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꾼과 환영경계의 우로보로스 - 프롤로그 (3)

서진권 2014-12-29 1



“당신은 저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습니다.”

이슬비라는 이름의 소녀는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제이는 걸음을 멈춰 선 채 그녀를 잠시동안 응시했다. 편의점 안의 따뜻하게 덥혀진 온기가 목덜미를 훑는 밖의 기분 나쁜 한기와 어울려 이질적인 소름을 자아냈다. 

마치 거미줄 사이에라도 걸린 듯, 천장 구석에 위태롭게 매달린 더러운 스피커가 수많은 계절을 거쳐 노래를 불러 온 앙상한 목을 안간힘을 다해 쥐어짜며 철 지난 가요의 기타 반주를 감미롭게 연주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직 사무실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철없는 아이가 서른 넘은 어른에게 건네기엔 엉뚱하고 심지어 사치스럽기까지 한 배려였지만 지금만큼은 제이를 조금이지만 안도하게 만들었다. 소녀는 어둠속에 반 쯤 파묻힌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제이를 바라보고 있다. 

푸른 안광이, 소녀의 오똑한 콧잔등 위를 수평선처럼 가로지르는 암갈색 그림자 안 에서 형형히 빛나며 그녀의 존재를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럼 어떡할까? 여기서 싸울까?”

제이의 말 속에 보일 듯 말 듯 살짝 가시가 돋쳐 있다. 소녀는 익숙하지 않은 곁눈질로 데이비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미리 괜찮은 곳을 알아봤습니다, 차에 타시죠.”

“아니, 그런 식 으로 어눌하게 납치당하는 건 거절하지.”

제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이비드의 입가 끝자락엔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작은 웃음이 살며시 번졌다. 참으로 부자연스러운 실소이자 비웃음이다. 살포시 위로 시켜 뜬 그의 시선에선 쓸데없는 허세 따윈 소용없습니다. 라고 제이를 향해 조소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는 어금니를 다시금 질끈 악물며 콧등에서 살짝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똑바로 고쳐 썼다. 

“원하시는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여기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휴경지가 하나 있다. 땅주인은 반 년 전에 죽었으니 문제 따윈 없을 거 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국장님, 역시 그, 그건......”

연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유정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흐려진 말 끝 에서 제이에 대한 불신이 노골적으로 풍겨져 나왔다. 

“함정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녀가 경직되고 냉정한, 그러나 긴장된 속마음은 미처 숨기지 못한 채 유정의 말 뒤 끝을 이어 말했다. 저 의뭉스러운 남자를 믿어서는 안 된다, 마치 그런 식의 말투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두꺼운 선글라스의 렌즈 뒤에 숨겨 진 그의 의중을 읽으려는 듯 더욱 날카롭게 빛난다. 

“괜찮습니다. 저 남자의 제안 대로 하도록 하죠.”

“그럼 하는 김에, 주변에 숨어서 엿보기나 하는 저 친구들도 떼놓고 오면 안 되겠나?”

“그것은 제 권한 밖입니다.”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롭니다.”

더 이상 물어봤자 알아 낼 것은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싫어도 잠시 후 면 알게 되겠지. 제이는 아무 말 없이 어둠의 저 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무언의 동의라도 한 듯, 데이비드가 거리를 둔 채 뒤를 따랐다. 유정과 슬비, 두 여자는 자리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그들도 결국 어쩔 수 없이 경계심 가득 찬 눈초리와 함께 조심스레 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별 한 점 떠 있지 않은 흐린 밤하늘 아래로 오밀조밀한 능선을 타고 뻗은 유순한 산봉우리들과, 그리고 그것을 따라 흘러내린 두루뭉술한 산기슭들이 먹지를 바른 것 마냥 깊은 심연이 되어 서 있었다. 

편의점에서 흘러나온 탁한 불빛만이 핏줄처럼 가느다란 외길 하나를 불안하게 떨리는 숨결처럼 비추고 있을 뿐. 

