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개 - 나타] 잊혀지지 않는, 꿈을 만나다

세하야이리와나쁜형아아냐 2015-06-13 2

Intro (인트로)



꿈은,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크윽..."

잠에서 깬 나타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다. 아직 바깥바람은 차가웠고, 별빛은 영롱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타의 머릿속은 온통 불안과 고통에 잠겨있었다.

"이런, 제기...랄. 이게 도대체 뭐야!"

잠들어야만 했지만, 잠들기가 두려웠다.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꿈인데도 왜 이렇게 생생하게 와닿아야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자식, 그 버러지 자식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그 멍청한 버러지 자식 때문에...
괴롭고 뒤숭숭한 마음을 품은 채 나타는 방 한 켠의 창가로 향했다. 잠자리에서 웃통을 드러낸 채 멀리 보이는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던 나타는, 그대로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밤새 그를 괴롭힌 꿈 속에서 만난 존재는 이미 그도 깨닫지 못한새 잊혀졌지만, 꿈에서 그 존재를 만났던 순간 느꼈던 감정만큼은 쉽사리 떨쳐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바라고 원했지만, 결코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꿈이었다.

"......"

최대한 감정을 죽인 채 나타는 근처 공원으로 뛰어갔다. 지금의 이 마음을 달랠 방법이라고는 그것뿐이었기에 그는 도착한 공원을 고독한 발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뛰는 발걸음마다 밟히는 흙소리, 공원을 감싸고 도는 나무와 잔잔히 스쳐가는 바람이 만드는 하모니, 그리고 그 속에서 조용히 합창하는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잔잔히 귓가를 감싸고 돌면서 나타를 천천히 진정시켜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공원을 돌던 나타는, 잠시 공원 어귀의 벤치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후우... 정말."

분명 털어낸다고 털어낸 것 같지만, 아직 나타의 마음 한 켠에는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음을 나타는 느낄 수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품은 채 나타는 다시 발걸음을 집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리움, 갈망, 아련함, 고독함. 나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다가와 나타를 혼란스럽게 했다. 외롭게 싸워야만 했고,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던 자신만의 삶. 그리고, 그 찢긴 삶의 상처 속으로 들어온 누군가로 인해, 나타는 흔들려가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이 하늘... 별빛..."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두려움과 아픔에 몸서리를 쳐야만 할 것임에도, 그는 자야만 했다. 모든 걸 뛰어넘을 단 한 가지 진실이 그 꿈 속에 있었다.



--------------------------------------------------------------------------------------------------------

With 그의 마음 속 소년



   한껏 편안해지기 위해 이불을 내팽개쳐놓고 잠든 나타. 하지만 쉽게 잠이 들리 없었다. 뒤숭숭한 꿈은 아직도 나타의 마음을 쉬이 편하게 해주지 않았다. 뒷덜미에 깍지를 껴놓은 채 눈 앞의 어두운 천장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쉽게 편해지지가 않았다. 필시 그 자식 때문임이 틀림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더 잠들기 싫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잠들어야했고 간절히 잠들고 싶었다.

"......"

  조용히 생각을 닫고 눈을 감았다. 가장 편안한 순간이자 가장 지옥같은,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순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문득 짜증이 나는지 나타는 눈을 감은 채 한껏 표정을 찡그려야만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잠들어있던 나타의 눈이 떠졌다. 아직 흐릿하게 안개낀 듯한 시야에 갇혀 잠시 어지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짜증섞인 고갯짓을 한 뒤 다시 눈을 비벼 시야를 밝혔다. 저 멀리 보이는, 아직 여물지 못한 가녀린 소년 한 명이 홀로 앉아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을 왠지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생김새마저도 이미 외워버린 듯하다. 또다시, 시작된 이야기. 그것은 그와 그 아이만의 이야기였다.
  나타는 문득 자신이 가진 장비를 조심스럽게 점검해보았다. 장비는 아주 멀쩡했다. 휘두르는 감각도 혼전히 살아있었다. 항상 그래왔던 습관처럼 매우 조심스럽고 신경질적으로,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발걸음으로 아이에게 향했다. 점점 주변의 시야가 밝아지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이 곳은 수없이 만나온 그 아이의 집이 있는 골목이다. 그리고 아이는 또 골목을 뛰어다니며 홀로 놀고 있었다. 발랄하고 생기 넘치게 동네를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아이의 그림자가 짙어만 보였다. 그 아이에게 딱 하나 필요했던 건, 아이의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였다.

