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세하의 위상력 -18-
이케아라 2015-08-08 5
유니온에서 개발한 큐브 안에서, 차원 종이 된 이 세하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은 죄다 부수고 죽여 버리면 돼... 귀찮은 일만 떠넘기는 더러운 어른들도 모두 다 죽일 수 있어..."
"부수고 죽이는 것이 이렇게 재밌는 건 줄 알았으면 게임 따윈 진작에 관둬버리고, 더 일찍 차원종이 되는 거였는데 말이야..."
그때 세하(인간)는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녀석이 불길한 소리를 해댔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놈을 처치해버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한 말들이 상당히 매력적인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으아악!!!"
"사람 살...! 크억!"
수많은 박사들이 체면을 집어던진 채 꼴사나운 모습으로 이리 저리 도망을 다니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두뇌를 가진 천재들이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인상을 찌푸릴만큼 추한 모습을 보이자, 세하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의 미소가 점점 짙어지고 있는걸 느낄 수있었다.
"풉...!"
폐부에서 올라오는 웃음을 억지로 막으며 오른 손에 들려있는 무기를 휘두른다.
해일처럼 휘몰아치는 거대한 화염덩어리가 도망치던 연구원들을 순식간에 일소(一掃)시키고, 시야에 포함 돼있던 모든 시설들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만약 평범한 불꽃을 쏴댔더라면 이렇게까지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었을 것이다.
유니온 본부의 비밀 실험실이 평범한 화재 따위에 파괴될 정도로 허약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쓰고 있는 정체불명의 무기와, 원래부터 방어를 무시하는 세하의 위상력 특성이 깔끔한 파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검 진짜 대단한데? ...어쩌다 손에 넣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하는 자신을 감금해둔 유니온을 징벌하기위해 어떻게든 쇠사슬을 녹여서 빠져나온 것까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에 정신이 들었을 땐 이런 무기가 손에 들려있었다. 순수하게 검의 형태만을 지니고 있었지만, 건블레이드처럼 굳이 방아쇠를 잡아당기지 않아도 위상력을 발사할 수있었고, 오히려 전에 쓰던 무기보다 훨씬 다루기가 쉬워서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손에서 파란색 위상력을 내뿜으며 위력을 과시하는 무기를 잠시 집어넣고, 세하는 자신의 손으로 일구어놓은 광경을 느긋이 감상했다.
"이거 참... 묘한 기분이네."
사람의 형태는 온 데 간 데 없고 새까만 재만이 먼지처럼 흩날리고, 곳곳에 푸른 화염이 유니온의 시설들을 파괴해가고 있다.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도 벌레를 죽이는 것만도 못한 죄책감이 들고 오히려 게임에서 승리할 때 느끼는 감정보다 달콤한 쾌감이 뇌리를 휘저어댔다. 지금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이 감각이 너무나도 감미로워서... 세하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커다란 웃음을 내뱉었다
"크흡...! 크흐흐흑!! 크하하하하하하!!"
사지(四肢) 끝에서부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를, 뚜렷하고 선명하게 의식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들과 앞으로 살게 될 인생을 통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을것 같은 행복감.
이 세하라는 인물은 지금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확고하게 인식하며, 통쾌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숨이 막히도록 마구 흘려대고 있었다.
"크핫, 크하하학!! 하하하.... 쳇, 갑자기 기분이 확 가라앉네."
오랫동안 행복에 겨워 기쁨을 표출하고 있던 도중, 마치 실이 끊어진 것처럼 감정이 억제됐다. 마치 감정을 담당하고 있는 뇌의 일부분을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행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에 아쉬워하며 세하는 자신의 감정에 깃 들린 위화감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기분이 복잡하게 바뀌는 거지?"
확실히 자신은 유니온의 계획을 막기 위해 손목에 걸려있던 사슬을 녹여 십자가에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어떻게 위상력을 되찾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후엔 냉정한 기분으로 유니온 본부를 배회했고 갑자기 나타난 무기를 손에 든 채 학살을 감행했을 때 터무니없는 행복감을 느끼게 됐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지금까지 느꼈던 기분들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진 상태다.
다중인격자의 감정도 이정도로 복잡하진 않을 것이다.
세하는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고민했지만, 그것도 결국 찰나에 불과했다. 손에 들려있는 무기를 가볍게 휘두르며 세하는 간단하게 자기 몸을 풀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난 내 할일이나 해야지. 차원 문을 닫으려면... 억제기를 다시 기동시켜야 되나?"
애초에 자신이 이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건 유니온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사슬을 풀었으며, 전부 빼앗겼을 터인 위상력이 이전보다 강하게 몸에 남아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높으신 분들의 더러운 계획을 막아서 차원종의 침공을 저지해야 되니까.
'도중에 살인을 저지르긴 했지만'
티끌만큼 남아있는 양심의 가책이 세하의 행동을 지적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무시하기로 했다.
"에휴... 억제기가 게임기도 아니고 버튼하나로 쉽게 작동될 만큼 간편한 기계일리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아무리 세하가 유니온 소속의 공무원이라고 해도 위상력 억제기같이 복잡한 기계를 다룰 수있는건 아니다.
세하의 직업은 엄밀히 말하면 클로저(위상능력자)이고, 그런 클로저의 임무는 차원종의 섬멸이 대부분이니까. 아마 세하혼자서는 이번 사태를 막기 어려울 것이다.
