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정미슬비] All for you -中-
월하령 2015-06-25 12
“선배, 무슨 고민 있어요?”
“……응?”
옆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후배의 질문에 정미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어? 뭐라고 했어?”
“고민 있냐구요. 다 죽어가는 얼굴이나 하고…선배답지 않아서요.”
“그렇게…심해 보이니?”
“지금도 딱 죽을상이에요. 들어가서 쉬시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요 며칠 동안 집에도 안 들어 가셨다면서요.”
“그야 연구가 한창이니까….”
“연구를 주도하는 사람이 스트레스로 쓰러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구요. 야근의 스트레스도 잊을 겸, 같이 가서 한 잔 하실래요?”
철없는 후배의 권유에 정미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이 친구는 언제 철이 들는지….
“생각 없어. 너나 먼저 퇴근 해.”
“그러지 마시고~딱 한 잔만~.”
“헛소리 그만 하고 퇴근이나 해. 이 자료 마무리 하는 대로 나도 퇴근 할 테니까.”
“아, 지금 퇴근하신다고 하셨죠? 저랑 약속 하신 거에요. 내일도 안색 나쁘면 캐롤리엘 대선배에게 말해서 강제 퇴근 시킬 거라구요.”
“대선배는 또 뭐니, 대선배는…….”
그러고 보면 요즘 저 후배, 여자면서 무협지에 빠져 살던가. 아마 거기서 나오는 말 중 하나겠지.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ㅡ.
‘……자기 일은 알아서 하니까 그건 아닌가?’
“알았으니까 들어가 봐. 제대로 퇴근 할 테니까 걱정은 말고.”
“네에~.”
익살스레 경례를 붙이고 문 밖으로 사라지는 후배. 드디어 찾아온 혼자만의 정적에, 정미는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으, 으으으…….”
의자에 몸을 기대며 주위를 둘러보자 한눈에 들어오는 널브러진 자료들. 이걸 정리하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이젠 가늠하기도 지겨울 정도다.
“……이러다 진짜 쓰러질지도.”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기 연구 때문에 만들어진 자료들인데, 정리하는 것도 응당 자신이여야 수지가 맞겠지.
깊은 한숨을 쉬며 자료를 주워 모으는 정미. 그러던 와중, 한순간 손을 멈춘 그녀의 눈이 슬쩍 가느다랗게 변한다.
“…하.”
다시금 한숨을 쉬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한 장의 서류. 그 상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훈련용 큐브 강도, 홀로그램 위험도 조정에 대한 처리 동의서]
본래라면 큐브를 관리하는 정비반이나 홀로그램을 관리하는 물리 연구부에서 다루어야 할 사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류가 생체 공학부인 정미에게까지 넘어온 것은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걘 진짜….”
실제 물리적 피해를 가할 수 있는 고출력 훈련 시스템.
시험가동에서 부상자가 나온 이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는 위험한 훈련 프로그램. 그런 위험물을 거의 매일이라는 수준으로 돌리는 집념의 요원이 있었으니, 최근 정미의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요원ㅡ이슬비였다. 안 그래도 과부하가 걸릴지도 모르는 시스템을 매일 가동하다보면 설비의 강도라던가 안전 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러니까 좀 작작 하지.”
한동안 훈련 자제 권고라도 내려야 하나. 그런 고민에 골치가 아파진 정미는 서류를 옆에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
슬비의 과도한 훈련에 대해선 그녀 역시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원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물론 말리지 않으면 계속해서 몰아붙이다가 언젠가 그녀의 몸이 버티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도.
“…….”
그렇지만, 그만 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을 뿐 더러, 그런 말을 해 봐야 들은 척도 하지 않겠지. ‘그 사건’ 이후 몇 번이고 충고하고, 경고하고, 부탁하고, 윽박지르면서 얻은 교훈이었다.
“짜증나….”
생각해보니 짜증이 나는지 정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전부 자기 혼자 짊어지려고 하는 모습도 맘에 들지 않았거니와, 그 일로 슬픈 사람이 자기 하나 뿐이라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더더욱 그랬다.
“짜증난다고….”
사실은 내가 더 슬프다.
네가 품은 슬픔보다 내가 품은 슬픔이 더 깊고 무겁다.
마음 같아선 면전에다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이런 어두운 마음을 드러냈다간, 슬비가 완전히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녀ㅡ슬비가 죄책감을 품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으니까.
