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이슬비편: 부탁-

Maintain 2015-05-27 11

그러고 보면, 여기 온 지도 벌써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와야지 와야지 하면서도 결국 오지 못했던 건, 그럴 염치도, 용기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겁도 나고.

그날 유리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실수를 두려워만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그 실수를 고치지도, 그 실수로 폐를 끼쳤던 사람들에게 보답하지도 못한다고 했었지.

그래, 그 말은 분명히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보답해야 할 사람들이 아예 이 세상에 없을 때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가만히 손가락만 빨면서, 그 날의 일을 곱씹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나...? 그게 겁이 났던 거겠지. 그래서 몇 년간 여기를 찾지 않았던 거고. 대장한테 감사해야 하나. 오랜만에 여기 오게 해 줬으니.

역시나...라고 해야 하나.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이곳은, 전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먼지는 글자조차 읽기 힘들 정도로 두텁게 쌓여 있고,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한 데다가 심지어 실금까지 여기저기 가 있었다. 휴...살아서도 그런 취급이었는데, 죽어서도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먼지를 떨어내다가,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그날의 후회 때문에.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뒤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굳이 ** 않아도 되겠지.

"...왔어?"

대답은 없다. 그저, 무거운 침묵만이 있을뿐. 그렇게 가만히 서 있자, 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이 씨...그건...?"

아, 대장은 모르겠구나. 하긴, 일부를 빼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까.

"보다시피...기념비야...차원전쟁때 죽었던 요원들의."
"이게요...? 이런 게...?"

믿지 못하겠다는 대장의 목소리. 뭐...무리도 아니겠지. 대중적으로 알려진 요원들의 취급은 굉장히 좋은 편이니까. 나라에서 집도 주고 연금도 주는, 막말로 철밥통을 보장해 주는 그런 모습으로 알고 있었겠지. 대장도 클로저 요원이긴 하지만, 유니온 녀석들이 실상을 알려줄 리도 없고. 아마 내부적으로도 교육을 시켰을 거다. 클로저가 되면 이런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

"그래... 믿기 힘들겠지. 하지만, 사실이야. 차원전쟁 때 희생됐던 요원들은, 대부분이 이런 취급이었어. 살아서는 운 좋았던 몇몇을 제외하곤 문자 그대로 쓰다버리는 소모품 취급이었고... 죽어서도 고작 이런 꼴을 당하고 있지. 이름도 알려지지 못하고."
"그런..."
"그리고 그런 소모품들 중에선, 내가 잘 알던 사람들도 있었지. 정확히는 내가 이끌던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우리 검은양 팀처럼."
"제이 씨가 이끌던 팀이요...? 무슨 일이...있었던 거죠?"
"옛날 일이야...별로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아무튼 그 팀원들도, 결국 이런 운명을 맞았어. 후... 이래서 여기는, 별로 오고 싶지 않았던 건데."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일어나며 뒤를 돌아다봤다. 그리고...후회했다. 대장의 그런 얼굴, 보는 게 아니었는데.

딱히 별다른 말이 있었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다른 어떤 말보다 더욱 귀찮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달라, 그 단호한 표정. 그 표정을 보고 직감했다. 이거, 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겠구나. 

"정말...듣고 싶어?"
"예. 꼭 그래야겠어요. 제이 씨에겐 죄송하지만... 말씀하셨죠? 제가 비뚤어지지 않게 책임져 주시겠다고."
"그야 그랬지만...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건 차이가 큰 법이에요. 그리고 그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슬픈 일을 겪어버린 아이는, 결국 비뚤어져 버리겠죠. 제이 씨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되는 건 정말 죄송해요...하지만, 그래도 전 알고 싶어요. 그래야만...저도 그런 일을 겪었을 때 비뚤어지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내 눈치가 보이는 건지, 마지막 말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잔뜩 소심한 표정으로 쭈뼛대기까지.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걸까. 그쪽 얘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골백번 다짐했건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장을 데리고 조금 앉기 편한 곳으로 갔다. 얘기를 하려면, 아마 시간이 꽤 길어질 테니까...




제이 씨가 나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추모공원 뒤쪽 언덕이었다. 신서울의 풍경이 보이는 곳이라 이런 지루한 긴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여기만큼 좋을 곳도 없을 것 같다나. 풍경 보느라 심심하진 않을 거라고. 확실히...경치는 좋긴 하다. 저녁놀에 물들어 가는 신서울의 모습은, 왠지 새롭게 느껴졌다.

대체 제이 씨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괜히 그런 말을 한 게 아닐까 속으로 후회한다. 차원전쟁을 겪으면서, 누구보다 깊게 상처를 받아오신 분일 텐데. 하지만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제이 씨는 좀처럼 과거의 일을 꺼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고. 

이런 내 복잡한 생각과는 다르게, 제이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저, 그냥 어제 있었던 일 중에 어떤 게 재밌었더라, 화젯거리를 떠올리는 것 같은 그런 얼굴. 제이 씨는 한참이나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가, 여기로 오면서 산 맥주 한 모금을 드시고 입을 열었다.

"차원전쟁 때 말단 요원들의 취급은,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았어. 내가 있었던 울프팩 같은 몇몇 특별한 요원들 말고는, 대부분은 소모품 취급이었지. 전쟁터에서 그들의 인권 따위는 없었어. 열악한 장비와 별볼일없는 위상력으로 전쟁에 나가 차원종과 싸우다가 죽으면, 곧바로 새로운 요원이 배치됐지. 그날 처음 본 신참이 하루가 끝나고 보니 다른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같은 일은 너무 흔해서 셀 수조차 없었어.

