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천재와 수재

Larken 2014-12-29 3


“이세하. 상황 보고해. 이세하…….”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하지만 정작 이어폰을 낀 소년은 그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든 게임기를 열심히 두들기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리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셋…….”

“야, 이세하…….”

또 다시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이번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방금 전과 비교하면 톤이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하라고 불린 소년은 묵묵히 게임기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둘…….”

“이세하……?”

화났다. 누가 들어도 이어폰으로 통신을 하고 있는 소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세하는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나…….”

“…….”

그런 세하의 모습을 보면서 유리는 양 손가락으로 자신의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야!! 내가 진짜 몇 번을 말했어? 작전 중에 게임하면 내가 진짜 그 게임기 부숴버린다고 했어, 안했어!?”

“으아아아아!”

그제야 세하는 하고 있던 게임을 종료했지만 이미 배는 떠나간 지 오래였다. 그런 세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리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했다.

“게임도 터졌고, 슬비도 터졌고,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세하는 물론이고 이어폰으로 통신을 하고 있던 소녀, 이슬비에게 있어 이 상황은 심각하기 그지없었지만 제 3자인 유리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선 매우 재미난 상황으로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심지어 특경대의 요원들은 슬비가 세하와 통신을 시작하고 얼마나 오래 화를 참는지 내기를 할 정도였으니, 그 둘이 얼마나 토닥거리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는 알아? 참는데도 한계가 있지. 이번 작전 끝나고 진짜 각오하고 있어!”

“뭐? 야, 야. 잠깐만! 야, 이슬비!”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세하는 다급하게 슬비를 불렀지만 이미 슬비는 통신을 끊어버린 상태였다. 통신이 끊겼다는 것을 깨달은 세하는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게임기를 주머니 속에 우겨넣었다.

“으이그,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작전 도중엔 게임 좀 하지 말라고. 소리 들어보니까 이번엔 슬비가 진짜 화난 거 같은데?”

“하이고, 내 팔자야…….”

세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녀 역시 지겹도록 그 둘이 방금과 같은 문제로 토닥거리는 것을 보아왔지만 항상 이런 식이었다. 슬비는 목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고, 세하는 그런 슬비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결코 게임을 하는 버릇을 고치질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런 슬비의 모습에 못 이겨 게임을 하는 버릇을 고치거나, 아니면 의연한 세하의 모습에 못 이겨 아예 신경을 끌 수도 있었을 테지만 세하나 슬비나 그 둘은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고집불통인 점에선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는지 유리는 새삼 궁금해졌다.

“아무튼, 지금 슬비를 조금이라도 진정시키려면 이번 작전에 정신 차리고 임하라고.”

곧 있으면 차원종이 나타날 것이기에 전투 준비를 위해 유리는 자신의 무기인 일본도와 권총을 쥐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아, 귀찮아 죽겠네.”

세하역시 그런 유리를 따라 차원종을 상대하기 위해 자신이 사용하는 두 정의 건 블레이드(Gun Blade)를 챙기기 시작했다.

차원종을 상대하는 이능력자, 클로저스(Closers)들 중에서도 이세하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검은 양’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상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높은 위상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세하의 어머니가 [1차 차원전쟁]을 종결시킨 전설적인 클로저 요원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1차 차원전쟁]을 종결시킨 클로저 요원의 아들이니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세하에게 엄청난 기대를 품고 있었다. 대개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

둘째, 사람들의 기대로 인해 오만해지는 경우.

셋째, 사람들의 기대를 부담스러워하는 경우.

…세하의 경우는 마지막 세 번째 경우였다. 그가 클로저 요원이 된 것은 그가 보유하고 있는 높은 위상 잠재력 때문이었지, 당사자인 세하는 능력 계발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하는 지금 이 상황이 정말 ‘귀찮은’ 상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이미 한 명의 클로저 요원이 되어버렸고 지금은 곧 나타날 차원종들을 상대해**다. 옛날,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하아, 그 녀석한테는 또 뭐라고 둘러댄담?’

