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가 내린 세피아빛의 하루

클로즈드베타 2015-08-01 5




얄궂게도 날씨가 흐린 날이었다.

 

궂은 일이었다. 차원종이 강남 어느 동네에 나타나, 그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유린하는 것은.

역시, 궂은 일이었다. 빌릴 손이 모자라서, 나이 어린 대원까지 동원하며 '인류의 위기'에 대처하던 것은.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얄궂었던 건, 유난히도 흐리고, 습하게도 갑갑했던 이 날의 날씨였다.


적어도 그 자리에 있는 둘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신논현역 인근에 불시에 떨어진 B급의 차원종을 물리치고, 쉴 자리를 겨우 방금에야 찾아 쉬던 검은양 팀의 두 일원, 슬비와 세하가 생각하기엔 그러했다.


 ​

건물가에서, 팔짱을 끼고 도도하게 기대어 선 슬비는 여지껏 차원종의 공격에 이리저리 튕겨나가 굴렀던지 바닥에 짓찧은 상처들이 온 몸에 가득이었고,

좀처럼 지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던 세하도, 게임기를 켜 들고 길에 털퍼덕 앉은 모습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이 날만은 평소와는 다르게, 몰아쉬던 숨을 제자리에서 고르고 있었다. 

 

지원 팀은, 이 날 유독 늦었다. 평소라면 벌써 도착해서 부족한 배려로나마 둘을 보듬고 있었을 것이었지만. 이 날만은, 지원 팀의 도착이 유난히도 늦었다. 도착이 늦어졌던 이유는,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검은양 팀은 숨도 고르지 못하던 아까의 전투 속에 뿔뿔히 흩어져, 지금 제각기 다른 곳에서 지원 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빌딩에 진입하면서 무너지던 잔해 너머로 사라져버린 테인, 불시의 차원 왜곡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 차원종의 앞을 가로막던 제이, 곁을 달리다 어느 순간엔가 사라져버린 유리, 그 모두가 무사했다면, 어디에선가 지금 그들처럼 애타게 지원 팀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기에.

 

그 모두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난히 궂었던 날씨도, 지원팀이 늦던 일도.


​이 날 하루 중에 일어났던 많은 일들, 그 중 하나, 단 하나 이상한 일이 있었다면,

슬비가 세하에게 말 없이 다가와 그의 게임기를 위상력으로 집어든 일이, 이상했다.



​보도블럭이 듬성듬성 깨진 신논현 역 가의 어느 보도에서, 세하는 자리에 앉은 채, 게임기를 빼앗겼던 게 대체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어깨 너머로, 게임기가 사라진 쪽으로 돌렸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사고'야."

 

 

 

 

세하가 바라보던 어깨 너머에는, 슬비가 있었다. 세하의 게임기를 비트로 집어들고, 차갑고 싸늘한 표정을 짓던 슬비였다.

'사고' 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하던 그녀의 말들은, 평소에 장난하듯 투닥이며 쏘아붙이던 말투가 아니었다.

세하의 다섯 걸음쯤 앞에서,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도 싸늘하게 느껴졌던 살기 어린 목소리가 이세하를 향했다.

 

 

 

 

"일어나, 이세하."

 

 

 

 

세하는 어깨 너머의 쪽을 바라보며 슬비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고, 싸늘했다.

그건 여러 번, 그가 본 적이 있는 눈빛이었다.

차원종을 망설이지 않고 벨 때마다 그녀가 보이던 눈빛. 어린 시절 위상력에 물들어, 더없이 아름다운 짙은 하늘 코발트의 색이었지만, 순간 순간마다 잔혹하게 눈 안의 세계가 텅 비어버리고 말던 '그' 눈빛이, 세하를 마주했다.

 

 

그녀가 그런 모습이었기에, 그도 일어나야 했다. 털퍼덕 앉은 자세에서 몸을 조금씩 추슬러, 세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게임기가 손에서 떠났으니 그로서는 더 앉아 있을 이유도 없는 셈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세하에게, 슬비가 단검 한 자루를 빼어들어 세하 쪽으로 들이대며 차갑게 말했다. 

 


 

 

 

 

"더 이상 이런 모습은 용납할 수 없어."

 

 

 

 

 

세하는 그런 상황에도, 심드렁하게, 슬비 쪽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뭐가 말이야?"

 

 

 

 

 

 

"그런 무책임한 모습."

