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크리스마스 - 석봉,유리 편 (上)
백합녀 2014-12-26 1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특별한 날일테지만, 검은양 팀원들은 오늘도 그냥 평소처럼 임시본부에 모여 무의미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제이 아저씨, 우리...... 내일은 쉬겠죠?"
한참동안 게임만 하던 세하가 구석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제이에게 물었다.
"너 바보냐? 클로저 요원한테 휴일이 어딨어. 차원종이 언제 튀어나올지 어떻게 알고 쉬게하겠냐?"
"그래도~! 내일은 크리스마스잖아요~!"
제인느 희망에 부푼 세하의 바람을 잔인하게 부숴버렸다.
"뭐, 상관없잖아? 넌 어차피 크리스마스 때 만날 사람도 없잖아~! 모솔 이세하!"
옆에서 음악을 듣고있던 유리가 헤드셋을 벗으며 끼어들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적잖은 상처를 받을만한 심한 말이었지만, 여자보다 게임을 더 좋아하는 우리의 세하는 눈곱만큼도 상처받지 않았다.
"난 크리스마스 때 석봉이랑 경험치 2배 이벤트 챙길거거든?"
"으, 응......? 석봉이랑......? 아, 그래~! 누가 게임 폐인 아니랄까봐~!"
석봉의 이름을 듣자마자 유리의 얼굴은 눈에 띄게 붉어졌고, 말까지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하네~ 석봉이 뺏어가서. 넌 크리스마스 때 쉬면 석봉이한테 데이트라도 신청하려고 한거 아냐~?"
"아, 아니거든?!"
이번에는 세하가 유리에게 역공을 펼쳤다. 그러자 공격에 비해 방어에 약한 유리는 크게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포기하라니까~ 내가 몇번이나 말했잖아? 석봉이는 너 말고 좋아하는 애 따로 있다고."
"그,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안알랴줌."
"으으으으으으으으으~!"
세하에게 완패한 유리는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리고는 다시 헤드셋을 꼈다.
"제이씨 말대로, 우리 클로저 요원들에게 휴일은 없어.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차원문에 대비해야하니까."
"그래도 크리스마스 때는 좀 봐주라~ 석봉이랑 벌써 레이드 약속 잡아놨단 말이야~!"
잠자코 듣고만 있던 슬비가 날카로운 일침을 놓자, 세하는 의자를 뒤로 젖혀 삐걱거리며 투덜거렸다.
"히히~! 안됐다~! 테인이는 그날 쉬는데!"
"알아. 넌 월차 썼다면서?"
"2명 이상 휴가일이 겹치면 안되니까~ 미안하지만, 먼저 크리스마스 날에 월차를 쓴 테인이가 잘했던 거야!"
"요망한 것......!"
자리에 앉아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던 테인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 귀여운 모습도 지금 세하의 눈에는 소악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탁탁탁탁탁탁- 쾅-
그때, 임시본부 문을 힘차게 열어젖히며 유정이 들어왔다. 그런 유정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있었다.
"헉...... 헉...... 얘들아! 좋은 소식이야!"
꽤 먼 거릴르 뛰어온 듯, 숨을 고른 유정은 땀을 닦아낸 후 큰 소리로 말했다.
"뭔데요? 우리 승진한대요? 월급 더 준대요?"
"아니...... 그런건 아니고, 보다 눈앞에 있는 좋은 일이야!"
"눈 앞에 있는 좋은 일이라...... 핫! 혹시 [하얀사막] obt 날짜 나왔어요?"
"그것도 아냐!"
"그럼, 허리 통증에 좋은 한약이라도 가져왔나?"
"댁은 또 뭔 소리에요!"
척-
세하와 제이까지 바보같은 말만 하자,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이 슬비가 손을 들었다.
"무엇이 좋은 소식인지, 저는 눈치챘습니다. 김유정 요원님."
"그, 그래~! 역시 믿을건 슬비 뿐이지~! 언제부터 퀴즈쇼같은 분위기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 정답을 말해봐!"
