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페라도

은탄 2015-06-16 3

시각은 슬슬 자정, 짖궂은 바람은 더욱 거칠게 불어온다.
비스듬히 부딪혀오는 비의 양은 아직 적다.
하지만 앞으로 조금,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난다면 못버틸정도로 쏟아지겠지
하아, 하고 숨을 뱉는다.


서로의 거리는, 아마 약 10m정도,


하지만, 그녀에게 이 정도 거리는, 단 일보로 좁혀지겠지, 서로에게
도망갈 길 따윈 없다.


또한, 후퇴같은 것───, 사고 끄트머리에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한발짝, 움직인다.


마치, 산책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발걸음


그 속에서 얼굴에 긴장을 지우지 않은채로, 힘없는 눈매를 한다.
하지만, 역시나 지금 심장의 떨림이 쉽게 지워지질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박수가 높아지는 듯 하다.


"농담"


그렇게 작은소리로 중얼거렸다. 착각, 분명히 착각이다.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는 마치, 귀찮다는듯 칼집에 손을 댄다.
 여태까지 칼집에 들어가 있던 은은하게 은색을 띄는───요도(妖刀)
그것을 빼어든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렇게나 빼어진 칼을 한손에 든
그 모습은 고류의 검객과도 같다.


도무지 그 이상은 없을정도의 살기를 보란듯이 내뿜으며
아주 강렬한 죽음을 이끌고, 그녀는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다.


"얕**마, 못생긴게"


착,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울린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손으로 느슨히 쥐고 있던 칼자루를 다시한번
강하게 움켜쥐는 소리다.


타박, 타박, 가볍게 또 천천히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간다.


그 표정에서 느껴지는 결심에─────차원압 6단계 악몽의 아스타로트의
마음속에선 이미 일절의 여유를 박탈했다.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아스타로트는 슬슬 광기에
몸을 맡기고 싶어졌다.


무저(無底)의 흑빛 눈동자를 지긋이 고정하며, 난잡한 흑색의
머리칼이 휘날린다.


너무나 이질적인 풍경에 잠시나마 긴장을 푼다.
빛이 닿지않는 심해 같은 이곳은 너무나 아름답고 깊다.

순수하디 순수한 새하얀 눈 위 모습에 절대로 뒤지지 않을만큼
어둠이 뒤덮은 아주 맑은 이곳도 뛰어난 모습이다.
 새하얀 눈이 그 순수함 자체라면 이곳은 맑게 더럽혀진 유흥의
이공간일까, 동굴 안에서도 그런 순수함은 느껴졌다.


───그 순수함 속에서 소중한 이들의 시체가, 배경이 된다.


「허망하다. 그대도 이곳에서 살아돌아간다는 것 바라지 않을 터
아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스타로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서유리는 부드럽고 또 유려한 걸음으로
끈임없이 다가갔다. 서로의 거리는 점점 좁혀진다.
그녀가 발하는 살기는, 이 차가운 동굴의 온도와 습기를 한 여름의
열풍(熱風)으로 바꿔버리고 있다.


서유리───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칼이 수백 년이나 되는 세월을
축적한 요도(妖刀)라는 것은 아스타로트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인간이다. 그녀의 전투기술 따위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아스타로트는 그녀를 접근시키는 일 따위 없이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아스타로트 주위에 떠도는 무형(無形)의 검은 기운에 다가가
그 직전 발을 딱 멈춘다. 그리고, 여태 한손으로 강하게 쥐고 있던
검자루에 왼손을 살짝 겹친다.


"검도………라는거야"


허리의 중심은 낮으며, 칼자루는 목전에 자리를 잡고 배 앞쪽에
고정시키며, 도신은 비스듬히 상대의 목을향해 기울인다.


그 자세는 정안,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면서, 최강인 자세
아주 날카로운 그녀의 살기가, 절망적인 칼날이 되어,
아스타로트의 온몸을 지배하려 한다. 후욱, 하고 숨을 내뱉으며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운다.
자신의 사고에 오로지 살(殺)만을 채워넣으며, 자기암시로 온몸을
전투기능에 집중시킨다.


「아아────」


화악, 하고 그녀는 눈을 뜨며 손에 힘을 싣는다.


「정말이지 어리석구나,」


구웅, 하는 굉음과 함께 모든것이 주저앉는듯 했다.
이제───아스타로트가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마치, 밤의 어둠에 섞인듯 사냥감에 부드럽게 스치듯
다가간다.


접근하는 과정따윈 생략해버린 그것은 마치, 귀신
동력을 빼앗긴 듯한 압박감을 느끼는 그녀의 바로 옆에서
아스타로트의 신형(身形)이 흔들린다.


그 예비 동작조차 없는 접근에,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못했다.
정면에서 보고있었는데───접근 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지금 자신의 옆에 서 있다고 느낄 수 없었다.


