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단편]

킨토스 2015-06-24 1

- 심심하니 한번 끄적여봤습니다  -   번호가 달린 부분은 맨 아래 주석이 붙어있습니다(주석을 ** 않고 읽으셔도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나중에 몰아보시거나 안보셔도 됩니다.)

 

 

짤랑 짤랑..

 

유리문에 달린 종이 사람들의 수다를 비집고 소리를 냈다. 머리카락이 온통 흰색에 대충 해집어놓은 더벅머리..

 

건장한 체격의 청년은 허우대와는 다르게 파스로 뒤덮힌 몸을 삐꺽거리며 고개를 휘둘렀다.

 

 

"어이 꼬마 여기다 여기.."

 

 

살짝 미소를 짓는 얼굴. 처음 볼때만해도 팽팽하던 양반이 이젠 슬슬 눈가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다. 대충 손을 휘두르고 앞에가서 턱. 그리고 한때 유명했던 그 얼굴들 다시 들여다봤다.

 

"...여기 맥주 500cc 한잔 더.."

 

"쓸데없는 소리 말아. 어딜 꼬맹이가 술을 마시겠다고.."

 

턱하니 가로막는 누님. 하여간 나이가 그지경이어도 죽질 않으시는구만.

 

"내 몸이 안좋다 해도 슬픈 누님이랑 맥주한잔은 할수 있어. 아시겠어 누님?"

 

날 바라보는 눈이 살짱 찡그려지더니, 이내 힘을 풀고 곁에 놓여있던 반쯤 마신 맥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맥주 500cc 한잔. 안주도 좀 더 갔다줘요. 아, 어... 오븐구이 치킨으로."

 

곁에서 눈치보던 남자가 계산서에 작대기 몇개를 더 긋더니 이내 카운터 쪽으로 돌아갔다. 내 시선도 다시 누님에게로 컴백.

 

 

 

'오븐 순살 하나-'

 

카운터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누님은 슬쩍 그쪽을 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린채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요즘 잘 지내냐. 몸은 건강하고?"

 

"골골한 누님에 비하면야. 괜찮은 여자 하나만 있으면 확 낚아챌정도로?"

 

"꼬맹이가 잘난척은. 그래서 겨우 호프집 와놓고 온 몸을 꺾고 앉아있냐. 티를 내질 말던가..."

 

"그러는 누님은 세하놈이 속 꽤나 썩이나 봅니다. 얼굴에 없던 주름이 다 생기고?"

 

하면서 슬쩍 웃었더니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가 피식 웃는다.

 

"아이고 천하의 서지수가 백발꼬맹이한테 놀림이나 당하고... 부끄러워서 참.." 하면서 씩 웃더니 고개를 사악 돌려 드디어 내 쪽을 쳐다본다.

 

 

그리고 한번도 본적없는 눈동자로 날 쳐다봤다.

 

"할 말 있음 단도직입적으로 하셔요 누님. 언제 우리가 가렸습니까."

 

"그래. 그럼 바로 들어가자."

 

 

그리곤 왠지모르게 몸을 바로 세우더니, 생각하지도 못한 충격적인 소릴 꺼냈다.

 

 

"유니온 휘하, 위상능력자팀, 검은양의 리더 해볼래?¹ 아니, 해. 해줘."

 

 

이건 무슨.. 이 누님이 차원종 때려잡다 본인 정신까지 때려잡았나? 내 사정을 다 아시는 누님인데? 그런소릴? 유니온이라고?

 

 

"...와..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지을것 까진 없잖아 동생.."

 

"..."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니, 난처한듯 헛웃음을 짓는다. 일단. 맥주를 조금 들이키고, 속을 진정시키고, 목소리가 너무 사납게 들리지 않도로 최대한 자제를 시키면서 말을 꺼냈다.

 

"누님도 내 사정 잘 알잖아. 이젠 위상력이고 뭐고 그놈들에게 다 뜯겨나가서 없다고. 그런걸 꾸릴 능력은 나한텐.."

 

"유니온쪽에는 내가 이미 말하고 네 동의만 있다면 괜찮다고 허가까지 났어. 그러니까 부탁할게."

 

"....이 보세요 누님..!"

 

이쯤 되면 화가 치밀어오른다. 이럴 누님이 아닌데, 오늘 도대체 왜, 하고 화가 나기 직전 누님의 얼굴이 뭔가 이상하다는걸 깨달았다. 누님은 목구멍을 무언가로 틀어막는것 같은 얼굴이었다.

 

"..동생. 내 아들이.. 세하가.. 그 팀에 들어가기로 했어. 그래서 이렇게 부탁을-"

 

 

"뭐? 아니 제정신이야? 어떻게 그꼴을 당하고 자식을 거기 넣...어.."

 

거기 까지 말했을때 누님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천하의 서지수가.. 알파퀸이라 불리며 차원종을 쓸어버리던 영웅이..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내 자식 사지로 몰아넣는것 같아서 내 가슴도 찢어져......"

 

 

참고 있기 힘든지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로 가슴팍에 손을 올리는 누님.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누님은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고개를 들고 애써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후우. .. 그... 세하.. 능력조절이 힘들정도로 위상력이 넘쳐나. "

 

"피는 못속이는군."

