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정미슬비] All for you -下_1-
월하령 2015-07-04 13
일반적인 사람들이 차원종에게 가지고 있는 ‘파괴’ 혹은 ‘야만’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차원종들은 그들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 증거로 차원종-이름 없는 군단의 군단장급 차원종들이 가진 각자의 데미플레인(영지)은 단 하나도 같은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특색이 강하다.
그런 수많은 데미플레인 중 가장 최근에 생성된 곳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특색을 가지고 있었으니ㅡ.
“설마 차원압이 인간계와 같은 데미플레인까지 만들 줄은 몰랐는데 말야. 정말이지…너에겐 여러모로 놀란다니까, 나의 서유리.”
“…누가 ‘너의’ 서유리야. 기분 나쁘니까 그만 둬.”
“어머, 매정해라. 이젠 같은 동지인데 조금은 살갑게 대해도 되지 않아? 나 있지, 개인적으로 널 싫어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정말 좋아하는 편이라고나 할까.”
“기분 나쁘다니까.”
“흐응…. 그건 좀 유감이네.”
명백한 거부 표시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맴돌며 능글거리는 더스트를 향해 눈살을 찌푸려 보이는 유리. 그런 그녀의 반응조차 즐거운지 더스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짙어진다.
“그렇게 인상 쓰면 주름 늘어난다?”
“…….”
“농담이야, 농담. 무서운 얼굴 하지 마~.”
“하지 마, 그런 불길한 농담은.”
“어머, 미안. 그래도 내가 이렇게 왔는데 대놓고 신경질을 안 내는 걸 보면…갔던 일은 잘 마무리 했나봐?”
그 말에, 유리는 한숨을 쉬더니,
“그게 며칠 전 일인데 지금 꺼내고 난리야?”
“이쪽엔 아직 우리 정보망이 연결 안 된 상태잖니. 아니, 애초에 네가 거부하고 있는 거였던가? 우리가 통신병을 보내는 족족 네가 다 처리해 버렸잖아.”
“…….”
“좀 이기적이라고 생각 안 해? 우린 네가 우리와 같은 선에 섰을 때부터 이것저것 편의를 봐 주고 있는데 넌 아무런 협조도 하지 않고…불공평하잖아.”
“…….”
“그리고 지난번의 일ㅡ너희 가족을 이쪽으로 이주시키는 건. 그것도 우리가 나랑 애쉬가 참모장의 권한을 거의 월권 수준으로 사용해서 겨우 성사시킨 거라고? 원래 인간이 이쪽으로 오면 이유 불문하고 죽이는 게 룰이었는데도 말이지.”
“그 일에 대해선…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야 다행이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차원종이 되기로 계약한 뒤, 애쉬와 더스트는 유리를 향해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지원과 편애를 아끼지 않았다. 어지간한 요구는 대부분 들어주었고, 아무리 그래도 들어주기 힘들 것 같던 ‘가족’이 차원종의 차원으로 피난하는 것 까지 용인해 주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파격적인 대우에 최근 유리 본인도 ‘정말 얘들이 날 좋아해서 이러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ㅡ.
‘방심은 금물이지.’
아무리 잘 해준다고 해도 상대는 몇 달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이런 대우도 단순히 ‘빚’을 지우는 걸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유리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놓듯, 더스트의 말투가 조금 은근하게 변해간다.
“그래서 말인데, 슬슬 너도 우리 일을 도와줬으면 해.”
‘역시….’
“설마 받을 만큼 다 받아놓고 거부하진 않겠지? 서유리 넌 그런 치사하고 비열한ㅡ인간들과는 다르니까. 난 그렇게 믿고 있어.”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라고 그녀 또한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와 주는 편이 책략 같은 쪽에 강하지 않은 자신에게는 오히려 나았다.
“원하는게 뭐야.”
“시원스럽네. 이런 면이 좋은 거라니까.”
“빙빙 말 돌릴 거면 그냥 가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마 뒤에 신서울 여의도에서 ‘클로저 지원 자금 확대’를 위한 법안 하나를 국회에 제안한다는 정보가 들어왔어. 플레인 게이트가 발견되면서 클로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그에 따른 지원이 필요하다…는 명목이었던가? 물론, 뒤로는 무슨 꿍꿍이들인지는 상상에 맡기겠지만.”
“…….”
