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표 (*시영 관련 스포일러 ~재해복구까지)

마르스립 2015-07-20 0









"당신같은 사람이 있었더라면, 내가 지금 이 길을 선택하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가능성 뿐이었다.


시영의 삶은 높은 확률로 이러한 결말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이 시대에, 그 부모에게서, 시영으로서 태어난 이상, 미래는 그렇게 대단하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영은 가물거리는 남자의 눈꺼풀에 손가락을 얹고 속삭였다. 까만 플라스틱 손잡이가 남자의 뺨에 닿았고, 눈꺼풀에는 여전히 붉은 빛이 머물렀다. 흔한 혼란상태. 기억은 해도 좋고, 하지 못해도 좋다. 기억을 해주길 바라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고,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궤적은 이미 그려졌고, 공식은 세워졌다. 고작해야 그뿐인 이야기다. 만약을 가정해봐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옥은 언제나 곁에 있다. 시영은 그 한가운데 있다.









시영은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자신은 어딘가 어긋나있다. 고칠 수 없는 부분이 잘못되어있고, 교정할 수 없는 부분이 다르다.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이해받을 수도 없는 어딘가가 틀어져서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 그 사실을 눈치챘던 때는 언젠가 거울을 들여다보던 날이었다. 예전 언젠가 어린 소녀들이 자신의 유별함을 알기도 전, 유별함을 자랑처럼 지니기 전, 다른 것들에 민감할 적. 보통은 어긋난 점보다는 남과 같은 점을 찾을 무렵에.


때문에 누구도 시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해보려하지 않을 것이다. 시영은 그것을 막연히 알았다. 자신이 어딘가 어긋났고, 다르고, 그것은 잘못되어있으므로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시영은 안방에 붙어있던 자기 어머니의 작은 손거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숨을 잠깐 참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붙잡았던 공기를 삼켰다. 이렇게. 그래, 이렇게.



그래.

이렇게 숨을 죽이고, 삼키면 교정 불가능한 이 마음만은 숨길 수 있을지 모른다.




목으로 미끈한 유리구슬 하나가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차갑고, 소화가 되지 않고, 영양가도 없어서 그저 목을 타고 넘어갈 뿐인 유리구슬이었다. 차갑고 매끈하지만 말랑해지지는 않아서 둥그런 가시를 삼킨 것처럼 목이 아파왔다. 시영은 엄마의 작은 거울에 얼굴을 들였다. 창백하고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목이 졸린 것처럼. 불편한 웃음은 의외로 한동안 유효했다. 균형을 잃기 전까지는.



시골 학교란 신기하게도 도시에서 하기 어려운 일들이 간편하다. 특히나 차원전쟁의 중심지에서 빗겨난 시골동네는 마치 전쟁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예사스러웠다. 가령 개구리를 잡아와 해부하는 것. 워낙에도 개구리를 잡아다가 못된 장난을 치는 애들이란 더러 있었고 실험이란 이름만 붙지 않았지 대충 죽여서 배를 가르니, 다리를 잘라 굽니 하는 일도 가끔씩은 있었다. 다만 과학실에서 핀셋이니 칼을 붙잡고 놀리는 일이 없다 뿐이다. 모여서 하는 일이야 조금 어색하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학급 인원은 기껏해야 열 여덟쯤 되었다. 세 명에 한 마리씩 여섯 마리 개구리가 네 다리를 벌렸다. 자, 마취부터 시키고. 산발적인 웃음이나 짜증섞인 핀잔이 오갔다. 야, 대충 넣으라고. 싫어 징그러. 눈 뜨고 해. 아, 싫다고 니가 하라고. 야, 아. 



"어?"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시영은 그 순간을 여러번 생각해보려고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누군지 안다면 또 어떨까. 어차피 그 시절 사람들은 다 죽어버려서 어차피 기억할 가치도 없었던 일인도 처음이란 늘 날카로운 인상을 주고,그 인상은 형체도 없이 길게 남는다.



"야, 쟤 봐봐."



시영은 그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어떻게 바라보았다던 기억은 생생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반응은 그저 목소리만이 남았고, 길고 또렷하게 남은 것은 그 순간의 감촉뿐이다. 메스의 날이 날카로우니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장갑을 끼고 핀셋과 메스를 세척하고, 차갑고 날카로운 것을 부드럽고 축축한 것에 넣고, 손끝에는 미미한 전율이 흘렀고 그게 계속됐고 끝나지 않았던 기억. 작은 근육은 두근거렸었지. 이상한 소리가 났었지. 목이 졸린 것처럼. 그래, 마치 시영이 숨을 참듯이.



"...시영아!"



