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그녀의 방식 -完-

점검중 2014-12-31 0

“승하야, 가서 동생 좀 깨워. 밥 먹여서 학교 보내야지.”
“네.”
밥을 먹으려고 식탁에 먼저 앉아있었건만 동생이 내려오질 않아서 쫓겨났다. 다락방을 통째로 사용하는 동생의 방 앞에서 노크했다.
똑, 똑-
“야, 이슬비. 밥 먹어야지.”
대답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직도 이불 속에 웅크려 있다. 이 때는 강경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지각을 할 게 분명하다. 손으로 슬비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자 잠에서 깼는지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우웅...”
“일어났냐?”
슬비가 눈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노크는 해야 합니다.”
또 시작이군.
“노크는 이미 했고, 네가 일어나지 않아서 이대로라면 학교에 지각하지 않을까 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온 거야.”
“그, 그렇지만...!”
당황한다. 하지만 곧 진정했는지 내 얼굴을 쳐다본다. 으으 얼굴이 기름기 봐라... 세수 좀 시켜야겠다.
“후. 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검은양의 일원으로써 책무에 지장이 가지 않게 도움주신 점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거실의 식탁으로 돌아갔다. 뒤에서 시간을 확인한 슬비의 비명이 들리긴 했지만, 이제부터는 뭐 알아서 준비하고 오겠지. 식탁 의자에 대충 걸터앉았다.
뭐, 여기까지 봤다면 지금 내 동생이 어떤 상황인지 알 것이다. 이슬비, 18세. 고등학교 2학년이다. 참고로 나는 이미 졸업하고 재수를 하는 중이다. 아무튼 슬비를 설명하자면... 그래, 중2병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자신을 검은양의 일원이라고 하며 말투며 성격이며 전부 이상하게 바꾸고 있다. 그래도 가끔 본래 성격과 말투가 나오기는 하지만 애초에 고2가 중2병에 걸려있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머리를 분홍색으로 염색하는 건 뭐냐고. 고등학교가 아무리 두발제제로부터 자유로워졌다지만 저건 너무하지 않아?
거실에서 슬비가 보였다. 허겁지겁 준비한 차림새가 보였다. 식탁에 식사가 차려져 있지만, 가방을 내려놓고 착석하지 않는다. 뭐야?
“어머니. 저의 등교시간과 식사시간, 그리고 지각시의 감수해야할 리스크를 비교분석한 결과, 오찬에 동석은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현재 시간으로 보아 즉시 등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면학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혹시 간편히 섭취할 수 있는 이동성과 휴대성이 용이한 식품이 있습니까?”
주절주절 잘도 그런 말투로 떠든다고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부러 한자 단어를 사용해가면서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피곤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오찬이 뭐야 오찬이. 그건 점심이고 지금은 아침이니 굳이 쓰려고 하면 조찬이 맞지. 아무튼 단어를 쓰려고 노력하다가 가끔 실수하는데 그게 웃겨서 가만히 놔뒀었다.
엄마가 미숫가루를 보여주자 아주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 장단에 맞춰주려면 미숫가루로는 만족을 못할 테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찬장에 넣어둔 식빵을 꺼내서 토스트기에 넣었다. 얼마 안 있어 튀어 오른 식빵에 잼을 발라서 슬비에게 건네주자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얼씨구, 방금까지만 해도 적어도 미숫가루는 아니라는 듯 망설이던 녀석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물 흐르듯 집을 나섰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가려는 찰나 엄마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얘, 오늘 마지막 원서접수 결과 나오는 날 아니니?”
“응. 오늘 오후 5시니까 나중에 슬비 바래다주면서 확인하려고.”
솔직히 재수를 한다고 했을 때는 결과가 나오는 날은 엄청 멀어보였었다. 하지만 막상 재수를 하다보니까 1년이 그렇게 멀지 않음을 알았고, 결국 오늘이 다가왔다. 수능 때도 긴장했지만 지금도 그에 준하게 긴장되었다.
방으로 돌아가서 잠시 침대에 누웠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원서를 접수할 때만 해도 가, 나, 다군 전부 상향지원해서 다 불합격되면 홀가분하게 군대나 가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례대로 두 곳이 불합격이 나오자,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오늘이 그 마지막 원서접수 결과가 나온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승하야. 슬비한테 연락해서 도시락 가져가라고 해.”
