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꾼과 환영경계의 우로보로스 - 프롤로그 (1)
서진권 2014-12-26 2
결국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새하얀 액정모니터 속에서 축소된 A4 사이즈의 백지가 자신을 비웃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오늘도 제자리걸음. 하지만 손 끝 에는 미세한 울림이 화석처럼 남아있었다. 제이는 눈가를 쓸어내리며 노트북 앞에서 일어나 창가의 커튼을 걷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탁상 위의 진정제 몇 알을 집어 삼켰다. 알약이 식도를 달팽이처럼 느리게 타고 넘어가는가 싶더니, 이내 끈적거리는 식감과 함께 그의 몸 속 으로 사라졌다. 손가락이 계속해서 저려왔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가 오늘 한 일이라곤 9시간 넘게 책상 앞에서 앉아있었던 것 뿐 이었다. 키보드의 자판 따윈 건드리지도 못했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비단 오늘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어제, 일주일, 한 달, 그리고 몇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 며칠이었지? 어둠속에 손을 더듬어 집은 탁상달력이 적어도 올해 것이라면, 오늘은 12월 25일이어야 했다. 크리스마스였나? 새삼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상기하며 무심코 바라본 시계는 벌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이는 스스로를 비웃듯이 입가에 조소를 띄우며 달력을 바닥에 던졌다. 어차피 8시 건 12시 건 그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 이었다. 딱히 만날 사람이 있는 것 도, 연락할 사람이 있는 것 도 아니었다. 달력을 확인 한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 위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시간감각이 확실하게 무뎌져가고 있었다. 증상이 시작 된 것은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시점부터였다. 타자를 치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그에 비례해서 시간관념은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갔다.
증세는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달력을 확인하지 않으면 올해가 몇 년도 인 지 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2019년? 2018년이 아니었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무서울 정도로 같은 모습을 한 일상들이 성큼성큼 무례하게 다가 와 자신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었다.
과거와 미래를 잊은 인간에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에 읽었던 소설가의 격언이 문득 떠올랐다. 그의 말 대로 라면, 자신은 확실히 살아있다는 느낌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우울한 상념이 이윽고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그는 발작이라도 하듯 침대에서 일어나 낡고 헤진 두터운 코트를 걸쳐 입고 어두운 아파트 안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밖으로 도망간다면, 현관등의 불빛을 뚫고 어두운 적막이 쫒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그는 소설가였다. 물론 정식으로 등단 같은 거 따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소설다가. 적어도 제이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타인의 인정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관심도 인정도 필요하지 않은 소설가. 그는 오로지 자기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게 문제였을까? 소설가로 전업하고 난 뒤로, 그는 단 한 글자도 써내려가지 못했다. 아마추어로 활동 할 때는 나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정도 받았고 자비로나마 책도 만들었다. 나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꼴은 뭔가? 도대체 이유가 뭔가? 이건 단순히 필력 어쩌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제이가 글을 써 온 시간은 그가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길었다. 비록 사정이 있어 직업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밖 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시도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써내려 갈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아니, 할 이야기라면 오히려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았다. 장담컨대, 자신의 남은 평생을 바쳐 적어도 다 못할 정도의 양 이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 자리에 앉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그가 쌓아온 필력, 그간 헤쳐 온 삶의 굴국 등이 노트북 앞의 새하얀 백지 앞에서 재처럼 허망하게 흩어졌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앉아있어도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렇게 절망했다.
결국 단 한 글자도 적지 못한 채, 2년 이라는 세월만 잔인하게 흘러갔다.
숨 막히는 적막으로부터 도망쳤지만, 그가 다다른 곳은 결국 또 다른 어둠 속 일 뿐 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주택이나 소규모 아파트의 불빛과 백 미터 당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가로등을 제외한다면, 이곳에 빛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변덕스러운 날씨에 은밀하게 얼어붙어 연쇄살인을 위해 쳐둔 덫처럼 그의 발 밑 을 노리고 있었다. 제이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드문드문 보이는 인가의 불빛을 벗 삼으며 발 끝 에 신경을 집중해 걸었다.
무턱대고 집을 나왔지만 그로서는 딱히 갈 곳도 없었다.
무심코 주머니를 뒤지자 언제 있었는지도 모를 꼬깃꼬깃 접힌 만 원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서는 오랜만의 외출이다. 기왕 나온 김에 간단히 요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번화가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거리였다. 이 시간대에 여기에서 버스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는 수 없군. 제이는 한숨을 내 쉬곤 어쩔 수 없이 근처 편의점으로 방향을 옮겼다.