“……몰라, 이젠. 멋대로 하라 그래.”
그런 것보다 일단 자료 정리가 우선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정리 작업을 향해 손을 뻗는 정미.
이변이 일어난 것은ㅡ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경고. 경고. 구로 지역 위상 변곡률에 급격한 변화를 감지. 최소 군단장 급, 혹은 그와 동등한 개채수의 차원종이 출현. 시설 내의 연구원들은 지정 매뉴얼에 따라 신속히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구로 지역 위상 변곡률에 급격한 변화를 감지. 최소 군단장ㅡ.]
“……뭐?”
느닷없이 울리는 사이렌. 그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차원종의 출현을 알리는 경고 방송. 등줄기를 달리는 서늘한 기운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정미는 곧바로 연구소 안쪽에 있는 관제실을 향해 달려갔다.
“하아…하아…….”
이미 많이 늦은 시간 이라 그런지 연구소에 남아 있던 사람은 정미 한 사람뿐이었다. 보안 시스템까지 자동화 된지 오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정적을 들이마시며, 정미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관제기 앞에 섰다.
“G-1부터 G-150까지 모든 관제 카메라 화면을 띄워.”
[알겠습니다. G-1부터 G-150까지의 화면, 업로드 하겠습니다.]
무뚝뚝한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매우는 구로 각 구역의 영상들. 그 영상들을 빠른 속도로 훑어 내리던 정미는, 어느새 이상함을 깨닫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깨끗했다.
군단장 급은 고사하고 차원종이라고는 한 무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한 변곡률이라면 대기가 녹색으로 오염되는 현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런 전조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어떻게 된 거야?”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다시금 화면을 훑어내리는 정미. 그리고ㅡ.
“……?! 113번 영상, 스톱! 확대해!”
[113번 영상, 확대합니다.]
빼곡하게 채워져 있던 화면들이 모두 사라지고 커다랗게 확대되는 ‘어느 지점’의 영상. 그것은 위상 억제 열차의 노선에 수평으로 설치되어 있던 감시 카메라의 영상이었다. 그 한 순간의 정지된 화면 안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이건 대체…….”
한 쪽은 분홍빛 머리의 유니온 정식 요원 복장을 한 소녀, 이슬비.
그리고 다른 한 쪽은ㅡ.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수개월 전, 군단장 급 차원종과의 교전에서 행방불명된 소녀ㅡ서유리였다.
★
“대체 뭐가! 뭐가 미안하다는 건데!”
“…….”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유리를 향해, 슬비는 절규하듯 소리쳤다. 믿을 수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절규에 쐐기를 박듯, 유리의 전신에서 검고, 이질적인 위상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거….”
시커먼 기운에 휩싸인 채 쓸쓸한 미소를 짓는 유리. 가벼운 차림이던 유리의 몸을 감싸고 있던 위상력은 어느새 불길한 자주색으로 수놓아진 경량 갑옷으로 변해 있었다. 얇은 금속제 장갑을 낀 채 손을 움직이던 유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하면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할 수 있었으면,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고.”
“…….”
“근데 맘대로 안 되더라. 막상 와서 널 보니까 옆에 가 보고 싶고…이런 몸이 되어 버렸는데도 아직까지도 이런 건 변하지 않ㅡ.”
“목적이 뭐야….”
“…….”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똑바로 유리를 겨누는 칼 끝. 원망과 배신감, 그리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시커먼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며, 슬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서유리…. 너, 목적이 뭐야…차원종이 돼서 나타난 이유가 뭐냐고!”
“…….”
“대답 해!”
“걱정 마. 뭔가를 부수거나 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그럼 뭔데!”
“……‘누군가를 지키려고’ 온 거야.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입힐 생각은 없어. 너만 눈 감아 준다면 조용히 사라질게.”
“내가 차원종의 말 따위를ㅡ!”
뒷말이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오기 직전, 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비어있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차원종의 말 따위라고? 아니,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몇 달만에 만난 소중한 친구다. 그런 친구의 말을 그냥 차원종의 말로 치부해도 되는 걸까?
“차원종의…말…따위를…….”
무리다.
아무리 해도 ‘믿을 수 있겠냐’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
그 말을 꺼내려고만 하면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슬픈 눈빛이 눈에 밟히고,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가 않는다.
“나…는…….”
“……슬비야.”
“나는……!”
“…….”
