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방과후는 길다

이센고러퍼 2015-06-09 6

어른의 방과후는 길다(제이X유정)

내용이 다를 수가 있고 말투가 캐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그러이 받아주시옵소서
또한 제이유정 커플링을 주제로 한 내용이니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뒤로가기를 살포시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p.s 추천 10개 넘으면 다른 것도 쓰겠습니다. 제이유정 만세!!! 대충 10000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길다...ㅋㅋ
재밌으셨다면 추천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차원종을 죽이고 나면 항상 그녀에게 보고를 끝내고 새 임무를 받고는 했었다. 
'관리요원 김유정'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고, 직책이었으니까. 

언제쯤이었을까. 그녀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던 건.
확실한 것은, 내가 말렉을 처치했을 때의 그녀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렉을 처치하시는 데 성공하셨군요! 잘하셨어요. 제이 씨!"

하필 왜 그때 얼굴이 붉어졌던 건지. 황급히 그걸 숨기기 위해 선글라스를 들어올렸다. 다행히 그녀는 모르는 것 같았고, 나는 천만다행으로 지역 이동을 핑계로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우란의 헥사부사는 굉장히 강력해서 그걸 타면서 얼굴을 식힐 수 있었다. 울렁거리는 속은 덤이었지만. 

그녀를 오랫동안 보고 싶었고, 그녀가 오랫동안 내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고,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녀가 간간히 어제 너무 마셨나라는 말을 하며 휘청일 때는 다가가 무리하지 말라며 허리를 받쳐 주고 싶었다.

물론 난 그러지 못했다. 전의 그 때처럼.
그래. 이렇게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누더기이고, 약을 먹어야 간신히 차원종을 처치할 수 있는 나인데. 누가 나를 좋아해주겠어. 잊어. 잊어버리자.

그렇게 나 자신을 질책하면서도 그녀 앞에만 서면 웃음이 스미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일을 저질렀다. 아니, 오히려 일이 나를 찾아왔다가 정확하겠지. 


* * *


"좀 피곤하니 낮잠이나 자볼까. "

"그러세요. 아직 새 임무도 온 게 없는 것 같거든요. 아 그럼 저도 좀..."

장갑차 안에서 뒹굴거리는 백발의 남자와 방탄조끼를 입은 단발 갈색머리 여자. 제이와 송은이가 차 안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으음..지금이 몇 시지?"

분명 잠시 1시간만이라며 눈을 붙였는데, 깨어나보니 차 안에는 그 혼자였다. 

"유정 씨? 송은아? 다들 벌써 나간건가? 대체 지금이 몇 시인거지?"

창문을 살펴보니 해는 이미 노을을 뿌려가며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지금이 한여름이니 이미 6시는 훌쩍 넘겼을 터. 오늘 왔을 건강식품이나 뜯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차 밖으로 나가는 순간. 

"제이 씨!"

아나운서 톤의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 그녀였다. 

"유정 씨? 왜 유정 씨가 여기 있는 거지? 지금쯤이면 퇴근 시간 아닌가? 유니온도 끝까지 부려먹는 건 여전하군. "

"대체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거예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아 귀를 맴돈다. 새빨개진 귀를 매만지며 그가 은근슬쩍 얼버무렸다. 

"너무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 내가 설마 유정 씨 두고 어디 가겠어?"

"전 당신의 관리요원으로서 제이 씨를, 검은 양 팀을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요. 가만히 있었으니 망정이지, 막 돌아다녔으면 근무지 무단 이탈로 근신처리가 되었을 거라고요!"

"이거야 원.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다니. 너무 사생활 침해 아닌가?"

"제이 씨!"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나를 부른 용건이 뭐지?"

순간 굳어지는 그녀의 표정. 딱딱한 그녀의 얼굴에 그 역시 얼굴이 굳어졌다. 

"....요. "

"유정 씨? 좀 더 크게 말해줄 수 있겠어? 내가 예전처럼 귀가 그리 좋지는 못해서. "

"유니온의 긴급한 호출이에요. 지금 당장 저를 따라오세요. "

몇 년동안 비가 안 온 땅마냥 단단히 굳어 있는 유정의 얼굴을 보고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임무를 줄 때 어디를 다녀오라는 말만 하지,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 적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지역 이동을 할 때도 그들은 따로 움직였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할 즈음, 유정이 들어간 곳은 유니온 건물도, 알 수 없는 괴건물도 아니었다. 

"여긴 유니온 건물이 아닌데. 유정 씨? 여긴 포장마차 아닌가?"

그의 말대로 그들 앞에 있는 것은 새빨간 천으로 뒤덮인, 분식과 술의 냄새가 확 풍겨오는 포장마차였다. 

그녀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가 그를 향했다. 환히 휘어지는 눈매가 마치 반달 같았다. 

