. 가엾긴 개뿔, 하여튼 이녀석도 어지간히 마이페이스다. 공복으로 힘도 없을텐데도 겉모습만큼은 예전처럼 그 철통같은 도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긴 우리 리더쯤 되는분이니 그정도는 되어주셔야지 않겠어? 내가 말했다.
"하지만 우린 널 구하러왔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제 여기를 탈출해서 모두의 곁으로 돌아가자."
"구하러 와준건 고마운데, 탈출해? 무슨 수로?"
어라?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일단 슬비를 찾은건 좋은데말이지, 여긴 지하라 탈출하려면 위로 뚫고 나가야하고 그 위엔 차원종들이 득시글대고 있으니까.
"너 아까 차원종들을 피해다니고 있지 않았어? 보니까 혼자 온 것 같은데... 때마침 옆을 지나가는걸 내가 건져주지 않았으면 붙잡혀 죽었을걸. 그리고 탈출하겠다고 위로 올라가면 차원종들이 아이고, 지나가십시오. 하면서 길을 내줄것같아?
오히려 분노한 차원종들에게 우리 둘 다 뭇매 맞아 죽을걸? 구하러와준건 고마운데 앞 뒤 대책없이 달려들어서 네 죽음에 동참하는건 사양이야."
"...그래. 미처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우쳐 줘서 참으로 고맙다, 인마."
"고마우면 내게 감사해, 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보통 나와 이녀석은 앙숙이었던 사이인 걸. 하지만 걱정 마시라, 이런 때를 대비해서 담보를 하나 남겨두었던 것이니까. 난 통신장비를 키고 상대방에게 연결했다.
"누구한테 연락하려는 거야?"
"벌써 잊은 거야? 팀 검은양(Black Lambs)엔 너와 나만 있는게 아니잖아?"
곧 상대방쪽에서 연락을 받았고, 난 그녀에게 말했다.
"알파, 들리는가? 지금 막 슬비를 찾았다."
***
"아아, 오메가? 아주 잘 들린다. 그래, 살아있었구나. 정말 다행이야."
서유리는 천장에 휘어진 철골 구조물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밑에 있는 두마리 차원종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도 시끄럽게 돌아다니는 판에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묻혀서 놈들에게 들리지 않았고, 그녀는 마음놓고 통신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알았어. 이쪽이 해야할 일은 방금 막 끝마쳤다. 알았어. 그럼 난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다, 그럼."
주변에 아무도 없는게 확인되자 서유리는 천장에서 떨어져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녀가 지금 있는곳은 건물의 거의 최상층부로 위쪽으로 올수록 차원종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세하가 밑에서 소란을 피워준덕에 모조리 그쪽으로 몰려가고 없어서 일은 수월했다. 이제 두사람보다 건물밖으로 먼저 탈출해 나가기만 하면...
"어? 이건??"
별생각없이 옥상 바로 밑의 꼭대기층까지 올라온 서유리는 자신이 본 것을 보고 말이 막혔다. 건물 내부의 훼손상태는 위쪽 층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사위가 훤했는데, 그 틈사이로 건물 중앙즈음에 보랏빛으로 허공에 걸려있는 둥근 무언가가 보였다.
주변엔 보초라도 서는 듯,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차원종 한마리만 있을 뿐이었고, 그래서 서유리는 뒤에서 몰래 다가가 차원종의 머리통을 단칼에 날려버렸다. 죽은 차원종은 그 시체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대기중으로 화해 사라졌다.
그리고 유리가 가까이 다가가서 본 것은 틀림없는, 규모만 다를 뿐 틀림없는 차원문(次元門)이었다.
대규모 차원종을 쏟아내던 구서울 하늘에 나타났던 그 거대 차원문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닫혀있는 듯 움직임도 반응도 없었지만.
비로소 유리는 왜 이렇게 많은 차원종들이 순식간에 건물을 점거할 수 있었는지 이해했다. 요즘들어 사방에 일말의 예고도 없이 이런식의 차원문들이 중구난방으로 나타난다는 소린 들었지만 바로 예의 그 차원문을 보게되자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냥 가만히 두고 갈 순 없었다. 이건...