 

 

 

 

날선 목소리로, 단검을 세하 쪽으로 뽑아든 채 슬비가 말했다. 눈초리가, 목소리가, 그녀의 기분이, 모든 것이 유독 평소와는 달랐다. 불성실함에 관해서는 다른 때에도, 다른 곳에서 줄곧 그녀에게 지적을 들어온 적이 있었으나, 이 날만은 유독 그녀가 그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 달랐다. 고양이상의 얼굴에 한껏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슬비가 세하를 또렷이 노려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무언가 평소와 달랐다는 걸 세하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가 슬비에게 보이는 모습만이 전혀 변하지 않았을 뿐.



 

​"또 무슨 말을 하는거야. 얼른 게임기 돌려줘."



슬비 쪽으로 왼손을 쭉 뻗어 내밀어, 오른손에는 검을 집어든 채로, 세하가 대답했다.

세하의 목소리는, 평소와 늘 같이 심드렁하기도, 차분하기도 했다.

그런 세하의 반응에 슬비가 순간 이를 꽉, 악무는 듯하던 소리가 들려왔다.



​"넌 항상 그런 식이지."

무겁게 느껴지던 말들과 함께 ​슬비의 뒤쪽에서, 물체 여럿이 허공에 떠오르며 맴돌았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슬비와 함께 오래 싸워왔던 세하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세하는 문득, 아까 일어날 때 검을 집어들었던 게 몹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핑 -




세 발치 앞에서 울리던 소리가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 옆을 지나갈 즈음, 세하의 두 발은 이미 땅에 붙어 있지 않았고,

빠르게 기동하던 세하에게, 슬비에게서 날아오던 비트가 소리가 멀어지는 데까지 떨어져간 때,



 


퍼어어어어엉 - !!!!

​ ​

방금까지 세하가 서 있던 자리에서 큰 폭발음과 함께 매서운 불기둥이 키 높이보다 더 높은 곳까지 치올랐다.

그녀의 장기였던 화염 폭발. 그걸 지금의 위력으로 쏘아 올렸다는 건, 슬비가 지금 인지하고 있는 세하는 쓰러뜨려야 할 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세하가 폭발을 피하면서, 동시에 슬비의 발도 땅에서 떨어져 나와, 그녀를 피해 기동하던 세하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순간 실없이, 세하는 슬비를 바라보며 '아까 분명 다리를 다쳤을텐데,' 라고 생각하고는.

텅 비어있던 큰 대로를 매섭게 건너 쫓아오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하는 또, 그녀를 조금은 진심으로 상대해야 할 것 같다고도, 문득 생각했다.


 

​달리던 발걸음은 이미 보도를 멀리 떠나, 둘은 강남의 대로를 그 자리에서 달려야 할 차들보다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거리를 건너 건물들 쪽으로 달려가던 이동의 속도만은 세하 쪽이 좀 더 빨랐지만, 그의 움직임은 그의 뒤와 옆을 쫓던 다수의 비트들 때문에에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제 스스로의 의지가 있는 듯, 가로수와 가로등 사이를 뱀처럼 감아 돌며 그를 쫓던 비트들을, 직격당하기 직전마다 방향을 급히 틀어 피해내던 세하에게, 뒤에서 한껏 열을 올려 소리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에게는 이 모든 싸움이, 차원종과 싸우는 이 모든 게 전부 게임일 뿐인거지?"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지직거리며 허공에 자기장이 뭉치는 것을 세하는 감지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아니 정확히는. 사고가 났을 때 해야 할 설명을 최소화하기 위해, 세하는 달리던 방향을 확 꺾어 바로 옆의 공사중이던 고층 건물 부지로, 건물 안쪽으로 달려갔다.

 

슬비는 세하의 열 두어 발치쯤 뒤에서 그런 세하를 매섭게 쫓았다. 세하가 수직으로 방향을 꺾던 기예 같은 솜씨는 아니었지만, 슬비 또한 달려가던 중에 크고 아름답게 반원을 그리면서, 세하가 돌입했던 공사장 터에 들어섰다.

 

돌아 달리던 반원의 호가 다 그려지던 때, 슬비가 세하의 뒤를 잡았던 순간.

지직, 파직 소리와 함께 - 허공에서 전기가 자기장에 묶여 가시화되면서, 매서웠던 덩어리가 세하의 쪽으로 뻗어가기 일순 직전,






"그럼 나도 쓰러트려 봐! 나는 지금 네 적이니까!!"





슬비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크게 울리고는,




파아아아아앙 - !!!!!!!!



