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꾼과 환영경계의 우로보로스 - 프롤로그 (4)

서진권 2014-12-30 2

작은 맥박 소리가 소녀의 몸을 감싼 대기의 일그러진 피안(彼岸)을 넘어 제이를 향해 들려온다. 이를 악 문 소녀의 핏발 선 눈동자를 선글라스의 주홍색 세상으로 겹쳐보니 익숙한 과거가 낮선 현재가 되어 그의 앞에 서 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밑에 새겨져 있을 혈관과, 그것을 타고 흐를 붉은 피의 대하(大河), 생명의 강을 떠올렸다. 

한 겨울 새벽녘의 하늘보다 고요하고 짙푸른 소녀의 눈동자 깊숙히 억겁의 생명을 각자 짊어 진 적혈구의 거대한 흐름이 차디찬 안광이 되어 폭포의 비명소리같이 요동친다.

제이는 잠시 자신의 손 끝 을 내려다보다 이내 시선을 옮겨 멀찍이 서 있는 데이비드를 바라보았다. 거의 어둠에 속에 파묻힌 그를 제대로 볼 방법은 없다. 자신의 눈에 비친 주홍빛 어둠 속에서 저 남자는 과연 어떤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슬비 훈련생! 당장 멈춰요, 감시관 명령입니다!”

머뭇거리던 김유정 감시관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그녀를 제지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독기가 바싹 오른 소녀에겐 그저 공염불에 불과했다. 

소녀의 입술에 맺힌 피 한 방울이 일순 저 혼자 다른 별에서 온 듯, 아주 천천히 떨어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이는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피 한 방울과 제이만이 일순 다른 시간, 다른 차원으로 떨어졌다. 일 억 만 분의 찰나가 영원히 길게 이어지는 느낌이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소녀 자신도 미처 ** 못 한 파열을 제이는 이 세상과 동떨어진 시간의 틈새에 선 채 혼자 외롭게 관측했다.

온갖 오물이 뒤섞인 눈밭 위로 어린 소녀의 생명이 빠알간 핏방울이 되어 보드라운 입술 끝 에서 추락하며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목격했을 때, 제이는 문득 생각했다. 만일 자신이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나는 눈 앞 의 소녀를 지금 이 시간대에서 분리시킨 다음 또 다른 그녀를 데려 와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세워 둘 것이다.

그리고 소녀의 눈 속 깊은 심연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을 것이다. 

부서진 것 들 을 되돌릴 수 있냐고. 

그렇지 못하다면 너는 그것들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 있겠냐고.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릴 적 자전거 페달을 반대로 밟으며 놀던 그 때가 왜 떠올랐는지, 제이로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시원스레 감기던 체인 소리가 무언가에 걸리듯 귓전 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눈을 뜨자 그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리 뛰어난 표현방법은 아니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흐린 하늘을 뚫고 간신히 빛나던 별 빛 하나가 그에게 10 광년 만 큼 가까워졌다 다시금 멀어졌다. 통증과 함께 입에서 비릿한 향취가 이상한 짐승의 소리와 같이 흘러나왔다.

위상력의 감각을 그는 정말 한참동안 잊고 있었다. 그건 구역질이 나올 만큼 친근하고 심해어만큼 낮 설다. 주홍빛 세상에 크레바스가 몇 줄 그어져 있었다. 떨리는 손이 그 스스로도 모르게 선글라스를 벗긴다.

제이는 땅에 대(大) 자로 누워 소녀를 간신히 올려다보았다. 소녀는 처음 봤을 때의 얼굴을 한 채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름이 이슬비라고 그랬나? 강하지만 이름만큼 가냘프고 위태로운 여자다. 그녀의 입술 끝자락에 핏자국이 가로로 섬뜩하게 번져있었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지던 지루한 놀이가 단 한 번에 역전패가 되어버렸다. 위상력 제한을 해제 한 능력자에게 맨 몸으로 맞서다니,스스로 생각해도 ** 짓이다. 어째서일까? 그에게서 위상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위상력 쯤 이야 아직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비폭력주의자 처럼 소녀의 공격을 맨 몸으로 맞을 생각도 없었다. 그저 아까처럼 적당히 주먹을 날려 소녀의 얼굴을 땅바닥에 쳐 박으면 되는 일 이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선택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의 선택인가? 아니면 내 안의 또 다른 누군가의 의지인가? 어쩌면 그것은 소녀의 떨어지는 핏방울 속에서 본 나 자신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정은 양 손 으로 입을 가린 채 말을 잇지 못하며 서 있다. 소녀가 저지른 짓을 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경악감에 ** 듯이 떨리는 눈가 아래로 눈물이 작게 맺혀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초짜라는 거다, 젊은 감시관.