그러나 지금 세하는 곧 나타날 차원종들은 어떻게 상대해야할까 하는 생각보다, 지금쯤 잔뜩 화가 났을 슬비한테 이번엔 또 무어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긴장감이 없다고도 평할 수 있겠지만….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셨네.”

그 때, 유리의 말에 세하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유리의 말처럼 눈앞에는 20체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양의 차원종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이, 몰라. 일단 이것들 다 정리하고 생각하자고.’

양 손에 든 건 블레이드를 똑바로 붙들면서 세하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차원종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달려 나가면서 소리쳤다.

“빨리 빨리 덤벼! 나 시간 없다고!”

◆◆◆

“내가 진짜 오늘은 그 게임기를 박살을 내던가 해야지…….”

한 편, 세하와 유리가 차원종을 쓸어버리고 있는 동안, 그 곳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다른 지역에서 다른 검은 양 멤버들과 함께 차원종 소탕 작전을 끝마친 슬비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세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슬비의 모습에 J와 미스틸 테인은 곧 세하가 처하게 될 상황에 미리 그에게 애도를 표했다.

“아무래도 슬비가 제대로 화가 났나보구나.”

“당연하죠. 매 작전 때마다 게임하느라 브리핑은 늦게 하질 않나. 무기 사용법은 자꾸만 까먹어서 내가 일일이 가르쳐줘야 하질 않나. 그 녀석 뒷바라지하느라 힘들어 죽겠다고요!”

매사에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슬비가 이렇게까지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면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J는 짐작할 수 있었다. 클로저 요원들은 개인행동이 아닌 팀을 짜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지금 세하와 슬비처럼 팀과의 사이가 나빠지면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세하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눈에 선했기 때문에 J는 지금 슬비의 머리를 조금이라도 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세하를 혼내는 걸 뭐라고 하지는 않겠다만 너무 심하게 야단치지는 말아라. 같은 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일이 정말 곤란해지니깐 말이다.”

“그, 그건 맞는 말이지만…….”

팀과의 관계가 틀어진다는 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방방 날뛰었던 슬비의 태도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슬비는 검은 양 멤버들 중에서도 최고참인 J를 제치고 검은 양 팀의 리더를 맡고 있었다. 클로저 팀의 리더를 맡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상황 판단력과 같은 팀원을 이끌어 갈 책임감이 필요한 법이었다. 검은 양 멤버 중에서도 슬비는 그 조건에 전부 부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슬비가 검은 양 팀의 리더를 맡겠다는 것에 반대를 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 저기 세하랑 유리가 오는데요?”

그 때, 자신의 무기인 창을 손질하고 있던 미스틸 테인의 말처럼, 우란의 헥사부사를 타고 세하와 유리가 다가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야호! 달려라! 달려! 헥사부사!!!”

“으아아아아아아!!!”

말 그대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정신 나간 속력으로 달려오는 헥사부사, 그리고 헥사부사 뒤에 타고 있는 세하와 유리의 비명소리가 지천을 울렸다.

…세하와 유리는 헥사부사가 속력을 늦추고 멈추자마자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가뜩이나 차원종을 소탕하느라 체력을 소모했는데 곧바로 우란의 헥사부사를 타고 돌아왔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헉…… 저 오토바이는 몇 번을 타도 적응이 안 되네.”

“그래도…… 처음 내 헥사부사에 탔을 때보단 낫잖아?”

우란은 방금 전 헥사부사를 몰았을 때 그 쾌활한 폭주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의 모습 때처럼 조용하고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우란의 모습에 세하는 그냥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세하의 주변에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슬비의 그림자였다.

“이세하? 아까 했던 얘기는 계속해야지?”

“으억?”

마치 그녀의 등 뒤에서 검은 오오라가 풍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슬비의 모습에 세하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갈지자로 비틀대던 모습은 어디가고 바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게임기 내놔. 오늘은 진짜 그 게임기 박살을 내야겠어.”