생각을 떨쳐냈다. 고민한다고 결정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미 내 손을 떠난 일. 나는 슬비에게 연락했다.
뚜루루- 뚜루루루-
달칵-
“어, 슬비야 도시...”
“현재, 이슬비 요원은 부재중이거나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참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결과가 이거였다. 다락방으로 가서 다시 전화를 거니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부러진 척은 다 하드만 도시락하고 휴대폰은 예외냐? 남의 방에 허락없이 들어 간 것에 약간의 미안한 느낌을 가지며 문을 열었다. 휴대폰을 먼저 찾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주변을 잠깐 살펴보니, 가로로 길쭉한 액자에 다섯 명의 모습이 보였다.
“코스프레 사진인가...”
다섯 명 전부 서로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하게 보이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뭐 어디엔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겠지. 특히 이 구석에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는 꼬맹이가 실존인물일 리가 없잖아. 분장이겠지. 일단 그 중 세 명은 나랑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툴툴거리지만 싹싹하게 행동하는 게임을 좋아하는 이세하랑 여러모로 굉장한 서유리. 나머지 한 명은 키 큰 아저씨인데 나도 별로 아는 게 없다.
주변에 수많은 노트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내 글씨체랑 비슷한 글씨가 적혀있는 노트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 법. 슬비의 노트를 살짝 확인했다.
“하아...”
이 녀석 뼛속까지 중2병인지 무슨 상세한 설정까지 적어두었다. 신서울? 칼바크 턱스? 위상력? 평범한 동생으로 남아주는 걸 원했는데 중2병이라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간과했다. 슬비의 설정상 자기는 외계인 비슷한 거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단체의 일원이란다. 노트는 그냥 덮어둬야겠다.
일단 휴대폰과 도시락을 챙겨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엄청 추워졌으니 든든하게 입고 나가야겠다. 옷장에서 하얀 털이 달린 검은색 외투를 꺼냈다.
“어라? 언제 실밥이 터졌지?”
외투 한쪽에 실밥이 터져있었다. 아끼던 외투라서 아쉬운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다시 사면되는 거니 걱정은 안했다. 작은 가방에 휴대폰과 도시락을 넣고 집을 나섰다. 나도 재작년까지 현역이었던 학교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하교시간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다.
휘이잉-
“으으...”
춥다. 얼른 전해주고 돌아와야겠다. 바람까지 불어 추위가 한층 더 심해졌다. 가까스로 한 발짝씩 걷고 있었다.
“어, 승하형!”
“아... 세하냐?”
뒤에서 세하가 크게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정말 수백 미터 밖에서 세하가 보였다. 저건 어떻게 난줄 한 번에 알아본 건지... 세하가 허겁지겁 달려오기에 가만히 기다려줬다.
“하아... 형. 무슨 일이에요? 밖에를 다 나오시고?”
“뭐야. 보자마자 시비냐?”
“아뇨! 저도 학교만 안다니면 형처럼 집에만 있고 싶은걸요.”
시비 다음에는 도발이냐? 그런데 이 녀석 얼굴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언제부터인가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면서 싹싹하게 행동하기에 자주 보더니 곧 친해졌다. 그리고 이 녀석이 슬비의 책상에 있던 액자 안의 이세하다. 게임을 너무 좋아해서 하교시간부터 새벽 2~3시까지 게임에 항상 접속해 있을 정도였다. 그거에 대한 결과가 지금 시간에 등교하는 거고.
“지금 9시가 다 되었는데 고등학생이 지금 등교냐?”
“대충 1교시만 안 늦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재수만 하지 마라. 아, 생각해보니 이 녀석을 이용 할 수 있겠다. 
“맞다. 슬비한테 휴대폰하고 도시락 좀 전해줄래?”
호불호가 확실하지만 믿을만한 녀석이니까 군말 없이 해주겠지. 게다가 슬비랑도 친하고. 나는 가방에서 도시락과 휴대폰을 꺼냈다.
“100골드로 하죠.”
역시 조건이 붙었다. 태연하게 보상으로 게임머니를 요구할 건 예상 했지만 가격이 너무 셌다.
“오, 오십 골드.”
그저께 무기 강화하면서 돈이 얼마 안 남았단 말이야. 그러자 세하가 빠르게 도시락과 휴대폰을 낚아채갔다.
“다음에도 이용해주세요.”
“그, 그래. 학교 지각할 텐데 빨리 가라.”
“넵. 추운데 들어가세요.”
“그래.”
후배가 아니고 친구였다면 그냥 50골드를 안 주는 방법도 있지만 후배라서 체면상 그러기도 애매했다. 날씨도 추운데 빨리 집에 들어가야겠다.