서유리는 왼손의 권총에 포켓에서 꺼낸 탄환 하나를 꺼내어 장전한 후, 문을 향해 겨눴다. 클로저 슛(Closer shot), 문자 그대로 문을 닫는 탄환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소규모 차원문을 해체시키기 위해 유니온 본부에서 특별 제작지급한 특수탄환이었다. 그리고 서유리는 문을 향해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째애앵-----!!!!! 유리는 순간 귀를 틀어막았다. 탄환은 차원문을 뚫었고, 유리접시가 깨지는 듯, 고막을 건드리는 굉장한 파열음이 순간 터져나왔다. 돌아봤을 땐 차원문은 이미 파괴되고 없었다. 이것을 없애버렸으니 차원종은 더이상 이지역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방금 이 파열음을 듣고 밑에있던 차원종들이 몰려올테니... 세하가 탈출하기 쉬워지겠군. 이건 생각못한 성과인걸.'
이제 건물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다.
***
"이게 무슨 소리지?"
난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유리그릇이 깨지는듯한 소리인걸? 위에 무슨 일이 있는걸까?
"유리가 뭔가 일을 저지른 것 아냐?"
옆에 있던 슬비가 말했다. 그녀로서도 뭔지도 모를 이유를 짐작할 순 없는 노릇일 테지. 그때였다, 내게 갑작스럽게 서유리의 통신이 전해져 온 것은. 분명 방금 막 대화하고 끝냈었는데?
"알파, 무슨 일인가??"
"아아 오메가, 아니, 이세하!! 방금 막 건물에 있던 차원문을 파괴했다. 내짐작으론 그것이 건물을 점거하던 차원종들을 쏟아낸 원인이던 것 같아."
뭐라고? 난 4일전에 여기서 차원종들에게 습격받았던 일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없던 차원종들이 갑자기 다 어디서 나왔나 싶었는데 그게 이유였구만!! 그런데 잠깐, 유리가 방금 그걸 파괴했다고??
"차원문을 파괴하면서 난 소리를 듣고 밑에있던 차원종들이 건물 위로 올라갔다. 탈출하려면 지금이 기회야, 슬비랑 어서 그곳을 빠져나와! 건투를 빌겠다. 그럼!"
통신은 끊겼고, 난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어쩌면 하늘이 마지막으로 내려준 기회인지도. 지금 탈출하지 않으면 기회가 또 언제 있을지 몰라!! 난 슬비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난 여차하면 그녀를 업고서 빠져나갈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극구 거절했다. 움직일 수 있는데 도움을 받고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며칠간 못먹었어도 뛸 정도는 돼. 그리고 네가 날 업으면 속도가 느려지잖아, 탈출이 힘들어질거야."
"그래도 단시간이라면 업고 뛰는것 정돈 돼. 무리다 싶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 알겠지?"
"괜찮다니까. 환자 취급하지말고 너나 잘해, 난 네가 더 걱정이야."
예, 예. 어련하시겠수? 되려 날 걱정해주는 우리 리더님의 얼굴을 뒤로 하고 난 손에 쥔 무기를 다잡았다.
한번 올라가면 돌이킬 수 없을테지. 기회는 한번뿐!! 이 탈출에 내 목숨을 각오했다.
"그럼, 간다!!"
***
슬비가 건물잔해로 막아놓은 입구를 뚫고 위로 올라왔을땐 정말로 주변에 차원종이 얼마 없었다. 아, 착각하지 말자. 어디까지나 슬비를 찾기 전과 비교해서 없다는거지 아직도 충분히 많고도 남는 숫자가 빠져나온 나와 슬비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바로 내 옆엔, 내가 밑에서 입구를 뚫기 위해 쏘아올렸던 공파탄에 얻어걸려서 반쯤 죽어가는 차원종 한마리가 있었고, 그놈에게 검을 꽂아 확인사살하며 나는 판단을 내렸다. 아니, 사실 판단이라고 할것도 없었다. 우리에게 선택지는 어차피 하나뿐이었으니까.
