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김유정편: 술자리-
Maintain 2015-07-07 5
"조심해서 걸어요. 괜히 들키면 큰일나니까."
"알아 알아. 너무 걱정 말라고. 왜, 여기서 크게 불이야! 라고 외쳐주기를 원해?"
"...그러기만 해 봐요. 앞으로 얼굴 평생 안 볼 테니까."
"그건 좀 싫군. 알았어. 조용하게 있지."
역시나, 라고 해야 하나. 유정 씨의 집은 강남 근처에 있는 여성 간부용 숙소였다. 여기서 괜히 문제 퍼졌다간 난 바로 모가지겠지. 그건 안 된 말이다. 아직 약값을 벌지도 못했다고.
유니온의 간부들은, 가정을 꾸미기 전까지는 다 이렇게 간부용 숙소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보통 간부용 숙소라면 그 품질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정석이고 실제로 나 때만 해도 그랬지만, 그래도 유니온이 나름 투자는 했던 모양인지 이 간부 숙소는 나름 괜찮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입구를 기준으로, 아파트 구조로 되어 있는 간부용 숙소는 동관이 남성용, 서관이 여성용인 모양이다. 5층 높이에 한 층당 열 집 씩인가. 유니온의 간부도, 생각보다 많긴 많군.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모자라다고 느끼는 게 사무직이니까요. 거기다 유니온이 보통 규모도 아니고. 자연히 간부도 많아질 수밖에 없죠."
"그건 그렇군. 그리고 저기는..."
저쪽 멀리, 한눈에 봐도 나 고급이요 하고 말하는 듯한 저 주택지구는 아마 고위직 간부들용 숙소일 것이다. 아마 데이비드 형네 집도 저 중에 하나겠지.
"참고로 말하지만, 찾아가려고 해도 헛수고일 거에요. A급 요원들도, 그 간부의 직속이 아닌 이상 저기는 들어가는 것조차도 힘드니까요."
"그야 그렇겠지. 높으신 분들께서 계시는 데니까. 아무튼... 지위로 사람 사는 집을 나누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 ...맘에 안 드는군."
"어쩔 수 있나요. 그저 이렇게 사는 데라도 주어진 거에 감사해야죠. 힘들게 먼 곳에서 출퇴근하는 일반 요원 분들에 비하면, 이건 정말 과분한 정도니까요. ...아무튼, 어서 가죠. 여기 계속 서 있을 순 없잖아요?"
유정 씨의 재촉에,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살짝 씁쓸한 기분을 안은 채.
"짐은 저쪽 소파 옆에 놔 두세요. 혹시 지루하시면 티비를 보셔도 되고요."
"뭐, 됐어. 그냥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혹시 도와줄 일이라도 있으면 말하라고. 나도 살림은 자신있으니까."
"됐거든요? 저도 손님한테 뭐 시킬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요. 아, 하나 있긴 하네요. 장 봐온 것들 식탁 위에 놔 주시겠어요?"
유정 씨의 말대로 식탁 위에 장본 것을 두고, 나는 거실 소파에 등부터 쓰러지듯 앉았다. 여기까지 긴장하며 오는 바람에, 들어오자마자 몸에 힘이 풀린 것이다. 여기가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것조차 잠시 잊을 정도로.
내 예상대로, 간부용 숙소는 그 안쪽도 외관만큼이나 수수한 구조였다. 거실, 주방, 방 2개, 그리고 화장실 두 곳.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면 보통 집값 좀 싼 아파트하고도 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벽지나 화분, 혹은 장식장 등등 나름 유정 씨가 인테리어에 신경썼다는 증거들이 여기저기 보이기는 하지만.
"뭐, 그래도 예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지긴 했군."
"그래요? 예전엔 어땟는데요?"
주방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던 유정 씨가, 내 혼잣말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물었다.
"말도 마. 책상하고 침대 하나만 들어가면 방이 다 차는데다, 주방이 없어서 개인 취사는 꿈도 못 꿨고 거기다 화장실은 시설도 별로 안 좋고 또 공용이었다고. 오죽하면 그때 간부용 숙소 별명이 '개미굴'이었겠어? 그때 그 개미굴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 따로 없군 그래."
"상상이 잘 안 가네요... 그나저나, 꽤 잘 아시네요?"
"...뭐, 사정이 좀 있어서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거기서 전쟁 동안 살았었던 거지만. 다른 요원들은 야전 텐트 신세였고 우리 팀도 원래는 그래야 했겠지만, 그래도 나름 전쟁에서 써먹을 수 있는 중요한 인재들이라고 그 개미굴에서나마 사는 게 허락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엘리트 요원이나 고위직 간부들이 좀 더 고급 숙소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말이다. 그 실적과 승전으로 유명한 울프팩도, 계급 앞에서는 얄짤없었던 거다.