“다녀왔습니다.”
“일찍 왔네?”
“네.”
일단 방에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세하가 게임을 너무 좋아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시간까지 어울린 나도 뭐라 할 처지는 안 된다. 하지만 슬비가 몰래 자기 방에서 노트를 훔쳐 본 것을 알면 썩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얼른 가서 원래대로 정리하고 자야겠다.

똑, 똑-
노크소리에 눈을 뜨니 주변이 완전히 어두웠다. 휴대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32분.”
“승하야, 지금 진눈깨비 오고 있는데, 슬비 우산이 없다니까 가져다 줘.”
“하아... 네...”
눈을 비비적거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외투를 입고 자서 그대로 나갈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겨울에 비가 오는 것 보다 더 싫은 게 진눈깨비다. 평상시보다 몇 배로 추우며 기분도 몇 배로 나쁘다.
춥고 축축한 길을 지나 신강고등학교에 도착했다. 몇몇 애들을 제외하면 전부 하교한 듯 했다. 정문에서 잠시 기다리면서 슬비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야?”
다급한 목소리다. 우산이 그리도 급했냐.
“네 학교 정문이다.”
“위험하니까 당장 거기서 도망쳐요! 위상변곡률이 기이하게 증가하는 중이에요! 곧 학교에 차원종이 출몰할거에요!”
뭔 소리야 또. 자기 있는 곳으로 와 달라는 말인가? 번거로운 녀석.
“그래. 어디로 도망쳐줄까?”
“어디로든요!”
뭐야? 나보고 어쩌라고? 맞장구를 쳐줘야해?
“이, 이정도면... S급 이상?!”
“그래, 그래. 정문으로 오면 우산을 씌워주마. 끊는다.”
“잠...!”
툭-
귀찮게 추워 죽겠는데 말이야. 학교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바람이 불지는 않겠지... 바람을 피해 현관으로 들어왔다. 차원종이 어쩌고 위상변곡률이 어쩌고... 제발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으면 정신 좀 차려야 할 텐데 걱정이다.
“이건 또 뭐야. 학교에 저런 게 있어도 돼?”
사람 하반신만한 인형이다. 칼같이 생긴 무기를 하늘로 곧게 뻗고 있는 형상이었는데, 약간 위험해 보였다. 어찌되었든 학교에 어울리는 구조물은 아니었다.
심심해서 복도를 거닐고 있는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방금까지는 전부 하교한 줄 알았지만 교사나 수위도 없었다.
덜컹-
게다가 교실문도 열려있다. 어떤 여자가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상착의로 봐서 교사는 아닌 것 같았다. 여기저기 밖을 둘러보고 있었다.
“누굴 찾고 계시나 봐요?”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여태껏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일순 지워버리고 살며시 웃었다.
“아뇨, 찾았어요. 그쪽은 누구 찾아요?”
나는 그녀 옆으로 가서 창문을 통해 진눈깨비가 내리는 운동장을 바라봤다.
“찾는 다기보다는 기다리고 있죠. 동생을요.”
저 멀리 분홍머리가 보였다. 슬비다. 정문 앞에서 황급히 나를 찾았다. 진눈깨비를 우산 없이 맞고 있어서 자칫하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우연히 교실을 본 슬비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흔들었다. 슬비는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뭐 여기 있으면 안 되냐?
“안 돼!”
에... 마음을 읽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질감을 느꼈다.
푸욱-
“뭐, 뭐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자 현관 근처에서 본 그 인형이 있었다. 들고 있던 무기로 나를 공격했는지, 무기에는 피가 맺혀있었다.
“커헉.”
그 인형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공격해왔다. 방어수단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의외로 힘이 약한지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상처가 늘어나고 피가 흘렀다.
퍽-
“케르륵!”
단검이 날아와서 그 인형의 머리에 박혔다. 한 순간에 절명한 듯 그대로 쓰러졌다.
“오, 오빠. 괜찮아?”
시야가 흐릿해졌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중상이라 불릴만한 상처가 많아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뒤따라서 세하가 도착했다.
“쿨럭, 슬비야...”
“응.”
“나는... 인정 못한다...”
슬비가 아깝지. 저런 게임 폐인한테 동생을 내줄 순 없다. 울고 있는 슬비를 보자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팔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젠... 장... 죽는 건가...’
솔직히 뭐 하나도 이해가 가는 게 없다. 나를 공격한 인형이며, 어마어마한 힘으로 두개골에 깊숙이 단검을 박은 것과... 옆에 있던 여성이 나를 쳐다보면서 무언가를 내 손에 쥐어줬다. USB만한 장치에 버튼과 작은 디스플레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세하나 슬비를 봐도 이 여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작은 디스플레이에는 카운트다운이 있었고 나는 무심결에 버튼을 눌렀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 다가 곧 의식을 잃었다.

