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x정미) 평범과 일상 사이의 교차로

Lavi 2015-06-23 2

재해복구 지역 이후, 플레인 게이트 이전 검은양 팀들이 잠시 학교로 복귀했다는 설정입니다.

유리가 G타워에서 차원종이 되기를 망설이다가 포기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 몇 가지 픽션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

 

'----'

 

수업의 끝을 알리는 맑고도 경쾌한 소리가 조용한 운동장 울리고, 곧 이어 교내에서부터 왁**껄한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금세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가득한 부드러운 바람이 자아내는, 나무가 나부끼는 소리와 뒤섞였다.

엎드려있던 자리에서부터 종이 치는 동시에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난 유리는 눈을 비비적거렸다. 이내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기지개 켜기를 마친 그녀는 배게 삼아 배고 있던 교과서와 노트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은 후 재빨리 가방을 어깨에 멨다. 언제 잠을 자고 있었냐는 듯 푸른빛이 도는 눈을 반짝이며 그 어느 때보다도 바른 자세로 자리에 앉아있는 유리를 보면서 가방을 정리하던 뒷자리의 정미가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촙을 날렸다. , 이라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감싸며 유리가 뒤로 돌았다.

"정미정미, 왜 때리는 거야!"

 

별로 아프지도 않았을 터인데 뒤통수를 연신 매만지며 조금은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을 친근히 불러오는 유리의 모습에 정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얘는 왜 고등학생씩이나 돼서도 어린아이 같은 건지, 라고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팔짱을 끼고선 의자에 기대앉으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자더니, 끝날 때가 되니 귀신같이 알고 일어나네, 서유리. 그러다가는 아주 근육 바보가 되어버릴거야. "

머리를 만지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의자를 감싸 안고선 특유의 맑은 웃음을 띠면서 그치만~, 이라고 말을 길게 늘이며 정미의 책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늘은 정미정미랑 놀러가기로 한 날이잖아? 기대가 돼서인지 시간이 너무 안 가는걸 어떡해-."

 

언제나 그래왔으면서 '오늘은'이라는 말을 덧붙여 대답해오는 유리의 모습에 걱정이 되는 정미는 다시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목구멍으로 삼켜내고서는 그래, 오늘은 봐줄게, 라며 할 수 없다는 듯 한 웃음을 지어내었다.

 유리는 역시 우리 정미야! 라며 또 다시 밝게 웃어왔다. 의자를 끌어안고 있는 유리의 팔 곳곳에는 잔 흉터들과 아직도 낫지 않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그녀가 이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것은, 몇 주가 채 되기도 전의 이야기이다.

 

*

 

내가 다니는 신강 고등학교는 차원종들의 습격으로 -반쯤, 어쩌면 그 이상을 클로저들의 활동으로- 폐허가 된 탓에 재해 복구지역으로 선정되어 수리와 차원종 잔당의 퇴치가 이루어지는 약 한 달 반 여간 임시 휴교령이 떨어져있던 곳이다.

그 동안 집에서 TV로부터 흘러나오는 차원종에 관련된 뉴스로 불안에 떨면서도 설마, 라는 자기합리화에 취해 후반부에는 휴식을 즐기던 녀석들이 대다수인 듯 했지만, 서유리와 이세하, 이슬비와 같은 위상능력자들은 우리들과 같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들은 우리 아빠의 목숨을 앗아간 인간들과 같은 클로저였다. 클로저라는 족속들이 너무나도 미웠다. 그러니까 그런 인간들은 나와 같은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임무이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 같은 클로저들은, 전부 없어져버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내가 내뱉은 쓴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걱정 말라며 씁쓸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언제나와 같은 웃음을 지어오는 유리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여서 그녀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은 직후에는 언제나 입 안에 쓴 맛이 감돌았다. 그녀가 뻗은 손을 몇 번이고 뿌리쳐 내면서도 정작, 유리가 정말 내 곁을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내심 두려워져 혼자서 두려움에 떨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대한 갈 곳 없는 질책과 원망은, 내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면 줄수록 다시 내게로 돌아와 나의 심장을 후벼 파냈다.