4년 전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내려온 고향의 풍경은 교과서에서나 보던 깡촌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풍문으로 들은 말로는, 그가 어릴 적에 신도시니 어쩌니 개발붐이 일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이후 찾아 온 경기침체에 전부 없었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고향이라곤 하지만 8살 이후로 줄곧 서울에서만 살았던 그로서는 논밭과 비닐하우스로 도배된 이 곳 의 풍경이 몇 년을 봐도 익숙하지 않았다. 해 만 떨어지면 당장 한치 앞 도 볼 수 없는 적막이라니. 아프가니스탄같은 오지도 아닌데 이렇게 지독한 어둠을 만날 줄은 솔직히 상상 못했다. 놀랐다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었다.
얼마 쯤 걷자 국도로 연결되는 갈림길 조금 너머에 편의점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창문 너머로 흔들렸다. 그리 오래 걸은 것은 아니었지만 목도리나 장갑도 없이 집에서 뛰쳐나왔기에 조금 걷자마자 그의 몸은 빠르게 식어버렸다.
오늘따라 유별난 추위가 제이의 머릿속을 온기 가득한 난로만 생각나게 만들었다. 빨리 실내로 들어가고 싶다. 그는 내리막길을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편의점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못 보던 차량이군.”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제이는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편의점 앞에는 처음 보는 낮선 SUV 한 대가 서 있었다. 손을 담그면 빼지 못할 것 같은 검은 도색이 지친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리창에는 밖 이 보이기는 할 까 싶을 정도로 선팅이 짙게 처리 되어 있었다.
제이는 말없이 멀리서 차 속을 한참동안 응시하다 이내 편의점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 탓 일거야. 하지만 선글라스는 쓰는 게 좋겠지. 속주머니를 뒤지자 그가 애용하는 주홍빛 렌즈의 선글라스가 잡힌다. 그 와중에 선글라스는 챙겨서 나왔나보다. 선글라스에 대한 집착에 제이는 스스로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돌아선 등 뒤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이상한 시선이 느껴진 것 같아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으나, 매서운 바람이 한 차례 불어오자 미약한 기시감 따윈 금방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최근 글쓰기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가 더욱 심해졌는데, 덕분에 신경이 평소보다 몹시 곤두 선 모양이다.
“어서오세요, 어라, 형님 오셨습니까?”
자동문이 열리고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마에 듬성듬성 여드름이 난 고등학생 알바 하나가 제이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 마치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같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자신을 편의점 주인 쯤 으로 여길 것 같다. 난 이곳 점장도 아닌데. 그 보다 도대체 누가 네 형님 이라는 거냐? 딱히 대꾸하기도 귀찮아서, 제이는 소년에게 말 대신 딱밤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 아파요! 하필이면 여드름 맞았다구요! 아, 진짜! 형 지금 일부러 그런거죠?!”
예상치 못한 기습에 소년은 청소도구를 든 채 허둥대며 울상을 짓는다.
“거, 밤 중 에 주민들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그러지 마라. 그리고 누가 네 형님이냐? 난 동생같은 거 안 키워.”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 쉬며 제이는 소년에게 마지못해 인사 겸 대답을 건넸다. 소년의 표정이 금세 밝아진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 녀석하고 애초에 얽히는 게 아니었다. 제이는 소년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얽히는 게 귀찮다.
글은 글대로 쓰지 못한 채, 하루하루 저축 통장만 까먹으며 살던 일상에 지쳐갈 때 쯤 동네 불량배들에게 돈 뜯기던 소년을 충동적으로 구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영웅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신경이 조금 곤두 서 있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처지에 대한 스트레스를 불량배들에게 푼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 인지, 소년은 그의 집 까지 찾아와서 감사를 표했고 시간이 지나자 한 술 더 떠 싸움을 가르쳐달라며 조르기 시작했다. 실수했다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처음에 소년은 자신이 다니는 길목에 진을 치고 기다리더니, 나중에는 자신을 피해 다니는 제이의 행적까지도 파악해서 그의 앞에 불쑥불쑥 튀어나와댔다.