“뭐? 야야, 이건 아니잖아.”

슬비의 말에 세하는 잔뜩 당황하면서 소리쳤다. 예전에도 슬비에게서 게임기를 부숴버리겠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녀가 진짜로 게임기를 부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세하뿐만이 아닌 다른 검은 양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게임기를 내놓으라는 슬비의 말에 다른 검은 양 멤버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작전 도중에 게임을 하질 말았어야지! 내가 예전에도 몇 번을 말했어?”

슬비가 예전에도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은 사실이었기에 세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순순히 게임기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그는 게임기를 내놓으라는 슬비의 말에 석상처럼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세하의 태도는 가뜩이나 화가 난 슬비의 기분을 돋우는 결과만 초래했다.

“이세하 너 진짜……!”

이대로 가다가는 상황이 정말 심각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검은 양 멤버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그 둘을 말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갑자기 그들에게 특경대 대원들이 헐레벌떡 뛰어오기 시작했다.

“거, 검은 양 소속의 클로저 요원 분들이십니까!?”

“저희가 검은 양 소속 클로저 요원이 맞지만…… 무슨 일이죠?”

자신들에게 검은 양 소속의 클로저 요원이 맞느냐는 특경대 요원의 질문에 유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정말 급하게 달려왔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는데 곧 이어 그가 내뱉는 말에 모든 검은 양 멤버들의 표정이 굳었다.

“지, 지금 시간의 광장에 대량의 차원종들이 출현했습니다! 지금은 저희 특경대들이 차원종들의 발목을 잡고 있긴 하지만……!”

“뭐, 뭐라고요?!”

예상치 못한 차원종들의 출현에 모두가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냉정을 되찾고 다들 자신들의 무기를 장비하기 시작했다. 시간의 광장은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으니 빨리 출동하면 더 이상의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하, 좋아…… 게임기 건은 나중에 얘기하자고. 이세하.”

“네, 네. 알겠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토닥거리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지금 세하와 슬비의 모습은 차원종을 상대하는 어엿한 클로저 요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도심 한복판에 대량의 차원종이 나타났다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검은 양 멤버들은 특경대 요원들의 도움을 받고 빠르게 시간의 광장에 도착했다. 시간의 광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에는 검은 양을 관리하는 유정과 특경대 대장인 은이가 현재 차원종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특경대 요원들과 교신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 곧 클로저 요원이 온다고…… 아, 얘들아! 마침 잘 왔어!”

요원들과 교신을 나누던 은이는 검은 양 멤버들을 보자 무전기로 자신 휘하의 특경대 요원들에게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소리쳤다.

“유정이 언니.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건가요?”

슬비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유정에게 현재 차원종의 규모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특경대가 ‘대량의 차원종’이라고 말을 했으니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상황이었기에 준비를 철저히 하자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특경대 쪽 사람들이 차원종들의 발을 묶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차원종들이 신 서울을 침범하는 건 시간문제야.”

갑작스런 차원종의 출현에 유정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예정에도 없는 차원종들의 출현이었으니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이도, 지금 차원종은 시간의 광장 한 가운데만 밀집해있는 상태야. 그러니까, 각개격파를 하지 않고 이 구역의 차원종들만 소탕하면 더 이상의 피해는 없을 거야.”

만약 차원종들이 시간의 광장 곳곳에 출몰했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더욱 심각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지금 차원종들은 시간의 광장 중심부에만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일일이 각개격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희 다섯 명이 한 번에 이곳으로 출동하면 된다는 거죠?”

유리는 시간의 광장의 내부 구조를 그려놓은 지도를 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서둘러야 해. 아까까지만 해도 특경대 쪽에서 부상자가 속출한 상태야. 더 이상은 특경대 쪽도 버티기 힘들어.”