 

유니온의 최전선이 신강고에서 G타워라는 곳으로 옮겨간 지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

 

금세 풀릴 것만 같았던 임시 휴교령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풀리지 않았다. 수리와 차원종 잔당 퇴치 때문이 아니었다.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차츰차츰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보며, 현재 상황이 예상보다도 심각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대부분의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선포했고, 집 밖으로의 출입을 삼가할 것을 권고했다. 그 후로부터의 한 달은 공포심으로 조성된 지옥에 가까웠다. 하늘은 번쩍이고 굉음이 작렬했으며 건물은 무너져 내렸다. 뉴스와 인터넷은 차원종에 대한 이야기부터 지구 멸망론까지 잡다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나날이 어두워져가는 하늘과 거세게 번쩍여가는 푸른 불길에 사람들이 공포에 떠는 동안, 많은 클로저들이 위험한 대규모 작전에 계속 투입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의 클로저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했다. 뉴스에는 그들을 추모하는 난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SNS나 핸드폰, 건물 한편에 흰 색 리본을 달아 그들의 령을 위로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유리와의 연락은 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름이 그 난에 추가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매일같이 뉴스와 신문의 추모란을 확인 했다. 다행히도 그 곳에 내가 아는 이름들이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둡기만 하던 하늘이 언제 흐렸었냐는 듯 맑게 게고, 정부와 위상능력자들의 관리시설인 유니온의 지휘 아래 신속한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전국 초고등학교에 내려졌던 임시 휴교령이 풀어졌고, 그로부터 반 개월 후에는 신강 고등학교의 복구 작업도 완료되어서 다시 학교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거의 반 년 만이었다. 하지만 서유리나 이슬비, 이세하 중 단 한명도 교실에 그림자를 내비추지 않았다. 그 때 까지도, 유리와의 연락은 닿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무실에서 캐롤리엘 씨와 마주쳤다. 웬일인가 싶어 알은 체를 하니, 학교의 복구상태와 학생들의 안전에 관련된 시설 점검을 나왔다고 했다. 또한, 그녀는 무언가 묻고 싶어 하는 듯한 내 표정을 캐치 해 내고서는 신강고 소속 클로저들의 근황을 전달 해 주었는데, 최근 마지막으로 투입된 작전에서 제법 큰 부상을 입어 재활치료에 임하고 있다고 했다.

심장이 땅에 내려앉는 듯 했지만, 예전 그녀의 일을 잠깐 도왔을 때 그녀로부터 '위상 능력자들의 회복 능력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정보를 완전히 신뢰하고만 싶었던 나는, 매일 밤, 그 서유리라면 아무 일도 없을거야, 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연락이 되지 않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잠이 들었다.

 

휴교령이 풀린지 2주 째 되던 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교실문을 벌컥 열고 유리가 들어섰다.

 

'어라, 정미밖에 없네? 너무 일찍왔나?' 라는 태평한 소리를 내뱉는 그녀의 태도에 일순간 화가 난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등교시간 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기에 적막함만이 흐르던 교실을, 바닥을 긁어내는 거칠고 날카로운 쇠의 마찰음이 가로질러갔다.

화가 난 듯한 내 얼굴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갸웃이며 물음표를 띄워내며, 무슨 일이야, 정미야? 라는 소리를 하는 유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 어깨를 붙잡았다. 분명 내가 화를 내어도 될 것 같은 상황인데, 막상 그 상처 가득한 얼굴을 보니 입술이 도저히 때어지지 않았다. 이곳저곳 붙여져 있는 밴드는 대충 세어 보아도 십 수 개는 되는 듯 했고, 오른쪽 다리에는 제법 큰 자상이 남아있었다. 목이 메어왔다. ', 정미야..?', 라니, 정말 내 속을 조금도 모르는 건지.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너어..! 내가 얼마나,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코끝이 찡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새어나왔다.

 

당황한 듯한 그녀의 얼굴이 눈물 때문에 흐릿해지고, 몸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눈에 눈물이 맺혀있던 것도 잠시, 금세 볼을 타고 흘러 내려와 치맛자락에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 내가 뭔가 잘못한거야? 나 바보인거 알고 있잖아. 으으.. 내가 뭘 잘못한건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정미야! ? 그러니까 울지 마.'

 

오히려 위로하듯, 무릎을 굽혀 나를 안아오는 유리가 너무 다정하게 느껴져왔고, 그녀가 내 곁에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져왔다. 그 탓에 감정이 복 받친 나는, 이세하가 손에 PSP를 든 채 교실문을 열었다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갈 때 까지 울면서 한동안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다.

 

후에 듣기로는, 핸드폰이 임무 도중 부서져버렸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수리도 재구업도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한다. 덕분에 내게 연락이 왔던 것조차도 몰랐다고…….

 

그 이야기에 나 혼자만 바보.짓을 한 것 같아 며칠 간 틈틈이 멍 때리지 말라는 핑계로 그녀의 머리를 괜스레 쥐어박은 건

 

 

 

 

나만이 아는 이야기.

