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들의 바캉스
이리개 2015-07-25 1
본격적으로 휴가철이 왔다. 뙤약볕이 해변을 후라이팬 처럼 뜨겁게 달구었다. 시선만 돌려도 모래사장과 파도의 경계선을 거닐며 나 잡아봐라 하면서 꺄르륵 대는 바보커플이 눈에 들어왔고, 아빠처럼 보이는 남자가 헤엄쳐서 생긴 넘실대는 파도에 튜브를 끼고 놀던 꼬마들이 무섭다고 빼액거렸다. 한쪽에서는 뭐가 재미있는지 신나게 뛰어다니는 꼬마와 어떻게든 꼬마를 붙잡으려고 그 뒤를 쫓는 어른간의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어른이 만들고 있던 모래성을 꼬마가 부순 모양이다. 파도에 쓸려 온 파래 사이로 소라게가 남기고 간 모래 위의 작은 발자국은 파도거품에 섞이면서 바다로 흘러갔다. 하지만 지금 한 소년에게는 전부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다.
"후우..드디어 도착..우웁.."
세하는 아이스 박스를 들고 뜨거운 모래사장 위에 발을 디뎠다. 모래 알갱이가 해변 슬리퍼 속으로 들어와 발을 간지렸다.
발을 들어 털어보았지만, 모래알갱이들은 발가락 사이사이 더 깊숙이 들어갈 뿐이었다. 결국 발 터는 것을 포기하고, 울렁거리는 속을 가다듬었다.
"그러게 누가 차안에서 게임 하래?"
그떄였다. 청렴하지만 조용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하가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자, 핑크빛 단발을 숨기듯이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쓴 슬비가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저런 슬비의 눈빛을 한 두번 받아온게 아닌 세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엄마한테 용돈을 타면서 게임에 지르는 30살 먹은 백수를 보는듯한 표정으로 보면 버틸수가 없었다. 세하는 비지땀을 뻘뻘흘리며 슬비를 보고 힘겹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진정한 게이머는 말이지..어떤 시련에도 게임을 놓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멋지게 표정을 지어보아도, 새파란 안색 때문에 더 안쓰러워 보일 뿐이었다. 세하는 슬비의 시선이 한심하다는듯한 눈빛에서 측은한 눈빛으로 강화된 것을 보고 애써 외면한 채 해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넓은 바다가 마치, 슬비랑 유리의 눈동자 색 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슬비랑은 다른 좀 더 활발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소녀가 세하 옆을 지나쳤다. 긴 검은 생머리가 세하의 눈길을 끌었다.
"우와아~바다다!"
폴짝, 뛰면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유리의 뒷모습이 매우 즐거워 보였다. 세하는 그런 유리에 모습에 약간 흐뭇했지만, 곧바로 당황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야야!! 너 뭐해!!"
그 이유는 달리면서 옷을 하나하나 벗어던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별로 없는 해변이라지만 저런식으로 옷을 벗으면 좀 이상한 여자 취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하나의 취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세하는 멀미도 잊은채 유리한테 그런 오해가 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세하의 영혼을 담은 외침이 닿았는지, 유리가 뒤를 돌아보고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귀여움에 잠시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세하는 잠깐동안 잊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재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야! 너, 오, 옷을 그렇게 벗으면 어떻게!"
"괜찮아! 안에 수영복 입었거든~!"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아몰랑!"
첨벙-
경쾌한 물소리가 세하의 귀를 때렸다. 잠시동안 잊었던 울렁거림이 다시 돌아온 것도 모자라, 관자놀이도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런 세하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뒤를 돌아보자 뾰족한 흰머리의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 제이가 서있었다.
"아저씨말고 형이라고 불러."
형이 서있었다. 세하는 제이를 보고 무슨 할말이라도 있냐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이는 하얀 이빨이 보일정도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만 믿으라고."
세하는 제이가 자신을 도와주는구나 하고 짧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김칫국을 마신 것이었다. 제이는 그 자리에서 바로 웃통을 벗어던지고 바다쪽으로 달려갔다. 몸에 붙은 파스가 연륜을 나타내는 것 같았지만, "끼요오오오오!" 라며 이상한 기합을 지르며 달리는 제이의 모습은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이가 놓고간 파라솔을 줏어들고, 불쌍하는 눈빛을 보내는 슬비와 함꼐 자리를 찾아움직였다. 그녀의 눈빛이 이 단시간에 세번이나 바뀌다니, 세하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십여분 후.