네가 보기엔 소녀가 단지 말 잘 듣는 귀여운 **고양이로만 보였겠지, 하지만 틀렸어. 당신은 그저 호랑이**에게 방울만 달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저 여린 소녀의 입가에 사납게 솟은 송곳니가 번득이는 것이 보이지 않아? 

우린 모두가 닮은 꼴 이다. 결국 무언가를 물어뜯으며 살 수 밖에 없어, 그것이 타인의 생명이던 혹은 스스로의 살덩이 이건 간에.

위상능력자가 된 그 순간부터 우린 모두 야수가 된다.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심장 속에 돋아난 이빨은 죽을 때 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따금 씩 그들의 가슴을 뚫고 나와 핏방울을 뿌리며 그들의 생명을 불태우도록 만든다.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그들에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가지 뿐 이다. 이빨을 드러내며 살 것 인지 혹은 숨기며 살 것 인 지. 물론 주변을 불태우며 죽느냐와 스스로를 먹어치우며 죽느냐의 차이 밖에는 없다.

결국 위상능력자 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스스로의 능력에 잠식되는 길 뿐 이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리. 아니, 이준성.

“어린 맹수에게 물어뜯긴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의 속마음을 마치 읽기라 도 한 듯, 데이비드가 어느 새 곁에 다가와 말했다. 제이는 아무 말 없이 누워 입가에 흐른 핏줄기를 천천히 핥았다. 차가운 냉기가 뼈를 뚫고 골수에 서린다.

“선글라스가 부서졌군요.”

그의 말에, 제이는 어눌한 손짓으로 눈가를 더듬는다. 정말이다. 항상 허공에 떠 있는 듯 나른하게 보이던 세상이 자기 색을 찾고 있다. 원래대로의 색으로 세상을 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하지만 그 쪽이 당신에겐 훨씬 잘 어울립니다.”

“더 이상 지껄이면 죽이겠다.”

“당신은 언제나 말 뿐이군요. 예나 지금이나.”

데이비드는 작게 실소를 내뱉으며 말했다.

“제가 이겼습니다, 이제 얌전히 따라 오시겠습니까?”

“그냥 죽여라.”

데이비드의 제안에도 제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담담한 말투로 대답하며, 하늘의 별 한 점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 이었다. 데이비드는 긴 침묵 끝에 안경을 올려 쓰며

“선배에게 상상 이상으로 실망했습니다. 이 수준이라면 당신을 데려가던 그렇지 않던 간에 별 의미 따윈 없겠군요.” 하고 차갑게 식은 눈으로 제이를 깔아보았다.

헛웃음만 터져 나온다. 결국 이번 일 도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갑자기 찾아와서 내가 필요하다 어쩌다 멋대로 떠들더니 이런 식으로 나를 깔아뭉개고 자기들 멋대로 떠들다 휑하니 떠나버리겠단다. 하지만 너희가 나에 대해 뭘 아나? 너희 유니온 놈들은 정말 아무것도 변 한 것이 없다. 그럼 잘난 네 놈들이 한 번 대답해봐라! 내 인생은 도대체 뭐였나? 난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내 인생은 스스로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속이다 스스로에게 버림받은 것 뿐 이었다. 그것이 나의 인생 이었단 말인가? 

참을 수 없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죠.”

데이비드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유정의 뇌리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유정은 벌어진 입을 차마 다물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녀도 마찬가지다. 상상 외의 명령에 소녀의 입술이 빙어**처럼 뻐끔거렸다.

“국장님, 그건 엄연한 명령 위반입니다! 이 남자는 어쨌든 엄연한 민간인.......”

“인류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불응 한 탈주범일 뿐 이다. 죽음으로 갚아주도록.”

“국장님, 전, 그런 거........”

“슬비야, 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국장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건 너무 이상.......”

“명령이다. 그리고 폐허가 된 선배에 대한 후배로서의 마지막 예의이기도 하고.”

“이 남자는 아직 군인이 아니에요, 아직 민간인 일 뿐 입니다! 제발요, 전 그런 명령 못 내립니다! 당장 철회 해 주십시오!”

“그래? 자네가 못하겠다면 그럼 내가 직접 하도록 하지. 이슬비 훈련생, 국장 권한으로 직접 명령한다. 탈주범을 사살하도록.”

그의 말에 소녀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 굳는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제이를 향해 반원을 그렸던 치명적인 칼날이 당장에라도 바닥에 떨어질 듯 소녀의 작은 손 안에서 번민하고 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던 그녀의 눈이 이제는 마치 길가에서 죽어가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처럼 변해있다.