***

 

"정미야? 정미정미! 놀러 가야지! 정신차려!"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동안 과거를 회상하던 정미는 눈앞에서 손을 흔드는 유리의 모습에 정신이 든 듯 몸을 살짝 흠칫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난 몇 달간을 떠올리던 그 잠깐 사이에 어느덧 종례는 끝나 있었다.

"왠지 갑자기 멍 해 보이길래. 무슨 일 있어?"

유리는 정미의 앞에서 손을 거두고선 고개를 갸웃이며 물었다. 정미는 딱히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대답하고선 속으로 너 때문이다, 바보야, 라고 중얼거리며 가방을 매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미와 유리는 나란히 하굣길을 걸었다. 계절은 어느덧 여름이 되었고, 몇 달 전 그 혼란의 자취를 말끔히 지워버린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쨍쨍한 여름 아래, 어느덧 얇아져버린 교복을 입고 평화롭도록 잔잔히 북적이는 거리를, 두 소녀가 거닐고 있었다.

"정미정미랑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어서 기뻐. 정말, 그 때는 죽는 줄 알았다니까?"

 

정미는 죽을 뻔 했다, 라는 소리에 그녀를 걱정했던 과거가 떠올라 잠시 멈칫였지만 결과적으로 유리는 무사히 일상과 평화 속으로 돌아왔다. 뭔가 한 소리를 해 주고 싶었지만, 무사하니 역시 괜찮은가, 싶어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던 정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휴.. 그래, 살아있으니 됐어."

 

유리는 정미의 대답에 그래야 정미답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긋 웃어보였다. 길을 거니는 둘 사이에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푸르른 하늘을 가득히 담고 있던 유리의 눈이 사뭇 진지한 듯한 빛을 띄우고 정면을 주시했다. 언제나 밝은 빛만을 품고 있던 그녀의 눈에는 비장함마저 감도는 듯도 했다.

 

"계속 이렇게 무사해서 정미같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거야.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소중한 정미정미랑 같이 살고 싶으니까! 내 일상이 바뀌어도 좋아. 이렇게 사람들의 평범함을 지켜줄 수 있다면. "

 

 

유리의 미소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정면으로 향한 채 묵묵히 길을 걷고 있던 정미는, 갑자기 사뭇 진지해진 그녀의 모습에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돌려 유리를 쳐다보았다.

"서유리.. 갑자기 철 든 것 같은 소리를 한다?"

유리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머리 뒤편에 얹으며 다시 하늘을 마주했다. 갑자기 너무 진지해졌나, 라고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워 보이며 중얼거리듯 이야기한 그녀는 깍지를 꼈던 손을 풀고선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유리의 행동에 의구심이 생긴 정미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틀어 그녀를 보았다.

 

"있지, 나 차원종들이랑 몇 번이고 마주하면서 다리가 막 후들거리고 눈앞이 캄캄하다고 느껴질 만큼 무섭고 막막한 상황들이 되게 많았었다? 언제인가 정말정말 위험한 상황이었을 때 모두를 위해서, 라며 나 스스로를 포기하려는 생각마저 했었는데-, 으으, 소중한 사람들이 떠올라버려서 끝까지 나를 포기할 순 없더라고. 헤헤.. 나 생각보다도 엄청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

세계의 존망이 걸려있었는데. "

 

애써 웃음으로 묻어내려 했던 것 같은 유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에 깜짝 놀란 정미는 자리에 멈춰섰고, 하늘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길을 걷던 유리도 정미의 움직임이 멈추는 듯 보이자 덩달아 멈춰섰다. 유리는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

 

"만약, 이런 엄청난 우연이 일어나지 않아서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전부 죽어버렸다면.. 나는 살 가치가 없었겠지? , 너무 당연한걸 물었나? 으음- 그런데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그에 대한 보답을 위해서라도 나는 사람들을 지킬거야,

아니, 지켜야만 해. 설령, 내가 망가져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

 

아까보다는 한층 밝아진 목소리였지만, 그 소리에는 인위적임이 묻어나고 있었다. 유리는 하늘로 향하고 있던 손을 움켜쥐듯이 주먹을 쥐었다. 밝은 햇살에 가려져 그녀의 표정이 명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미는 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정미는 유리의 왼쪽 팔을 확 잡아채어 그녀의 몸을 자신이 향하도록 돌리고는 유리의 뺨에 양 손 바닥을 짝 소리가 나도록 쳐 버렸다. 흔들리는 듯 하던 유리의 눈동자가 일순간 멈춰섰다.

 

"-아팟..! 정미정미, 갑자기 왜 때리는 거야!?"

