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세하와 슬비의 게임
불기둥이나타나타 2015-07-21 45
00.
"잠, 잠깐... 세하야."
차분하고 당당한 목소리가 아닌, 묘한 망설임이 이세하를 붙잡았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휴대용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며 막 동아리 방을 나서려던 그가 별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새로운 게임... 하지 않을래?"
새까만 눈동자에는 애처롭게 떨고 있는 분홍빛 소녀가 보이고 있었다.
01.
검은 양 팀의 동아리 방은 언제나 어수선하다. 고작 다섯 명밖에 되지 않지만, 건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사람. 서유리나 미스틸테인 중 한 명만 있더라도 동아리 방은 활기가 넘치다 못해 소란스러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며칠 동안 강남역 방면으로 호출을 받은 서유리는 아직 외근 중이었고, 미스틸테인은 수업이 다시금 시작된 신강 고등학교의 여학생들에게 하굣길에 둘러싸여 몇 시간 전 강남 CGV로 놀러 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있는 듯 없는 듯 신문을 보거나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면서도 간간이 아저씨의 유머 감각을 보여주어 분위기를 급격하게 반전시키는 주범, J마저 본부에서의 호출로 인해 김유정과 함께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후, 또 죽었네."
하지만 이세하는 이런 날을 좋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을 아무런 방해 없이 즐겁게 즐길 수 있으니까. 조금 아쉬운 것은 같이 게임을 즐길만한 한석봉이 아르바이트로 인해 혼자 해야 한다는 점. 뭐, 그 정도뿐이었다.
"이세하. 조금 조용히 해주겠어? 오늘 출동이 없더라도 우리는 아직 업무 중이야."
"아, 니예 니예...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찌릿한 눈초리에 이세하의 뒷골이 서늘해졌다. 원래 까칠하기는 했지만, 평상시라면 넘어갔을 법한데 오늘따라 그녀의 감각이 곤두서있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지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각했던 그가 다시금 게임기를 잡으려는 찰나,
"야! 너 게임기 당장 안 끄면 진짜 부숴버린다!"
다시금 이슬비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워낙 큰 목소리에 순간 이세하는 게임기를 떨어뜨릴 뻔할 정도였다. 그래도 트라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스윽 이슬비를 훑었다.
"이. 세. 하."
문서작업을 하고 있던 것일까. 잘 쓰지 않는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채로 노려보는 소녀는 정말로 뱉은 말을 지킬 것 같은 모습이라 이세하는 그냥 조용히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하아, 알았다. 알았어. 끄면 되잖아."
이렇게 놀 거리를 잃어버린 게이머는 딜레마에 빠졌다.
들리는 건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짹깍짹깍 돌아가는 양 모양의 시계뿐. 게다가 퇴근까지는 30분이나 남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몹시 애매한 상황.
잠시나마 생각을 하던 이세하는 무언가 마음을 굳힌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디 가는 거야? 이세하."
"...바람 쐬게."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터덜터덜 밖으로 나가버렸다.
02.
검은 양 팀의 리더. 이슬비는 고요함을 좋아한다. 특히 조용한 방 안에서 드라마에 집중하는 건 더욱 좋아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멤버들처럼 업무 중에 취미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업무시간에 충실한 그녀는 평상시와 다른 분위기라도 복구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보고서 작성과 다음 일정들을 체크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 날이었다. 다름 아닌 며칠 전에 보았던 영상이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여느 때처럼' 업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이슬비는 '여느 때처럼' 새로운 드라마를 보기 위해 인터넷 세상을 떠다녔고, '여느 때처럼' 훌륭한 작품 하나를 발굴해냈었고, '여느 때처럼' 감상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문제가 시작되었다. 현재로부터 약 30년 즈음 된 그 드라마가 이렇게 신경을 쓰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모른 이슬비였다.
두 사람의 들뜬 호흡. 서로 맞지 않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자연스러운 율동.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러운 그 움직임.
힘든 것이 눈에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그것'을 즐기는 두 남녀의 모습이 너무나 신경 쓰이게 하였던 것이다. 덕분에 항상 6시간 숙면을 취하는 패턴마저 깨져 밤잠을 지새울 정도였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다시금 그 모습이 떠올라버렸던 이슬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업무 시간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살짝 흥분한 탓일까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큰 움직임에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흘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이세하는 게임에 빠져 이런 그녀의 모습을 놓쳐 민망함을 피할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집중하려는 그때 이슬비는 영감을 얻었다.