“...야!”
몸에 피로가 누적되어서 움직이기가 힘들다. 나는 어떻게 된 걸까?
“승하야!”
날카로운 엄마의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어, 엄마?”
“얘가 식탁에서 자고 있네. 또 밤새 게임했지? 빨리 올라가서 슬비 깨워서 밥 먹여.”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어지럽다. 그건 꿈이었나? 일단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식탁에 손을 얹자 손에 무언가 잡혀있었다.
“이, 이건...”
학교의 그 여자가 준 장치다. 꿈이... 아니었어?
“승하야. 오늘 원서접수 마지막 결과 나오는 날이지?”

일단 슬비를 학교에 보냈다. 보내기 전에 내가 도시락과 휴대폰을 챙겨 보냈기 때문에 이번에는 가져다 줄 일이 없을 것이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같은 날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몇 시간 이전으로 이동 된 것. 이상한 인형과 나밖에 안 보이는 여자. 뒤로 돌아간 시간. 여태까지 슬비의 말을 중2병으로 치부하여 무시했지만, 지금 기댈 수 있는 정보는 슬비의 그 이상한 설정이 전부였다. 슬비의 방으로 들어가 모든 노트를 뒤졌다.
“아...”
내 글씨체 같은 글씨로 적혀있는 노트를 다시 발견했다. 방금 시간여행을 경험했다. 하나 떠오르는 가설은 이 노트는 혹시 내가 직접 적어놓고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닐까? 일단 노트를 들춰보았다.

「 11월, 13일.
기이한 현상이다. 며칠 전 거대한 차원문이 열려 현장에 파견되었지만, 차원종이 한 마리도 출현하지 않았다. 결국 차원문은 닫혔지만 무언가 불안함만이 남아있었다. 정신적으로 피곤해져서 그런지 온몸이 무거웠다.」

팔락-

「 11월, 19일.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검은양 팀의 발족 이후로 첫 A급 차원종 격퇴에 성공했다. 원래대로 작전구역이라 사진 찍는 걸 금지했지만, 검은양 팀에게 들키지 않도록 자세를 잡게 하고 찍었다. 슬비. 자랑스러운 여동생이다. 딱딱한 척 하지만 인간적인 아이다.」

분명히 나의 시점이었다. 내 가설이 맞아 떨어졌다. 어떤 이유로 인해 나는 기억을 잃었고, 이 일기는 슬비가 보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테이블에 있는 사진도 내가 찍은 것인 듯 했다. 약간 딴청을 피우는 듯 보였던 사진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 11월, 22일.
요새 들어 부쩍 몸이 안 좋아 진 것을 느꼈다. 병원에 가보았지만 단순한 피로누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근래에는 출동도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팔락-

「 11월, 25일.
오늘 테스트 결과가 나왔다. 차원종에 의한 감염이라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출동을 자주 다녔으니 이런 일이 생길 법도 하지...」