번개의 줄기와도 같던 섬광 덩어리가, 높이 뛰어오른 세하의 밑으로 격류처럼 흘러갔다.


번개의 섬광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임기응변 식이었던 점프를 공중에서 자세를 가다듬어, 세하는 살짝 휘청이며 자리에 착지했다.

직격당했다면 분명 큰 사단이 났을 거다, 생각하며 세하는 착지한 자리에서 다시 제대로 발을 모아, 걸음을 딛으며 달려갔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서 세하는, 콘크리트 칠만 겨우 되어있는 건물 기둥들 사이로 달리면서 어딘가 마음놓고 공격을 피해낼 수 있는 공간을 찾으면서는. 뒤따르던 슬비에게, 큰 목소리로 물음 하나를 던졌다.



 

"​아니라고 하면 어쩔 건데?"



"뭐?"

"이 모든 게, 나한테 게임이 아니라고 하면? 어쩔 건데?​"






매섭게 뒤를 쫓던 비트들이, 한 순간은 기둥들 사이로 굽이굽이 달리던 세하의 뒤를 따라 휘어지지 않았다. 틀림없이 슬비가, 세하의 먼 발치에서 잠시 멈칫했던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항상 그런 모습인데!!"





멈칫했던 것도 결국에는 잠시, 다시 한 번, 복도를 따라 슬비의 목소리가 허공을 크게 울렸고,






"나는 항상 진심이야! 차원종을 상대할 때 나는 항상 진심이라고!"






슬비의 목소리 못지않게 컸던 세하의 목소리가 다시 슬비 쪽으로 향했다.

왜였을지, 이유 모르게 화가 나 있던 슬비를 상대로 세하 또한 평소답지 않게 열을 올려 반응했고, 꺾어진 복도를 다시 한 번 돌아 나오며 둘의 목소리는 앞쪽의 벽에 반사되어 복도 안에 더욱 크게 메아리쳐 울렸다. 목소리가 지나간 바로 다음에, 슬비가 날려보낸 비트들이 꺾어지던 복도의 벽면에 세차게 내리꽂혔고, 세하는 튀던 파편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방향을 우측으로 확 틀어 달려갔다.



세하가 달려가던, 꺾어진 복도 너머에서 그 층의 로비처럼 보이던 커다란 광장이 나타났다.

공간을 돌아나오며, 조금 움직임에 여유가 생긴 세하가 광장 안을 크게 반 바퀴 달려 돌아, 마침내 뒤에서 달려오던 슬비 쪽을 마주보았다.

슬비는 세하보다 조금 늦게, 꺾어지른 복도를 돌아 매섭게 달려오며, 세하 쪽을 바라보고는, 목소리를 매섭게 폭발시켰다.






"그 정도의 진심이라고? 차원종을 없애는 건 우리의 임무야! 너 같은 불성실한 클로저 때문에, 누군가가 또 희생당한다고 하면 난 절대로, 절대로 너를, 그리고 너와 함께했던 나를 용서 못해!!"





말을 던지면서, 슬비가 몇 발 도움닫기를 하고는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 점프, 그리고 이어지는 체공은 그녀의 장기였다. 바닥 공사가 아직 되지 않아 위로 쭉 뻗어 있던 건물의 한중간, 십 미터도 더 넘는 높이의 그 곳에서라면, 제아무리 세하라고 해도 슬비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곳에서 슬비가 공격을 준비한다면, 세하는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고. 공격이든 방어든, 무엇이든 시급히 준비해야만 할 때에, 세하는 외려 그런 슬비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면, 너는 차원종과 싸우는 게 단순히 임무 때문이라는 거야?"






높은 곳을 향해 시선을 뻗으며, 세하는 제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슬비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지금껏 비트의 공격을 막아내던 칼도 허리 아래쪽으로 완전히 내려버리고는, 세하가 목소리를 높여 슬비에게 물었다.

지금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고 그는 믿었기에.






"너는 내가 차원종이라고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쓰러뜨릴 수 있어? "






세하가 슬비에게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졌다.

차분한 듯 무심했던 그의 목소리는 아까에 비해 어조가 조금도 다르지 않았지만, 보다 조금은 진지했다.

이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또 슬비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높은 곳에서 맴돌듯 체공하며, 슬비는 왠지 망설이는 듯 제자리에서 잠시 머물렀다.

