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김유정편: 악화-

Maintain 2015-07-16 6

공복에 약을 먹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캐롤을 보러 가는 게 부담이 되어서 그런지, 속이 조금은 쓰리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애들한테 걱정 끼치는 것도 싫고. 

캐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게이트를 탔다. ...이런, 게이트만 타는 건데도 또 현기증이 나는군. 안 되겠어. 빨리 약을 타야...

"...?"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원래 캐롤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군.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어디 잠깐 자리라도 비운 건가?

"아, 제이 선배님!"

세린이가 나를 발견하고 불렀다. 플레인게이트에 와서 이것저것 많이 무리를 한 탓인지, 앳된 얼굴과 머리카락은 많이 푸석해져 있었고 눈동자도 살짝 흐릿해져 있었다.

"여, 오랜만이야 세린이. 일은 잘 되어 가나?"
"예, 덕분에요. 선배님이 항상 재료를 가져와 주셔서 일이 잘 풀리고 있어요. 저...그건 그렇고..."
"음? 왜?"
"선배님...어디 많이 편찮으세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으신 거 같은데..."

...이런이런. 세린이한테까지 이런 말을 듣다니. 만약 거울이 있다면 지금 내 몰골이 어떤 꼴인지 한 번 보고 싶어진다.

"안색? 안색이야 항상 안 좋았잖아. 세삼스럽게."
"하,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심해 보이고..."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오히려 난 세린이 네가 더 걱정된다고. 전에도 말했지? 계속 정신적으로 무리하게 되면 넌... 언젠가는 망가지고 말 거야.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 그러니 선배로서 부탁 하나만 하지.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예, 알겠어요..."
"그래그래. 그래야지 착한 후배님이지?"

세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던 세린이는, 내가 손을 떼자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런데 선배님, 질문이 좀 늦긴 했지만...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캐롤을 찾아왔는데,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말이야. 어디 자리라도 비운 거야?"
"아, 캐롤리안 의료요원님이요? 의료요원님이라면 방금 전에 정도연 연구요원님을 뵈러 가신다고..."
"도연 씨를? 왜?"
"잘은 모르겠지만... 무슨 약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러 가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아, 그리고요."
"그리고?"
"오늘은 일찍 퇴근할 것 같다고도 말씀하셨어요. 왠지 의료요원님이 표정도 많이 어두우셨고... 기운도 별로 없으셨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속으로 뜨끔했다. 그게 벌써 일주일도 전에 일인데 말이지. 하긴 뭐, 좋아하는 사람에 관해서는 일주일이 아니라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신경이 쓰이게 되지.

"그래, 알았어. 그럼 한번 도연 씨에게 가 봐야겠군. 그럼 세린이, 몸조심하고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건강이 제일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저, 열심히 할게요!"

마지막에 활기차게 말한 건, 아마도 침울해져 나에 대한 일종의 배려겠지. 기특한 후배 녀석이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한번 더 쓰다듬어 준 다음, 나는 도연 씨에게 향했다. 




"아, 오셨군요, 제이 요원님."

도연 씨를 찾아가자, 도연 씨는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음, 얘기는 들었어. 캐롤이 찾아왔었다며?"
"예, 맞아요. 요원님에 대한 얘기 때문에요."
"나? 난 무슨 약에 대한 얘기로 도연 씨를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그나저나, 캐롤은?"
"집으로 돌아갔어요. 왠지 표정이 어둡더군요. 후...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들킨 건가? 별로 남한테는 들키고 싶지 않은 얘기였는데. 뻘쭘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도연 씨는 한 장의 차트와 함께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 요원님, 한동안 출격은 좀 자제해 주세요."
"...도연 씨도 그 소린가? 대체 왜 다들 그렇게 나같은 놈을 신경써 주는 건지 모르겠어."
"캐롤이 준 차트를 봤어요. ...심각하더군요. 제이 요원님, 요즘 요원님의 몸..,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죠?"
"이미 각오한 일이야...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몸상태를 생각했더라면, 애초에 돌아오지를 않았겠지."