「 11월, 27일.
의사 말로는 이 상태라면 며칠 이내에 사망 할 수 있다고 한다. 절망적인 소식이었지만 왠지 그리 참담한 기분은 아니었다.」

기운이 없었는지 점점 글이 짧아졌고, 글씨체도 점점 떨렸다.
팔락-

「 11월, 29일.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설명하기를 몇 주 전의 거대한 차원문에서 통과한건 자기 자신이었고, 나의 위상력을 흡수하여 성장했다고 한다. 어이없다. 내 위상력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기력마저 부족하다. 저 여자가 죽도록 원망스럽다. 지금도 내가 일기를 쓰는 와중에도 지켜보고 있는 저 여자가.」

팔락-

「 11월, 31일.
몸에 기운이 없지만, 왠지 그녀와 함께라면 안정이 되었다. 나의 모든 것을 인정해주었다. 이 이틀간 그녀는 나에게 정말 헌신적이었고, 그녀를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팔락-
“마지막 장인가...”
나는 노트를 덮었다. 확실히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는 시점에서 판단을 내리는 건 무리가 있다.
툭-
노트를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으려는데, 노트 사이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선임 요원 이승하」
나도 요원이었었나... 자조적인 기분이 되었다. 항상 슬비를 중2병 취급한 내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니... 슬비가 중2병이 아닌 내가 문제가 있었던 건가... 슬비의 노트를 집어서 슬비가 기록해둔 정보를 찬찬히 읽어나갔다.

시간이 되자, 나는 밖을 나가기 위해 외투를 찾았다. 검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서자, 저번 때와 같이 등교하는 세하를 볼 수 있었다.
“세하야!”
“어? 형! 안녕하세요.”
아무 일 없이 나를 반긴다. 이 녀석이 슬비랑 붙어 다니는 주제에 서유리라는 여자애도 끼고 있어서 괘씸하지만, 지금은 다른 목적이 있다.
“혹시 검은양이라고 알아?”
움찔-
“아, 그거요? 슬비가 매일 떠들고 다니는데 무슨 단체라던데요?”
시치미를 뗀다. 방금 잠시 동안의 머뭇거림으로 확신이 생겼다.
“그래. 이 코트는 이만 돌려줘야겠지?”
“... 기억이 돌아 오셨나요?”
세하가 내 눈치를 살핀다. 한번 떠보는 것인가?
“아니. 내가 그전에 썼던 일기를 봤을 뿐이야. 덤으로 슬비의 작전 기록 같은 것도 살폈지.”
“...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현재로써는 차원종이 출몰하지 않은지 한참 되어서, 검은양 팀도 무기한 대기명령을 받았거든요.”
역시 이 외투는 세하의 외투였다. 아마도 차원종과 전투를 하는 요원들에게 지급된 장비여서 차원종에 대한 공격에 면역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 수준이 되어버린 내가 학교에서 그 차원종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언제부터 차원종이 출몰하지 않았지?”
“음... 아마 11월 19일 이후였어요. 그때 엄청난 차원종을 처치하고 난 뒤로 정말 한 마리의 차원종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11월 19일. 사진을 찍었을 당시였다. 그게 마지막 차원종이었나보다.
“11월 13일에. 그 거대한 차원문에 대해서 기억나는 거 있으면 설명 해줄래?”
“기억나는 게 왜 없겠어요. 그 불길한 기운이 넘실넘실 눈으로도 보일만큼 확실했는데, 저희 팀이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사라졌었어요. 덕분에 여기저기 난리였었고요.”
정확히는 내가 다가가자마자였겠지. 한 가지 분명한 건 일기 후반부의 그 여자에 대한 정보는 사실인 것 같다. 그 때 내 몸에서 기생하기 시작하여 몇 주간을 잠복했던 거군.
“고마워. 나중에 또 보자.”
“예, 형도요.”
세하를 보냈다. 앞으로 위상변곡률이 급상승할 시간은 대략 7시간 남았다. 내 생각에는 내게 시간을 되돌리는 장치를 준 그 여자가 핵심 키가 될 것이고, 아마도 나에게 기생한 차원종은 그녀임이 틀림없다. 그녀와의 만남을 이 시간 동안에 대비를 해야겠다.