자주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였지만, 확실히 그라면 자신이 가진 문제를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같은 남자인 J 또한 그의 능력에 대해 넌지시 긍정을 표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 부분에선 긍정적으로 느끼는 부분이 있었기에 자연히 주억거려지는 이슬비였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 그녀는 약했다. 서유리처럼 자연스럽지도 못했고, 미스틸테인처럼 순수하지도 않았기에 좀처럼 그에게 말을 붙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후, 또 죽었네."
그렇게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순간, 이세하가 게임기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앗...!'
빤히 쳐다보았던 것을 들킨 듯한 기분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이슬비였다. 그리고 그녀는 악수를 둬버렸다.
"이세하. 조금 조용히 해주겠어? 오늘 출동이 없더라도 우리는 아직 업무 중이야."
"아, 니예 니예...잘못했습니다."
이젠 반쯤 포기했었기에 평상시라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그녀가 실수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말을 취소해버리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이. 세. 하."
"하아, 알았다. 알았어. 끄면 되잖아."
그런 그녀의 선택 때문에 벌어진 감정의 골은 점점 더 깊어졌고,
"어디 가는 거야? 이세하."
"...바람 쐬게."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슬비는 없던 두통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03
"크... 더워...."
이세하는 동아리 방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채 스무 걸음도 가기도 전에 피부에 엉겨 붙은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에게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함을 적극적으로 성토하고 있었다.
이렇게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에어컨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이 멍청한 행동임은 너무나 자명했다.
그러나 이미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바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돌아가는 것은 조금 머쓱하게 느껴지는 그였다.
자존심과 현실의 충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더위에 4층에서 2층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것은 끔찍하게 싫었다. 결국, 그는 발걸음을 되돌리기로 했고,
-철컹
이세하는 자판기 앞에서 허리를 숙여 캔 두 개를 손에 쥐었다.
본인이 마시며 들어갈 콜라 한 캔, 이슬비에게 가져다줄 커피 한 캔.
자신의 짧은 외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절대 더워서가 아닌, '이슬비에게 음료를 가져다주기 위해 왔다’는 동아리 방에 들어오기 위한 목적을 부여하기 위한 나름의 수단이었다. 덧붙여 어쩐지 평소보다 날카로운 슬비를 진정시키기 위한 뇌물이기도 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날 듯 후덥지근한 복도에서 손에 쥔 두 개의 알루미늄 캔은 마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그런 시원함을 느끼며 이세하는 다시금 동아리 방으로 들어섰다.
"아....."
동아리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시선엔 이슬비가 가득 들어찼다. 물론 마주 보는 이슬비의 눈에도 그가 가득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렇게 가만히 서로를 쳐다본 적이 있었던가. 라는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원래 사람을 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두 사람이다. 게다가 이런 미묘한 상황이 바깥의 더운 공기만큼이나 숨 막히게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
이세하의 한 마디에 얇은 빙판 같던 침묵이 깨졌다.
“마시면서 해.”
그제야 이슬비는 그의 손에 들린 캔커피를 받아 쥐었다.
“…고마워.”
이세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뇌물’이 효과가 있었던 탓인지 이슬비의 기세도 어느 정도 누그러진 듯했다. 덩달아 시곗바늘도 퇴근 시간인 6시 정각을 향하여 짹깍이고 있었다.
슬슬 짐을 챙기면 정시에 바로 퇴근할 수 있었다.
딱히 짐이라고 할 것도 그다지 없었지만, 그는 준비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 잠깐... 세하야."
그때 이세하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
"새로운 게임... 하지 않을래?"
"아....."
뒤돌아서 바라본 시선의 끝엔 푸른 눈이 있었다.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요원복 치마의 끝을 아래로 잡아 늘이고 있었다. 살짝 깨문 입술에 혈기가 돌아 평소보다 유독 붉어 보였다.
“그래.”
다시 한 번 두 시선이 얽히고, 문이 잠겼다.
04.
J는 이런 날을 싫어한다.