세하의 말을 들었던 슬비의 표정은 세하가 있던 지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잠시나마 망설이던 그녀의 표정은, 즐거웠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을 것이다. 슬퍼하던 표정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냥, 화난 모습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전히 화난 표정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화난 모습에 남아있던 것은 이제 이유 없는, 그녀의 자존심 뿐이었다.





"그래, 쓰러뜨릴 수 있어!! 불성실한 클로저는 차원종보다도 위험하니까!!"






높은 곳에서 목소리가 크게 터져나오면서,




지직, 지직, 쩌억.




세하의 위에서, 공간이 조금씩 비집어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그의 머리 위에서, 허공의 틈 너머에서 뻗어왔다.

대처를 생각하기도 전의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에 세하는 슬비를 바라보며, 이것만은 쓰지 않길 바랐는데, 하고 생각했다.



공간을 비집어 열었던 틈 사이로, 세하의 머리 위에서부터 버스가 떨어져 왔다.

머리 위에서 거대한 버스가, 떨어지던 중력에 더 가속을 받은 채로 세하의 위에서 덮쳐왔다.



이건 그녀의 '공격'이 아니었다.

버스가 꽂힌 자리로부터 위쪽으로 거대한 폭발이 뻗어갈 것이 뻔했는데.

이건 공격이라기보다는 자멸, 혹은 공멸이었다.

슬비가 이 정도의 생각도 없던 녀석이라고는, 세하가 생각지 않았었지만.



세하는 떨어져오는 버스를 올려다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도움닫기를 한다 한들, 높은 점프는 그가 자신 있어하는 분야는 아니었다.



덮쳐오는 버스의 그림자 밑에서, 세하의 그림자가 발을 모아 웅크리며, 작아졌다.

 

 

 

 

 

 

펑,



버스가 땅에 부딪쳐 제 1의 폭발이 일어나던 순간,

세하의 발은 땅을 강하게 구르고 치닫아 그의 몸을 높이 위로 실어 올렸고,



쾅,



버스가 충격에 찌그러지면서 제 2의 폭발이 슬비가 있던 위쪽으로 뻗어가던 때에,

세하는, 철골 사이사이에 나부끼던 홍염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슬비를 덥석 붙잡고는,



마침내 제 3의 폭발이 굉음과 함께 건물을 뒤덮던 순간에,

세하는, 공중에서 한 번 더 도약하여 슬비를 무작정 안아든 채 건물의 밖으로 뛰쳐 나갔다.



 

 


 

건물을 뛰쳐나와 착지하던 자세를 가다듬던 바로 다음의 순간,





콰아아아아앙-




폭발이 연쇄를 일으켜 방금 뛰쳐나왔던 창문 밖으로 터져나오던 걸 바라보며 세하는,

건물이 마무리 시공이 되지 않아, 방금 뛰쳐나왔던 자리에 유리가 없었다는 게 퍽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유리라고 하면, 그 바보 같은 유리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도 다행이라고도, 그는 생각했다.

바보라면 지금은 품에 안겼던 한 명으로 충분했을 테니까.









폭발이 연쇄하며 계속되던 한동안은, 세하는 폭발을 등진 채, 슬비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 무릎을 끓고 붙박여 있었다.

그런 세하의 품 안에서, 조금의 기척도 보이지 않던 슬비는, 그저 잠든 듯이 조용히 그의 품 속에 안겨 있었다.


 

큰 폭발 뒤에 몇 차례의 잔 폭발이 일어나면서, 폭발은 자욱한 폭연만을 둘이 있던 자리에 남기고선 천천히 잦아들어 갔다.


 

폭발이 이제 다 잦아들었던 때에서야, 그제서야, 긴장에 굳어 있던 세하의 팔에 힘이 풀려 나와, 안겨 있던 슬비가 세하의 무릎을 따라 굴러 다시 땅에 내려왔다.

땅에 내려오고 나서, 슬비는 몸을 찬찬히 추슬러 앉고는. 잠시간 말 없이 있다가, 세하 쪽을 바라** 않고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음을 하나, 던졌다. 

공터에 내리쬐던 노을 빛에, 슬비의 분홍색 머리칼이 들판에 이는 불꽃의 색으로 물들던 때였다.






"날 왜 구해준 거야?"


 

 

 

 

"말했잖아. 나는 항상 진심이라고."







세하가 다리를 쭉 뻗어 앉은 채로, 애써 여유로운 척하며 슬비에게 대답했다. 차원종에게 당한 상처에, 폭발에 휘말린 곳에 화상까지 입어 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지만, 세하는 그런 내색을 조금도 슬비에게 보이지 않았다. 아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죄책감이 누군가를 또 아프게 할 거라는 걸 알았기에. 그렇기에, 세하는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며, 휘청이던 다리를 팔로 부여잡고, 억지로나마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어서 일어나. 이런 모습은 너답지 않잖아."