대략적인 정보는 전부 파악했다. 기본적으로는 내 기억이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내 기억을 추리해 간다는 게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다. 기록을 뒤지던 중 송은이라는 인물을 찾을 수 있었다. 소재를 파악해 경찰서로 찾아가봤지만, 기록된 성격대로 땡땡이를 치고 있어서 서 안의 누구도 그녀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그녀와는 다르게 제한시간이 있는 나로서는 그녀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 할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올 때만 해도 주변이 어두워지고 점점 머리 위로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 안을 살폈다. 구석에서 이상한 노트가 보였다.

「 위상력을 이용한 시간여행
위상력으로 인한 시간여행에 성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첫째, 위상력을 사용하지만 위상능력자는 사용 할 수 없다. 위상능력자의 체내의 위상력이 기계의 작동을 방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기계는 시간여행의 영향을 받지 않아, 의식만이 과거로 돌아오는 것이지만, 같이 전송되는 듯 했다.
셋째, 되돌리는 시간은 한정되어있다. 하루 이상의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추후에 개량될 여지가 있다.
넷째, 이 부분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기억의 손실이 발생하는 것 같다. 기계에 글씨를 적으며 흠집을 내어 놓아, 과거의 나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흠집이 2개 단위로 특이한 표시가 나 있다. 이 이유를 생각할 차례인 것 같다.」