"어이 꼬맹이."
"네?"
"......"

  아무 생각없이 아이를 불러세운 나타는, 이어지는 아이의 짧은 응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막상 불러세웠지만, 그 다음 할 말은 막혀야만 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날 때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만 봤어야하는 건데, 이런 귀찮은 자식을 끼워봐야 난 저 자식을 결국 짐덩어리로 취급해버리고 말 것임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는 또다시 아이를 불러세운 것이다.

"왜요?"
"......"

  그래도 아이는 집안교육을 잘 받아서인지 윗사람에게 말을 높일 줄 알았다. 또래의 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타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다.

"형아! 나 심심해요. 같이 놀아주면... 안 돼요?"
"...뭘?"
"나랑 같이 술래잡기 하자! 헤헤헤."
"술래잡기?"
"웅! 내가 머어어얼리 갈테니까 나 한 번 잡아봐요! 네?"
"...그럼 빨리 도망이나 가."
"알았어요!"

  아이는 부리나케 그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도망을 쳤다. 귀찮은 듯이 잠시 근처를 서성이던 나타는, 순간 치기어린 장난기가 발동해 근처 주택가의 높은 건물로 뛰어올랐다. 높이서 보니 얼기설기 펼쳐진 주택가의 건물 사이사이 길을 따라 아이는 열심히 도망을 치고 있었다. 길가와 골목에는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이와 나타, 그리고 이 주택가의 너머로는 희뿌연 안개가 둘을 감싸고 돌고 있었다. 잠시 나타가 아이를 따라 조용히 이동해서 살펴보자, 아이는 어딘가에 멈춰서서 길가 골목 어귀 큰 쓰레기통 뒤편에 숨었다. 아이는 긴장한 듯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가끔씩 큰 길가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나타는 그런 아이를 건물 옥상 위에서 무심한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가 찾으러 오지 않자 아이는 눈빛이 흔들리며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큰 길가로 조심히 얼굴을 내민 아이는, 뒤이어 그를 찾아야할 사람의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주저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조금씩 훌쩍이기 시작하는 아이는, 꽤나 의젓한 척 했지만 역시나 외로움을 무서워하는 평범한 꼬마아이였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어울림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그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족쇄가 되어버려있었다. 그리고 나타는 그런 아이를 보면서 하품과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애초에 남이 어떻든말든 그런 것에 신경쓸만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이미 본인마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보고 있는 나타의 시야가 다시 흔들린다. 주택가와 길가, 골목, 쓰레기통과 아이의 모습이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며 왜곡되기 시작했다. 희뿌연 안개가 다시 나타의 시야를 가리며 장면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따라오는, 다음 장면. 아이는 조금, 유심히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이 커있었다. 어느 놀이터,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리고 나타가 아까까지 유심하게 보고 있던,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울던 아이가 눈에 띄었다. 놀이터의 친구들과 가볍게 어울리고 놀던 아이들. 나타는 역시나 시큰둥하게 그 장면을 보고만 있었다. 미끄럼틀도 타고 그네도 밀어주면서 사이좋게 놀던 아이들 사이에, 티나지 않는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는 항상 흔한 일이다. 치고 받고 싸우면서 크는 이야기들. 가끔 그렇게 놀다가 싸우고 코피 한 번 나면서 크는게 아이들의 일상인 것이다. 다만, 누군가에게만은 너무나 이질적인 이야기.

"야 이세하! 저리 안 비켜? 내 차례잖아!"
"음.. 어? 지금 내 차례잖아. 나 탈거야아!"
"흥 됐어!"

  무리에서 힘 좀 쓰게 생긴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려던 세하를 밀어냈다. 단 한 순간의 장난으로 세하는 높은 미끄럼틀에서 떨어졌다. 모여있던 몇몇 아이들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몇몇 아이들은 킥킥대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키키킥. 야, 쟤 저래도 괜찮아! 쟤 뭐냐 그거 괴물이라서 저런거에 끄떡 안 해! 하나도 안 무서워! 크헤헤헷."
"아우으으..."