예전 직업 때문에 몸이 골병이 든 건지, 최근에는 가뜩이나 몸 까지 아파 병원치례까지 하던 제이인데, 소년의 끈질긴 어프로치까지 겹치니 말 그대로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처음 몇 번은 소년의 멱살을 잡고 협박도 해 보았지만 고집이 어찌나 황소 같던지, 그가 단골로 삼은 편의점에 알바까지 돼서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는 그도 두 손 두 발 다 들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소년에게 단순한 호신술 몇 가지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불행인 지 다행인 지, 소년은 생긴 것 과는 달리 제이의 지도를 무리 없이 따라왔다. 오히려 상상 외로 빠르게 배웠기 때문에 그도 소일거리론 꽤 쏠쏠했다. 그렇게 반년이 좀 넘게 지나자 소년은 적어도 불량배들에게 지갑이나 소위 빵셔틀 취급은 당하지 정도의 구색은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 다 거기서 거기인 법이다. 한 번 강해지면 더욱 강해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던가. 소년은 레슨이 끝나자 다른 기술을 알려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녀석의 성질머리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곤 사실 기대하지 않았지만, 막상 겪게 되니 짜증스러운 정도가 상상 초월이었다. 주제에 눈치는 얼마나 빠른 지, 자신이 아는 기술이라고는 가르쳐준 것이 전부라고 아무리 둘러대도 믿지를 않는다. 최근 그가 외출 횟수를 줄인 것도 따지고 보면 일차적으론 다 이 소년 때문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최근 잦아들었던 편두통이 도지는 것 같다. 이 가능한 녀석 상대하지 말고 빨리 저녁 먹은 다음 집으로 들어가야겠다. 그리고 다시 시도해 보는 거다. 어쩌면 모른다, 이번에는 쓸 수 있을지. 어쨌든 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제이는 속으로 다짐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가서 너구리 두 마리하고 하아네켄 하나 갖다줘라. 외상 달아 놓는 거 잊지 말고.”
“아, 또요? 진짜 안돼요, 형. 며칠 전에 점장님이 형 외상주지 말라고 했단 말이에요.”
“나 점장이랑 초등학교 동창, 그러니까 서로 잘 아는 사이야. 괜찮아.”
“동창이고 뭐고, 제가 안 괜찮거든요? 애초에 점장님이랑 반 년 밖에 안 본 사이라면서요? 그것도 8살 때. 어쨌든 한 번만 더 형한테 외상주면 저 완전 작살나요.”
“내가 알게 뭐냐, 외상 안 달아놓으면 앞으로 너는 나 못 본다고 생각해.”
“진심, 형은 진짜 사람이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아, 그리고 어차피 안 가르쳐 줄 생각이잖아요, 그 기술!”
허, 요놈 봐라? 두 주 못 봤다고 꽤나 세게나온다. 요컨대 자기도 생각이 있다는 거다. 아무래도 제이가 이 편의점 외상없으면 삶이 힘들어지는 인생이라는 걸 이미 파악 한 듯하다. 아무튼 눈치만 빠르다, 번거로운 놈.
이번에는 한 수 물러주기로 했다. 솔직히 꼬맹이하고 외상가지고 실랑이 할 상태도 기분도 아니다. 그는 주머니속에 숨겨 둔 만원을 잘 펴서 소년에게 건넸다.
“......형, 바지에 돈 넣고 빨았죠?”
“이상한 소리 말고 라면이나 가져다줘. 그리고 난 그렇게 허튼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 뭐, 그렇겠죠. 암튼 조금만 기다리세요. 잘 끓여다가 갖다 드릴게요. 아, 그리고, 그 기술 언제......”
“빨리 라면 가져와라? 내일부터 내 얼굴 보기 싫어”
제이의 으름장에 소년은 살짝 풀이 죽은 채 라면을 끓이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갔다. 물론 사무실에 들어갈 때 조그맣게 어차피 또 올 거면서. 라고 중얼거리는 것은 덤이다. 아무튼 번거로운 녀석이다. 제이는 카운터로 들어 가 멋대로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설거지하기 귀찮을 때 집에서 쓸 여분의 나무젓가락도 계산 해 코트 주머니에 넣은 것은 오랜 독신생활로 얻은 생활의 지혜다.
그가 젓가락을 정성스럽게 반으로 쪼개 두 쪽을 정성스레 비비고 있자 소년은 금세 라면을 끓여 그의 앞에 가져다준다. 양은냄비다. 스테인리스 대신 양은 냄비라니, 역시 눈치는 빠르다. 소년의 그런 점이 이럴 땐 참 좋다.
“맥주는 형이 꺼내서 마셔요. 저 시키지 말고.”
“서비스업 종사자가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군, 좀 더 정진하도록 해라.”
“아, 좀......그러지 마세요, 라면도 형 좋아하게 완전 꼬들꼬들하게 끓여드렸잖아요.”
기왕이면 가져다주면 좋을 텐데. 편두통이 좀 가라앉았나 싶더니 요즘은 또 무릎이 시큰거려서 고생중인데, 소년은 제이의 몸 상태까지는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소년은 묘하게 중요한 곳에서 눈치가 없다. 제이는 투덜대며 냉장고로 가 문을 열고 맥주를 집는다.
하지만 그의 손에 집히는 건 맥주캔의 시원한 감촉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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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 용지 12장 분량 붙여넣기 하니까 에러납니다-_-;
게시판 참 잘만들었네요.
그리고 제이 언제 내줘요? 넥슨님들 지금 BADASS 무시하나요? 아저씨 무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