이런놈들과 정면충돌하는건 맨몸으로 달려오는 차량에 들이받는 행위지? 난 바로 현명한 선택을 골랐다.
"튀어!!!"
난 주변을 둘러보고, 우릴 둘러싸 포위하고있는 차원종의 숫자가 가장 적은 곳으로 슬비의 손을 잡아끌었다. 냅다 달렸고, 난 앞서가며 우리가 향하는 방향에서 버티고있는 두마리 차원종들을 향해 검을 밑에서부터 쳐올려 띄웠다.
"역전(逆轉)!!"
우릴 막고있던 두마리 차원종이 내 검에 맞아 하늘로 솟구쳤고, 나와 슬비는 그 밑으로 잽싸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무리는 이거다!!"
그리고 난 뒤돌아서며 떨어지는 차원종들 쪽을 향해 또다시 공파탄을 쏘아날렸다. 퍼퍼펑!!! 두번 쏘아진 공파탄에 하늘에 떴다가 떨어지던 놈들과 달아나던 우릴 쫒아 몰려오던 놈들이 한꺼번에 맞아 연쇄폭발을 일으켰고 놈들이 주춤하는게 눈에 보였다.
"이거 의외로 상황이 잘 풀리는데?!"
난 뒤도 안돌아보고 달려가며 외쳤다. 옆에 슬비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그녀는 곧잘 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건물을 빠져나간 뒤엔 어쩔 생각이야?!"
난 슬비의 물음에 답했다. "어쩔 생각이냐니? 뭐가?"
"저 녀석들, 네 공격에 잠깐 주춤했지만 금방 쫒아올거아냐 그땐 어쩌게? 건물밖에서 쟤네랑 다 싸울거야?"
"아아, 그건 걱정마! 다 생각해둔게 있으니까... 조심해!!"
나는 깜짝 놀랐다. 달려가는 방향에 아무놈들도 없어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리위에서 차원종 한마리가 뚝 떨어져서 나와 슬비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차원종이, 내가 아닌 슬비를 공격해서 그녀를 주저앉혔을 땐 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줄 알았다. 저 자식이, 지금 무슨짓을 한 거야!!
"슬비에게서 떨어져!!!"
난 그놈을 단칼에 베어넘겼고, 그 시체를 돌아보도 않은 채 슬비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다행이 다친 건 아니었던듯 상처는 없었다.
"괘, 괜찮아. 살짝 스친 것 뿐이야."
대신 난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정말 스치기만 한 듯 상처는 없었지만 그녀는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말을 더듬었고, 또 뭣보다 숨을 몰아쉬며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처음엔 몰랐으나 그녀를 돌아본 순간 느낄수 있었다. 사실 며칠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몸으로 이정도로 달려온 것만으로도 굉장한건데, 슬비는 이제 한계였다. 더 뛸 수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여유부릴 시간도 없지. 많이 따돌렸던 차원종들은 지금도 멀찍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는 무기를 등에 짊어지고 슬비에가 다가가 그녀를 들어올렸다.
"꺄악?! 너 지금 뭐하는??"
"잔소리라면 나중에 들어줄게!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
난 오른팔로는 슬비의 등허리 뒤를, 왼팔로는 두 다리를 받쳐서 품에 안아들고 냅다 뛰었다. 이른바 공주님 안기 자세라는건데, 난 내가 이 자세를 직접 하게 될 날이 올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슬비녀석을 상대로!!
"세, 세하야..."
"입 다물어! 혀 깨물어도 난 모른다?!"
녀석은 이런 자세가 부끄러운 듯 한 손으론 자신의 짧은 치마를 붙잡으며 얼굴을 사정없이 붉혔다. 나중에 자길 안아들고 난리쳤었다고 이 일로다가 한소리 듣는다고 해도 어쩔수 없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고!!