“어쨌든 법안이 제출되면 통과는 확정이겠지. 그렇게 되면 우리 이름 없는 군단으로선 곤란하다고. 적의 군비가 상향되는 꼴이니까.”
“그래서?”
날이 선 유리 질문에 더스트는 입술이 요사스런 호를 그린다.
“그 회의, 백지로 돌려버려.”
“…….”
“뭐야? 그 의외라는 얼굴은.”
“아니…. 영락없이 참석한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할 줄 알았거든.”
“어머, 그건 아니야. 내가 막고 싶은 건 적의 군비 증강이지 거기 모인 썩을 대로 썩은 인간들의 목숨 따위가 아니거든. 오히려 그 녀석들은 살아서 계속 부정부패를 저질러 주는 편이 더 나아. 적의 유능한 장수를 없애고 무능한 장수는 살려둔다. 참모로서 이런 전략은 당연한 거라고. 물론, 개중에는 우리 쪽에 정보를 넘겨주는 스파이도 있으니까. 괜찮으면 알려줄까?”
“됐어.”
“그래…? 뭐어~이번 일은 네게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너희 가족을 이리로 도망치게 만든 거, 실질적으론 그 녀석들의 탓이거든.”
“……!”
꿈틀하고 주먹 쥐어지는 유리의 양 손.
아주 작은 반응이었지만, 더스트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그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어. 그 썩어빠진 녀석들, 있어도 없어도 전력에 크게 차이는 없으니까. 그리고…그런 녀석들은 걔들 아니더라도 차고 넘치잖아? 정보를 넘겨주던 녀석의 경우는 좀 아깝긴 하겠지만, 정보원이 걔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알았으니까 그만 가 봐.”
“회의는 사흘 뒤에 있을 예정이라더라?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 우리의 동포, 서.유.리.”
유혹하듯 눈웃음을 짓고 사라지는 더스트.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가라앉은 눈빛으로 노려보던 유리는 이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는 있었지만.”
아니, 더스트의 말대로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유니온과의 관계는 확실히 매듭지어 놓는 편이 나을 테니까. 결의를 다지기로 한 유리는 등 뒤를 향해 흘리듯 말했다.
“사흘 뒤, 신서울 여의도. 회의가 있다고 하면…아마 국회의사당이겠지. 그곳을 칠거야. 준비해 둬.”
[알겠습니다.]
“전부 뒤집어엎는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손속에 인정을 두지 마.”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되묻는 듯한 유리의 반응에, 유리의 뒤에 서 있던 차원종이 송구한지 고개를 숙인다.
[외람되오나, 지금까지 주군의 성격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그 정도 되는 명령까지 내리실 분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는지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차원종이 꺼내든 예상외의 질문에 유리는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설마 ‘차원종’이 인간의 목숨을 빼앗으라는 명령에 대해 의문을 가질 줄은 몰랐다. 이것도 자신이 이 영지를 지배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변화인걸까.
“너 말야. 내가 나 다음으로 누구를 소중히 여기라고 했는지 기억하지?”
[주군의 가족이십니다.]
“그곳에 모인 녀석들은 내 가족의 원수 같은 녀석들이야. 납득할 이유로선 충분하지?”
[……명 받듭니다.]
이유에 납득했는지 소리 없이 사라지는 차원종. 녀석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유리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 본다.
“…….”
어디로 보나 인간의 손으로 보이는 자신의 손.
그 외에도 아직도 변함없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보고 있자면, 아직 자신은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ㅡ아니다.
“다 죽이라니….”
밀려드는 자괴감에 헛웃음이 터진다.
몸은 차원종이 되더라도 마음만은 인간으로 남아 있기로 했었건만, 증오라는 감정 하나만으로 이다지도 쉽게 마음이 변하게 될 줄이야.
“이거야 원….”
그렇다고 결정을 번복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죄책감 또한 들지 않는다.
오히려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는 것에 대한 상쾌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유리는 문득 깨닫고 만다.
“…완전 괴물이잖아.”
더 이상,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
“ㅡ비야…! 이슬비!”
“으, 응?”
귓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리는 슬비. 시선이 향한 곳에는 같은 검은 양 팀의 스트라이커 ‘이세하’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답지 않게 멍 때리기나 하고.”
“아…응. 미안.”
“너 요즘 이상해. 작전구역에서도 나한테 요즘 잔소리 한 번 안 하고, 혼자 멍하니 넋 놓고 있는 일도 많아졌고….”