푹푹 찌다 못해 햇볕에 타 죽는 느낌이 드는 이 날씨에 바깥으로 출장을 갔다 와야 한다니. 자진해서 검은 양 팀을 맡은 거지만 이럴 때마다 은근히 후회되곤 했다.
이런 사소한 생각이 발단되어 데이비드 형은 왜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했을까 하는 물음부터 최근까지 있었던 신서울 용의 영지 출현 사건까지.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떠다니다 사라졌다. 왠지 생각이 부정적으로 깊어지는 것 같아 J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래도 J는 이 유쾌한 검은 양 팀이 싫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는 건 하나 있지."
반짝 새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를 그린 그는,
"꼭 테이스팅 해달라고. 유정씨. 좀 더 신경 쓴 나의 특제영양 드링크를 말이야."
"하아, 네네 물론이죠 J씨."
보온병에 담긴 정체불명의 액체를 살랑살랑 흔들며 옆에서 걷고 있던 김유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J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당사자는 한숨을 푸욱 내쉬곤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유정씨. 볼이 왜 그렇게 빨게? 더위라도 먹은 거야? 아니면 특제드링크를 너무 기대하는 건가."
"흥, 신경 쓰지 마세요. 별거 아니니까요."
"흠. 그래? 그럼 다행이군. 그래도 건강이 제일이야. 일하다 아프면 본인만 손해라고 유정씨. 아, 어차피 요즘 유니온은 4대 보험이 적용되니 그나마 다행이군. 난 퇴직할 때 보니 없어서 슬펐는데 으하하핫!."
그렇게 J가 자조적인 개그를 들으며 김유정의 마음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동아리 방의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나저나 유정씨. 놓고 온 거 말이야. 그렇게 중요... 응?"
사실 J는 퇴근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같이 본부를 찾아갔던 김유정이 놓고 온 물건이 있다고 했기에 다음날 가지고 돌아가도 상관없었던 글러브를 가지러 온 상황이었다.
-앗... 이세하... 아프잖아!
그러나 모두가 퇴근하고 조용해야 했을 동아리 방은 평상시와 달랐다. 그래, 분명 인기척이 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어야만 했다.
-미, 미안.. 생각처럼 쉽지 않단 말이지.
-하윽...! 또 그런다!
얇은 나무문을 두고 들려오는 달뜬 호흡 소리와 미묘하게 삐걱대는 가구의 움직임에 J는 반사적으로 김유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김유정의 눈이 팽글팽글 돌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게다가 이 상황을 어찌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 또한.
물론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J 역시도 다를 바 없었다.
"이, 이거... 그, 그, 그거. 맞죠.... J씨?"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김유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J가 먼저 움직였다.
05.
쾅! 소리와 함께 경첩이 부서져 나가며 문이 열리고,
"얘, 얘들아!"
찢어질 듯한 김유정의 목소리가 동아리 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목격한 것은 책상에 몸을 기댄 채 격한 운동을 하고 있던 남녀였다.
그러나.
"응? 왜요 유정누나?"
태연스러운 이세하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면서도 바닥에 깔린 여덟 방향의 화살표 매트를 밟는 것을 잊지 않는 훌륭한 게이머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문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즐겁게 게임을 즐기고 있던 이슬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거의 분홍빛 머리 색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익어버린 상태였다.
"......"
"어, 이슬비. 너 죽었는데?"
둔감하게도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이세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발판을 밟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른보다 잘하는 그녀답게 금세 진정을 되찾은 이슬비는 주위에 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후우, J씨. 아무리 급하셔도 노크는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리고 유정 언니도요."
J와 김유정에게 면박을 주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 모습에 그제야 석상처럼 굳어있던 두 사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으, 으하하핫! 오늘따라 힘이 넘쳐서 말이지! 대장. 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어."
"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거람. 하하... 미, 미안하다 애들아."
그렇게 한없이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둘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세하는.
"아, 죽었다."
TV 속 비치는 'Game Over'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다소 굴곡이 있었지만 어쨌든 오늘도 동아리 방은 평화로웠다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End>
---------------------------------------------------------------
이거 비속어 표현이 굉장히 애매하게 필터링되네요.. 읽고 괜찮았다면 꼭 추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