난 마지막으로 부서진 채 활짝 열려진 건물 정면 입구로 빠져나왔고, 곧 슬비를 바닥에 천천히 내려주었다. 저기 멀리서 우릴 발견하고 달려오는 서유리가 보였다.
"슬비야!"
유리녀석은 대뜸 달려오더니 슬비를 와락 껴안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난 저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리의 반응이 딱 내가
슬비를 발견했을 때랑 똑같았던 것이다. 생사가 불문명했던 소중한 친구를 되찾는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것은 비단 나뿐아닌, 유리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미안해! 그리고 보고싶었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으응. 고, 고마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두 사람 사이를 일단 갈라놓았다. 다정한 재회의 순간에 초를 치고싶은 맘은 티끌만큼도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매우 시급했던 것이다.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유리야, 네가 맡았던 준비는??"
"아아, 걱정 마. 완벽하게 해놨으니까!"
유리와 내가 처음 상의했던 게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 아침 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만일 슬비를 찾아 구해내게 되면 저 차원종 무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위해 난 위험을 감수하고 속칭 어그로를 끌며 차원종들을 모조리 몰고 다녔었고 서유리는 건물 내에 잔재한 차원종들의 눈을 피해건물 전체를 돌아다녔던 것이었다. 바로 위상력을 사용한 진을 그려놓기 위해서.
아마 저 건물 곳곳엔 그녀의 전매특허인 별 모양의 마법진이 잔뜩 그려져있을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나와 슬비를 등진 채 건물을 바라보고 앞에 섰다.
"위상력, 개방!!"
퍼퍼펑!! 삽시간에 그녀의 몸은 푸른 불꽃처럼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축적되어있던 위상력을 일제히 끌어내 힘을 몰아치는, 우리들의 비기(祕器)!!
"자아, 이게 바로 이 서유리님께서 준비한 비장의 결전기, 유리 스타이시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콰콰콰쾅!! 그녀가 칼을 거꾸로 쥐어 밋밋한 땅바닥에 꽂아넣자마자 그것을 트리거로 삼아 건물 곳곳에서 붉은 폭발과 화염이 일제히 터져나오며 건물 전체를 삽시간에 불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건물 입구쪽을 쳐다보니, 뒤늦게 나와 슬비를 추격해나오던 차원종들이 유리가 건물입구 앞에도 그려놓은 유리스타에 휘말려 불타고 있었다.
"괴, 굉장해..."
슬비조차도 입을 쩍 벌린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지. 15살의 나이에 뒤늦게 위상력을 깨우쳤던 그녀의 잠재력이 이 정도이리까지라곤 나도 예상치 못했었으니까.
분명 저정도의 화력을 내려면 십수개의 유리스타의 진을 건물에 그려놨어야 했을테고, 그것들을 모조리 발현시켰으니 아마 그녀는 자신이 가진 위상력을 저 일격에 모조리 쏟아부었을 것이다. 내 생각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던 위상력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유리는 우리를 돌아보며 혀를 살짝 내미는 것이었다.
"헤헷, 이 한번에 위상력을 전부 써버렸으니 앞으로 한 일주일은 힘을 쓰지 못하겠지만... 지금 이 위기를 모면한 대가치곤 싼 편이지?"
"하하... 비장의 결전기, 굿이었어 서유리."
무지막지한 녀석... 가만보면 우리 셋중에 가장 안 그럴것 같으면서도 무서운 힘을 보여준다니까. 그렇게, 불길에 휩싸인 건물을 보면서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때, 내 눈에 뭔가가 건물에서 걸어나오는게 보였다.
"뭐야, 저 불지옥에서 살아남은게 있었어?"
유리가 반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며 말했다. 놈은 지금까지와의 차원종들관 달리 덩치도 크고 그 모습에서 나오는 위압감도 예사롭지 않은게, 놈들의 우두머리급은 돼 보이는 녀석이었다. 그 증거로 저 불속에서 멀쩡히 걸어나오고 있었으니까.