저 멀리 듬성듬성 보이는 인가의 불빛들이 땅에 내린 별 들처럼 간간히 반짝이며 작은 이정표를 세웠다. 그리고 그 이정표를 향해 어둠 속에서 수많은 인간의 형상들이 나타나 유령처럼 사박사박 풀 밟는 소리, 눈 밟는 소리, 이따금 살얼음을 부수며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일제히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물소 떼가 야음을 틈타 맹수를 피해 이동하듯, 그들은 누구의 시선도 원치 않으며 그렇게 떨어진 별 빛 너머로 서서히 사라졌다.



소년이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그들이 떠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설거지를 하는 척 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꽤 고역이었다. 직장도 변변히 없는 동네 형을 이렇게 배려해주는 착한 학생이 또 어디 있을까? 소년은 스스로를 대견한 듯 칭찬하며 카운터로 향했다. 

방금 전의 여성은 꽤나 미인이었다. 무슨 일로 이런 시골에 나타난 것 일까? 어쨌든 이런 깡촌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그 형은 어디로 사라진 것 일까? 소년은 주변을 둘러 봤지만 남은 것 이라고는 빈 맥주 캔 하나, 그리고 반 쯤 남은 것 하나만 휑하니 놓여있을 뿐 이다.

보아하니 예상한 대로 꽤 잘 된 모양이다. 라고 소년은 혼자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맨날 이상한 선글라스나 쓰고 다니는지라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는 꽤 잘생긴 편이다. 특히 머리가 매력적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순백에 가까운 은빛 머리칼이 마치 다큐멘터리에 종종 나오곤 하는 멋진 우두머리 늑대를 연상케 한다. 

큰 키 와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 그리고 그에 비해 탄탄하게 잡힌 근육들도 무척 인상적이다. 글 쓴답시고 집에만 앉아있어서 그런 지 피부도 하안 편 이었고, 생각해보면 주변 학교의 여학생들 사이에서 충분히 소문거리가 될 만 큼 의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같은 남자로서도 질투심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소년도 딴에는 남자다. 그는 뚱한 얼굴로 턱을 괴고 앉아 제이가 돌아오면 이번에는 반드시 새로운 기술을 전수 받고 말 것이라 다짐해본다. 

스피커가 수명이 다 했는지 미세하게 잡음을 내 뱉고 있다. 그는 일어나서 스피커를 몇 번 두드리다가 불현듯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주먹도 아니고, 그렇다고 손날 역시 아니고. 한참을 골똘히 생각 해 봐도 역시 소년의 지식만으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제이의 손 끝 은 분명 불량배들의 몸에 닿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바닥이 멈춘 곳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괴물 같은 녀석들이 마치 축구공처럼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이래서야 마치 무협영화에서나 보던 무림고수가 아니지 않는가?

그때의 일을 다시금 떠올리며 소년은 제이처럼 강해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았다. 남자로 태어나 강해진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름이 제이라고 했던가? 참 이상도 한 이름이다. 애초 한국 사람이 맞기는 한 걸까? 

어쨌든 그 형이 돌아오면 이번에는 다 쓴 치약을 쥐어짜듯 끝까지 달라붙어 봐야겠다. 자신의 육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덤프트럭도 한 방에 부술 필살기 같은 것도 알고 있을 터. 