 



하루 종일, 무리할 만큼 무리한 다리를 일으켜 쭉 똑바로 서서는, 세하는 손을 뻗어 슬비 쪽으로 내밀었다.

자리에 다소곳하니, 새치름하니 앉아 있던 슬비의 모습은 다시 평소처럼, 속내를 알 수 없던 한 마리 고양이 같아 보였고, 슬비는 뭔가 망설이듯,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세하의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비와 함께 간밤에 내렸던 이슬이 노을의 빛으로 물들어가던 시간.

구름이 개이던 하늘 너머로, 세피아 빛의 하루가 저물어 가던 무렵이었다.


 

세하는 슬비의 앞에 서 있었다.  

늘 싸워야만 했던, 그들의 싸움에는 의미가 없었다.

차원종이 나타나기에 싸운다. 그것만이 싸움의 이유였고, 그건 모두가 알고 있는 이유였다. 

 

 

그들이 오늘 서로 싸워야만 했던 이유는, 좀 더 복잡했다. 

'위험에 빠진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보다는 사소한 이유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복잡했고, 더욱 소중했던 이유였다.

둘은 평소에도 자주 투닥이며 많이 싸웠지만, 이 날의, 싸움의 이유만은 다른 날들과 달랐다.

 

무언가가 변해가기 전의, 마지막의 싸움이었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고 누군가에겐 인생 모든 것을 건 목표였다고 해도 -

그들이 변해가기 전의, 마지막의 싸움.


 


 


"정식 요원 된 것 축하해, 리더."



석양을 등진 채로, 세하는 평소의 모습처럼 조금 껄렁하게 서 있었다. 그들이 수습 요원으로서 맞이하던, 마지막의 석양.

정식 요원의 인가는 이미 떨어졌으니, 다음 날부터, 그들은 정식 요원이 될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동안 추구해 온 목표였고, 누군가에게는 부질없게만 보이던 기성의 관문, 그뿐이었지만.

 

 

그 문턱에서, 둘은 서로 세차게 부딪혔다. 다르게만 살아왔던 둘의 가치가 서로를 향해 세차게 부딪혔다. 



노을이 내리쬐는 공터에서 세하는 슬비를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진심을 알고 난 지금에는, 자신이 얼마만큼의 진심이었는지도 모르던 이와, 줄곧 자신이 진심인 줄로만 알았던 이 사이에, 이제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다. 



주저하듯 눈동자가 흔들리며, 눈앞의 손을 쉽사리 붙잡지 못하던 슬비의 곁에는 아직, 날려보내지 않았던 단 하나의 비트였던, 세하의 게임기가 남아 있었다.



세하라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슬비라는 리더를 믿지 못해 일어났던 다툼이 아니었다.

붉게 타오르던 세상 속에, 결이 희고 선이 고왔던 손이 주뼛거리며 세하 쪽으로 향했고, 세하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붙잡아 주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리더."


 

 

 


 

이유 모를 분노로 일어났던 싸움은, 이제 그들 사이의 믿음으로 바뀌어, 끊없고 이유 없던 싸움을 밝힐 등불이 되어줄 것이었다.

물론, 그 뒤에, 그들이 더는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의미가 있었던 싸움.

 

붉게 달구어지듯 석양에 물든 하늘 아래, 그림자가 길게, 길게 숲처럼 드리웠던 공터에. 

슬비의 손을 맞잡은 세하가 건네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되퍼졌고.

전해지던 말들은 작은 홀씨가 되어, 세하의 앞에서 선 이에게서, 미소 한 떨기가 곱게 피어났다.

 

 

 

 

 

 

 

"나도, 잘 부탁해. 이세하."

 

 


 


 

 

 


추억이라는 액자 속에 세피아 빛으로 남을 사진처럼, 둘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하루.

 

 

 

새볔녘에 이슬비가 내렸던, 이상한 일들이 가득하기만 했던 하루가, 이제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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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이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서 급하게 끄적인 글입니다.



올린 시기도 늦었는데다 올린 상태로는 미완인 글이었어서 여러 번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그래도 글을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기쁘네요 :)

 

 

 

 

컨테스트에 완성본의 글이 투고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 ㅜ







2024-10-24 22:37:2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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