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J'
티팬티 2014-12-31 2
#1
빛바랜 흰 머리카락을 비비 꼬아본다.
수많은 약물 복용으로 생긴 부작용으로 탈색돼버린 머리카락을 보며 과거를 생각해본다.
초연향기가 가득하고 아군들의 피비린내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 어두운 기억이 지난 10년 동안의 클로저로서의 삶이였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을 보면 자꾸만 시선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과 다시 눈을 마주친다.
탈색뿐 아니라 피부까지 청백하게 변해버렸다.
풍채에서 드러나는 건장함과는 너무나 상반된다.
몸은 내부부터 썩어 들어갔고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부터 건강을 노래하며 뇌리에 박혀버린 몇 번이고 지켜본 주마등이 자꾸만 뇌를 헤집고 다닌다.
당시 내 이름을 부르던 이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었고 이제는 ‘제이’라는 가명이 내 이름을 대신하여 남들에게 불러지고 있다.
차원 전쟁이 끝난 후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위상력을 손에 쥐고 전장을 휘젓고 다니던 과거의 모습이 거울에 비춰진다.
다시 또 시선을 피해 자리를 옮긴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 캔의 냉기가 손바닥을 간질인다.
좁아터진 방 안에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본 창가에 걸터앉아 캔을 따며 올라오는 거품을 단번에 들이킨다.
10대에나 찾아오는 정체성의 혼란이란 게 지금에서야 나를 흔들고 있다.
내 10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2
처음 차원종과의 조우를 한 그 당시엔 대한민국에선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나자 이들과 싸울 수 있는 차원 현상이 나타날 때 나타난 최초의 클로저를 찾게 되었고 즐거운 학창시절을 지내야할 나이에 국가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차원계 대응 특수부대 울프팩.
난 그곳에서 제이라는 별호를 부여받았다.
당연히 전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화기, 장비 제어 지식을 알려주고 전투교본을 배우고 난 선택된 인간이란 것에 혈안이 되어 이 모든 것을 빠르게 습득하고 전장에 투입되었다.
우리 위상능력자 뿐만 아니라 일반 군인들도 한 자리에 모여 차원종들 앞에 섰을 때의 떨림은 아직도 생생하다.
#3
차원종들과의 거듭된 전투를 통해 얻은 거라곤 그들에게 등급을 부여한 것과 수많은 인명피해라는 것이다.
클로저라고해서 죽음을 피해가진 못했다.
클로저가 가진 위상력만이 차원종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었지만 위상력을 지니고 있어도 이를 구현하고 방출하고 활용하는 능력은 별개다.
1세대 클로저들은 거친 환경 속에서 차원종들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히기 위해 죽음과 자신들의 능력을 맞바꾸고 있었다.
나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없었고 그 때 위상력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던 때 만들어진 위상력 구현을 위한 약들이 그 때 먹던 밥 양보다 더 많았으면 많았지 적진 않았을 것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지나가던 도로는 군데군데 움푹 패여 있어 차 안이 들썩 거렸고 평소 전철을 타고 지나가던 다리들도 끊어지고 그렇게 평화로웠던 서울은 온데간데없이 참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리는 내게 죽음을 속삭였고 기댈 곳 없는 내 마음은 서울과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아마 그 때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손으로 나 자신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5
아줌마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난 그녀를 아줌마라 불렀지만 그 때마다 내게 누나라 부르라 시켰다.
하지만 지독한 환경 속에서 생활 속 10대의 작은 반항이 그녀를 계속 아줌마라 부르게 된 걸지도 모른다.
전쟁을 한지 7년 만에 제일 오래 이야기를 나눈 클로저였다.
나는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랬고 아마 그녀 또한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난 계속 잊고 살았을지 몰라도 이 전쟁은 비단 클로저와 차원종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시민들의 피해 속에 내 부모님이 같이 속해 있었고 이는 차원종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도착지를 향해 걸으며 내 몸은 넝마가 되었고 텅 빈 마음을 매번 술로 매우기 일수였다.
그런 나를 위로하는 그녀 또한 외진 줄 위를 걷고 있던 걸 알아차렸던 것은 차원전쟁이 종식을 맺을 때 즈음이다.