파라솔 그늘아래, 돗자리에 누워 게임기를 만지는 세하는 잠시 눈의 피로도 풀겸 자신의 동료들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이가 거대한 수용돌이를 만들며, 유리와 슬비랑 놀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보인다고 믿고 싶다. 나잇값 못하는 아저씨구만 세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냥 눈을 붙이는게 피로를 푸는데 훨씬 좋겠다 싶어 그대로 몸을 뉘였다. 천천히 의식은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니, 빨려들어가고 싶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세하의 두개골을 흔들었다.
"으어헤크거!!"
갑작스러운 고통에 꼴사나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픈 머리를 감싸쥐고서 바닥에 뒹굴거리던 세하는 분노했다. 놀러왔을 때부터 동료들의 엉뚱한 행동에도 참아온 자신이었지만, 이렇게 다이렉트 어택을 먹으면 어태까지 중첩된 분노가 폭발할 수 밖에 없었다. 인상을 찡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을 공격한 물체를 찾아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자 세하옆, 1미터정도 떨어진 곳에 배구공 하나가 있었다. 세하는 가까이가 배구공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한 손으로는 들 수 없는 묵직함이 세하의 성장판에 전해져 왔다.
"이거..물을 채웠잖아?!"
그렇다. 공기대신 물을 채운 공이었다. 어떤 정신나간 인간이 이런 공을 사람한테 던진단 말인가. 세하가 컬쳐쇼크를 먹고 정신을 못차리던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세하는 공의 주인이 말을 걸었다 생각하고 그 사람을 쳐다보며 무작정 소리쳤다.
"이런걸 사람많은 곳에서 가지고 놀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죄, 죄송합니다.."
여름에는 안 어울릴정도의 새하얀 머리를 가진 소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훤히 드러난 이마에는 이상한 종잇조가리를 붙이고 있었지만, 화가난 세하한테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진짜 이거..와, 아프다니까요? 네? 맞았을 때, 소행성이 제 머리에 충돌한 줄 알았다니까요?"
"죄송해요오..."
고개를 아까부터 계속 숙인채 울먹이며 말하는 하얀 소녀를 보자, 세하의 화도 조금은 가라 앉았다. 화가 가라앉자, 세하도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후..사과 하셨으니 됐습니다. 앞으로는 사람 많은 곳에서 이런거 가지고 놀지 말아주세요."
"감사합니다.."
꾸벅-
갈때조차 고개를 숙이고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모습이 인파에 가려 안보일 때 즈음, 세하가 혼자 중얼거렸다.
"잠도 꺳는데..좀 돌아다닐까."
아이스 박스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내어 마시고는 엉덩이에 붙은 모래알갱이를 털며 일어났다. 어디로 갈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위가 밀집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래밟는 소리가 기분좋게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가 뺵빽히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바위 사이사이에는 게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고인 물에는 조그만한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바위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해변보다 사람이 훨씬 적었다. 이쪽이 더 조용한 것이 세하의 마음의 쏙 들었다. 하지만 그 때,
"키키킥! 어딜가? 있는거 다 내놔!"
커다란 바위 뒷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누가 삥이라도 뜯는건가..'
게임하는 것 이외에 만사가 귀찮은 세하였지만, 아무래도 유니온에 소속된 클로저다 보니 책임감이나 정의감이 있었다. 세하는 말리기 위해 바위 뒷쪽으로 달려갔다. 모퉁이를 돌자, 나타난 것은 삥을 뜯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삥을 뜯기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에잇! 에잇!"
뾰족뽀족한 파란머리의 소년이 막대기로 게를 찌르고 있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막대기 두개로 게를 이리저리 굴리니 오히려 게가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쿠하하하! 받아라, 연옥!!"
뽀족한 파란 소년이 막대기 두개를 땅에 꽂고서는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그러자 모래가 사방으로 튀어 날아갔다.
'..모퉁이를 돌면서 멋지게 "그만둬!" 라고 소리지를려고 했는데..다행이다..'
누구도 모르게 속으로 안도하는 세하였다. 세하는 3시간도 안되어,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피로 및 고통, 세마리의 차원종을 한번에 잡았다. 피로를 풀러와서 오히려 피로만 쌓이는 것은 기분이 탓이라고 믿고 싶은 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