“내가 그랬어?”
“응. 뭐, 덕분에 게임할 때 좀 편해지긴 했지만.”
“형, 그러다가 슬비 누나한테 실컷 두들겨 맞을지도 몰라요~.”
“헙…!”
바로 옆에서 들려온 미스틸테인의 능청스런 목소리에 황급히 입을 막는 세하.
마치 일련의 촌극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지만 그 광경을 보며 슬비는 조금이지만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제이는 안심된다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제야 웃는구나?”
“제가 언제는 안 웃었던가요?”
“웃기야 웃었지. 다만ㅡ울기 직전의, 자책하듯이, 스스로를 비웃는 정도의 웃음을 말하는 거라면 말야. 일주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묻지는 않겠지만…적어도 그 날부터 지금까지 실컷 봤지, 응.”
“…….”
“보호자를 우습게** 말라고. 그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어야 겨우 자격이 생기는 자리가 보호자라는 직업이니까.”
“…….”
아무 대꾸도 없이 시선을 회피하는 슬비를 보고 있자니 사춘기의 소녀 같다.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며, 제이는 항상 들고 다니던 물병을 내밀었다.
“이건?”
“특제, 비타민 C 드링크. 한 모금만 마셔도 정신이 번쩍 들 걸?”
“……이상한 거 넣으신 건 아니에요?”
“주 재료는 레몬하고 매실인데?”
그런 거라면 좀 시겠지만 마셔도 괜찮겠지. 재료를 듣고 조금 안심한 슬비는 병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아……그리고 식초도 조금ㅡ.”
“켁?!”
입 안을 침략하는, 레몬이나 매실과는 전혀 다른 ‘가공된’ 신 냄새와 맛. 혀를 옥죄여오는 산미에 콜록거리는 슬비의 앞으로, 이번에는 투명한 물병이 내밀어진다.
“콜록…콜록…!”
“정신이 좀 들었어?”
“아, 아저씨이이……!!”
“아…화났니?”
“장난이 심하시잖아요! 이거 거의 원액 수준이네!! 오히려 몸에 안 좋다고요!”
“걱정 마. 맛은 그래도 산도는 제대로 안전선에 맞췄으니까. ……PH 수치상으론.”
“PH 수치 이전의 문제잖아요!!”
한바탕 소리를 내지르고 물병을 낚아채 단숨에 들이키는 슬비. 다행히 물은 평범한 것이었는지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신 맛.
겨우 한숨 돌리는 슬비에게, 다시 한 번 제이의 목소리가 와 닿는다.
“그래도, 이걸로 눈에 생기는 돌아왔네.”
“……네?”
“계속 눈빛이 죽어있어서 마음에 걸렸거든. 이젠 조금 마음이 놓인다 싶어서.”
“…….”
“조금 전에는 미안했어. 나중에 아이스크림 쿠폰을 주도록 하지. 나한텐 필요 없는 거니까, 대장이 애들 인솔해서 같이 먹어.”
“정말이지….”
“하하하.”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타인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배려가 오히려 더 마음에 와 닿았다.
“…….”
조금이나마 풀린 마음. 그러자 시야가 넓어지고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게임에 집중하는 세하와 그런 세하 옆에서 잘 모르면서 이것저것 훈수를 두는 미스틸테인.
삭신이 쑤신다면서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는 제이.
그리고….
“…….”
원래대로라면 여기에 트레이드 마크인 덧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유리가 함께 했겠지.
‘……괜찮아. 아직은…괜찮아.’
그 빈자리가 무심코 그리워지려는 찰나, 슬비는 스스로의 마음에 제동을 걸었다. 지금은 임무 중. 사사롭게 감정을 흐트러트려선 안 되는 시기다.
그리고ㅡ유리를 구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
‘유하나….’
몇 년 전, 차원종에 의해 벌어진 ‘신강고 습격 사건’의 주범-유하나.
그녀는 애쉬와 더스트에 의해 차원종으로 변화하던 도중, 차원종이 된 칼바크 턱스의 혈액을 분석해 개발한 억제제 덕분에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유니온 과학반은 놀고 있지 않았다.
수많은 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왔고, 지금 현재도 기술은 발전되어가고 있고, 개중에는 ‘차원종이 된 인간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방법’ 또한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직 유리를 되찾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물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희망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인간은 어떻게든 버텨나갈 수 있다는 걸, 슬비는 요즘 누구보다 확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게임을 하던 세하 옆에서 훈수를 두던 미스틸테인이 질문을 한 것은, 슬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도중의 일이었다.