괴로운 표정으로 굳어있는 슬비를 보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여는 유리. 그런 그녀의 행동을 끊듯 뒤에서 차원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적의 감시망에 걸릴 위험성이 높습니다. 이만 목표를 확보하기 위한 행동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정중하게 모셔오도록 해. 소중한 분들이니까.”
[모시고, 곧바로 영지로 돌아가면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해. 내 영지랑 이쪽은 차원압이 비슷하니까 곧바로 이동해도 문제는 없어. 넘어갈 때 차원 분진에 의한 오염만 주의하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명령, 이행합니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한 발자국, 움직이는 차원종. 지금껏 굳어있던 슬비가 움직인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ㅡ?!]
“어딜 가!”
위상력까지 사용해서 서 있던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슬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차원종의 급소를 향해 슬비의 단검이 호를 그리며 날아든다. 먹혀들어간다면 일격에 즉사시킬 수 있는 위치. 자가당착에 빠져 있던 스스로를 책망하듯 휘두른 일격에는 반드시 차원종을 죽이겠다는 살의가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인간 주제에ㅡ!]
예상치 못한 기습에 약간이나마 느려지는 차원종의 대응. 이 거리에서 이 상황이라면 빗나가지 않는다. 급소를 꿰뚫린 차원종은 그 일격에 명을 다하리라.
ㅡ본래라면, 그렇게 되어야만 했었다.
-챙!
차원종에게 나이프가 꽂히기 직전 그 사이를 가로막는 차가운 금속성. 어느새 들어 올린 유리의 얇은 칼날이 슬비의 단검을 망설임 없이 쳐내고 있었다.
“크윽…!”
필살의 일격이 막힌 것에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나는 슬비. 그녀와 차원종 앞을 가로막듯 선 유리는, 뒤에 선 차원종을 향해 무심하게 말한다.
“봤지? 저런 애야. 쉽게 상대할 수 없을 거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가 봐. …네 말대로 시간은 많지 않아.”
[예. 가자!]
눈 깜짝할 사이에 달리는 기차 밖으로 뛰어내리는 차원종의 무리. 어디론가 향하는 그들을 추격하기 위해 뛰어내리려는 슬비 앞을, 유리가 막아선다.
“비켜! 난 저 녀석들을 잡아야 한다고!”
“말 했잖아. 딱히 누군가를 다치게 하려고 데려온 거 아니라고. 저 녀석들도 그 점을 제대로 알고 있어.”
“웃기지 마, 서유리! 차원종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차원종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진정하고 이야기를ㅡ.”
“진정은 무슨 진정! 이 배신자ㅡ!!”
앙칼진 그 외침에 슬비를 향해 다가오던 유리의 발걸음이 멎는다.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어! 차원종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네가 우리 부모님을 죽인 원수들이랑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거냐고! 어째서!”
“…….”
“이젠 변명도 안 하는 거니…? 내 질문엔…대답할 가치도 없는 거야?”
“그런 거…아냐.”
“그럼 대체 왜! 왜…!”
눈가가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흐려지는 시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데일 정도로 뜨거운 감정이 ** 듯 솟구친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전부 뒤섞인 채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
그 떨리는 목소리가 자아내는 것은ㅡ소중한 사람의 배신으로 상처 입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처절한 애원이었다.
“하필이면 네가…차원종 따위가 되어버린 거냐고…….”
조금 전까지 꽉 쥐어져 있던 손이 풀린다.
떨리면서도 곧게 유리를 향해 겨누고 있던 단검이 차가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그 소리가 방아쇠인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만다.
“왜…….”
타 버릴 것 같은 뜨거운 감정이 입을 통해, 눈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온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아아…흐아아……으흑……흑…….”
듣는 사람의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처절한 울음소리. 그 애절함에, 유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내딛었다.
“슬비야….”
“다가오지 마ㅡ!”
“슬비야…!”
“다가오지 말라고! 차원종하고 할 말은 없어!”
“이슬비!”
“오지 마아아ㅡ!!”
“싫어!”
턱, 하고 어깨에 닿아오는 가벼운 중압감. 슬비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자, 그곳에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한 유리의 모습이 있었다.
“오지 말라니까…왜 자꾸 다가오는 거야…!”
“만나고 싶었으니까! 보고 싶었으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그럼 왜 배신했는데! 왜 차원종 따위가 된 거냐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었으니까! 다시 만날 방법은 이거 하나 뿐이었다고!”
“나에게 있어서 차원종이 어떤 의미인지 다 알고 있으면서!”