 

한 순간만에 유리의 목소리에 깃들어있던 진지함이 가시고, 어김없이 억울하다는 듯 한, 한층 밝아진 듯이 들리는 유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웃긴다, ? 웬일로 어른스러운 소리를 한다 했더니만.. 정신 차려, 서유리. 나는 내 인생을 사는거고 너는 네 인생을 사는거야. 네 멋대로 우리들의 인생에 책임 같은 걸 지려고 들지 말란 말이야. 만약 네 선택으로 세상에 멸망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널 원망하지 않았을 거야. 그건 어디까지나 네게 그런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 차원종 놈들이 잘못한 거라고.

설령, 네 희생으로 우리가 살아남았다고 한들, 기뻐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남겨진 사람들의 사람들의 슬픔은 생각 안 해봤어?"
가시가 돋친듯 보이는 정미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운 듯 보였지만 그녀의 진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으며 맑고도 투명한 그녀의 눈은 거울과 같이 또렷하게 유리의 모습을 비추어내고 있었다.
정미의 스매쉬로 연분홍 빛이 돌게된 볼을 따갑다는 듯 양 손으로 매만지고 있던 유리는 손을 멈췄다.
무언가에 뒷통수를 맞은 것만 같은 아릿한 느낌. 하지만 뒷통수를 맞은 것 치고는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정미라면. 정미가 아니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이라면 내게 저렇게 이야기 해 줬겠구나. 어울리지 않게 혼자 고민하고 모든걸 끌어안으려 했어.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은 기대어도 됐을텐데. 으응, 아니, 오히려 기대라고 어깨를 내밀어줄 사람들일텐데.
어쩔수 없이 나는 바보구나, 라며 작은 웃음을 흘려냈다.
먹구름으로 어두워져 있던 하늘이 서서히 맑아지는 듯한 쾌청한 감각이 과열되어 있던 머릿속을 차갑게 식혀낸다. 그녀의 진심어린 한 마디에 가슴 한켠과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응어리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덕분에

"으응, 역시 그렇구나."

그동안 하던 고민이 너무나도 바보 같아서-

"헤헤, 나는 역시 바보였어. 역시 정미뿐이야!"

환하게 지어내 보인 미소와는 모순되게도 눈물을 울컥 쏟아내고 말았다.

"ㅇ,어, 야, 서유리, 왜 우는거야..! 으으, 가지가지 한다, 정말! 길 한복판이란 말이야!"
정미는 갑자기 울컥 눈물을 쏟아내며 자신을 끌어안는 유리를 제대로 밀어내지도 못한 채로 어쩔수 없다는 듯 그녀를 안아주었다. 짐작할 수 없을만큼 무거운 사명감과 책임을 지려고 했던 그녀의 등이 너무나도 가녀리게 느껴져왔다. 길을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것이 느껴졌지만, 정미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개의치 않다는 듯 그냥, 그렇게 말해주는게 너무 고마워서, 라며 자신의 어깻잇에 눈물을 떨궈내는 유리를 한동안 말없이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


"결국 돌아가면서 한 번씩 울어버렸네, 헤헤. "


유리는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손등으로 비비면서 빨리 놀러가야지!, 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난 너처럼 길 한복판에서 울지는 않았다, 뭐."

 


유리를 따라 걸음을 재촉하게 된 정미는 피식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유리는 아 그건 그렇네, 라며 볼을 몇 번인가 긁적이고선 정미의 손목을 붙잡은 채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정미는 조금은 벙찐 표정을 지어내었다.
"야, 뭐야!? 갑자기 왜 뛰는건데..!"
"그건 그거고, 나는 1분 1초가 급하단 말이야. 빨리 정미정미랑 놀고싶다구!"
평소와 같아진 환한 미소로 달려나가는 유리에게 이끌려가던 정미는 철은 무슨, 아직도 어린애구만, 이라고 속으로 중얼이며 피식 미소를 지어보였다.
"앞으로 놀러갈 날이 더 많을텐데 뭘."
"으으, 그렇지만 나 내일부터 다시 임무에 투입된단 말이야-. 끝나려면 또 오랜 시간이 필요할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정미정미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유리는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미소로 감추어내고선 장난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임무, 후딱 끝내고 돌아올게. 이번에는 나를 생각해줄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조심조심 싸울테니까.

돌아오면 결혼 해 주는거다?"

"어휴, 그래. 일단 돌아오면 결혼이던 뭐던 해 줄테니까 무사히 돌아오기나 해, 바보야. 네가 평범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함께 놀러다닐 날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두 소녀는 선도의 손을 서로 꼭 마주잡은 채 거리를 가로질러갔다. 나뭇잎을 시원스레 나부끼게 하는 여름날의 푸르른 바

소녀들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Fin

2024-10-24 22:29:0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