위상력 억제기가 개발되어 서울 곳곳에 이를 설치하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먼저 차원종에게 전투를 선포하기 시작하여 그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6
유니온과 더불어 벌처스와 함께 최대 규모의 병력을 소집하여 차원종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피해는 줄었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명씩 없어지고 있었다.
한 때 선택받은 자라면서 우쭐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장이라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피폐해진 마음은 갈수록 날 지치게 만들었고 그 때마다 그녀는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줬다.
하지만 그녀도 언젠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착잡한 마음에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나의 불량한 태도에도 그녀는 나를 한결같이 대해준 것에 대해 너무나 고마웠다.
그 고마움도 잠시 그녀는 자기에겐 아들이 있고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잘 돌봐달라는 말을 끝으로 내 곁에서 떠나게 되었다.
#7
FILE No. 004532-005.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유니온 내부의 기록이다.
이 파일엔 나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있지만 숨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기밀이랍시고 열람이 불가능한 것이 대부분이다.
내 10년 동안의 행적을 읽어보니 나름 재미있긴 했지만 쓰디쓴 기억을 다시 맛보니 추억이라 부르기도 뭐해서 금방 기록을 덮어버렸었다.
클로저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사회에 나온 나는 주변에서 들리는 클로저에 대한 악평을 들으며 지난 내 삶이 그렇게도 쓸모없었을 거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의 마음이 지금의 나와 같을까.
슬픔과 고뇌를 되새기는 것을 포기하고 금방 생각을 접어버렸다.
이 이상 생각해버리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돼버릴 것 같았다.
#8
오늘 오랜만에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차원전쟁을 종식시키고 나서 육아에 전념하기 시작한 그녀는 말썽쟁이 아들 때문에 힘들다며 차원종과의 싸움이 더 편하겠다는 농담도 던지고 그 때에 비하면 서로 많이 밝아진 것 같다.
그런 그녀에게 부탁을 하나 받았다.
자기 아들이 이번에 클로저가 된다면서 뒤를 잘 봐달라는 것이다.
이미 클로저 생활을 접은 나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부탁이지만 그 때 클로저로 복귀하라는 유니온의 요청이 같이 닿았다.
직접 차원종과 싸울 필요는 없이 새로운 클로저들의 교관 검 서포터로 활동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아이들도 클로저로 활동하게 된다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겠지만 내가 옆에 있다면, 그녀가 내게 해줬던 것처럼 해준다면 자신이 상처를 입는 일은 없도록 노력해야겠다.
이렇게 마음 먹었다. 그리고 아직도 김시환이 살아있다면 면상에 주먹을 한 방 날려주고 싶다.
오늘따라 내 전우들이 그립다.
#End
“그런데 아저씬 왜 다시 돌아온 거에요? 은퇴했었다면서요.”
옆에서 해맑은 표정으로 날 처다보는 아이가 있다.
날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약간 부담스럽다.
이름이 서유리라 했던가.
지금 이 미소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어야겠지.
“거기엔 어른의 사정이 있지.”
“어른의 사정? 연인에 대한 복수라던가 인류에 대한 사명감, 뭐 그런거요?”
“아니, 저축해놨던 돈이 다 떨어졌다.”
“아하, 네에.”
“그리고 난 아저씨가 아니다. 앞으로 오빠라고 부르도록.”
“으엑?”
'애들아 무리하지마라. 건강이 제일이야.'
- J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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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단편으로 쓰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어떤 것을 쓰면 좋을 지 고민하다가 쓰게 된 게
제이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과거에 대해 밝혀지지 않는 미스테리한 제이에 대한 스토리를 써보자 해서 써본 게
바로 이 소설입니다.
재밌게 읽어주셨으면하는 바람 가득 열심히 썼고 비록 소설이지만
어느정도 제이에 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작중 내용 행적
(출처 : 클로저스 오프닝 영상)
FILE No. 004532-005
차원계 대응 특수부대 울프팩 전투요원 출신
소부대 전투, 전술 지휘 경험 있음, 화기 장비 제어 관련 지식 보유
실전 경험 다소 있음
차원 전쟁 당시 청소년으로 추정
종전 후 유니온 소속 특수 기술 연구부 소속
위상력이 많이 내려감 ->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
차원 전쟁 당시 많은 비밀 임무를 맡아 기록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