“미움 받더라도 보고 싶었어! 소중한 친구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마음이야?!”
“윽…….”
아마 진심이리라.
차원종이 되었더라도, 그 심지가 곧은 서유리가 스스로를 잃어버리거나 하진 않았겠지.
지금 하고 있는 이 말도, 흔들리면서 호소하는 그녀의 눈동자도, 전부 진심이라는 것을 슬비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ㅡ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놔….”
단호한 거부와 함께 슬비의 양 팔이 유리를 밀어낸다.
“슬비야, 나는ㅡ.”
“알아.”
“……응?”
“알고 있다고. 네가 하는 말, 아마 전부 진심이겠지.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너랑 가벼운 사이로 지내진 않았어. 하지만…그래도 난 널 용서할 수가 없어.”
“널 배신한 것에 대해선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어. 그래도ㅡ.”
“나 하나만이 아냐. 사정이 어찌 되었건 넌 우리 팀을 배신했고, 유니온을 배신했고, 나아가선 인류 자체를 배신한 거야. 그리고ㅡ절대로 배신해서는 안 되는 사람까지 배신했어.”
쫙, 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
그것은 슬비의 손이 유리의 뺨을 올려붙이는 소리였다.
서서히 욱신거리는 뺨을 한 손으로 감싸는 유리. 그런 그녀를, 슬비는 텅 비어버린 눈을 하고서 책망한다.
“나쁜 년. 어떻게…정미까지 배신할 수 있어?"
정미, 라는 이름에 떨리기 시작하는 유리의 눈동자.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슬비는 슬픈 목소리로,
"너랑 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
“…….”
“정미가 차원종에게 자기 아버지를 잃은 것 정돈 너도 알고 있었으면서! 적어도 걔를 생각했으면 넌 이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
“그런데도 이렇게 경솔한 결정을 내려버리다니…너란 애는ㅡ!”
“시끄러워!”
“!!”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천장.
슬비가 자신이 유리에게 밀려 넘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라고 좋아서 이런 선택을 한 줄 알아?! 내가 아무리 생각 없는 애라도 차원종이 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냐!”
“…….”
“경솔한 결정이라고? 내가 이런 몸이 되기까지 얼마나 갈등했는지 알기나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난 척 떠들지 마! 얼마나 괴로운 심정으로 이따위 선택을 한 건지, 모르면 다물고 있어!”
“……….”
“누군 이런 몸이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변명들. 어느새 그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이고 있었다.
“이 방법이 아니면…지킬 수 없었으니까.”
“뭐…?”
지킨다고? 누구를?
그런 의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지만, 슬비는 그 답을 본인에게서 들을 수 없었다.
“작전 종료? 그리고 이쪽으로 접근하는 위상력 감지…다른 사람들인가. 생각보다 빠르네. 응…알았어. 먼저 영지에 가 있도록. 곧 돌아갈게.”
“아….”
“…미안.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네. 지금 세하나 아저씨, 테인이를 만나기라도 하면 꽤나 속이 쓰려질 것 같거든.”
들고 있던 검으로 허공을 베어내는 유리. 그러자 맥없이 공간이 갈라지며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차원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 경계선 너머로 발걸음을 옮기던 유리는, 여전히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슬비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내 입으로 변명하진 않을게. 유니온의 기록을 조사해 봐.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기다ㅡ!”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닫혀버리는 차원문. 처음부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텅 비어버린 공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이제는 사라져버린 차원문을 향해 뻗고 있던 슬비의 손이, 그대로 바닥을 강하게 내려친다.
ㅡ쾅!
“아아아아아아ㅡ!!”
텅 비어버린 공간을 채우는 비통한 절규.
그 처절한 외침은 검은 양의 다른 팀원들이 도착하고, 슬비가 힘이 다해 의식을 잃어버리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
사건 종료 며칠 후, 신서울 복구지역ㅡ신강고 옥상.
차원종의 공격으로 복구 작업이 끝날 때 까지 휴교 상태를 유지하기로 해서 그런지 한창 학생들이 하교할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적막한 공간.
그 곳에서, 두 소녀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지금 당장 설명해. 지난 며칠간 어디서 뭘 하느라 잠적했는지! 그 날, 대체 유리랑 무슨 말을 했고, 걘 지금 어디 있는지…지금 걔가 어떤 상태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
“혹시라도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 나도 설치된 관제 카메라로 보고 있었으니까.”