“근데요, 제이 아저씨. 우리들, 왜 계속 여기에만 있는 거에요?”
“응?”
“그렇잖아요. 호위 임무라고 들었는데 계속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만 있고.”
“듣고 보니 그렇네?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 꽤 높은 분들 아니었던가? 바로 옆에서 경호를 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슬비야, 혹시 뭐 아는 거 있냐?”
“나도 자세히는 몰라. 회의 내용이 유니온과 클로저에 관한 의제라고 해서 우리가 보디가드 형식으로 차출된 거고, 실질적 경호는 다른 업체를 불렀다고만 알고 있거든.”
“흐음…….”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말에, 제이가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질린다는 듯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우릴 부른 건 그저 ‘명목상’ 그런 것 같아.”
“명목상으로 클로저를 불렀다고요?”
“일단 유니온과 클로저에 관한 의제라고 하니까 아예 배제하고 진행할 순 없었겠지. 하지만, 무슨 일인지 자세한 내용은 우리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심보일거다. 그 증거로 실질적 경호는 우리가 아닌 외부 업체에 맡긴 상태고. 우릴 경호원으로 대동하기엔 뭔가 꺼려진다는 뜻이겠지.”
“우, 우우….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 테인이는 아직 중학생이라고요. 조금만 쉽게 설명을…….”
“애가 정확히 알아서 좋을 건 없는데 말이지….”
난처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제이. 그를 대신해 질문에 대답한 것은 다름 아닌 슬비였다.
“우리가 모르는 뒷거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야. 정경유착이라던가, 부정부패라던가.”
“뭐?!”
“그, 그거 나쁜 거 아닌가요?”
“나쁜 거야.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적어도 좋은 건 아니겠지.”
“그럼 지금이라도 가서 막아야ㅡ.”
“아니, 무리다. 이래서 별로 알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에요 아저씨! 나쁜 사람들은 혼내줘야 하는 거잖아요!”
나쁘니까 혼내줘야 한다.
지극히 중학생답고, 또 지극히 옳은 사고방식이었지만…애석하게도 제이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를 댈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직접 가서 막는 건 무리야.”
“어째서요?”
“아까 말했지? 외부 업체가 경호를 서고 있다고. 그리고ㅡ그 업체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민간인. 우리 클로저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어. 나중에 큰 문제로 번지거든.”
“그게 뭐에요! 그럼 나쁜 사람들을 혼내줄 수 없다는 거잖아요!”
“어쩌겠냐. 법이 그렇게 짜여 있는데. 클로저가 진심으로 한 대 치면 일반인은 몇 군데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인게 현실이잖아.”
“우, 우으…그래도…….”
분한지 볼멘소리를 내는 미스틸테인. 반면 세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여전히 게임기만 들여다 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다들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거 아니에요? 그런 안 좋은 점은 지부장님이 어떻게든 바꿔나가고 계신 거 같던데…조금씩 괜찮아 지겠죠.”
“세하 말이 맞아. 그 형 성격에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겠지.”
“그런 사고방식은 너무 될 대로 되라는 식인 거 같지만…일단 동감이에요. 데이비드 지부장님께선 강단 있으신 분이니까.”
“그럼 저희는 오늘 할 일, 없는 건가요?”
“따지고 보면 그렇겠지…. 국회 의사당에 쳐들어올 사람은 테러 조직이 아닌 이상 없을 테고, 유니온에 반대하던 조직은 꽤 전에 무너트렸고.”
“맞아. 차원종이라도 튀어나오지 않는 한 우리가 나설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게임 좀 해도 천벌 받진 않을 거야.’라며 게임기를 꺼내는 세하. 철없는 소리를 하는 팀 동료의 뒤통수를 한 대 날려주려는지 손을 들어 올리던 슬비는, 이내 생각이 바뀌었는지 가만히 손을 내렸다.
‘잠깐 정도라면 놔둬도 괜찮겠지….’
임무 중이라고는 하지만 그 실체는 뭔지 모를 수상쩍은 회의의 경호. 엄밀히 말하자면, 슬비 본인도 이번 임무에 대해선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더러, 오히려 그 속내를 알고 나니 불쾌한 감정만이 마음속에서 조금씩 가열되기 시작할 정도였다.