이번 일을 꼬투리 삼아 제이에게 기술을 전수받고 만화 속 영웅들같이 강해 질 자신을 떠올리니 소년의 입가에는 벌써 미소가 가득했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소년은 제이가 여자와 함께 다정히 사라졌을 어둠 저편을 바라본다. 내일은 반드시 그의 필살기를 전수받고 말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멀리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고래의 눈동자보다도 짙게 내린 밤이 유리로 만든 서리처럼 영원히 얼어 붙을 것 만 같았다. 산기슭 아래에 억지로 만들어 진 볼품없는 논밭은 세상을 뜬 주인의 살아생전 삶이 어땠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폐허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주변에는 인기척은 커녕 시골길을 한가로이 배회하는 흔한 산짐승의 움직임조차 찾아 볼 수 없다. 논두렁 비탈을 따라 듬성듬성 세워 진 가로등 주변을 제외하면 주위는 온통 한 치 앞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 뿐. 그리고 그 어둠 속을 몇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먹히지 않으려 발버둥이라도 치는 작은 동물을 연상시키듯, 김유정 감시관은 가로등 불빛 아래의 조잡한 콘크리트 외길 위에 선 채 양 팔을 강박적으로 부여잡고 경악에 찬 표정으로 얼어붙은 논밭 한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마치 노환으로 폐사 직전에 다다른 늙은 말이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 한 젊고 싱싱한 경주마를 달리기에서 압도적으로 박살 내 버린 꼴이다. 있을 수 없는 광경에 유정의 입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슬비의 심정도 그녀와 다를 바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라고 되새기며 소녀는 핏물과 함께 내 뱉은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금 곱씹었다. 아름답다는 아프가니스탄의 청옥마저 부끄러움에 숨을 멈추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투명하고 흔들림 없었던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지금은 공포로 볼썽사납게 흔들리고 있다.

오직 데이비드만이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냉담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 이었다.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표정으로, 슬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거칠게 닦았다. 손 등에서부터 쇠 비린내가 역하게 풍겨졌다. 갑작스러운 냄새에 장갑 위를 쳐다보니 이마를 닦은 손 등 위로 핏자국이 흉하게 묻어있다. 이제 보니 그녀의 검은 에나멜 구두 주변에도 희미한 핏자국 여러 개가 섬뜩하게 번져있었다. 

손 안에서 얇고 예리한 단도 두 자루가 볼품없이 덜덜 떨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도저히 그것들을 주체 할 방도가 없었다.

소녀는 눈 앞 의 목표를 공포와 경악이 뒤섞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남자의 주홍색 선글라스가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더욱 압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벌써 몇 십 합이나 주고받았지만 제이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얼굴 뿐 만이 아니다. 한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오히려 만신창이인 것은 소녀 뿐 이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제이의 털 끝 하나 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제이의 빈틈없는 시선이 슬비의 몸 구석구석에 날아와 꽂힌다. 동작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는 한 밤 중의 장승과 같이 자리에 서서 잡귀를 경계하듯 소녀의 얼굴 타고 흐르는 핏방울 하나, 손가락의 미동 하나까지도 전부 관찰하고 있다.

마치 처음 만난 남자에게 강제로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토사물이 온 몸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은 불쾌감에 이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면 차가운 흙바닥에 누워있는 것은 저 남자여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 반대로 그녀 자신이 저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목이나 얼굴, 머리통을 잡힌 채 놀아나며 땅에 매번 메다 꽂히고 있는 꼴 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에게 굴욕적이었던 것은, 저 남자의 주특기가 유술이 아닌 타격기라는 사실에 있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 제이라는 남자에게 자신은 그저 적당히 놀아줘야 할 어린 여자아이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무리다, 그래도 계속 할 거냐?”

제이가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숨조차 차지 않는 다는 듯, 그의 목소리 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로서는 이슬비가 사뭇 안쓰러워 내뱉은 말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동정과 같은 물음이 소녀에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전신에서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김유정 감시관님, 준 1급 단계의 위상력 사용을 허가 해 주십시오.”

소녀가 또박또박, 그러나 치미는 분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유정이 그녀의 말에 소스라치듯 놀라며 싸움의 한 가운데로 황급히 뛰어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소녀에게 있어 방금 전의 요청은 유정의 허락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닌, 그저 단순한 통보였을 뿐 이었다.  

“김유정 감시관!”

데이비드가 긴 침묵을 깨고 그녀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의 호령에도 유정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데이비드와 그들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논 위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 이었다. 의외로군, 하지만 흥미로워. 데이비드는 반 쯤 통제불능 상태에 접어 든 이슬비를 보며 사뭇 놀랍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벌써 그녀 스스로 능력 제한을 해제 한 것 인지, 소녀의 몸 주위에는 대기의 일그러짐 비슷한 것이 이질적으로 넘실대며 심장 박동처럼 미세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2024-10-24 22:21:2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