 

비꼬듯 목소리가 튀어나가버렸다. 빌어먹을 놈에 위상력. 듣기만해도 속이 쓰리다. 내 목소리에 약간 기가 눌렸는지 누님은 더 말을 꺼내질 못했다.

 

...

 

"얄궂구만. 누님이 잘 가르쳐줄수는 없어? 굳이 유니온쪽에 맡겨야할 필요가 뭐가 있어? 누님은 이분야에선 최고잖아, 까짓거 아들 좀 가르치면.."

 

"세하 위상력은 애아빠²랑 닮았어. 내가... 어떻게 할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도 누님 실력이면.."

 

누님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나도 안다. 쓰는것과, 쓰는것을 가르치는것은 별개의 문제. 아무런 시설도 없이 위상능력자를 훈련한다는 것은 말도안되는 억지다. 하지만 어깃장을 부려봤다.

 

"....시간 지나면 조금 나아지겠지. 누님이나 나같은 1세대들은 누가 훈련시킨것도 아니었잖아. 좀만 기다려봐."

 

"세하가 그걸 못견뎌해. 유니온 팀에 들어가겠다 한것도 본인 의사야."

 

 

"갑갑하네 진짜. 누님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몰라? 요즘 차원종이 다시 나타날거라는지 흉흉한 소문도 돌아다니는 판국이야. 알아?! 그시절로 돌아가지 않을거란 보장이 없다는 얘기라고. 세하녀석이 고집을 부리건 뭐건 집안에 묶어서라도 그걸 막아야 할..!"

 

 "내가 안그런줄 알아...?! 내가 세하한테 수십번을 얘기했어. 엄마 꼴 못봤냐고!!!"

 

 

얼굴이 차츰 일그러지던 누님은 폭발하듯 소리를 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지금 그지경으로 날 써놓고 내팽개쳐져서 한달 20만원짜리 쥐꼬리만한 보상금 나오는걸로 버티고 있는 엄마 신세를 못봤냐고. 그렇게 까지 말했어... 위상후유증으로 제대로 일하기도 힘들어서 고생하는 내 모습을 못봤냐고, 그렇게 까지 내 아들한테, 세하한테 퍼부었다고..!"

 

머리카락 사이로 구슬구슬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기서 난 차마 더이상 볼수가 없어서,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있는 그 '신세' 라는 단어에 속이 쓰려와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근데 안되겠다잖아..! 아들래미가 나한테 그러잖아. 주변인간들은 이상한 취급한다고, 차원 전쟁도 끝난 마당에 괜한 긁어부스럼 아니냐. 차원종 되는것 아니냐..! 이대로 학교를 졸업해도 난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못할거라고!

 

그럴바에야, 차라리 유니온에 들어가는게 낫다고!"

 

"누님!"

 

난,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저, 이 이상 누님이 휩쓸리게 해선 안되는 생각에, 부들거리는 손으로 누님의 손목을 잡았다. 그렇게 튼튼하던 사람 손목이.. 가느다랗고, 시퍼런 맥에선 가느다란 맥동이 느껴졌다.

 

 

누님이 소리치느라 들어올린 얼굴은, 눈물과 분노로 얼룩져있었다. 내가 그렇게 알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그래도 늘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가던 누님인데, 후유증에도 앓는 소리 한번 안하고 큰소리 치며 아들 등짝을 후려치던 누님이..

 

지금은 그저 상처받은 어머니의 얼굴로 쓸쓸하게 앉아있었다.

 

 

 

"난... 난 요즘은 그런 생각해. 내가.. 차원전쟁 막바지에, 세하를 내 뱃속에 데리고 있었을때 위상력을 쓴게 문제 아니었을까?³ 내가 유니온이고 뭐고 사정 안살피고 몸조리 잘했다면 세하가 멀쩡하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누님 이제 그만..!"

 

"그럼 세하도 멀쩡하게 다른애들과 잘 지내지 않았을까..? 아니, 애당초 세하가 내 아이가 아니었다면 저 애가 이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고 나 난.. 아윽... 잠.. 잠깐..놔..줘.."

 

 

누님이 내가 잡고있던 손목을 틀며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냈다. 황급히 손을 놓으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버렸는지, 가는 손목은 시뻘겋게 자국이 남아있었다.

 

누님은 한동안 손목을 틀어쥐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난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누님. 조금 진정하고.. 누님 사정은 나도 잘 알아. 세하 내 친조카처럼 귀여워하던 녀석이고. 근데 누님도 내 사정 알잖아. 난 이제 위상력이고 뭐고 없어. 그날 이후 난 그냥 건강 나쁜 동네 형이야."

 

"유니온에서 그걸 문제 삼진 않을꺼야. 그쪽에서 너에게 바라는건 많은 실전감각으로 아이들을 캐어하는 거니까."

 

"누님 방금 아이들이라고?"

 

"응. 이번에 조직되는팀.. 검은양 멤버는 모두 미성년자야."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꼭... 그시절 나같은...