 아주 차가운 숨결이 느껴진다. 공기가 찢어질듯 빠직, 하고 얼어간다.
그것은 공포라는 이름의 또 다른 감각
이 상황에 이르자 그는 겨우 자신의 '적' 이 절망, 이라는것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하지만,


"────죽어"


칼자루를 쥔 양손이 순간적으로 튀어 올라간다.
 그것은 마치, 섬광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빠른 속도,
 상단으로 튀어올라간 칼은 그것을 한참이나 웃도는 속도로
내리 휘둘러진다.


동시에 한발 내딛는다.


신속으로 칼을 휘두르고, 그녀의 한걸음은 아스타로트와의 거리를 벌린다.
가볍게 흐르는 몸, 또한 그에겐 너무나 가벼운 도(刀)
 그것은 그가 휘두르는 것 만으로 필살의 참격이 된다.


순간.


아스타로트는 후방으로 재빨리 물러서서 피한다.
그녀 서유리는, 칼을 완전히 휘두른 자세인 채로 아스타로트를 바라보고 있다.
그 표정엔 일절에 여유는 없다. 또한 긴장도 없다.
그저, 이긴다는 확신, 자신은 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꾸욱, 하고 움켜쥔 손에 힘을 싣고 검을 가로로 휘두른다.
얼마나 힘을 준건지, 동시에 그녀의 상반신이 등을 보인다.


그저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행동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행동,
 그도 그럴것이 아스타로트와의 거리가 벌려진 상황에서
그냥 허공에 대고 발도를 한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맛이 간건가, 하고 생각이 들 찰나에 그 동굴 전체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발도의 후폭풍과 함께 휘둘러진 칼날은 아스타로트를 중심에 두고
수십자루로 분해되어 동굴의 주위를 완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하나 하나를 주의깊게 살펴보니
그것들은 전설속에서나, 또는 사람의 입을 타고 전해지던
명검(名劍)들이다.


공기를 찢으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던 그 수십자루의 검들은
 자리를 찾자 세로로 한치에 흐트러짐 없이 수놓인다.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검으로 만들어진 성, 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정확하게 진의 아래엔 시공간을 갈라 칼자루 만이 멋들어지게
튀어나와 있었고, 적당히 찢어진 이공간이 절경을 연출했다.


그 아래엔 열자루의 도가 즐비하게 타원형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엔 다섯자루의 둔기가 즐비하게 육각을 이루고 있었고,


그 위엔 열세자루의 대검과 그 중심엔 한자루의 마검이 형상을
갖추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 자신의 도(刀) 수백년의 세월을 축적한
요도(妖刀)가 자랑스럽게 홀로 검신을 위로한채 두둥실 떠잇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자가 빙글, 하고 반전한다.


동시에 그녀는 마치, 어둠에 기대듯 등을 보인채로 뛰어오른다.
상체와 하체가 반전된, 천지(天地)를 반전시킨 역도약


 자신이 섬광이 되어서 정확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 즐비하게
늘어선 그곳에 흐르듯, 잔상을 남기며 뛰어들어,

가장 아래에 형상화된 '흑도 요루' 를 움켜쥐고 신속으로
아스타로트를 스치며, 그의 허리춤을 베어낸다.


동시에 허리춤을 베어 내자 마자 검은 눈녹듯 사라지고
그 가속으로 끈임없이 전진해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명검(名劍)을 오른손에 들고, 반바퀴 빙글, 회전해
다른 검을 왼손에 쥐고, 다시 섬광과 같은 속도로 잔상을 남기며
아스타로트를 베어낸다.


쩌엉, 하고 끈임없이 살이 베어나간다.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채 끈임없이 눈에 잡히지 않는 스피드로
움직여, 지나치는 순간 아스타로트의 살을 도려내 간다.


벌써 일곱번째, 다리를 벤다. 아직 3초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이지만
이미 서유리의 움직임에 있어서 인간따위는 아득하게 초월했다고 볼 수 있겠지.
그 능력은 방금까지와는 비교가 안될정도다. 정확함도, 스피드도 확실히 자신 이상이다.

어찌보면 지금 아스타로트는 초라하기 짝이 없어보였다.


마음이 완전히 얼어 붙어있는 상태처럼, 그녀의 움직임은 화려하고
또 눈부셧다.


하나 하나 아스타로트를 베어나가며 검을 쥐고, 바람을 찢는 굉음과
그것을 휘두르는 폭음이 터지고, 살을 베어나가는 소리,
그 어두운 동굴 안에 여러가지 색의 궤적을 남기고 잔상을 남긴다.

자신의 한계를 아득하게 초월한 움직임에 슬슬 정신이 아득해진다.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릴듯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휘청거린다면 자신의 스피드에 이기지 못하고
몸은 바닥을 굴러 전신이 망가져 버릴 것 이다.


끈임없이 움직이고 또 베어나갈수록 몸은 점점 빨라지고,
가볍다. 하지만, 점점 힘이 빠지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지익, 하면서 왼팔의 근육이 찢어지려한다. 이제 거의 끝에 다달한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녀석을 조각 내버릴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그 위의 아버지가 또 그 위의 아버지가 수백년의 세월을 받쳐서 기어이
완성한 필살(必殺)의 기술 하지만, 한번 사용하면 어째선지 전신의 근육이 전부 찢어지고
온몸의 뼈가 부러진다. 다리의 근육은 이미 전부 찢어져 피투성이,

사용자도 전후 500년을 두고 서유리 그녀 혼자다.