  딱 봐도 떨어지면서 팔을 잘못 짚으면서 뼈를 삐끗했거나 부러졌을 것 같았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할 정도였다. 팔에 불편을 호소하면서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는 세하였지만, 주변의 아이들은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저 웃고 놀리는데에 혈안이 돼있었다. 세하를 둘러싼 호기심 많고 장난기 많은 아이들에게, 세하는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자기들의 장난감, 유희거리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나타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아무리 짜증나고 귀찮은 것은 건드리지 않는 주의라고 해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세하가 당하고 있는 것은 왠지 두고볼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이 자식들이... 당장 꺼...져... 죽기 싫으면 빨리 내 눈앞에서 보이지 말라고!"

  나타는 아이들이 비웃고 있는 한가운데로 불쑥 뛰어들어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치며 위협했다. 놀리고 웃는데 정신이 팔려있던 아이들이 문득 갑작스러운 무서운 사람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놀라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런 버러지같은 자식들! 빨리 꺼지라고 했잖아! 죽여버리기 전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

  두 번째 고함이 있고 나서야 아이들은 펑펑 눈물을 쏟아내면서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울음소리가 저 멀리 달아나며 잠잠해질 즈음, 나타의 시선은 놀림을 받고 있던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는 어느새 천천히 일어났지만, 팔이 불편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이 꼬마, 괜찮은거냐?"
"...네, 괜찮아요. 어짜피 저는 이런거 당해도 빨리 나으니까... 애들이 장난을 쳐도 전 괜찮아요. 괜찮은데... 흐어어엉."
"...뭐냐."

  괜찮다면서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세하가 나타에게 뛰어들어 품에 파묻혀버렸다. 순간 당황한 나타는 무얼 어떻게 해줘야하는지 깨닫지 못한채 멍하니 서있었다.

"전 괜... 훌쩍... 괜찮아요. 그런데... 애들이 자꾸 나 괴물이라고 그러는데... 후에엥... 저 괴물이에요? 정말 진짜로 괴물인거에요?"
"......"

  나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눈물짓는 아이, 세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본인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위상능력자라면 누구나 거치듯이 지나가는 고통스러운, 외면과 따돌림 그리고 짖궂은 장난과 아픔. 아이들은 자기들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상하게 생각했다. 위상능력자는 특히나 더더욱 그랬다. 신기한 장난감 보듯이 하고 또 실제로 그런 식으로 다루었다. 바로 지금처럼, 세하가 당한 위험한 장난처럼.
  울고 있는 아이의 머리에 어쩐지 손을 얹어주려던 나타의 시선이 다시 묵직하게 흔들렸다. 모든 화면이 다시 왜곡되면서 뒤흔들렸다. 희뿌연 안개가 감싸고 돌다 다시 떠난 자리에 서서히 보이는 것은, 넓고 푸른 공원의 한 가운데에 조용히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는, 어느새 훌쩍 중학생이 된 세하였다. 학교 소풍을 나온 듯한 분위기에, 세하는 쉽사리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조금 동떨어져서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임기에서 게임을 하는데 열중해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세하가 좀 동떨어져 혼자 놀고 있음을 발견한 담임선생님이 세하를 불러냈다.

"이세하, 거기서 또 게임하냐? 빨리 모여라. 프로그램 진행할거야."
"...네..."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 게임에 열중하는 세하를 보는 선생님의 표정이 조금씩 화로 차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직접 세하에게 접근해서는, 세하의 게임기를 휙 뺏어버렸다.

"압수다."
"......알았어요."

  힘없이 순순히 수긍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세하. 아이들 사이로 기어들어왔지만, 힘없이 넋나간 표정으로 가득한 아이였다. 아이들의 수군댐과 장난기 넘치는 행동들 사이에서 외로운 섬으로 남아있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선생님들의 말소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저 아이들이 움직이는대로 자동적으로 따라다니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가끔씩 아이들이 세하를 향해 장난을 쳐주면, 다소 생기없는 표정으로 받아주곤 했다. 그나마 생긴 것만큼은 멀쩡히 잘 생기게 커가고 있었던 덕분에 관심을 보이는 여학우들은 조금 있었지만, 분위기라는 것에 얼마나 잘 휩쓸리는 시기란 말인가.
  이윽고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소풍이 마무리되고 다들 집으로 향하는 시간이 되었다. 세하의 옆으로 같이 지나가는 학우들은 없었다. 혼자, 걸어갈 뿐이었다. 나타는 또다시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발걸음을 옮겨 세하의 근처로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뒤에 누구세요."
"......"
"그쪽도 위상능력자에요?"
"...그래서?"
"...원래 이래요?"
"뭘?"
"원래 이러냐구요."
"뭘 말이냐."
"......"