"견습요원으로 승급한 것을 축하하는 회식이에요. 일종의 서프라이즈 파티죠. 후후 어땠어요. 제 연기?"

"견습요원 승급한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축하를 하다니. 유정 씨답지 않군. 그리고 회식이라고 하기엔 당신과 나 둘뿐인데? 어떻게 된 일이지?"

"다들 이미 들어갔어요. 우리도 어서 들어가죠. "

하지만 다들 있을 거라는 그녀의 말과 달리 포장마차 안에는 유정과 제이 두 명을 제외하면 의자는 모조리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어...어라? 분명 여기 다들 있었는데? 아주머니. 혹시 여기에 검은 머리의 남학생 한 명, 분홍색과 검은색 머리의 여학생 두 명, 그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아이 한 명 못 보셨나요?"

"그 애들? 애들이라면 좀 전에 분홍머리 아이가 다 데리고 나갔는데. "

"유정 씨, 설마 술냄새 확 풍기는 여기에 우리 애들을 데려온 거..."

"슬비가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유정이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이슬비에게 연락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사오니 다음에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

무심히 통화음만 내뱉는 핸드폰. 유정이 제이를 제외한 검은 양 팀 멤버 전부에게 전화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양심없이 뚜-뚜- 거리는 핸드폰을 유정은 망연히 바라보았다. 제이는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머금은 말엔 여지없이 웃음이 가득 스며 있었다. 

"유정 씨? 무슨 일 있나? 보아하니 다들 전화를 받지 않는 것 같으니 우리 둘이 술을-"

"별 수 없겠네요. 그러죠. 여기 소주 두 병과 모듬안주 좀 가져다 주세요. "

"쿠, 쿨럭! 저, 정말이야?"

그의 딴에는 습관적으로 던진 작업 멘트였겠지만, 오늘따라 그녀에게는 매우 끌리는 말이었나보다. 덕분에 그는 당황하면서도 정말로 오랜만에 그녀와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현재 시각은 7시 반. 서로 마주앉아 술을 마시기엔 좀 이른 시각이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유정 씨와 술을 마시는군. "

"그러게요. 

전에는 같이 술을 자주 마셨었지만,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에는 어째서인지 일에 일이 겹쳐 마시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그녀와 술을 마시는 내내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고 안주접시가 비워지면서 그녀의 텐션변곡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이 씨!"

"알큰하게 취했네. 유정 씨, 괜찮아?"

"제이 씨, 딸꾹, 당신 정말 너무해요!"

"유정 씨, 지금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정신 차려봐. "

"내가 술 혼자 마시는 게 얼마나 적적한 줄 알아요!? 그래서 같이 마시려고 불렀는데 항상 일 때문에 바쁘다고 오지도 못하고!"

두다다다 속사포처럼 자신의 서러움을 쏟아내는 그녀 앞에서 그는 그답지 않게 쩔쩔맸다. 

"유정 씨. 진정해봐. 이거야 원. 하필 술 깨는 음료를 집에 두고 왔군. "

그녀가 폭포처럼 쏟아내는 말들이 그의 귀를 통해 마음속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한참 동안 쏟아낸 감정의 파도는 시계의 분침이 한 바퀴가 넘어서야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뒤이은 유정의 말에 잠잠해지기는커녕 되레 뒤집어지고 있었다. 

"제이 씨. 남자는...어떤 여자를 좋아해요?"

술로 인한 홍조에 나른한 말투. 그의 마음속에서 애국가가 경건히 울리고 있었다.

"으음...다들 조금씩 다르지만, 남자는 역시 예쁜 여자를 좋아하지. "

"그래요...? 저는 절대로 안 되겠네요..."

순식간에 풀이 죽어버린 그녀를 보며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내가 전에 봤지만 유정 씨의 몸매는 나쁘지 않았..."

몸매 얘기가 나오자마자 그녀가 상체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마치 하악질하는 고양이처럼. 

"그런 거 관찰하지 말라고요! 진짜...성희롱으로 고소할 거예요!"

"유정 씨. 졸린 눈으로 그렇게 말해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고. 졸리면 좀 자 둬. 내가 깨워줄테니까. "

보드라우면서도 든든한 말에 유정이 테이블에 엎드렸다. 곧이어 고른 숨의 음파가 그의 귀에 스며들어갔다. 

'8시 45분이면 뭐, 30분 정도 있다가 깨워도 되겠군. 그 전에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유정의 옆에 앉았다. 팔을 베개삼아 옆으로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흘러내리는 갈색 머리카락에 손을 살짝살짝 대본다. 많이 고생하는 걸까, 다 엉켜있다.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손을 갑자기 뗀 것은 그녀의 잠꼬대 때문이었다.