그런 감정 상태 속에서, 슬비는 무심코 속내를 입 밖으로 뱉었다.
“회의고 뭐고 다 망쳐버렸으면 좋겠네. ……헙?!”
“오? 웬일이야? 그 깐깐하시던 대장님이 임무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다 하시고?”
“아, 아니에요, 아저씨! 이건 그냥 무심코ㅡ!”
슬비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자신의 부주의함에 대한 자기비판과 실언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한 정리를 모두 끝마친 순간,
쿵ㅡ!
회의실에서 떨어진 별실까지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음.
한순간, 별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무겁게 변해간다.
“어, 어이 대장. 설마 위상력 컨트롤 실력이 너무 좋아진 나머지 말하는 것 마저 실현시키는 경지에 오른 거야?”
“아, 아니에요! 이건 제가 한 게…!”
“처, 천벌인가?! 내가 임무 신경 안 쓰고 게임해서 그런 거야?!”
“그런 게 어딨어! 그리고 그걸 알았으면 게임 당장 꺼!!”
“그, 그럼 이 진동은 대체 뭐죠…?”
“지진…은 아닐 텐데.”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하는 긴장감의 끈. 모두가 각자의 무기를 손에 들고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무렵,
콰앙!
두 번째로 들려오는 파괴음. 둔하지만 섬뜩한 그 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슬비는 그 속에 섞여있던 이질적인 기운에 두 눈을 부릅 떴다.
‘이건…?!’
익숙하다.
끔찍하게도 익숙한 기운이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선 자신 혼자만 알고 있는, 그런 기운이리라.
“……크윽!”
“어?! 야, 이슬비! 어디 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슬비. 대장의 돌발 행동에 찰나 벙 쪄있던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슬비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회의실로 이어지는 복도는 이미 먼지와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아니, 그것뿐이라면 지극히 쾌적하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도에는 그보다 더한, 끔찍한 것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원종!!”
전신이 온통 시커먼, 그러면서도 양 손에는 선명한 붉은 빛의 검을 쥐고 있는 고위급 차원종. 상대방이 말살해야 할 대상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슬비의 손에선 어느새 생성된 비트가 차원종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흥…!]
코웃음을 치며 허공에 칼을 휘두르는 차원종. 성의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그 궤적은 비트가 날아오는 위치를 정확히 커버하며 기습적인 공격을 전부 땅에 떨어트렸다.
[그 때의 인간이군. 같은 적의 기습에 내가 두 번 당할 것 같았나?]
“역시 너…!”
[주군의 윤허도 떨어졌다. 지난번의 빚을 갚아주마, 인간!]
섬뜩하게 빛나는 양 손의 검을 겨누는 차원종.
당황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며 제 2격을 준비하는 슬비.
찰나의 순간 이루어진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난입한 제3자에 의해 한순간에 깨졌다.
“갚긴 뭘 갚아, 이 자식아ㅡ!!”
요란한 소리를 내며 둘 사이로, 정확히는 차원종을 노리고 떨어지는 푸른 위상력 덩어리.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돌격한 ‘유성’은 충격파와 함께 자욱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콜록! 콜록!”
“대장!”
“누나! 괜찮아요?”
“이, 일단은….”
지근거리에서 차원종에게 직격한 세하의 유성검. 그 충격파 때문에 뒤로 넘어지긴 했지만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세하 형이 유성검을 써서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그 바보 녀석. 이런 좁은 곳에서 그렇게 큰 기술을 쓰면 어쩌자는 거야!”
“그래도…제대로 들어간 것 같았어요. 아마 방금 걸로 차원종을 해치웠을ㅡ.”
“우왁!!”
말을 끊어먹듯 세 사람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물체 하나. 허둥거리며 받아보니 낭패라는 표정의 세하가 먼지구름으로 자욱한 통로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세하?! 너 어떻게 된 거야! 차원종은?!”
“한 방 먹었어…. 아무래도 좀 힘들겠는데.”
“뭐?!”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먼지구름. 그 너머에선 검은 차원종이 아까와 같은 자세로 태연히 서 있었다.
[묵직한 일격…. 인간치고는 꽤 강력한 자로군.]
“야, 이 나쁜 자식아. 남의 결전기를 정면으로 맞아놓고 그게 할 말이냐?”