  나타의 차가운 반응에 고개를 떨군 세하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사이킥무브로 그 자리를 떴다. 분명 절대 평소같으면 위상력을 드러내지 않을 아이였지만, 수없이 쌓인 감정들은 가끔씩 엉뚱하게 분출되고는 하는 것이다. 그나마 순한 아이였던 덕분이라고 하겠지만, 나타는 무심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마음에 박힌 것들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이는 그의 거울이면서도, 그와 반대편에 있는 존재였다.

  다시 화면이 흐려졌다. 익숙한 울렁거림을 다시 맞이하고 떠나보내자, 어느새 검은양의 소속으로 차원종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세하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동작으로 스킬들을 사용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세하를 나타는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나타의 시야가 점점 밝아지면서, 지금의 이 곳이 어디인지 눈에 선명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세하가 어린 시절 팔을 다쳐야만 했던 그 놀이터. 놀이터다. 차원종들의 만행으로 놀이터 시설과 근처 주택이 여기저기 파괴되어버린, 그 곳에서 세하는 차원종들을 차례차례 제거해나가고 있었다. 굳이 뛰어들 필요가 없다고 느낀 나타가 근처 낮은 건물의 옥상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차원종을 다 정리하는데 성공한 세하는, 다시 놀이터로 돌아와 잠시 파괴된 그 미끄럼틀을 지지하고 있던 대에 기대앉아 포션을 마시며 쉬기 시작했다.
  나타는 옥상에서 뛰어내려 움직였다. 놀이터를 향해, 세하를 최대한 신경쓰지 않는 척 세하의 정면으로 다가갔다. 목을 축이면서 숨을 고르던 세하의 눈에 누군가의 발걸음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자 굳어진 표정 한 가운데 약간의 비웃음섞인 경멸이 보였다.

"...나, 당신 알아요."
"...어떻게?"
"당신, 이 동네 알잖아요. 나랑 놀아준다고 해놓고 말도 없이 가버렸었어요."
"......"
"그리고 또, 여기 알잖아요. 나 다친 데에요. 내가 품에 안겼던 것도 또렷이 기억나요. 그래요 품을 빌려준 건 고마워요."
"......"
"그리고, 내가 소풍 마치고 집에 가던 날도 기억해요. 내 뒤로 조용히 따라온 사람, 당신 맞죠?"
"......"
"또 뭐에요. 날 왜 또 보러 왔어요? 스토커에요? 뭐에요?"
"......"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을 해줘요. 도대체 뭔데 자꾸 따라오는거에요?"
"...별 이유 아니다 버러지."
"뭐요. 뭐가 버러진데요? 시간이 많이 지난 건 맞지만, 솔직히 나도 그 쪽을 왜 기억하고 있는지 이유는 모르겠어요. 근데 썩 좋은 이유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진 않거든요. 오늘도 또 별로 할 말은 없으신 것 같으신데, 별거 아니시면 전 이만 가볼게요. 아직 정리해야할 차원종이 많거든요."

  세하는 휴식을 마치고 일어나 사이킥무브로 자리를 떴다. 나타는 휑하니 남겨졌다.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나타는 휩쓸려있었다.

  또 다시 장면이 바뀐다. 역시나 소년 세하는, 이제는 나타의 나이 또래만큼 커서 한강 둔치에 앉아 강바람을 맞으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가갔다.

"...나타냐."

  이제는 나타와 같은 나이까지 성장한 듯한 세하가 다가오던 나타를 느끼며 먼저 말을 걸었다. 나타는 신경질적이고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이끌리듯이 세하가 앉아있는 벤치로 다가왔다. 그리고 벤치의 등받이를 부여잡고 세하를 내려다봤다.

"뭐, 이번엔 또 뭐냐."
"...버러지."
"그 말 몇 번이고 지겹게 들은 것 같은데? 다른 할 말은 없는거야?"
"......"
"없는거냐?"
"너, 어떻게 살아남았냐."
"......"