크르르륵... 놈이 우리를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태세를 보면 당장 달려들것만 같았으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신중을 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하야, 유리야.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너희는 달아나."
그 말에 나와 유리는 동시에 슬비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떨리는 다리로 바닥에서 일어나 서더니 뭔가를 각오한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 녀석은 보통놈들관 달라. 알잖아? 둘 다 힘을 많이 써서 지금상태로 싸우는건 무리야. 지금은 한명이 희생해서 저 녀석을 막고, 나머지 둘은 도망치는게 최선이야."
"그래서 리더인 네가 또 남아서 희생하겠다고?"
난 슬비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또다시 그때 그 패턴이다. 4일 전, 슬비는 자기를 희생해서 모두를 도망시켰고,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에서 희생을 자초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말했잖아. 이게 최선이..."
"최선이고 나발이고, 또 그때처럼 너 혼자 버리고 도망가라고? 그런 말을 듣는다고 내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와 같은 괴로운 경험은 한번으로 족하고, 또다시 그런 일을 겪는다면 난 괴로움으로 잠을 못 이뤄 수면부족으로 죽을것이다. 그럴 바엔 죽더라도 싸우다 죽는게 낫겠지.
유리는 힘을 다 썼어도 아직 난 싸울 기운도 남아 있었으니까. 난 동시에 내 몸의 남은 위상력을 모조리 개방시켰다. 나의 몸이 아까의 서유리처럼 순식간에 푸른 불꽃에 휩싸인 것처럼 변했고, 그것을 신호로 우두머리 차원종이 내게 거침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죽지 않아. 다시 또 널 혼자 내버려두진 않는다. 이슬비, 우린 널 구하러 온 거야."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날 보는 슬비의 시선을 뒤로 하고, 난 무기를 앞세워 차원종과 부딪혔다. 카카카캉!!! 내 검이 녀석의 복부에 파고드는 순간, 난 내 몸안의 모든 힘을 끌어낸 일격을 놈에게 퍼부었다.
"결전기, 폭령검(爆靈劍)!!!
칼끝에서 푸른 불꽃이 섬광처럼 터져나왔고, 그 불꽃은 우두머리 차원종의 몸을 뱀처럼 휘감으며 폭발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궁...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본 것은, 검끝에서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우두머리 차원종의 마지막 모습과, 그 뒤로, 십분 전까지만해도 나와 슬비가 머물고 있었던 폐건물이 불길 속에서 전소되어 꼭대기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었다.
"돌아가자, 슬비야."
나는 뒤돌아서서,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아있는 슬비를 보며 말했다.
처음엔 생각이 깊지 못해 슬비를 위험 속에 남겨두고 도망쳤던 나였지만, 소중한 사람을 두번씩이나 위험 속에 내던지는 비겁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지금 내 검끝에선 푸른 섬광이 그런 나의 의지를 대변하며 마지막을 불태우고 있었다.
3. 이세하 - 그 이유?
응? 내가 뭘 하고 있느냐고? 나는 지금 유니온 소속의 종합병원에 입원해 있는 슬비 보러 가던 참이었다. 유리는 아까 먼저 슬비를 보러간다고 먼저 떠났었다.
슬비는 며칠동안 식사에 따른 영양섭취를 못 했던 이유로 회복을 위해 이곳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본인은 괜찮다며 한사코 거부했지만, 팀의 리더가 길가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라도 하는날엔 곤란한건 우리쪽이니까 말이지.
...슬비 녀석 잠자코 잘 있으려나? 의사선생님이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가만히있으면 좀이 쑤신다며 바로 헬스장의 런닝머신에 올라탈것같은 녀석이라 말이지.(물론 종합병원엔 런닝머신이 없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다. 차원종 소굴에서 슬비를 되찾아오긴 했지만 한때 작전지역이었던 건물을 전소시켰고, 뭣보다도 명령도 없이 무단으로 행동했었던 우리니까. 적어도 명령 불복종으로 인한 중징계를 각오하고 있었건만 내려진 건 단 사흘간의 근신처분이었다. 그야말로 예외적인 특혜였었다고 할 수 있으려나?