유정의 말에 다섯 명의 검은 양 멤버들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장비들을 체크한 다음, 시간의 광장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의 중심부로 빠르게 달려가자, 유정의 말대로 대량의 차원종들이 특경대 요원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상황은 다들 들었지? 부상자도 있다고 하니까 빠르게 끝내자고.”

양 손에 자신의 무기인 컴뱃 나이프를 꺼내들면서 슬비는 다른 검은 양 멤버들에게 말했다. 부상자라는 말에 다른 검은 양 멤버들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차원종들을 향해 돌격했다.

다행히 차원종들은 전원 B급 차원종이었던 지라 차원종들을 소탕하는데 그렇게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극심한 체력 소모였다. 아무리 약한 차원종들을 상대한다고 하더라도 끝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차원종들의 모습에 다들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아, 진짜! 대체 얼마나 많이 나타난 거야?!”

세하는 건 블레이드를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차원종들이 몰려있는 곳 근처에 특경대가 설치해둔 폭탄을 발견했다. 잘하면 한 번에 여러 마리의 차원종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기에 세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폭탄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량의 차원종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자신의 생각해로 상황이 흘러가자 세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폭발로 인해 영향을 받은 것은 차원종 뿐만이 아니었다.

‘……어?’

불길한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는 건물 지면의 모습에 세하는 시간의 광장이 낡은 건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건물에 폭탄을 터뜨렸으니 건물이 무너지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들 피해!”

건물 바닥에 조금씩 금이 가는 모습에 세하는 다른 검은 양 멤버들에게 소리쳤다. 다행히 유리와 J, 미스틸 테인은 건물 바닥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자마자 폭발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으로 이동했지만 문제는 슬비였다. 그녀는 여러 마리의 차원종들을 상대하느라 몸을 피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세하는 혀를 차면서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비록 자신에게 쓴 소리만 하는 슬비였지만 그렇다고 그녀는 같은 클로저 동료였다. 그렇기에 세하는 슬비가 제때 도주할 수 있게 그녀가 상대하는 차원종들에게 달려갔다.

“**! 빨리 뒤로 물러서, 이슬비!”

“자, 잠깐만! 이세하, 지금 뭐하는 거……!”

세하가 자신을 도와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슬비는 잔뜩 당황하면서 그에게 소리쳤지만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조금씩 크기를 키워간 건물의 균열이 기어이 건물의 지면을 가르면서 세하와 슬비를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몸이 공중에 떠 있다. 물론 사이킥 무브를 할 수 있는 덕에 공중을 날 수 있는 것은 그리 낯선 경험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사이킥 무브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세하와 슬비는 불의의 사고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윽!”

시간의 광장 지하는 울퉁불퉁한 건물 잔해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런 지하에 맨 몸으로 떨어진 슬비는 등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폭발로 인해 자신의 위로 떨어지는 잔해의 모습에 슬비는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최대한의 부상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파…….’

하지만 그런 슬비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찾아오는 고통이 슬비의 몸을 잠식했다. 언제나 침착하게 작전을 수행했던 그녀에게 있어서 작전 중의 부상은 처음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고통에 슬비는 눈앞이 흐릿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

…눈을 떠보니 모르는 천장. 아니, 어두컴컴한 장소가 슬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그녀는 자신이 누워있음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팔뚝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 뭐야? 이제 깼냐?”

그 때,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슬비는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곳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앉은 자세로 태평하게 게임을 하고 있는 세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세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겨우 고통을 참고 자세를 바로잡은 슬비는 곧 자신의 몸이 검은 양 소속의 멤버들한테 지급된 검은색 자켓으로 덮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에 슬비는 세하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그가 입고 있던 검은색 자켓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설마…… 나 때문에 자기 옷을 덮어준 건가?’

하지만 슬비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세하는 무덤덤하게 방금 전 슬비가 자신에게 한 질문에 대답할 뿐이었다.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건물 바닥이 부서져서 우리 둘은 건물 지하에 갇혀버린 상태야. 그래도 방금 특경대 쪽 사람들하고 교신은 취해놨으니까 그렇게 큰 문제는…… 아, 깨어났으면 유정이 누나한테 교신이라도 걸어봐. 지금 너 엄청 걱정하고 계신다고.”