  세하는 조용히 게임에 몰두했다. 귓가에 스치는 강바람이 그 자리에 있어야할 말, 숨소리, 그리고 모든 순간을 스쳐 지나온 수많은 소음들을 집어삼켜버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과... 동질감. 그리고 잠시 뒤,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
"...그렇다면?"
"뭐, 어쩌겠냐. 나라고 안 힘든 때가 있었겠냐. 너도 쭉 봤을텐데? 알잖아."
"돌려서 말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대답?... 뭐, 그런거라면 좀 사양하겠어. 아무리 니가 그걸 궁금해하더라도, 내가 너한테 그것까지 다 일일이 털어줘야하는 입장인가?"

  말을 마친 세하가 다시 게임기를 부여잡았다. 몰두했다. 표정은... 아까보다 더욱 더 굳어졌다. 지나온 시간동안 받은 아픔들로 얼마나 가슴 속에 멍과 상처가 들어찼는지 나타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울 수준이었다. 이세하는 그런 아이였다. 위대한 전쟁영웅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런 배경 따위는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세하로서,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서 있고 싶었다. 사람들 속에서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나타의 마음 속 깊이 잠재워야만 했던... 모습이었다.
  조용히 세하의 뒤로 다가갔다. 무기를 내던지고 세하의 뒷덜미를 감싸고 그를 껴안았다. 세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게임에 몰두했다. 아무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두 사람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타는 또다시, 그가 망설이던 갈망의 순간을 깨달았다.

"...나타."
"뭐."
"이걸 고맙다고 해야하는거냐? 널 한 대 갈겨줘야하는거냐?"
"크훗... 뭘 망설이냐 버러지. 둘 다 해버리던가."

  잠시 게임기를 내려놓고 고민하던 세하가 그 말을 듣고는 나타에게 돌아섰다. 벤치를 넘어 세하가 나타에게 뛰어들어 안겼다. 그 순간, 우정을 넘어선 감정이 솟구쳤다. 단 한 순간의 알 수 없는 교감으로 두 사람은 한계를 뛰어넘어섰다. 그리고, 나타의 품에 안겨있던 세하가 서서히 빛나는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가기 시작했다. 붙잡을 수 없는 영원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한 번 그를 만난 기쁨은, 나타 자신이 품고 있던 고통의 길을 따라 또다시 먼지가 되어 사라져갔다.
  애석하고 미련하게도, 다시 한 번 나타는 세하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 했다. 그리고 구름이, 두 사람을 또다시 갈라서게 만들고 있었다.

"잊어버려, 이 버러지 같은 건 그만 잊어버리라구."

  흩날려가는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나타에게 웃어보이며 고갯짓을 해준 세하는, 그대로 나타의 품을 떠나 자유로운 하늘 위로 흩어졌다. 그리고 젖어가는 나타의 눈망울 앞에, 다시 한 번 희뿌연 안개가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다. 몸이 붕 뜨는 기분을... 받았다. 이대로 세하에게, 나도 닿을 수 있는걸까? 그 버러지같이 얄밉고 짜증나는 놈 따위에게, 내가 과연 닿을 수 있는건가? 서서히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음을 느껴가고 있었다.


  초양이 비쳐오는 창가에 등을 기댄 나타의 표정이 어둡다. 꿈은, 그렇게 감정만을 내던진채 무책임하게 그를 떠나갔다. 몰아치는 감정의 홍수가 익숙하지 않은 나타는 그렇게 괴로움에 신음소리를 내야만 했다. 망각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그 꿈의 한 가닥이 나타의 심장을 건드리고 마음을 강하게 후벼팠다. 이것은, 그의 아픔이었으면서 곧 나타의 아픔이고 좌절이었다.
  나타의 무기가 다시 팽이 돌듯이 돌기 시작했다. 다시, 하루가 시작됐다. 그가 없는 세상이 돌아왔다.

"아! 짜증나! 짜증난다고! 결국 어제도 한숨도 못 잤잖아!"

  애써 떨쳐내면서 길을 나선다, 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을 집에 남긴 채. 그렇게 시곗바늘은 다시 달리고 있었다.
2024-10-24 22:28:3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