이렇게 나에게 관대한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솔직히 상부의 결정이라 깊이 알고싶지도 않긴 하다만) 난 아무 이의없이 그 특혜를 누려주기로 했다. 뭐, 나쁠 건 없으니까.
병원 정문에서 문을 열고 거대한 로비로 들어섰다. 이곳 유니온 종합병원은 접수창구에서 업무를 보는 용도 외에도 커다란 쉼터를 겸하고 있었는데, 내부는 무척 조용했다.
음, 조용하다고 해서 무슨 독서실처럼 말한마디 없고 펜을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기분나쁜 침묵이 아니라, 이따금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그 목소리가 일정 선을 넘지 않는 고즈넉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난, 사람이 몇 안나와있는 오전의 쉼터의 중앙에 환자복 차림의 슬비가 팔에 꽂은 링거를 매단 링거대 를 옆에 둔 채 앉아있는것을 발견했다. 엥?
"슬비야!!"
슬비는 날 바라보더니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날 맞았다. 아아, 여전히 차가운 반응이구만.
"무슨일이야, 이 시간에? 지금은 근무시간 아냐?"
"근신 중. 유리는 어디가고 너 혼자 나와있어?"
"음료수 사러, 잠깐 매점에."
난 문안온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기보단 근무시간일텐데 병문안을 오느냐고 핀잔부터 주고보는 슬비를 보며 왠지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흠, 녀석이 이렇게 쌀쌀맞은건 내 생각으로 추측하건데 저번에 슬비를 안아올릴 때, 녀석의 몸을 건드렸던 앙금이 남아있는게 아닐까 하는거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건 슬비 쟤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내가 녀석에게 따져볼까하고 말을 걸려던 찰나 슬비가 입을 열었다.
"...세하"
"어, 응?"
"궁금한 게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난 그때까지도 별생각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 슬비가 꺼낸 말은 조금 당혹스런 것이었다.
"그 때... 내가 폐건물 지하에 갖혀있을때, 날 구하러 온 이유가 뭐야??"
슬비는 내가 말할 틈을 주지않고 자기 말을 이어나갔다.
"유리가 와서 내게 말해줬었어. 그때의 너희는, 날 포기하라던 상부의 명령을 거스르고 단독적으로 행동한 거였다고. 사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 구조대가 올 시기는 지나있었고, 당시에 날 구하러 온 전력은 너희 단 둘뿐이었으니까.
다른 지원도 전혀 없이 너희끼리만 있는걸 보고, 적어도 명령으로 인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 부분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덕분에 난 목숨을 건졌고, 이렇게 살아있으니. 내가 진짜 궁금한 것은... 왜 그런 무단행동을 벌였느냐는 거지."
슬비의 말은 이젠 반쯤 나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되어있었다.
"이번엔 상부의 선처로 너랑 유리 둘 다 근신정도로 끝났지만, 그게 아니었으면 너흰 커다란 벌을 받았을거야. 그걸 모를리 없었으면서도... 왜 굳이 위험을 자초하면서까지 날 구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
"하아, 뭘 말하나 했더니 별 시답잖은걸 다 물어보는구나?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
"시답잖다니, 너흰 그때 자칫하면 죽었을 수도 있었어."
"바로 그래서 널 구하러 간 거야."
그래, 솔직히 말하면 차원종이 득실거리는 소굴에 뛰어든다는건 반쯤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맨 처음 폐건물에서 차원종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슬비녀석도 똑같이 행동했었다.
혼자를 방패로 삼아 우리 모두를 살리려는 희생, 그것도 똑같은 자살행위였다. 결과가 좋았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거지, 어쩌면 우리 둘 다 이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위해 희생했었던 리더를 냉정히 버릴만큼 냉정하지도 못할뿐더러, 꼭 그렇게 손해득실을 따져가며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어도 널 구하러 갔을 꺼야.