"제이 씨? 다들 어디..안 돼. 그 곳은..가지...돌아와.."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에 그가 당황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평소라면 등만 두드렸을 텐데. 술김의 힘이란 대단했다. 

"유정 씨, 괜찮아. 난 여기 있어. "

그의 말이 유정의 의식을 잡아채기라도 한 걸까. 그녀가 부스스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 이런. 결례를 범했군요..죄송해요..잠시 꿈을 꿔서. "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잠꼬대까지 한 거야?"

"모두가 다 떠나는 꿈이었어요. 하하..그럴 리가 없는데.."

헛웃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눈길이 그가 잡은 손길에 닿았다. 

"제, 제이 씨! 게다가 언제 또 옆에 앉아 계셨던 거예요!"

유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이의 얼굴 역시 붉게 물들었지만, 유정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유정 씨. 난 유정 씨를..."

빠아앙-

취중진담이라 하던가? 그가 술의 힘을 빌려 그녀에게 진심을 조금이나마 드러냈지만, 하필 지나간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는 타이밍과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그의 말은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음? 제이 씨,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술을 한 번 더 마시는 척하며 그가 얼버무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단지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

"그건 오히려 제가 드릴 말씀이죠. 고마워요, 제이 씨. "

새빨개진 얼굴을 선글라스를 올리는 행동으로 가려버리며, 그가 간신히 대답했다. 

"고맙기는 무슨. 고마우면 일찍 퇴근이나 시켜달라고. "

"아이구, 둘이 사이 좋네그려! 내가 서비스로 안주 한 접시 더 줄테니 더 먹고 가-?"

"아, 아주머니!"

술집 아주머니의 인심을 먹고 술잔을 나눠가며 다시금 담소를 나누다가 발개지는 순간들이 반복되던 중, 기어코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현재시각 1시 반. 그녀가 술에 절어버렸다. 

"웬만하면 만취상태는 가지 않으려 했는데..결국 일이...터져버렸군. "

그녀가 초점이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건 신경도 안 쓰고 오로지 제이에게만 반응한다는 거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이 그녀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거야 원.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군. 유정 씨. 일어나. "

유정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꼭두각시처럼 쫄래쫄래 따라오는 그녀를 보며 제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주머니. 이 시간까지 있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

"뭘 새삼스럽게 그러나. 저 처자 여기 단골이라 늦게까지 많이 먹고 그랬어. 어찌나 어떤 청년 얘기를 했었는지. (꿀꺽, 제이는 침을 삼켰다. ) 그 청년 이름이...제..제이. 아 그래. 제이였어. 백발에 노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하던데..아 혹시 자네가?"

"네. 제가 제이입니다만.... "

"저 처자 후딱 데려가는 게 좋을 게야. 예쁘지, 참하지, 예의도 바르고..몸매도 좋잖아? 자네 잘 안다면서?"

"쿨럭!"

아무래도 유정이 그의 얘기를 아주머니에게 했나보다. 

뒷목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그가 값을 치르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술에 취해선지 거리가 불규칙적으로 일렁였다.

"유정 씨. 그거 알아?"

술에 취해선지 그의 입에서 말이 멋대로 공기중에 스며나왔다. 

"나는 유정 씨를 ㅅ...우욱.."

'후우, 고백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

"우우욱..."

토기가 올라오자 그가 간신히 억눌렀지만, 옆의 유정 씨는 그러지 못했다. 

우웨에엑-

벽에 손을 기대어 무지개를 한껏 뱉어내는 유정을 보며 제이가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많이 마시지 말지 그랬어, 유정 씨. "

우웩, 켁, 콜록콜록. 

"그래. 고생이 많아. 유정 씨도....엇!"

제이가 아기처럼 등을 두드려주는 순간 그녀의 눈이 빛을 발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힘으로 그의 손목들을 잡아 돌려 벽에 그를 기대게 했다. 

엄청난 힘으로 그녀가 제이를 내리누르자 졸지에 그가 기역자 비스무리하게 서게 됐다. 

다행히도 벽에는 무지개가 튀지 않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바지가 젖을지도 몰랐다. 

"유, 유정 씨?"

평소라면 뿌리칠 수 있었겠지만 술을 마신 상태라는 것과 상대가 유정이라는 것이 합쳐져 그는 빼도박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식은땀이 주르르륵 흐르는 가운데 유정의 얼굴이 점점 제이에게로 다가왔다.

"유정 씨. 이러면 내가..."

그러나 그를 덮친 것은 따뜻한 체온이 아닌 서늘한 직감이었다. 이대로라면 위험하다.