시영은 이름을 불리고 나서야 입 안이 달아진 것을 깨달았다. 숨을 참지 않고, 참은 숨을 삼키지도 않았다. 아주 달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뭔가 참지 않았구나. 이젠 버려지겠구나. 어긋났구나. 시영은 입안에 고인 달콤한 침을 삼켰다. 목 안이 매끈하고 따뜻했다. 입술을 핥았고, 눈을 감았다. 눈 앞이 캄캄했다. 이젠, 버려지겠구나.



아이들이란 다름에 민감했다. 



사건 단일로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고,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 날로부터 시영은 자신이 어디론가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그저 고요했다. 다른 것 없이, 이상한 일 없이 지나쳤다. 노트가 없어지고, 책이 떨어져있고, 실내화가 사라지고, 청소시간에 혼자 남거나, 도시락이 책상 위에 엎어져있거나 하는 사건들은 아주 기묘한 속도로 진행되어 그 공간에 있는 아이들 모두가 행동을 같이하고 있을 무렵에는 아무도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영의 대처도 한 몫을 했다. 시영은 그때까지 괴롭힘을 당한 적 없었던 사람답지 않게 모든 일에서 최악을 상정하고 행동했다. 노트와 필통은 언제나 여분을 들고 다녔고, 책은 열쇠 채운 사물함에, 실내화를 신을 때는 안을 확인하고, 청소는 홀로. 점심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 어린애가 하는 대처라기엔 지나치게 침착하고, 고요했다. 아무도 그것을 괴롭힘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그랬다. 


몇번인가는 그냥 당해주어야 했을 것을 꿋꿋하게 버텨낼수록 행동은 점점 포악하고 음습해졌다. 화장실에서 나올 수 없게, 또는 들어갈 수 없게한다. 책상을 뒤로 밀어놓거나, 숙제를 훔친다. 아이들이지만 그네들끼리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태가 나지 않게 할 일이다. 때리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사람 수가 적어 금방 들키고 만다. 시영의 부모가 아무리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리고 아이에겐 애초부터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이었어도 곁에 있다는 것은 시영에게 딱 물리적인 선에서만 방패막이가 되었다. 다만, 그날은 도가 조금 지나쳤다. 아이들이 무지했기 때문이었고, 시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차원전쟁 중에 살았지만 그 한가운데 있지는 않았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그 뿐이었다.


잠깐 갇혀있으면 그만이고, 잠깐 가둬두어도 그만일거라고 생각한 안일함. 그 과정이 너무 예사로운 것이 되었던 상황. 피해자가 되기엔 모든 것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았던 시영과 완벽한 가해자가 되기엔 무지했던 아이들. 전쟁 중심지에서는 빗겨난 시골학교라는 지리적 환경. 마침 신경가스를 실험해야했던 벌처스와 민간인에게 여파가 있을 실험을 묵인한 유니온 관계자가 있었다는 사실, 신경가스가 실제로 인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는 문제 등, 사건이 일어나도록 이룬 요인들은 교묘하게 그 한 자리에 모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연이었고, 어떻게보면 일어날 일이었다.







"앞으로도, 고체로 된 음식은 먹기 힘들거야. 식도, 위, 장 뭐가 됐든 음식이 지나갈 경로는 앞으로도 계속 기능하기 어렵겠지."

"위염...같은 건가요?"

"...글쎄, 이걸 위염같은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아프지 않은데요."

"네가 어리기도 하고, 내장에 직접 분진을 받아들인게 어떻게든 몸에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으로선 그것도 알 수가 없지만. 우리 의료기술론 네 상태를 알 수가 없어. 일반적인 검사결과로 보면 넌 지금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거든. 그 머리색 변화로 봐선 위상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위상력을 측정해보면 통상적인 위상능력자 수준도 아니고."

"모르겠다는 말인거죠?"

"똑똑하구나."

"그런 말, 가끔 들어요."



차트를 넘기던 남자는 난색을 표했다. 니코틴 원액 기반의 대 차원종 신경가스는 차원종에게 빠른 효과를 보이기는 했지만, 빠른만큼 차원종들의 경계심을 쉽게 샀다. 소녀가 들이킨 신종 신경가스는 기존 제품을 토대로 이차원 분진과 식물형 차원종의 화분을 섞어 개량한 것으로 보다 차원종들의 경계도를 낮추고, 더 나아가서는 차원종 스스로가 현혹되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목적으로 제조되었다. 다만, 이차원 분진의 사용이 인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실험의 목적은 신종 신경가스의 대차원종 효과검증과 더불어 가스 휘발 후, 잔여물질에 대한 인체반응실험을 겸하는데 있었다. 직접노출은 아무리 외지고 작은 시골 학교라도 리스크가 있었다. 



다른 많은 선택지 가운데 학교를 빌리고, 시행일자에 맞춰서 요원들을 파견해 실험 전 학생과 교직원들을 대피시키는 절차를 밟은 것도 다분히 의도가 느껴지는 행위였다. 특히나 안전확인은 보험의 일환이었다. 생각해보면 비용만으론 다분히 손해보는 장사였다. 장사를 한다면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게 마련인데, 의심할만한 사람들은 매수당했고 의심하지 못할만큼 어리숙한 사람들은 단순한 셈에도 어두웠다. 