이제는 더 이상 달릴수 없을 정도로 재기 불능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린다.


내뱉듯 탄식하는 목소리가 울리지만 자신이 휘두르는 칼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묻힌다


스물여섯번째의 검(劍), 아스타로트는 온몸에서 피같은 검은색을 흘리며
휘청인다. 이번에 다시 다리를 벤다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겠지,


───용서할 수 없다는 것, 그런게 아니다.


불타오르듯 온몸에서 무언가가 끈임없이 끓어오른다.
기쁨도, 슬픔도, 짜증도 아닌 오로지 절망이 섞인 감정,

다시한번 다리를 베어 넘긴다. 아스타로트의 무릎이 꿇린다.
동시에 촤악, 하고 소리를 내며 바닥이 젖는다.


아스타로트의 피가 아닌 서유리의 허벅지가 찢어져서 피가 뿌려진다.
그 뼈까지 파먹어 들어가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희생이 없을꺼란 생각따윈 하지도 않았다.


스물 여덟번째의 검(劍), 아스타로트의 몸뚱이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것, 전부 도려내서 이미 죽은거나 마찬가지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노리는 것은 그의 목, 아스타로트도 그것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일 수 없다. 가
맞는 표현이겠지


───하지만, 죽어버린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온몸이 터져나가 피를 너무 흘려서, 정신이 점점 더 아득해진다.
 마지막 가장 정상에 위치한 자신의 도(刀)를 잡는다.
온몸이 피투성이, 시야가 어두워지고, 다리는 뒤틀렸다.
이 기술은 다신 쓰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하지만, 웃음이 나온다.
이 마지막을 내려친다면────아득하게 자신의 최후가 느껴진다.



───그녀 서유리는 공중에서 자신이 남긴 수십개의 잔상과 궤적을
감상하면서, 쓰러지려는 아스타로트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단조롭게 죽음을 맞이할꺼라면
그 결말은 무엇보다 화려할 것이니까






커헉, 하고 한번 숨을 토한다. 뱉어진 침에는 한가득 피가
섞여있다. 


이것으로 끝났다.


심장이 터져버린 것 같지만, 이제 곧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꽤나 순식간이었다.
서유리는 자신의 도(刀)를 양손으로 쥐고, 무릎을 꿇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벼, 별거 아니네 후 후우………"


허세를 부리며 다 부서진 왼손으로 허리춤에 있는 리볼버를 빼어 총구에
바람을 불었다.


전투가 끝나면 항상 하던 행동이었고,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은척하며
허세부릴 수 있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갈라진 동굴의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

그 잿빛 조명에 비춰진 그녀는, 사신처럼 아름다웠다.
지금 이곳에 흩뿌려져있는 선명한 출혈의 흔적은 모두 그녀의 것이다.
아스타로트의 시체에 출혈은 없다.


서유리───그녀는 지금 전신이 뒤틀리고 찢어져서 아마 몃분
못버티고 생명활동을 중지하겠지,


아, 하고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바닥에 엎드려 어딘가로 기어간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몸을 겨우 겨우 움직여 한명씩, 한명씩
힘없이 드러누워있는 '그들을' 자신의 옆으로 끌고온다.


원래라면 1분도 안걸릴 일이 이런 상태이기에 1시간이 넘어간다.
그동안 겨우 형체를 유지하던 팔꿈치가 터져나가고 쓸린 무릎에
뼈가 튀어나온다.


"읏…"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 이 병적인 행위를 어째선지 계속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으니까, 헤어지기 싫으니까

조금 어린애 같은 발상이지만, 그래도 소중한 사람들 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빨랐다라면

내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더……


"젠자………앙."


결국 힘이 다 빠져 쓰러지듯 드러눕는다.
머리 옆에 세로로 꽂혀있는. 칼날이 전부 나가버린 자신의
도를 마주보면서 끈임없이 통증을 호소했다.


"이제, 된거야………"


호흡이 답답하고 거칠어 진다. 의식이 흔들린다. 그래, 마치 촛불처럼…
그 끊어질듯 말듯한 생명은 한 여름의 아지랑이와 같아서,
너무 가엽고, 아름다웠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 호흡을 고른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어 살아날 가능성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잠들어, 끝내기 위해서.
갈라진 천장 틈으로 비가 세어 들어온다.
비에 젖은 얼굴, 하늘을 보는 눈동자는 비가 흘러서
마치, 우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아 피곤해에………"


눈꺼풀을 가볍게 닫아버리고 잠에 빠지려한다.
여태까지의 삶에 후회는 없다. 그저, 조용히 생각한다.


「이세하, 이슬비, 미스틸테인, 제이 아저씨 차라리 나한테 죽지 그랬어」


아흑, 하고 순간 울음이 터져서 아랫입술을 깨문다.
아 진짜 아프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서유리의 의식은
번지점프를 하듯 곤두박질쳤다.


……… 시야가 끊어진다.


2024-10-24 22:28:4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