몇십 년을 클로저로 살아와 예리해진 그의 직감대로, 유정의 입에서 불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웁-"

'잘못하다간 옷에 쏟을지도 모르겠어. 유정 씨, 미안해. '

그가 눈을 딱 감고 왼손을 유정의 볼에 갖다대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유정은 무지개를 토해냈지만 벽과 함께 제이의 오른어깨에 묻는 것은 별 수 없었다. 

10분같은 10초가 끝난 뒤, 그는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 했었다. 그러나 유정이 토해낸 뒤 곧바로 그에 품에 안겨 잠들어 버리면서 문제는 더 커졌다. 

"허...허리가...!"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예전보다 0.7kg 더 찐 그녀의 몸무게는 그의 허리를 강력하게 압박했고, 그는 점점 중력의 힘에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몸을 빼내자니 유정이 바닥에 쓰러질 것이고, 받은 채 일어서자니 허리가 부서질 판이다. 그렇다고 그냥 앉으면 바지가 다 젖을 테고. 

그는 울며 겨자먹기로 마지막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철퍽-

"하아..."

그의 한숨이 흩어져 스러졌다. 

'우선 가면서 생각해보자. '

불행 중 다행으로 등은 젖지 않아 제이가 유정을 업고 갈 수는 있었다. 스킨십 자체는 그의 일생에서 최고였지만 상황은 끔찍했다. 

바지, 자켓, 츄리닝은 다 조금씩 젖었고 유정은 깨어날 기미가 없다. 모든 대중교통의 막차는 가버렸고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집 역시 모른다. 

'사이킥 무브를 써야하나. 하지만 그러면 유정에게 갈 충격이 너무 커. '

이대로 밤이 새기를 기다리는 것 역시 너무 리스크가 크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 그러나 그는 그걸 실행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어. '

생각하면 할수록 방법은 하나뿐이요, 중력은 점점 그를 압박해오니...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또다른 목소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옷도 빨아야하고, 잠깐이면 되지 않을까?'

끊임없이 전해지는 온기와 유혹에 그는 결국 목소리에 굴복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단촐한 그의 공간이 드러났다. 현관문을 기점으로 직선에 방 하나, 그 오른쪽에 화장실, 화장실 앞에 거실. 그리고 거실 왼쪽의 부엌.

단출한 구성이었지만 뭐 하나 빠진 것은 없는 알찬 집이었다. 유정을 침대에 눕혀놓고 그가 세탁기에 옷들을 던졌다. 

방의 문을 조용히 닫고, 그가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로 몸에 물을 뿌렸다. 

얕게 한숨을 쉬며 그가 눈을 감았다. 벗은 이 선글라스처럼, 나도 내 죄책감을 벗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드러난 지금의 얼굴처럼,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가 생각했다. 

미리 꺼내놓은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그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곤히 자고 있던 그녀를 깨울까봐 발걸음 하나하나가 신중했다.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녀를 보고 또 본다.  

'아름다워. '

손이 닿았다가는 그대로 깨버릴까봐, 그는 그녀를 보고 또 보기만 했다.

순간, 유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가지마...어디가...안 돼..제발.."

항상 객관적이고 침착한 그녀의 검은색 뒷면을 보는 것은 그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는 유정의 손을 잡았다. 다 괜찮다고,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는 아무말 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절망만 할 위인은 아니었다. 갑자기 그녀가 손을 빼내더니 캔을 따 마시는 시늉을 했다. 

유정의 눈이 팍 떠지더니 그녀가 일어나 제이를 껴안는 것이 아닌가. 그가 당황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었다. 

"유, 유정 씨?"

그의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타올랐다.

"더 이상 가지 마요..당신 마음도 모르고서는 가게 냅둘 것 같아요..?!"

"유정 씨, 난 아무데도 안 갔어!"

"맨날 다가가면 도망가고! 도망치고!...정말.."

말하며 목이 메이는지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를 안고 있는 손이 간절했다. 그가 조용히 그녀를 안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난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더는 도망치지 않아. 더는. "

"거짓말..."

"보여주지. "

그가 선글라스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대로, 그가 유정의 어깨를 잡고 잠시 간격을 넓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제이의 얼굴에 유정이 놀랄 새도 없이,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의 감촉은 너무나 달콤했다. 그가 먹어왔던 모든 쓴맛이 한순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포근했고, 부드러웠다. 그 순간만큼은 그가 모든 걸 다 가진 듯했다.

어깨에 있던 손을 위로 올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진다. 사락거리는 질감에 그는 만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왼손을 위로 뻗어 그의 머리를 만졌다. 오른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은 채, 그녀는 환상을 음미했다. 

황홀한 기분이 그들을 적셨다. 시간이 멈춘 듯, 구름 위에 뜬 듯, 달빛이 창문을 넘어 그들을 감싸자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들의 그림자가, 흰 천 위에서 섞여 스러져 갔다.  
2024-10-24 22:28:3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