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 그칠 무렵 -김기태 단편-

O워보이O 2015-07-21 0

 "이런, **! 아직은 안 돼. 안 된다고!"

 김기태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수천 마리의 개미가 뇌를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뻐꾸기를 놓

치지 않았다. 강철로 만들어진 통신기기 뻐꾸기는 언제나처럼 그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날, 내려보,지 말란 말이야......!"

 칼날이 거꾸로 뒤집히면서 부드러운 검기가 뿜어져 나갔다. 말 그대로 산들바람이었다. 차원종들은 자신이 베인 줄도 모른 

채 썰려나갔다. 유 동 중. 움직임 가운데 정적인 힘을 깃들게 만든다. 김기태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좋아요. 이사회에서 눈여겨볼 만은 하군요. 연줄만 남은 줄 알았더니, 의외로 유용할지도 모르겠어요."

 뻐꾸기를 통해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벌쳐스의 감찰관이었다. 아직 만난 적도 이름도 모르는 상대였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재수없고 기분나쁜 여자라는 것이었다.

 "다 죽였어. 이제 만족해?"

 "그럼 이제 유니온에 복귀해주세요. 곧 처리부대 두 명이 실무에 배치될 테니까 그때는 잘 부탁드려요."

 "칫, 쉴 시간도 없군. 그런데, 처리부대에 여자는 있어?"

 "한 명 있지만 꼬마예요. 사실, 두 명 다 꼬마이긴 하죠."

 "의욕 안 생기는데......"

 김기태는 바닥에 가래침을 퉤 뱉었다. 침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깜짝 놀란 그는 침을 밟아 지워버렸다. 혹시 봤을까? 김기

태는 재빨리 뻐꾸기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자신이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계의 눈치를 살필 수는 없는 법이다.


 유니온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벌쳐스의 **도, 차원종 군단의 의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다른 세력도 마

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 것은 오직 김기태뿐이었다. A급 요원은 단순히 강력한 위상력만으로 올

라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지휘능력과 공을 쌓아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게 A급 요원이었다.


 "나는 여기서 끝날 남자가 아니야."

 김기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힘을 잃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겪어** 않으면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었다. 문득 벌쳐스의 위상력 주입 실험이 떠올랐다. 

김기태가 참관한 것은 1차 위상력 주입 실험이었다. 생존자는 0명. 한 마디로 실패한 인체실험이었다.

 강제로 위상력이 주입된 아이들은 전쟁고아와 벌쳐스에 팔려온 아이들이었다. 아이로만 실험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가

장 반발이 적은 인간이 10대 초반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그 냄새에 적응될 때쯤에는 그보다 끔찍한 풍경에 익숙해졌다.

 차원종은 임무에 따라 인간을 죽일 뿐이다. 하지만 벌쳐스는, 아니 인간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죽음보다 더한 짓도 동족에게 

저지를 수 있는 종족이었다. 이런데도 인간답다는 말이 동정심 대신에 쓰인단 말인가? 김기태는 헛웃음을 흘렸다.





 헤카톤테일은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A급 요원 김기태는 차원종의 전 군단장을 퇴치한 클로저로 기억되겠지. S급 요원도 노

려볼 만 했다. 거기에 사라져가는 위상력도 되찾을 수 있으니,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말이지, 나는 바보가 아니란 말이야."

 벌쳐스의 입장에서 그는 그저 유니온에 심어진 배신자 중 하나일 뿐이다. 배신자는 언젠가 배신한다. 배신자는 언젠가 배신당

한다. 차원전쟁을 통해 피부로 배운 뼈저린 교훈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좋은 선택지가 내려올 리 없었다. 분명, 꿍꿍이가 

있을 터였다.

 '지금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놀아나 주겠어. 그래도 김기태님을 개나 늑대 취급하는 건 곤란해. 나는 인간이거든.'

 허공에 검을 휘둘러보았다. 재빨리 칼날을 뒤집으며 깊이 베어냈다. 산들거리는 검기가 작은 회오리를 일으켰다. 작고 예쁜 

소용돌이였지만 조금이라도 닿았다간 손이 **짝이 될 것이다. 산들바람 베기. 김기태가 개발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아직 그

밖에 쓰지 못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줄 생각도 없었기에 산들바람 베기는 김기태만의 기술이자 그가 은

퇴함과 동시에 사라질 기술이었다.


 요란한 소음에 김기태가 고개를 들었다. 저 너머에서 위상력을 사용할 수 있게 개조된 오토바이가 보였다. 차원종이 득시글거

리는 거리를 저렇게 누비는 사람은 데이비드 국장이나 선우란 정도였다. 그리고 탈것이 오토바이라는 걸 보면 상대가 누구인

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유니온의 검은양 팀인가?"

 어떤 꼬맹이가 오던 변할 것은 없었다. 검은양 팀 뿐만 아니라 늑대개 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헤카톤테일을 처치하고 유니

온의 S급 요원이 될 것이다. 위상력을 회복할 수단이 없는 이상,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강대국의 야망이든 벌쳐스의 **든 

유니온의 유치한 이상까지 모두 상관 없었다.


 차원전쟁을 겪으면서 김기태는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렸다. 산처럼 쌓인 시체, 잘린 팔을 들고 뛰어다니는 군인, 어서 죽여달라

고 울부짖는 부상병, 인간이 산 채로 타들어가는 절규와 끈적끈적한 냄새, 인간의 어두운 면모부터 차원종의 막강한 힘까지

전부...... 인류는 결국 차원종에게 패배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전쟁은 그 시기를 늦췄을 뿐이다. 

 "저기, 선배님......"

 오세린이 다가왔다. 김기태는 대답대신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당황한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우물쭈물거렸다. 희망도 승기

도 없는 전쟁이라는 걸 몇 번이나 말해줬는데도 오세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의 의지니, 클로저의 힘이니 말도 안 되는 망

상을 품을 뿐이었다. 짜증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검은양 팀의 멤버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녀석도 오세린처럼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김기태가 잃어버린 빛, 과거 차원

전쟁 때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죽어가던 동료와 민간인들의 비명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기서 소리칠 수는 없었다. 그건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는 거였다. 대신 김기태는 자신을 포장하기로 결심했다.


 철저한 나르시스트, 자신만을 믿는 허세꾼 A급 요원 김기태의 모습으로. 언제나 그랬듯이.
2024-10-24 22:36:5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