그때는 이것저것 불편한 것도 많고 높으신 분들께서 좋은 집에서 거들먹거리는 것도 보기 싫어서 차라리 야전 생활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시설에서나마 사는 게 얼마나 호사로운 생활이었는지, 전쟁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난다. 그런 비루한 곳이나마, '집'이라는 게 있다는 것은 분명 소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으니까.
"...죄송해요. 괜한 걸 여쭤 본 모양이네요."
"아니, 괜찮아. 이미 다 지난 일인걸. 그나저나, 이건 굉장한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장식장으로 돌렸다. 사실 장식장 자체는 별 특징 없는 양산형 장식장이지만,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은 내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언제 이런 걸 다 모은 거야 유정 씨?"
"월급에서 쪼개서 틈틈이 모았죠. 제이 씨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좋아하잖아요 그런 거."
"관리요원은 꽤나 박봉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꽤나 시간 좀 걸렸겠어."
장식장 안에 있는 건 술이었다. 그것도 제법 그 종류와 양이 많아서, 유정 씨가 다시 한번 애주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와인... 이거, 바 하나 차려도 되겠는걸?"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앞으로도 좀 더 모아야죠. 아, 말 나온 김에 식사 후에 한 병 딸까요?"
"그래? 그럼 나야 좋지."
"그래요. 그럼 그 전에, 일단 식사부터 하죠. 다 됐으니까, 오세요."
그 말만을 기다렸지. 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식탁으로 향했다.
"...그래서, 결국 보나도 아직 애였다는 뜻이지."
"그랬군요. 저 없는 동안에 꽤 많은 일이 있었네요..."
식사를 마치고, 아까 말했던 대로 유정 씨와 술을 한 잔씩 하기로 했다. 이왕 마실 거면 독한 걸로 마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어떻게 읽기라도 한 걸까. 유정 씨가 가져온 건 위스키였다. 호박색 액체가 담긴 잔에서는 특유의 곡물 향이 피어오르고, 마실 때마다 차가운 불줄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 전신에 기분좋은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준다.
좋은 술이군. 거기에 이야기거리도 많이 있으니, 이 정도면 좋은 술상이라고 생각한다. 플레인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은 많이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좋은 안줏거리가 되지. 뭐, 진짜 안주도 있긴 하지만. 과일하고 치즈.
"자요, 한잔만 더 따라 주시겠어요?"
"괜찮겠어? 벌써 얼굴이 빨간데."
"아직은요. 그리고 제이 씨가 있는데 취할 수는 없죠. 뭔 짓을 당할지 모르니까."
"...어이. 날 그런 표정으로 쳐다** 말아줄래...?"
흡사 짐승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유정 씨의 눈에 살짝 상처를 입으며, 나는 다시 위스키를 따라줬다. 그리고 나도 유정 씨에게 위스키를 받으려고 잔을 들었는데.
-툭
"제이 씨, 그건...?"
"뭐가? ...아, 이런."
분위기에 휩쓸린 탓이겠지. 깜빡하고 아까 캐롤한테서 받은 약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아직 식후 30분은 지나지 않았지만, 알코올이 들어갔으니... 이거, 약 먹긴 글렀군. 캐롤한테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거 창피하군.
"별거 아니야. 그저 단순한 약일 뿐이라고."
"제이 씨...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에요?"
"별거 아니라니까... 유정 씨도 잘 알잖아. 내가 항상 약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거. 그러니까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돼. 이 약도 그 많은 약들 중에 하나...쿨럭"
갑자기 터져나오는 재채기. 당연히 섞여 나오는 건 피였다. 그것도 원래의 그것과는 다른, 살짝 끈끈한 데다가 색깔도 거무튀튀한. 쳇, 타이밍 하고는. 최대한 안심시키려고 거짓말을 하던 중이었는데. 입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몸은 정직하구만. 어디의 무슨 능욕계 야전 동영상도 아니고.
"제, 제이 씨!"
"...휴. 역시 유정 씨 앞에선 거짓말도 못하겠군. 유정 씨 생각대로야. 요즘 몸이 좀 약해진 거 같아서 말이지. 그래서 캐롤한테 약을 받았지. 정해진 대로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는 모양이야."
"그럼 술은 드시지 마셨어야죠! 제이 씨는 절제라는 것도 몰라요?!"