그리고, 슬비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사랑과 차원전쟁] 14화, 친남매인 애쉬와 더스트가 과연 결혼할 수 있을지 없을지 결정되는게 바로 오늘 밤입니다. 김유정 요원님도 기대되시는 거군요!"
"슬비야...... 너한테까지 바보가 옮은거야......? 휴...... 그럼 전부 틀렸으니, 그냥 내가 직접 말할게. 사실......
12월 25일 성탄절, 우리 검은양 팀에게 특별 휴가가 내려왔다!"
"예에?! 정말요?!"
"그래! 요즘 우리팀이 강남하고 구로에서 공을 좀 많이 세웠잖아? 그래서 유니온 상부에서 크리스마스 때만큼은 좀 쉬라면서 이렇게 특별휴가까지 내려준 거라고~!"
유정의 뜻밖의 말에 모두가 크게 놀랐다. 그들은 여태까지 어떤 빨간날에도 쉬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그럼 차원종은요?"
"괜찮아. 유니온에 클로저가 너희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최근에는 차원문 발생 빈도도 그렇게 높지 않으니까. 정말 위험해지면 너네도 휴가 때려치고 나와야겠지만...... 최대한 그렇게는 안되게 해볼게."
"앗싸아아아!"
먼저 세하와 유리가 가장 먼저 기뻐하며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러나 다른 3명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에에에? 유정 누나, 그럼 제 월차는요? 날라간거에요?"
"아아, 테인이 너는 26일까지 쭉 쉬면 돼."
"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자신이 기껏 쓴 월차가 날아갈까봐 걱정하던 테인은 유정의 말을 듣고 그제야 얼굴을 활짝 폈다.
"저는...... 내키지 않는군요. 크리스마스라 해도 특별히 만날 사람도 없고......"
"괜찮아. 슬비 너는 지금까지 고생 많았으니까, 그날만큼은 임무에 관한건 싹 다 잊고 푹 쉬다 와."
"흠......"
슬비는 그래도 어딘가 석연치 않아보였다.
"......유정씨, 당신도 쉬는건가? 크리스마스에."
"에? 저요? 하아...... 물론 전 못 쉬죠...... 그 망할 데이비드놈 때문에 밀린 서류가 몇갠데...... 그날도 유니온 본부에서 야근해야죠......"
"......그런가."
선글라스 너머 제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유정이 쉬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땡- 땡- 땡- 땡- 땡- 땡-
그때, 6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 6시다! 유정 언니! 전 칼퇴할게요~!"
6시 종이 울리자맞 ㅏ유리는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그래...... 그것도 공무원의 좋은 점 중 하나지.
"아, 유리야! ......벌써 가버렸네. 뭐, 상관은 없지만. 다들! 해산해! 내일 푹 쉬고~!"
"예~!"
검은양 팀원들은 각자 짐을 챙겨서 임시본부 밖으로 나섰다. 갑자기 얻은 휴일에 무엇을 할지를 머릿속으로 계획하며......
.
.
.
"앗싸~! 솔직히 기대도 안 했는데, 나이스! 집에 가서 석봉이한테 톡 보내자~!"
"세하야!"
크리스마스 날 석봉이와 레이들르 돌릴 생각에 들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려던 세하를 불러세운건 다름아닌 유리였다.
"어? 서유리? 너 먼저 간거 아니었냐?"
"아...... 미리 나와서 너 기다린 거였어. 내일 일에 관해 할 말이 좀 있어서......"
유리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말했다. 그걸 본 세하는 순간, 혹시 이녀석이 나한테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너, 석봉이랑 게임에서 레이드? 그거 맞지? 아무튼 그거 한다고 했지? ......있잖아, 그것 좀 취소해주면 안돼?"
"하아...... 그럼 그렇지......"
세하는 순간 설렜던 자신을 마음속으로 질책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
"아무것도 아니다. 근데, 내가 왜 그걸 취소해야되는데?"