시간이 다가왔다. 신강고등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내리는 진눈깨비에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전에 도착했을 때에 비하면 이른 시간이지만, 이미 사람의 기척도 없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긴장되었다. 여지없이 내가 인형이라고 생각했던 차원종이 복도에 떡 하니 서 있었다. 무시하고 예의 그 교실을 들어가니 그 여자가 서 있었다.
“당신. 나랑 구면이지?”
“어머, 여기저기 바쁘구나 생각은 했는데, 기억을 찾고 다니신 거예요?”
눈치를 채고 있었나? 정확했다. 이 여자는 기록 속에서 나의 차원력을 흡수하여 기생한 그 차원종이다. 아마 전에 슬비가 했던 말과 기록을 대비해보자면 이 여자는 S급 이상이라는 소리다.
“그러면 그 전처럼 같이 살 수 있는 거예요? 기뻐라...”
기록대로 나에게 헌신적인 태도를 보인다. 나에게 다가와서는 끌어안았다. 소름이 끼쳤다. 나는 급히 여자를 떨쳐냈다.
“왜, 왜 그래요?”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장난치면 기분이 좋나?”
움찔-
“... 어떻게 알았죠?”
눈치를 살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인했다.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행세를 하더니 나를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나.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는 건 가능하지만 기억을 조작하는 건 가능하지. 그렇지?”
“...”
침묵을 유지한다.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내 일기에서 많은 정보가 있었지. 일기의 맨 마지막 페이지. 바로 그 전에 쓴 일기는 죽일 듯이 증오했으면서 며칠 뒤에 용서를 하는 거지? 만에 하나 정말로 너의 헌신에 감동받아 그렇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어.”
“... 무슨 실수요?”
“상식이지. 11월에는 31일이 없어. 멍청아.”
“이익!”
뭐야. 반응이 귀여운 걸? 멍청이라는 단어에 이렇게 발끈할 줄은 솔직히 몰랐다.
“흠, 흠. 그리고 결정적인 건 어머니의 존재야.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던가, 어디로 사라졌다는 기억 같은 건 전혀 없는데 왠지 어머니 혼자 계신 것이 익숙한 느낌이었어. 게다가 어머니라고 인식할 뿐 분명히 오늘 본 어머니의 얼굴이 안개가 낀 것처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그 사람은 누구지? 어머니는 어디에 있지?”
“풋.”
웃는다. 잠시 낄낄거리더니 작게 한숨을 뱉더니 고개를 든다. 여태까지의 순종적인 얼굴은 어디가고 표독스러운 얼굴만이 남았다.
“하! 여기까지 와서 그런 소리라니...”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손을 때자 거기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마치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듯 누구인지 인식을 하지만 정확히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승하야. 슬비 깨워서 밥 먹여.”
다른 누군가가 대신일 줄 알았지만 그게 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농락당해 온 것인가? 속이 답답하다. 저 여자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감정이 넘실거렸다.
“엄마를 치려고?”
손에 힘이 풀렸다. 저 쪽은 S급의 차원종. 어느 면에서도 내가 이길 방법은 없다.
털썩-
“젠... 장...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의 무력함에 치가 떨렸다. 좌절감에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옆에서 그 여자가 걸어오더니 정면에 마주 앉았다.
“나, 정말 승하오빠가 좋아요. 하지만 그 전에는 매일같이 욕하고 마주하지도 않았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증오 받는 기분을... 알아? 오빠가 그걸 아냐고? 매분 매초마다 나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어. 그래서 가족으로써 오빠랑 지내고 싶었어. 그리고 아버지... 라고 했지? 아버지가 없어진 기억은 내가 한 게 아니야. 그 분이 바로 시간을 넘는 기계를 만들었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프로토타입이라서 제한이 있지만, 오빠가 가진 건 완성품이라 제한 없이 사용이 가능할거야. 시행착오가 엄청 많았다고 하거든. 그래서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뿐이지, 찾으려면 찾을 수 있어.”
내가 가지고 있는 기계.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는 건 알았지만, 또 하나의 장치가 있는 건 몰랐다. 게다가 아버지가 이 기계의 발명자라니...
“그래... 이 엄청난 흠집을 보면 그런 것 같네.”
“응? 그게 무슨 소리에요?”
고개를 갸웃거린다. 진정했는지 다시 존댓말로 돌아왔다.
“아무튼. 두 번 단위로 흠집이 표시가 다르다는 기록과 기억의 손실의 경우를 볼 때 두 번마다 기억의 손실이 생기는 거지?”
그녀는 곧 내 말에 대답했다.
“네. 정확히 말하자면 손실이라기보다는 초기화가 맞아요. 원래 과거에는 가지고 있으면 안 될 기억들이 소거되는 것뿐이니까요.”
그거 과거로 가는 의미가 없잖아.
쿠당탕-
문을 박살나며 복도에 있던 차원종이 교실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형! 괜찮아요! 여긴 위험하니 빠져 나오셔야해요!”
세하였다. 나를 구하러 온 건가? 딱히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방해하지 마!”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세하를 방어막을 쳐서 튕겨 보냈다. 그녀의 존재를 몰랐는지 얼떨결에 튕겨나간 세하는 교실 벽에 강하게 머리를 박았다.
쾅-
“모, 몸이 움직이질...”
그 사이 세하가 맨 처음에 날려 보낸 차원종이 칼을 들었다. 저번에 직접 당해보니 잠깐 시간을 있을 것이다. 내가 달려 나가면...
서걱-
세하의 몸이 깊숙이 베였다. 딱 봐도 치명상에 길게 살아남기는 힘들어 보였다. 세하는 여자를 노려보며 겨우겨우 말을 뱉었다.
“너, 넌... 유하나... 도대체 왜...”
세하가 다친 건 전부... 다... 나 때문이다. 과거로 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겠어. 나는 시간여행 기계에 흠집을 내고 버튼을 눌렀다. 전에 없던 충격이 온 몸에 전해졌다.
“아... 아아악!”
창문 밖의 날이 점점 밝아지려 한다. 나는 서둘러 외투에 표식을 남기려고 했으나 손아귀의 힘으로는 겨우 실밥 몇 올 뜯는 게 전부였다. 이 외투를 무슨 일이 있어도 세하에게 넘겨줘야만 한다. 기억을 읽게 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억을 잃은 내가 눈치 챘으면 하는 마음으로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변해간다. 모든 것이 뒤섞이는 중에 그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
정말 티 없이 해맑은 웃음이었다.



밤새 세하랑 어울려 게임을 하느라 몸이 말이 아니다. 고등학생인 동생 때문에 아침을 일찍 먹는 우리 가족의 스케줄에 맞춰 아침을 먹어야 했기에 흐느적거리면서 식탁 의자에 걸터앉았다. 엄마가 내 외투를 세탁기에 넣는 모습을 봤다. 음. 세탁을 할 때가 됐긴 했지. 세탁기에 외투를 넣고 난 엄마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아주 평온한 웃음을 보냈다.
“승하야, 가서 동생 좀 깨워. 밥 먹여서 학교 보내야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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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부작으로 기획한 소설을 한편에 넣었습니다.
2024-10-24 22:21:3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