내가 해줄얘기는 이게 다야. 그리고, 난 그때의 나의 판단과 행동에 조금의 후회도 없어. "
생각해보라. 친구를 구하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해야하는데, 그 위험이 내가 충분히 감당할만한 것이면 기꺼이 구하러 가고,
위험이 나를 집어삼킬만큼 큰 것이면 '내 힘으론 미안하지만 어쩔수없어'라며 포기해버린다면 그것만큼 자기만족적이고 차가운 희생이 어디 있겠는가.
"슬비 넌, 나의 무단행동을 평소에도 못마땅해했으니 별로 달갑진 않겠지만..."
난 슬비가 나의 그 무단행동때문에 내게 이유를 묻는다고 생각했었다. 종종 내 맘대로 저지른 일로다 슬비와 의견충돌이 있곤 했으니,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미안해."
"엉? 뭐가?"
되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과를 듣게 됐다. 미안해? 내가 녀석에게 사과를 들어야 할만한 이유가 있었던가?
"미... 미안하다고. 네가 날 구하러 지하로 와줬을 때..."
녀석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려 나왔다.
"솔직히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난 아무도 와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 때, 네가 그곳에 와 줬던 거야. 날 위해서... 그런 네 모습을 보고 속으로 얼마나 감사했는지...
당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쉽게 입밖으로 말이 나오지가 않았었어. 하지만, 지금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슬비는 얼굴에 미소를 띄며 내게 말했다.
"미안해, 그때 바로 인사하지 못해서. 그리고 고마워. 날 구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와줘서."
...난, 그런 그녀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뭘 새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걸."
곧이어 내가 올 걸 생각해 내 몫의 음료수까지 사들고온 유리가 왔고, 우린 금방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아, 다행이야. 슬비가 내게 쌀쌀맞게 군 이유가 몸에 손을 대서가 아니었어.
솔직히 말하면, 두 번 다시 겪고싶지 않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나도 며칠동안 계속 마음을 졸였었고, 나뿐만 아닌 모두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번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그때도 주저하지 않고 또다시 슬비를 구하기 위해 나설 것이다. 그녀가 나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지로 몸을 내던졌던 그 이유였다.
에필로그 - 유정의 시선
김유정은 병원의 로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난간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가 내려다보고 있는 병원 쉼터의 벤치엔 검은 양의 멤버 3명인 세하, 슬비, 유리가 한자리에 모여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고 떠들고 있었다.
저 세사람이 자신들을 위해 김유정 요원 자신이 해준 일을 알게된다면 저렇게 즐거움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있었던 세하와 유리의 명령불복종에 따른 3일의 근신처분은 유정이 뒤에서 백방 힘을 썼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게 아
니었으면, 지금쯤 징계를 받고 있었겠지. 유정은 한번 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하와 유리가 차원종 소굴에서 슬비를 구해내 오자, 상부의 지시 일정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당장 전력투입이 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슬비는 일주일가량 푹 쉬고나면 기량을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했기에, 그녀의 복귀로 인해 두명이었다 다시 3명의 최소요원을 갖춘 검은양의 해체명령이 철회된 것이다.
당연히 이후 있었을 새로운 클로저팀에 의한 섬멸전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들은 어차피 검은 양의 대타로 예정되어 있었으니 검은양의 존속이 확정되자 새로 내려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세하와 슬비, 유리가 도주하면서 예의 폐건물을 완전히 전소시키는 바람에 상부가 계획했던 섬멸전을 대신 수행한 셈이 되었으니, 세하와 유리에게 걸려진 명령불복종이란 중죄를 근신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김유정이 뒤에서 상부에 많이 어필했었다. 김유정요원의 관리요원직책 변경도 없던 일이 됐고...
전에 봤던 대체관 남자는 알고보니 유정 자신의 대타로 내려왔던 관리요원이었는데, 자신이 그 직을 안 맡아도 됐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기도 나름 좋았는지(그는 이 일을 맡기 싫어서 처음에 유정에게 그리 퉁명스럽게 대했었단다)세하와 유리가 벌을 감면받는데 자기도 힘써준다고 말하며 돌아갔다.