"......나, 내일 석봉이한테 데이트 신청할거야. 그리고...... 제대로 고백해보려고 생각해."
대충 이런 이유일거란 건 유리의 말을 들은 시점에서 어느정도 에상한 바였지만, 세하는 일부러 심술을 부렸다.
"야, 내가 몇번을 말하냐? 석봉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그래도 상관 없어!"
유리의 단호한 외침에, 심술을 부리려던 세하가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물론 사귀게된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런거랑은 관계 없이, 그냥 석봉이한테 내 마음을 전하고싶어. 그러니까...... 부탁해."
유리가 머리까지 숙이며 부탁하자, 세하도 더이상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석봉이만큼 컨트롤 좋은 딜러는 찾기 힘들겠지만......"
"정말? 고마워! 아......! 이러다 늦겠다! 그럼, 안녕~! 고마워 세하야!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휴우...... 다행이다...... 근데 어떡하지? 지금부터 옷이라도 새로 사러 가야하나......"
세하의 손을 잡고 흔들며 감사를 표한 유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멀어져갔다. 유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들고있던 세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 한석봉 이놈...... 좀 부럽네. 크리스마스에 여자가 불러주기도 하고."
세하는 게임폐인에 모태솔로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온 동료인 석봉에게 조금 배신감을 느껴버렸다. 하지만 자신의 절친인 석봉의 관한 일이니, 일단은 응원해주기로 했다.
"뭐......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둘이 사귀게 된다면...... 나도 이제 더이상 눈치 볼 필요는 없겠군."
세하는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손을 주머니 속에 꽂아넣고 녹이며 제 갈길을 갔다.
.
.
.
뚜르르-
"여, 여보세요...... 아, 세하야......"
전화 수신음이 한번 채 울리기도 전에, 석봉이 냉큼 전화를 받았다.
"어, 석봉아? 할 말이 좀 있는데......"
"아, 저, 저기...... 미안! 세하야!"
유리에게 부탁받은 대로, 크리스마스 날 잡은 레이드 약속을 취소하려던 세하의 말을 끊으며 석봉이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엥? 왜 뜬금없이 사과를 해?"
"그, 그게 말이지...... 일이 생겨서 내일 레이드 같이 못할 것 같아......"
"무,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봐!"
"그, 그게...... 원래 내일은 다른 사람이 와서 알바하는 걸로 되어있었는데...... 그 사람이 독감으로 앓아누워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일 알바하러 나가야돼."
"뭐어어어어?!"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이렇게 되면 석봉이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겠다던 유리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야...... 알바 대타 빨리 구해! 지금 당장!"
"에...... 에엑? 지금부터? 그런거 무리야......!"
"입 다물고 빨리 대타나 구해! 안 그러면 다음부터 레이드 갈때 탱킹 안해줄거야!"
세하는 옹졸한 협박까지 해가며 석봉이 내일 알바하러 가는 것을 막았다.
"그, 그렇게 말해도...... 나, 친구도 없고......"
생각해보니 그랬다. 세하도 석봉이도, 학교에서도 게임만 하고 다녀서 친구는 거의 없다. 하물며 크리스마스 날 알바 대타를 부탁할 정도로 친한 녀석같은 건 없었다.
"하아...... 그럼 어쩔 수 없네...... 내가 대신 나갈게. 몇시에 나가면 돼?"
"어, 어어...... 시간은 오후 1시~6시까지만이라 그렇게 길진 않아. 손님도 특경대원이나 유니온 요원들밖에 없어서 그렇게 바쁘지도 않아...... 그냥 상품진열하고 청소만 제대로 해주면 돼......"
"하아...... 알았어."
세하도 남의 연애사업을 도와주느라 경험치 2배 이벤트를 못 챙기게 될줄은 예상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의 사정을 들은 이상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 그런데...... 나랑 레이드 같이하려고 하는거 아니었어? 근데 네가 대타로 나가버리면 의미가 없잖......"