안 되겠군. 한 대라도 피지 않으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어느새 담배는 도연 씨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한 대 정도는 봐 달라고. 내 삶의 낙 중 하난데."
"그럴 순 없어요. 지금 몸으론 담배 한 개피도 버거울 테니까."
"...빡빡하긴. 그래. 정확히 지금 내 몸상태가 어떤데?"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건 거의 반 시체나 다름없어요. 영화 속에 나오는 좀비 아시죠? 그것과 거의 동급이에요. 보나 말대로,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군요. 거기에 건강한 클로저들도 부담스러운 그 강한 차원압의 영향을 받고 있으니, 몸이 더 나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자세한 건, 이 차트를 보시면 되겠군요."

도연 씨가 건네준 차트를 받아 읽어 봤다. ...하하, 내 몸이라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은데. 도연 씨의 좀비라는 말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이미 김유정 관리요원에게도 연락을 받았어요. 앞으로 한 달 정도, 제이 씨는 휴가를 받게 될 거에요."
"...그럼 다른 애들은? 애들도 쉬게 해 주는 거겠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마 안 되지 않았을까요? 딱히 다른 요원들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으니까."
"그럼 나도 쉴 수 없지. 유정 씨에게 전해 달라고. 그런 명령은 듣지 않겠다고."
"소용없어요. 이건 김유정 관리요원의 명령이 아닌, 지부장님의 직속 명령이니까. ...그렇게 지부장님이 정색을 하시는 모습은 생전 처음 봤다고 하시더군요. 아,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월급은 지급될 거라고 하니까."
"...유정 씨 이 사람이 진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건만. 거기다 애들을 놔두고 나만 쉬게 하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이야? 오히려 쉬게 해 줘야 하는 건 애들인데. 

애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푹 쉬고, 잘 놀고, 열심히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어릴 적의 추억이란 걸 만드는 시간 말이다. 그걸 가지지 못한 한 사람으로서, 그 추억이란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뼈저리게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요. 하지만 이해해 주세요. 저도 더 이상은... 잃고 싶지 않으니까."
"날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해 줄 줄은 몰랐는데. 그럼 뜨끈한 쌍화차라도 한 잔 할까?"
"...연구 대상으로서 말하는 거에요. 귀중한 연구 대상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도 협력을 해 드리죠. 자요."

도연 씨가 내게 봉투를 하나 건네줬다. 

"한 달분 약이에요. 절대 안정을 취하면서, 하루 세 번, 식후 30분마다 드셔야 해요."
"이거...약만 먹어도 배부르겠구만. 약효가 좀 셌으면 좋겠는데. 그래, 한 20배 정도는."
"후후, 너무 독한 약은 오히려 몸에 해가 되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는 보실 수 있으실 테니까. 절대 안정을 취한다는 가정 하에서는 말이죠."
"잘 될지나 모르겠군. 하루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발에 가시가 돋히는 성격이니. ...아, 그건 그렇고. 술하고 담배는, ...혹시 안 되나?"
"가급적이면 한 달만 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요원님의 행실을 봐서는 그건 무리겠죠. 대신, 양을 많이 줄이세요. 술은 사흘에 하루 한 잔, 담배는 일주일에 한 개피 정도로요."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군. 아예 못 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나으니까."

허가라도 받은 게 어디냐,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라도 찾은 기분이다. 약을 챙기며 도연 씨에게 인사했고, 나는 다시 아이들에게로 돌아왔다. 

"저... 아저씨."

내게 말을 걸어오는 대장의 표정이 많이 침울하다. 역시나, 라고 해야 할까. 다른 아이들도. 표정들이 많이 어둡다. 아마 대충의 사정을 유정 씨가 얘기해 준 거겠지. 나중에 유정 씨에게 한 소리 해 줘야겠는걸.