"모두에게 해피엔딩이로군. 세하도 유리도, 살아 돌아온 슬비에게도... 뭐 나는 변한게 없지만."
변하기는 커녕 요 며칠새 이 애들때문에 온통 신경쓰고 잡무에 시달리고 했던걸 기억하면... 되려 끔찍한 나날이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냥 검은양 해체되게 냅두고 난 다시 본부로 인사이동되는게 나았을지도... 하아."
자기가 내뱉은 혼잣말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저렇게 기뻐하는 애들에게 실례되는 얘기 같아 유정은 스스로를 또 질책했다. 나도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군...!! 그 때, 유정의 옆으로 누군가가 와서 섰다.
"그것 참 아이들에게 가혹한 언사로군요. 제게도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린 아닙니다만..."
"어머, 제이 씨!"
최초로 차원종들에게 부상당해 전치 2달을 진단받았던 그 제이도 이곳 유이온 종합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아아, 방금 제말은 잊어주세요. 스스로 말해놓고도 후회하고 있으니까요."
"하핫, 그게 유정 씨의 진심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제이는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었으며 목에는 교정기를 달은, 겉보기에도 정상이 아닌 상태였지만 이렇게 나돌아다니는걸 보니 몸은 꽤 회복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셔도 돼요? 전치 두달이라고 들었는데... 힘들지 않으세요?"
제이는 대답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애들 모습이나 보려고 잠깐 나왔습니다. 제가 입원해있던 사이에 큰일이 있었다더군요. 세하도, 슬비도, 유리도 전부 별 탈 없어 보여서 다행입니다."
이번엔 유정이 쓴웃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별 탈이 없어서.
"제이 씨, 제가 왜 여기 병원에 이렇게 와있는줄 아세요?"
"글쎄요... 슬비 병문안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건 다 세하 때문이에요."
그녀는 사건이 끝난 후에도 세하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질 못했다. 워낙 정신없었던 탓도 있지만, 유정과 말다툼을 했던 세하가 그녀 자신을 조금씩 피했기 때문인 탓도 있었다.
하긴... 아무리 감정이 격양되어있었다 쳐도, 상관이자 연장자에게 큰소리를 쳤었으니 그게 미안한 탓이겠지.
그래서 유정은 세하에게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잔소리를 퍼부어주려던 참이었다.
"저는 불안했었어요. 그때는 슬비의 생사를 장담할 수도 없었고, 상부에서 지원은 없다고 뚝 못박았는데 세하가 흥분해서 자기 멋대로 혼자 쳐들어갔다가, 쟤마저 만약 잘못되었다면, 그땐 어떻게 됐을지...!!"
제이는 아무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같은 어른인 제이는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녀는 슬비에 이어 세하마저도 잘못될까 불안해 그것을 걱정했었던 거다.
"그래서 저는 오늘은 정말 엄하게 혼낼 생각이었어요. 슬비의 얼굴도 볼 겸, 세하도 병원에 올 거란걸 알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죠."
하지만 유정은 뒤돌아서서 난간에 뒤를 기대며 말했다.
"하지만 관둘래요. 죽다 살아나와서 저렇게 웃고 즐거워하는 애들한테 가서 분위기를 망가뜨리고 싶진 않네요. 세하와는 나중에 얘기해봐야 겠어요."
제이는 그런 유정의 옆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이렇게 걱정해주고 마음 깊은곳에서부터 위해주는 관리요원이 있으니, 저 세명의 아이들이 걱정되진 않았다.
앞으로 그들에게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어떠한 부조리 속에서라도 김유정 요원과 세하, 슬비, 유리 세사람이라면, 그 위기를 능히 타개해 나갈 수 있으리라, 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편 - 납득할 수 없는 이유.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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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진행을 위해 없던 설정을 약간 추가하거나 기술설정을 완전 뒤엎은 게 조금씩 있습니다(유리스타 원거리발동 등;;)
애교로 봐주시기를... 고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