"시꺼! 그럼 끊는다!"
"어, 으응......"
석봉은 대략 정신이 멍해져서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붙잡고 잠시 굳어있다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그때, 평소에는 전화올 일도 많이 없던 석봉의 핸드폰이 한번 더 울리기 시작했다.
"응......? 이번엔 누구지......?"
석봉은 혼잣말을 하며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살펴봤다. 그리고 그곳에 쓰여있는 이름이 서유리라는 걸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석봉아! 나 유리야~!"
석봉의 핸드폰에 여자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통신사 직원이나 스팸전화 외에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석봉은 깜짝 놀랐던 것이다. 생전 처음 여자와 전화를 하니, 석봉은 긴장돼서 땀까지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유, 유리야...... 무슨 일 있어?"
"아니~ 별일은 없구...... 사실, 내일 우리 팀 전체가 특별휴가거든~! 그래서, 내일 크리스마스기도 하구...... 넌 할 일도 없을테니까......"
유리는 어쩐지 평소의 유리답지 않게 우물쭈물하고, 뜸을 많이 들이는 듯 했다. 아무리 강심장인 유리라도, 데이트 신청을 할때는 떨릴 수 밖에 없을테니까......
"어...... 할 일이 있긴 있었는데, 지금 다 취소된 참이야."
"그, 그렇지~? 역시 그렇지~? 그럼...... 내일 나랑 영화라도 보러 가지 않을래?"
"으, 으응?!"
석봉이는 유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했다.
"여, 영화? 내일? 왜?"
"그게~ 사실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날 친구랑 보고 오라면서 영화 티켓을 2장 줬거든~! 근데 휴일에까지 우리 팀원들이랑 같이 잇으면 뭐랄까, 쉬는 느낌이 안들잖아~! 그렇다고 다른 애들 중에는 그렇게 친한 애도 없구~! 그래서! 같은 반 친구에, 구로에서 자주 만났던 너랑 같이 가려고...... 뭐, 싫음...... 말고......"
평소의 유리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 길었지만, 석봉은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상태라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석봉이는 침대에 누워 조금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 그래...... 좋아. 그럼...... 몇시에 만날래?"
"정말? 오케! 그럼 내일 강남 GGV 앞에서 1시에 보자!"
"으, 으응......"
얼떨결에 유리의 데이트 신청을 승낙하고 전화를 끊은 석봉은 잔뜩 긴장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 같이 영화보러 가다니...... 이, 이거 완전 데, 데이트 아냐......? 난 슬비를 좋아하는데...... 이래도 되나? 지금이라도 유리한테 전화해서 역시 못 가겠다고 할까......? 아니, 그랬다간 유리가......"
생애 첫 데이트를 앞둔 석봉은, 침대에 드러누워 이리저리 구르며 머리가 터져라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각, 유리는......
"크으으으으으으~!"
길고 푹신한 배게를 꽈악 끌어안고 방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쾅-
"으으으......! 아파라......!"
전화를 끊은 뒤부터 계속해서 발광하며 방바닥을 구르던 유리는 머리를 침대 모서리에 부딪히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후아...... 긴장했다......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유리의 심장은 아직까지도 빠르게 뛰며 쿵쾅쿵쾅 고동소리를 내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심장박동을 가라앉힌 유리는 손거울을 들고 얼굴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괜히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겨 정리했다.
"헤헤......"
석봉이를 생각하자 유리는 자연스레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후, 유리는 손거울을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고 침대로 기어올라가 긴 배게를 꼬옥 껴안았다.
"아......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유리는 내일이 조금이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7시 30분이라는 이른 시간에 잠을 청했다.
그날밤, 유리는 달콤한 꿈을 꾸었다.
<이번화 쓰면서 느낀점>
네...... 연애 해본적도 없는 놈이 연애소설 쓰려니까 아주 죽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랑 당일에는 노느라 못써서 결국 다 지나고 나온 크리스마스 특집이지만, 그래도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