세하의 말에 슬비는 급하게 자신의 귀에 붙어있는 통신기로 유정에게 교신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렸지만 이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유정이 언니?”

“여, 여보세요? 슬비니? 무사한 거야!?”

유정이 생각 외로 큰 소리로 대답하자 슬비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네. 그렇게 큰 부상은…… 아니에요.”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슬비야, 특경대 사람들이 1시간 안에 건물 잔해들을 치울 수 있다고 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렴. 알겠지?”

거의 흐느끼다시피 말하는 유정의 목소리에 슬비는 그녀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유정이 언니.”

교신을 마치면서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던 슬비는 자신이 임무 중엔 항상 착용하던 검은색 자켓 역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왜 자신이 자켓을 입고 있지 않은지 의아해하던 그녀는 자신의 팔뚝에 붕대로 보이는 검은색 천이 칭칭 감겨져 있다는 것에 슬비는 자신의 팔에 감긴 이 천이 검은 양 멤버들한테 지급된 검은색 자켓을 찢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비는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건물 파편이 자신의 팔에 박혀버렸고 그로 인한 출혈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이렇게나마 급하게 응급 처치를 했다고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세하겠지?’

지금 이 곳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이세하밖에 없었다. 귀신이라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 부상당한 자신을 이렇게 치료해준 사람은 세하밖에 없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 사실도 슬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아, 이거 참. 어두워서 그런지 게임도 잘 안되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하는 주변이 어두워서 게임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툴툴대고만 있었다. 그런 세하의 말에 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소리쳤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태평한 말이 나오는 거야!? 조금은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싫었다. 자신을 치료해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버럭 소리나 지르는 자신이 슬비는 너무나도 싫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슬비를 눈앞에 두고도 세하는 평소하곤 다르게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것이 슬비를 더욱 자극시킨 꼴이 되었다.

“넌 항상 이런 식이더라, 이세하? 누구는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겨우 차원종들이랑 싸울 수 있는 수준인데 너는 그렇게 게으른 모습만 보이면서도 싸우기는 또 잘만 싸우더라? 사람 놀리는 거야!?”

어렸을 때 차원종으로부터 부모님을 잃고, 유니온 산하의 관리 기관에서 자라온 슬비였다. 가족을 잃게 만든 차원종들에게 복수를 해주겠다고, 그래서 그녀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위상 잠재력이 낮다는 이유로 클로저 요원이 되지 못할 뻔 했던 슬비였지만, 그녀는 그 노력 하나만으로 당당하게 정식 클로저 요원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우쭐해질 만도 할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슬비는 정식 클로저 요원이 되었을 때도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가 않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하의 존재 때문이었다.

[1차 차원 전쟁]을 종결시킨 전설적인 클로저 요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런지 세하가 검은 양 멤버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슬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세하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왜 자신은 저렇게 강하지 않은 걸까? 자신도 세하만큼의 위상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텐데… 더 빨리 부모님의 한을 풀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세하를 볼 때마다 아른거렸다.

“그래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노력해왔어.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너는 이길 수가 없더라고.”

개인 훈련이 아닌, 검은 양 멤버들과 같이 훈련을 받았을 땐 항상 세하와 슬비는 같은 점수를 받거나 정말 아슬아슬하게 세하가 조금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슬비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슬비는 그때 받았던 모든 감정들을 털어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끝마친 슬비는 눈을 감고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젠 내 이야기를 해도 돼?”

이어서 들려오는 세하의 목소리. 평소하고는 달리 매우 낮고 진지해 보이는 어조에 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을 듣기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위상 잠재력도 엄청 높고, 그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도 알고 있어.”