 

 

 

"유니온 쪽에는 이미 잘 말해뒀어. 너가.. 관계자쪽에 연락만하면 되.. 그러니까. 제발 부탁할께. 미안하다."

 

 

기가막혔다. 그렇게 우릴 굴려먹고 또다시 아이들을 모았다니.

 

 

"후우.. 그 사건으로 위상력이 일찍 날아가버려서 후유증이 덜한게 이런식이 되버리나..."

 

 

다시 고개를 숙이는 누님을 차마 볼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서 창 바깥쪽을 바라봤다. 아파트단지와 드문드문 있는 나무들. 평범한 일상들.

 

사실, 이야기가 시작될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얘기를 하면서도, 이 누님은 말은 안했지만 분명 그 개같은 유니온 놈들에게도 머리를 조아리고 굽신거려가며 부탁을 했겠지. 아들을 잘 돌봐달라, 내가 고문으로 들어가면 안되겠느냐..

..지금의 누님은 거의 일반인보다도 못한 수준의 건강을 가지고있다. 유니온놈들도 쓸모없다는 생각을 했겠지..

 

 

...나라면 그 사건 이후 잠적했으니 데이터라도 빼낼수 있다 생각한걸까. 역시나 쓰레기 같구만..

 

 

 

"...생각은 해**. 나 먼저 일어날께."

 

 

".....그래.."

 

 

그리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항하려던 참에, 무슨 변덕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난 다시 누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유니온놈 연락처. 지금 가지고 있지?"

 

"..어? 어. 응."

 

 

"명함 줘봐. 그놈들 성격이면 두개 줫겠지."

 

 

누님은 주머니에서 새하얀 명함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머뭇머뭇 내밀었다. **. 그렇게 미안하면 아예 얘길 꺼내질 말던가 진짜..

 

 

"..미안해 정말.. 그래도 부탁할께. 제발 부탁이야. 아 계산은 이걸로..!"

 

"애딸린 엄마가 뭔 돈이 있다고 그걸 사려고해. 여기요."

 

 

누님이 지갑을 꺼내는걸 거칠게 막아서고 내 카드를 내밀었다. 홀몸에 그나마 건강도 누구보단 멀쩡한 편이라, 돈이 궁한편은 아니다. 누구 집과는 다르게.

 

 

그렇게 계산을 마치고 인사도 안한채 거칠게 나가버렸다. 누님 시선이 뒤에서 따끔따끔 느껴졌다.

 

 

"검은양인가...가슴팍이 쿡쿡거리는구만.."

 

 

 

 

 

 

 

그날 이후 며칠이 흘렀다. 누님은 그사이 나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나 역시 연락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넘어갈까도 싶었다.

 

 

 

빌어먹을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던것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미성년자들이 모였다는 말이 내귀에 맴돌았다.

 

....

 

 

"...뚜.. 달칵."

 

"전화 받았습니다."

 

"유니온 관계자분이십니까, 여기 명함에 성함이-"

 

"아아 괜찮습니다 제이씨. 솔직히 연락해주시리라 기대하진 않았습니다만.."

 

"...아직도 감시체재는 건재한가봅니다. 바로 누군지 알아차리시고?"

 

"여러분은 국가에서 관리해야할정도로 소중한 '인재'시니까요."

 

 

"....인재.. 인재라.. "

 

 

 

난 잠시 일어나는 화를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코드네임 제이. 검은양팀으로 복귀를 신청하겠습니다."

 

 

 

-------------------------

 

 

자유 게시판에 잠깐 올렸던 토막글을 좀 더 길게 써봤습니다.

 

주석

 

1)제이가 검은양에 처음 스카웃될때는 리더의 위치로 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렇게 적었습니다. 추후 팀을 꾸리고 서로 조정하면서 제이라면 슬비에게 리더를 넘기는게 더 맞겠다 판단했을것 같네요. 본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질테고, 슬비의 모습에서 과거 알파퀸의 모습이 겹쳤을것 같습니다..

 

 

2)세하의 능력을 보고도 제이가 서지수를 언급하거나 알파퀸과 능력부분에서 닮았다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세하의 능력이 아버지쪽에서 많이 내려왔다 라는 설정으로 대입해봤습니다.

 

3)세하 임신기간중 알파퀸이 차원전쟁에 참여했었느냐 아니냐는 이전에 자유게시판에서 한번 많은 분들이 토론했던 부분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정리를 해본 결과, 그해 8월쯤 세하를 임신했을거라는 결론이 나와서, 18년 차원전쟁이 그해 8월 이전에 끝났다면 사실이 아니겠으나, 그 이후에 끝났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4)제이가 위상력을 상실한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유니온의 '실험'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공식설정이 아니고 확실한 부분을 찾기가 어려워서 그 '사건'이라는 명사를 사용했습니다.

 

제이의 위상력 호흡법등의 문제는 공식 설정상 제이가 은둔하고있던 기간동안 익힌것이므로, 은둔 이후 위상력과 관계된 행동을 하기 전인 본 이야기의 시점에서는 제이 스스로만 알고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별생각없이 콘티에 넣었다가 방과후 활동이라길래 그냥 일반게시판으로 이동 -

 

2024-10-24 22:29:0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