"얘기 들었어요. 한 달 정도 휴가시라면서요?"
"음. 미안하구나. 너희들도 쉬게 해 주지 못해서.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고. 사무실에는 자주 들릴 테니까."
"딱히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다만... 지금은 그저 푹 쉬시고 오세요. 저희는 괜찮으니까."
"내 그럴 줄 알았어요... 엄마도 걱정 많이 하시더라고요. 제가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엄마랑 같이 찾아뵙든가 할께요. 
"왜 그러게 아픈 걸 자꾸 숨기세요? 아픈 거 숨겨봐야, 누가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가끔은 스스로를 좀 챙기시란 말이에요... 자꾸 저희만 챙기시지 마시고..."
"Gute Besserung. 빨리 완쾌하셨으면 좋겠어요 아저씨."

...그래그래, 너희를 봐서라도 빨리 몸이 나아야겠구나. 그전에 애들한테 맛있는 거라도 사 먹여야겠지? 오늘 임무도 끝났겠다, 나는 애들을 데리고 소영이네 분식에 가서 애들이 먹고싶은 만큼 많이 사 줬다. 원래는 더 좋은 데로 데리고 가야겠지만... 너무 비싼 데는 주머니 사정 때문에 무리라서 말이야. 

...미안하구나, 다들.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맘 같아선 애들 한명한명 전부 집에다 바래다 주고 싶었지만, 다들 괜찮다고 하면서 알아서들 돌아갔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특히 동생네 집에는 별로 가고 싶진 않다. 이런 몰골로 누님 얼굴 보기가 영 껄끄러워서 말이다. 

약봉지를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일단 간단한 실내운동으로 땀을 좀 더 뺀 후 샤워를 했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행동인데도, 몸상태가 이 꼴이라 그런지 더 힘든 느낌이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했다. 뭐 식사라고 해 봐야, 혼자먹는 관계로 예외일 때만 빼곤 그냥 '영양보충' 같은 식으로 때우곤 하지만. 선식이라든지, 녹즙이라든지. 오늘도 예외는 아니라서, 저녁은 그냥 간단하게 선식 한 잔으로 때웠다. 아까 소영이네 분식에서 이것저것 잔뜩 집어먹은 것도 있고.

"자, 그럼..."

그 이후는 TV를 본다던가, 소파에 누워 딩굴거린다던가. 30분 정도를 시간을 때우며 보냈다. 원래 같았으면 지금쯤 시원한 캔맥주를 한 잔 빨고 있었겠지만... 당분간 그러지 못하게 된다는 건 좀 아쉽긴 하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후, 나는 약봉지에 손을 뻗었다. 약 복용은 타이밍이 생명. 내가 이런 몸이 되면서 지키게 된 규칙 중에 하나다. 특히 이런 약은 그 타이밍이 다른 약보다 훨씬 중요하지. 나는 약봉지 안에 손을 넣었고

"...?"

뭔가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진다. 꺼내보자, 그 이질적인 물건의 정체는,

"......"

잠시 후, 나는 생각했다. 이거... 조만간 올 것이 오겠구만, 하고.




예 안녕하세요. 오늘도 글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으, 사정이 있어서 밤샘을 햇더니 조금은 어지럽군요. 그래도 짬짬이 글을 써서 업뎃 시간 직전에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이런 시간에 글을 올리는 건 아마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제 슬슬 글이 점점 시리어스해지는 게 느껴집니다. 사실 저도 시리어스한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아마 차기작은 개그 요소는 거의 없는, 시리어스함이 주가 되는 글로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사실 이 시리즈도 능력자 분만 계신다면 삽화를 같이 넣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예, 라이트노벨처럼요. 그러면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한층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잇지 않았을까...그런 아쉬움도 듭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 하브화 프로젝트와 낙타 만렙 프로젝트로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편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2024-10-24 22:36:4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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