세하역시 슬비처럼 감정이 북받쳤는지 잠시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간에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다? 평일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를 가고, 거기서 친구들이랑 얘기도 나누고, 학교 끝나면 친구들이랑 놀거나 집에 가서 편히 쉬거나…… 그냥,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그런데 유니온은 나를 거의 반 강제로 클로저 요원이 되라고 하더라? 그저…… 그저 내 어머니가 전설적인 클로저 요원이라는 이유로, 내가 높은 위상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만 말이야.”

세하의 표정은 허탈함과 분노, 슬픔 등. 온갖 감정으로 뒤섞여있었다. 이제껏 ** 못한 세하의 표정에 슬비는 감히 중간에 토를 달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이상 나한테 기대를 쏟아 붓질 않을까하고 생각하다고 떠올린 게 이거야. 우습다고 비웃어도 좋아.”

세하가 자신의 위상 잠재력을 개발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쏟아 부은 기대를 떨쳐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세하는 멍하니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그저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이 세상은 그런 자신의 소망을 그렇게 들어주기 싫었던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동안 그 둘은 말이 없었다. 서로 자신들이 마음속에 꼭꼭 숨겨두고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보니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토닥거리던 사이었지만 그들은 같은 팀에 소속된 클로저 요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도 몰랐던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미안해.”

오랜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슬비였다. 항상 성격 차이로 다투긴 했지만 세하는 방금 전 자신을 치료해주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세하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도리어 역정을 냈으니, 슬비는 그런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싫어졌다.

“아니야, 나도 미안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거 같아.”

세하의 대답에 슬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멀거니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차라리 세하가 고함이라도 지르면 겸허하게 받아들일 각오라도 하고 있었지만 그마저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했으니, 슬비는 진짜로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몇 십분 뒤,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건물의 한 쪽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특경대 사람들이 구조 작업을 끝마친 것이다.

무사히 모습을 드러낸 세하와 슬비를 맞이한 사람들의 모습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유정과 은이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다행이라고 몇 번을 소리쳤고, 다른 검은 양 멤버들도 그녀들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그들을 엄청나게 걱정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세하와 슬비는 특경대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구급차에 탑승한 슬비는 지금 이 안에 또 다시 자신과 세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기, 이세하…… 아니, 세하야.”

또 다시 심호흡. 말해야만 한다.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고 슬비는 몇 번이고 자기 자신에게 되뇌었다.

“응? 뭐야, 갑자기.”

“고, 고마워. 이거 네가 해준 거지?”

슬비는 응급 처치가 된 자신의 팔을 세하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러자 세하는 쑥스러운 모양인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아무 말 없이 그저 자신의 한쪽 볼을 긁적이기만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이세하에 대해…… 세하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한 팀의 리더를 맡고 있는 사람이 같은 소속의 멤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도 못한 것은 최악의 실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인해서 세하가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세하도 마찬가지였다.

‘아, 정말…… 귀찮게 돼버렸네.’

이런 일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전같이 게임기만 갖고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항상 무뚝뚝한 모습만 보여주던 슬비가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은 그 모습을 본 후로는 세하한테도 약간의 변화가 생겨버린 것이다.

‘다음엔 대기할 땐…… 게임하지 말아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세하는 슬비가 알아채지 못하게 살짝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러다가 세하는 문득 방금 전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한 슬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세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었잖아.’

항상 사무적인 태도로만 일관한 슬비의 모습만 보아왔기에 그때 슬비의 모습은 세하에게 있어선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록 조금씩이긴 했지만, 오늘 일은 아직 부족한 면이 많은 검은 양 팀 중에서 가장 트러블이 잦은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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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스의 설정을 잘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세하는 검은 양 멤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위상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슬비는 비록 위상 잠재력은 낮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어엿한 클로저 요원이 된 노력파 캐릭이죠.

어쩌면 슬비가 세하에게 잔소리를 자주하는 이유는 세하와 성격 차이가 나서 생기는 것도 있긴 하지만 약간의 질투심이나 심술도 섞여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써 본 단편 소설입니다.
2024-10-24 22:21:2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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