세하가 답답한 심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에 빠져있었을 때, 미세한 소음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웃!"
세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검을 휘둘렀다.
초열의 화염이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을 불태우고, 그걸 로도 모자라 그 궤도에 포함 돼있던 풍경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무심결에 휘두른 탓에 힘 조절을 못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실험실의 반 이상을 궤멸시켜버린 세하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연기 때문에 앞이..."
매캐한 연기가 주변에 자욱하게 껴있어서 전후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환경에 오래 있다간 연기를 들이마시게 되서 생명이 위험할 테지만, 라움의 위상력을 받은 세하에게 이런 연기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연기 안을 노려본 세하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찾았다...!"
세하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 행동으로 인해 타버린 손목에 피가 왈칵 튀어나왔지만 눈앞의 적을 죽일 수있다는 흥분에 통각이 마비됐다.
정신의 혼란을 겪고 있는 세하에게 강렬한 살의를 불러일으킨 인물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려** 말라고 부탁한지 1시간도채 되지 않았는데... 자넨 의외로 기억력이 안 좋은 것 같아. 이 세하군."
혼자서 A급 차원종과 대적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유니온 본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절대적인 요원이자,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사태를 초래한 남자, 제임스 로빈이 자신의 무기인 활을 들고 세하를 도발해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역시 아저씬 대단한 사람이네요."
세하도 쓴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무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응수해왔다.
제임스 로빈은 차원전쟁시절부터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무수한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 클로저다.
아마 실력으로만 따지면 틀림없이 S급 클로저라는 직함에 걸맞을 테지. 하지만 세하는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힘에 자신을 가져본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마침 잘 오셨어요. 어떻게 하면 위상력 억제기를 작동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사건의 주모자인 당신을 죽여 패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어른에게 폭력을 휘두르려는 겐가. 내가 어릴 때 만해도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며 명성이 자자했는데 말이야. 세월이 지나면 자네 같은 변절자도 나타나는 법이군."
시대의 변화를 안타깝게 여기는 노인처럼 한숨을 푹 쉰 제임스는 자기 몸의 위상력을 개방시켜 일시적인 각성상태에 돌입했고, 세하도 진지한 자세로 검을 고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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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력에 각성한 위상능력자들은 십중팔구 전투능력을 손에 넣는다.
왜냐하면 차원종이라는 생물 자체가 파괴에 특화되어 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종류의 힘을 얻은 인간들도 차원종과 마찬가지로 파괴적인 힘을 얻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상능력자는 차원종이라는 재앙을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류이며, 그와 동시에 같은 인간에게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불리는 불행한 존재다.
그런 차별받는 초능력자 중에서도 이례적인 케이스로 정신계 능력을 갖고 있는 유니온의 클로저 오 세린은 등을 괴롭히는 차가운 감촉에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으음... 어라?"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세린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난생 처음 보는 곳에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있었기 때문이다.
수 십 미터는 될법한 너비를 지닌 이 공간엔 약 100여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심각한 중상을 입은 채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은 상태로 쓰러져있거나,
그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나마 부상이 적은 인물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간호를 하고 있었다.
세린은 갑자기 바뀌어버린 주변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간호하고 있던 사람에게 달려가 말했다.
"저기...!"
"아! 일어나셨군요! 일단 이걸 받으세요!"
"에?"
주황색 머리를 뒤로 넘긴 여자요원이 세린을 보자마자 들고 있던 수건을 넘겨줬다.
수건이라곤 해도 옷을 찢어서 만든 조잡한 것에 불과했지만.
"일단 상황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다른 분들의 상처를 그 옷으로 막아주세요. 이 이상 출혈을 방치해두면 사망자가 속출할겁니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에 있는 요원들은 대부분 심각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환자들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창고에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치료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입고 있는 옷을 상처부위에 말아서 출혈을 막고 있던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진지한 눈빛으로 명령을 내린 요원을 보고 세린은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죽어가는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세린이 누워있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움직이려고 했을 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세린양?"
세린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인물을 바라봤다.
척 보기에도 거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큰 덩치와 빨간 피가 잔뜩 묻어있는 검은색 정장이 인상적인 중년의 남성이었다.
너무나도 낯이 익은 그의 모습에 세린이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니엘... 아저씨...!"
그녀의 앞에 있었던건 테러리스트들의 총격으로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다니엘이었다.
"흐끅...다행이에요...! 전 아저씨가 죽은 줄 알고...! 끄윽...!"
세린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막아가며 기쁨을 표출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과다출혈을 일으키며 죽어갔었는데, 가까스로 살아남아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으니 감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상당히 엽기적인 모습으로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세린을 보고 다니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중상자들을 치료하는 데에 집중하도록 하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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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ㅏ... 요즘 불면증이라 소설을 많이 못썼네요...
전투씬을 써넣으려고 했지만 그건 다음편에...(머쓱)
세하의 말과 독백은 라움의 정체를 유추할 수있는 일종의 떡밥입니다만... 애초에 이름이 라움인 시점에서 정체를 다 까발린거나 다름없더라고요. 그럼 다음편은 저도 만족할 수있을만한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근데 팬소설에 올라와있는 인기 소설들을 보면 여러분은 가벼운 스토리를 좋아하는것 같네요.
전 덕후인 주제에 덕스러운 이야기는 항마력이 적어서 못쓰는데...ㅠ (하렘러브코미디같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