정미의 다그침에 말없이 자료 한 뭉치를 건내는 슬비.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자료를 넘겨보던 정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이게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 아니야. 정규 보고서에서 찾아낸 것들이니까. 샅샅히 뒤지느라 시간이 걸린 거고.”
“이게 헛소리가 아니라고? 이따위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맥없이 바닥에 던져지는 자료들. 흩날리는 종이 가장 앞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7개월 전 군단장급 차원종과 교전 중 행방불명된 검은 양 팀 소속의 서유리 요원과 그 가족의 처우에 대해서]
[일반적인 경우라면 순직으로 처리하는 것이 옳은 사안이나 대상 요원의 특이사항으로 인해 순직 처리는 보류. 또 다른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서유리 요원은 지난 강남 데미플레인 사태 때, 군단장 급 차원종인 개체면 ‘애쉬’와 ‘더스트’의 도움을 받아 ‘용 : 아스타로트’를 쓰러트린 전례가 있다.
이 과정에서 서유리 요원은 군단장 급 개체인 애쉬와 더스트, 두 차원종의 위상력을 몸에 받아들인 전례가 있으며(관련 자료 ‘칼바크 턱스’-13페이지 첨부), 그로 인해 생긴 ‘제 3의 위상력’(관련 자료 ‘제 3 위상력’ 14페이지 첨부)을 사용해 아스타로트를 쓰러트렸을 때, 다음 대의 ‘용’의 지위에 오를 자격을 얻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관련 자료 ‘검은 양 팀 사건 보고서’ 15페이지 첨부)
위의 이례적인 사항들로 미루어 보아 서유리 요원을 비롯한 ‘검은 양’팀 전원에게 후일, 어떠한 요소로 인해 ‘차원종’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여러 가지 조치를 할 것을 비밀리에 결정했다.
그 중 하나는 대상들이 차원종으로 변질되었을 경우 교섭을 위한 대비책의 일환으로서 요원들의 ‘가족’을 감시, 보호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이슬비 요원의 경우는 가족이 없고, 제이 요원, 미스틸테인 요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이세하 요원의 경우는 코드네임 ‘알파-원’의 자식이므로 감시, 보호의 의미가 없다.
이러한 사항들에 따라 위 여건에 들어맞는 것은 서유리 요원뿐인 것으로ㅡ.
그 뒤로 이어지는 무수히 많은 내용들.
하지만 모든 내용을 극한까지 압축했을 때, 이 보고서가 가리키는 내용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가족을 인질로 잡는다고? 요원이 차원종으로 변질될 것에 대비해서? 웃기지도 않아…! 유리가 차원종이 된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 없잖아!”
“…….”
“말 해, 이슬비. 걔, 지금 어디 있어? 무사한 거 맞지? 아무 일 없지? 이따위 보고서가 나돌아다닐 이유, 없는 거 맞지?”
“…….”
“묻고 있잖아! 대답해!”
“……미안.”
“네 사과를 듣고 싶은게 아냐! 내 질문에 대답하라고ㅡ!!”
“정말…미안.”
“…….”
거듭된 두 번의 사과. 그 의미를 모를 정도로 정미는 둔하지 않았다.
“말도…안 돼…. 어떻게 유리가…그런……!”
“…….”
말없이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슬비. 그런 그녀에게 성큼 다가온 정미는 다짜고짜 멱살을 잡더니 난간에 슬비를 밀어붙였다.
“큭…!”
“너 때문이야…! 전부 너 때문이야!”
“…….”
“그 날, 네가 무리해서 적진에 돌진하지만 않았어도! 하다못해 빠질 수 있을 때 빠졌더라면…유리가 너 하나 구하자고 무리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
가슴이 아파온다.
“못 가게 말렸어야 했는데…. 이런 녀석 하나 구하겠다고 가려는 걸 말렸어야 했어…!
“…….”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언에, 불쾌감이나 분노보다 슬픔이 더 많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차라리 거기서 죽어버리지 그랬어! 너 때문에…너 때문에ㅡ!!”
“……….”
저주라고 해야 할 정도의 폭언.
그런 거칠고 무례한 원망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슬비는 아무런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돌려 내! 유리를…내 소중한 사람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흑…으흑……. 으으…….”
어느새 흐느낌에서 오열로 바뀌어버린 외침. 그 울음소리에 어느새 슬비의 눈에서도 한 줄기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