"너무 그렇게 화만 내지 말라고. 간만에 좋았던 분위기 깨져 버리잖아.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은... 나도 좀 마시고 싶었다고."
아니, 정확히는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말해야겠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오늘같이 검사라도 받는 날에는 먹고 마셔 줘야지 마음이 놓이니까. 그렇지 않으면...몸이 떨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잔뜩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어야지 그나마 잠이 들 수 있으니. ...그날의 기억은, 이미 몸에 깊숙히 박혀버렸다.
"이해해 줘. 나름 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제이 씨..."
다행이 내 뜻이 통한 건지, 유정 씨도 더 이상 아무 말 않기로 한 것 같다. 다만, 뭔가 슬픈 표정으로 내게 새 잔을 한 잔 따라 주며 말했을 뿐.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줘요. 제이 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두가 슬퍼할 테니까요."
"나 같은 녀석에게...? 글쎄."
"그러니까, 만약에 제이 씨의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판단이 되면, 강제로라도 제이 씨를 임무에서 뺄 거에요. 관리요원의 권한으로."
"...그것만은 좀 참아 줘. 나 하나 빠지면 애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도... 제이 씨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고생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그 말, 못 들은 걸로 치지. 자, 아무튼 그런 꿀꿀한 얘기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술이나 더 마시자고? 모처럼만의 술자린데, 이렇게 침울한 얘기로 분위기를 망칠 순 없잖아? 잔 들어. 분위기도 바꿀 겸, 건배나 하자고."
"...당신이란 사람은..."
"걱정하지 마. 나도 조심하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야."
유정 씨는 나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다,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휴...저런 표정을 짓지 못하게, 나도 한동안 몸조리 좀 해야겠군...
"후... 잘 마셨네."
그 이후로 술자리는 몇 시간도 넘게 이어졌다. 다행이 분위기는 금새 풀어졌고, 그동안 애들이 겪었던 일들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얘기했다.
당연히 위스키 한 병 갖다가는 모자라서, 거기에 아까 사 온 맥주까지 섞어 마셨더니 아무리 나라도 살짝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름 술은 센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럼 유정 씨, 난 돌아가 볼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유정 씨에게 말했지만, 유정 씨는 대답이 없었다. 저런, 뭔가 무리한다 싶더니, 결국 필름이 끊긴 모양이다. 테이블 위에 엎드려 곤히 잠든 유정 씨의 얼굴은 폭탄마냥 새빨개져 있었고, 숨에는 술냄새가 가득했다. 저럴 줄 알았지. 술도 약한 사람이 그렇게 마셔댔으니...
"...어쩔 수 없군."
대접도 잘 받았겠다, 집주인도 저렇게 곯아떨어졌으니 뭐라도 해 주고 가야겠군. 나는 테이블 위에 널부러져 있는 병과 캔, 그리고 접시와 컵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병과 캔은 재활용 봉투에 넣고, 접시와 컵들은 설거지를 해서 마무리. 덤으로 테이블도 행주로 닦아냈다. 나도 나름 살림에는 자신이 있다고.
"그럼 잘 자라고 유정 씨. 언제 한 번 보답하지."
나는 유정 씨에게 담요를 덮어 주며 말했다. 물론 듣고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서, 머리맡에 쪽지도 하나 써 놨다. 일어나면 볼 수 있도록.
자, 그러면 나도 이제 슬슬 집으로 갈까... 11시... 이거 아슬아슬하겠군. 뭣하면 택시라도 타면 되겠지만, 할증붙은 택시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라서.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데 말이야. 서둘러서 나가야겠어. 나는 마지막으로 불까지 꺼 준 다음 문을 열었
"What...? 제이...요원님...?
"캐, 캐롤?"
...이를 어쩐다.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캐롤이 서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오늘도 글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날씨는 덥군요. 다들 몸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그나저나...깜짝 놀랐습니다! 제 글이 명전이라니요?! 여러분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 글을 재밌게 읽어 주셨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저는 감사할 뿐이랍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넘어와서, 이번엔 술자리로군요. 사실 유정 씨가 술을 좋아한다는 건 이미 게임 내에서도 수차례 언급되었던 바가 있지요. 거기에 저도 개인적으로 조금 술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 이번 편은 나름 재미있게 썼습니다. 아마 술이 이번 김유정 편의 핵심 소재가 될 거 같군요. 거기에 제저씨의 인체실험 떡밥도 살짝 써 봤고요. 인체실험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설정이었는데, 괜찮나요?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인게임 내의 요소를 소설 속에 반영해 보려고 합니다. 소설이 이로서 더 재미었어졌으면 좋겠네요.
오늘도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