아무리 물정에 어두워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될 일이었다. 근처에 넓은 공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학교를 빌리는 돈보다, 버려진 공터에 간이 학교를 세워놓는 비용이 더 적게 들었을 것이다. 학교는 위상변곡률이 낮은 장소에 설립된다지만 벌처스의 연구소는 더더욱이나 변곡률이 낮아 차원종의 개체수 컨트롤에 용이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왜 하필이면 벌처스의 공장이나 연구소와도 거리가 있는 이 마을에서 실험이 진행되어야 하는지, 하필이면 학교인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궁색한 변명만 뒤따랐다. 전자는 민간인의 대피훈련을 겸한다는 말로, 후자는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실전과 같은 연습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실험 중에는 안전요원을 배치하여, 후일 간접노출로 부작용이 나타나더라도 '벌처스는 할만큼 했다.' 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별 필요없는 것처럼 보였어도, 결과적으로 이 보험은 부모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유효하게 작용하였다. 안내방송도, 확인도 했다. 시영에게 일어난 일은 본인의 부주의로 비롯한 사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의료지원에 배상금까지 편의를 봐준다. 어차피 어려운 형편에 감당하기 어려웠던 아이가 아닌가. 



어차피 이젠, 무엇인지도 모를 아이가 아닌가.



차원전쟁으로 클로저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만 해도 클로저의 특성이나 위상력 발현에 대해 지식이 높았던 시대는 아니었다. 가령 위상능력자는 조기에 위상력이 발현되면서 신체상의 변화와 특이사항을 보인다, 고 하는 기본적인 특성조차 상식이 되지 못한 시대였다. 시영의 경우에는 위상능력이 발현되었다기 보다는 위상력을 가진 무언가를 '소화'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매커니즘이야 어찌 되었든 좋았다. 예의 사건 이후로 시영의 모발은 색이 한없이 옅어졌고, 주변인들은 물론이고 부모와의 유사성조차 금방 잃어갔다. 극단적으로 평화로워 실험이 아니었다면 차원종을 볼 일도 희박했을 이들에게 시영의 변화는 그저 불쾌하고 이상스런 일에 불과했다. 돈과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바꿀만큼. 원래도 사랑스러워 못견딜 아이가 아니었고, 이젠 무엇인지도 모를 아이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시영의 예감은 쉽게 맞았다. 나는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지 않는다. 부모조차 받아들일 노력 못 할 아이를 누가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해줄까. 시영은 숨을 잠시 참았다. 강한 진통제를 주사로 한 앰플 맞고 났음에도 위장에 불을 지르고, 텅 빈 주머니를 쥐어짜내는 듯한 통증이 온 몸을 내달렸다. 시영은 볼에 모인 숨결을 삼켰다. 달각. 달각 거리며 공기로 만든 유리구슬은 아무것도 삼키지 못할 식도를 타고 공허한 위장으로 굴러 떨어졌다. 텅 빈 위에 철렁하며 묵직한 감각이 달렸다. 눈을 감았다. 코끝에 황홀했던 향기가 스쳤다. 식물형 차원종의 화분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달콤하고, 그 누구도 버림받지 않는.



공평하게 죽어가던 그 광경.



거기로 돌아가고 싶었다. 혼자가 되고, 혼자가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그 순간으로 회귀하고 싶다. 모두가 공평하게 죽어가기에 아무도 서로를 바라지 않던 그 풍경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달콤했던 향기와 죽어가면서도 코끝의 유혹에 못이겨 학교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하던 저열한 것들과 열린 문으로 다가다가 사살당하던 괴물들. 폐를 열어 향을 삼키면서 속이 쥐어짜낸 듯이 타오르면서도 그 광경 속에서 시영은 현관을 찾아 걸었다. 비상구도, 창문도 아닌. 멀고, 아주 멀었던 현관을 향해서 산책하는 것처럼 조용히, 사뿐사뿐 걸어나갔다. 파랗고, 녹색, 노란색, 보라색, 빨간색 체액들이 튄 창문에 손끝을 눌러 길고 긴 이정표를 만들어가면서. 


언젠가 다시 돌아서 여기에 올 수 있을까, 생각했다. 






네트워크에서 엄청나게 욕을 먹고 있는 언니이긴 하지만 제 눈에 예쁜 언니라ㅜㅜㅜ...

트위터 쪽의 전력도 없어지고 해서 게시판에 올려봐요 혹시 같이 시영언니 토크라도 하며 놀아주실 분이 계실까 해서...

좀 이어지지 않을까요ㅜㅜ 전부 날조긴 하지만.

2024-10-24 22:36:5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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