[나는 이름 없는 군단의 기사라 불리는 종족. 이 정도는 튼튼해야 모시는 분을 지킬 수 있지. 그런 고로, 이 뒤로는 한 발자국도 허락하지 않겠다.]
“아…그러셔? 그럼 말야.”
비틀거리며 일어난 세하의 손에 들린 것은 애용하는 건 블레이드. 그것을 양손으로 치켜들며, 세하는 차원종을 똑바로 노려본다.
“기사답게, 나랑 1 : 1로 뜨자고!”
[?!]
좁은 복도 안을 가득 채우는 인력. 몸이 끌려가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세하를 제외한 검은 양 팀의 3명과 ‘기사’라 불리는 차원종의 자리가 뒤바뀐다.
“?!”
“뭐 해! 빨리 가!!”
뒤에 홀로 남은 세하의 외침에 일순간 멈칫하는 세 명. 하지만 이내 그들은 이어진 복도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건…!]
“충격파를 좀 개량했거든. 끌어 모을 때 회전하는 식으로 모이게 말야. 조금만 응용하면 날 중심으로 자리 바꾸기도 가능하거든.”
[같잖은 수작을 부리다니….]
“걸어온 승부를 거부하지 않는 것도 기사의 덕목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야?”
세하의 말에 멈칫하는 차원종.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세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느새 호승심이 섞이고 있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 뒤로는 안 보내.”
[……좋다. 덤벼라!]
“말 안 해도 그럴 참이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동시에 달려드는 차원종과 세하. 곧 복도는 자욱한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채워진다.
★
“세하 형, 괜찮을까요.”
길게 이어진 복도. 그 모퉁이를 돌면서도 미스틸테인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멀리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금속음과 소음은 계속해서 세하와 차원종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신호와도 같았으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겠지. 저 녀석, 차원종에 대한 파괴력으로 따지면 우리 중에선 가장 강하니까.”
“걱정 되서 그러죠….”
“지금은 저 녀석보다 우리가 먼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판이야. 그 비정상적으로 튼튼한 차원종이 ‘주군’이 어쩌고 했던 거, 잊지 않았겠지?”
“역시 더 강한 걸까요?”
“적어도 몇 배는 더 강할 거다. 차원종들 사이에선 ‘힘’이 전부거든. 게다가 ‘기사’라고 불릴 정도의 차원종이 저렇게 깍듯이 호칭하는 걸 보면…재수 없을 경우 내가 전** 때 싸웠던 애쉬나 더스트 보다 더 심할지도 몰라.”
“진짜요?!”
“…….”
뒤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슬비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히 그 녀석이었어.’
조금 전, 앞을 막아선 차원종은 분명 구로에서 유리가 데리고 다니던 차원종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앞에 있는 것은….
‘유리야…너 지금 여기 와 있는 거니?’
이미 차원종이 되어버린 유리다. 무슨 짓을 할지, 슬비로선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대충의 목적은 알고 있었다.
유니온에 관련해 유력 인사들이 모이는 회의가 있는 중요한 날, 우연히 국회의사당을 노린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너무 희박하다. 처음부터 이 회의가 목적이었을 터.
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회의를 멈추는 방법과 차원종이 인간의 회의를 멈추는 방법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제발…제발……!’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기를.
하다못해 인간의 방식으로 회의를 망쳐놓았기를.
회의장에 도착할 짧은 시간 동안, 슬비는 계속해서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마침내 회의장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모퉁이를 돈 순간, 슬비는 회의장 문을 기어나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으…으으…….”
신음소리를 내며 엉금엉금 회의장을 빠져나오는 정장 차림의 남자는, 분명 오늘 회의의 주최자 격인, 국회의원 겸임한 유니온의 간부였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어오는 남자의 시선이 가장 앞에 선 슬비에게 닿고, 동시에 환희의 빛으로 물든다.
“크, 클로저인가…! 마, 마침 잘 왔네. 나 좀 살려주게…갑자기 차원종이 난입해서 다른 사람들을ㅡ.”
“시끄러워. 위선자.”
처절한 구조요청을 끊듯 끼어드는 목소리.
아니, 끊어진 것은 의원의 목소리만이 아닌 그의 생명이었다.
구조를 호소하던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 절명한 의원. 그리고 그 시신의 뒤에는….
“……슬비야?”
“서유리…!”
온 몸에 피 칠갑을 하고 아직도 핏방울이 떨어지는 검을 든,‘차원종’ 서유리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