“.......죄송합니다, 그 명령은 도저히 따를 수 없습니다.”

죄인처럼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혼자서는 못하겠나? 그렇다면 도와주도록 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이비드는 성큼성큼 슬비에게 다가갔다. 자신보다 키가 월등히 큰 남자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다가오자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에 이름없는 괴물처름 드리운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저항하려 해보았지만 이미 늦은 뒤 였다. 성인 남자의 위압적인 손길이 소녀의 가냘픈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다시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주겠다.”

데이비드가 슬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한 마디에 소녀의 낯빛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속으로 절규하며 슬비는 자신의 담당관을 절망스럽게 쳐다본다. 

당장에라도 뛰어 가 저 남자를 슬비에게서 뜯어내야 한다고 유정의 마음이 머릿속에서 절박하게 외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한 번 주저앉은 그녀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볼썽사납게 주저앉아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물만을 흘리고 있을 뿐 이었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 라고 속으로 외쳐**만 아무런 의미 없는 메아리만 들려올 뿐 이다.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데. 하고 세상을 원망해 보았지만 대답 대신 들려온 것은 어린 소녀의 부질없는 비명소리 뿐 이다. 

유정은 절망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귀를 틀어막았다. 제발 부탁이니 누가 좀 저를, 저 아이를 도와주세요! 하지만 그녀를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니온 신서울지부 직할 보안대가 어둠 속에 숨어 그들을 사방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감히 국장급 요원에게 조금이라도 잘못 손을 댔다가는 슬비도, 그녀 자신도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시선을 땅바닥에 쳐 박은 채 덜덜 떠는 그녀의 머리 위로 별 빛 하나만이 당장 숨이 꺼질 듯 반짝일 뿐 이었다.

“단검을 제대로 쥐어라. 손에 전혀 힘이 들어가고 있지 않잖나?”

남자의 손아귀에 잡힌 손이 부서질 듯 아프다. 상상을 초월하는 완력이다. 저항을 해 보려 해도 의미 없는 행동일 뿐이다. 데이비드는 마치 조카에게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방법을 가르쳐주듯이 소녀의 뒤에 서서 그 작은 손을 멋대로 조종하고 있다.

“우리의 적은 차원종 뿐만이 아니다. 클로저가 된 이상 언젠가 너도 좋든 싫든 사람을 죽이게 될 거다. 너의 처음은 단지 이 망가진 남자일 뿐 이다. 너의 선배가 더 이상 추잡스럽게 죽어가기 전에 목숨을 끊어 후배로서 경의를 표현해라.”

표정은커녕 목소리 높낮이 하나 바뀌지 않고, 데이비드는 소녀에게 살인을 명령했다. 팔에 점점 힘이 빠질수록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비명으로 점점 엉망진창이 되어간다. 소녀는 마침내 참았던 절규를 내뱉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이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모두 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요, 제가 사람을 죽이게 하지 말아요! 앞으로 시키는 건 뭐든 지 다 할게요, 앞으로 정말 잘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이렇게 빌게요!”

단검의 끝이 어느 새 제이의 가슴팍까지 침범 해 들어오고 있다. 그녀는 애걸복걸하며 연신 애원했지만 결국 강압을 버티지 못하고 체념 한 듯, 실성한 사람처럼 초점 없는 표정으로 죄송합니다. 라는 말 만 간신히 반복하고 있을 뿐 이었다.

“이제 찔러라. 심장을 찌를 때는 목표의 갈비뼈를 예상하며 강하게 빠르게 찌르고 빼라. 실전에서 칼이 갈비뼈에 걸리면 자칫 죽음으로 직결될 수도 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제이는 영원히 끝난 목숨이다. 아름다웠던 눈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이젠 끔찍할 정도다. 하지만 슬비는 간신히 남은 정신줄을 모아 데이비드가 그에게 가하려는 최후의 일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셋 셀 동안 팔에 힘을 빼지 않으면 남은 삶을 네 부모님 이름만 되뇌며 살게 해 주겠다.”

소녀의 눈에 순간 초점이 돌아온다. 대신 더욱 끔찍한 공포가 슬비의 눈동자에 서렸다.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제이의 입 이 아닌, 소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질끈 감은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이 더러운 흙바닥과 뒹굴며 부서졌다. 손이 곧장 그의 심장을 향해 내려갔다.

모든 게 끝났다. 엄마, 아빠, 부디 용서해주세요. 전 영웅대신 살인자가 됐어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슬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을 뜬 그녀의 앞엔 시체 대신 또 다른 괴물 하나가 서 있었다.
2024-10-24 22:21:3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