그런 요원들에게, 엘리트 요원들은 곧 선망의 대상이었어. 자신들과 다르게 강력한 위상력을 다루며 차원종들을 없애 나가는 그 모습을, 항상 동경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지. 그 요원들을 목표로 하면서. 뭐... 그 엘리트 요원들 대다수가 그런 말단 요원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대장도 짐작할 거야. 김기태 그 녀석? 그 녀석은 아무것도 아니야. 거기에 한 열 배는 곱했다고 보면 되겠지. 그 정도 수준이었어. 요즘 갑질이니 뭐니 하면서 말 많지만, 적어도 그때 엘리트 요원들이 말단 요원들에게 했던 것들에 비하면, 그런 건 정말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해."

제이 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도 평온해서,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그 김기태 요원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니. 그 정도로도 속이 많이 상했었는데. 아마 상상도 못 할 모욕이었겠지.

"그런 취급에도, 말단 요원들은 엘리트 요원들의 지시를 받으며 항상 열심히 싸웠어. 거의 없다시피 한 위상력으로, 그것도 안 된다면 총이나 맨주먹으로도, 앞장서서 차원종들을 저지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켰지. 물론 그 공은 전부 엘리트 요원들에게 돌아갔지만.

참 불합리한 일이지...그렇게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어. 오로지 차원종으로부터 신서울을 지켜야 한다는, 그 사명감 하나에 불타며 온갖 고난들을 헤치고 나갔지. 얻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바보 같기는.

가끔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어. 차원종의 본거지 한가운데에 들어간다던가 하는 위험한 임무에 차출된다던가 하는, 그런 기회들 말이야. 많은 사람들이 자원을 했지.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것도 있었고, 이름도 알릴 수 있고, 뭣보다 위험하면 그 엘리트 요원들이 자기들을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 이후의 일은, 말 안해도 잘 알겠지. 재주는 곰이 부리는데, 돈은 주인만 받아먹었어. 항상 그런 식이었지.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은, 아까 봤던 그런 취급밖에 못 받았고.

그리고...어떤 한 아이도 그런 임무를 받은 적이 있었어. 차원종들 한가운데에 유니온의 높으신 분이 고립된 적이 있었거든. 극비 임무로, 팀을 이끌어서 그 고위직을 구출해야 했었어. 아마 그렇게 어린 애를 그런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느냐, 그런 비난이 귀찮았던 거겠지. 그 아이는, 아직 어렸거든. 아마 최연소였을 거야. 유니온 산하의 모든 요원들 중에서.

그 아이는 그렇게 어렸지만, 위상력도 특출나게 강했고, 모든 임무에서도 눈부신 전적을 올리면서 다른 요원들 사이에선 '역전의 용사'라는 별명으로 불렸지. 그 아이와 그 아이가 속한 팀이 오기만 하면, 아무리 불리했던 싸움도 반드시 이기게 된다고. 아마 유니온도, 그걸 눈여겨보고 그 아이를 그 특수부대의 리더로 삼았던 거겠지.  

하지만 한 가지 큰 실책이 있었어.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팀의 리더의 명령대로만 따라서 살았었는데, 정작 자기가 리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지. 그래. 한 마디로 리더로서의 자질은 별로 없는 아이였어. 그리고 뭣보다. 누군가를 지키는 방법도, 그리고 그 이유도 몰랐었지. 원래 싸우기 위해서만 자라왔던 아이였으니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아무도 모르는, 그런 아이였거든." 
"그럼, 그 사람들은..."

결국, 거기까지 들은 나는 제이 씨의 말을 끊고 말았다. 그 결과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제이 씨는 너무나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음. 전멸했어. 그것도 깔끔하게. 아, 그래도 임무는 성공했어. 높으신 분은 무사히 구조됐고, 리더였던 아이는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고 대대적으로 알려졌지. 다만 탈출하는 도중에, 그 아이만 빼고는 전부 몰살당했다는 게 문제지만. 그 아이의 잘못된 명령 하나로 인해서. 거기다 차원종들이 너무 많았던 데다 시체도 이미 많이 망가져서, 결국 시체 회수도 하지 못했고.

그런데 한 가지 웃기는 게 뭔지 알아? 그 희생된 요원들은, 한 명도 자기들의 리더였던 그 아이를 원망하지 않았어. 그 아이의 삶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어떤 사람은, 그 아이만이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위로를 하면서 죽어갔지. 

그리고 보통 그런 일을 겪었다면 슬픔이라던지, 죄책감이라던지, 그런 걸 느끼잖아? 하지만, 그 아이는 자기 때문에 그런 사단이 났는데도,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어. 몰랐으니까. 그런 감정 자체를. 슬프다던가, 죄책감이라던가, 그런 감정은 모르면서 지내왔었으니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차원종들을 잡으면서 사는 게, 그 아이의 유일한 살아가는 이유였지. 감정이란 건, 그 아이에겐 미지의 영역이었어. 

그리고 그건 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지. 혹시 mk 백화점 사건이라는 거, 알고 있니?"

mk 백화점 사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만, 워낙 규모가 큰 사건이라 잘 알고 있다. 차원종들이 한창 때의 mk 백화점 안에 출현해서는 거기서 자폭을 하는 바람에, 백화점 건물은 완전히 붕괴되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몰살당했다는... 차원전쟁 때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사건들 중 하나였다지. 

"지옥이 있다면 아마 그런 모습이었을 거야... 흩날리는 먼지. 잔해를 들출 때마다 튀어오르는 핏방울과 살점.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과 차원종의 팔다리. 그 정도야 약과지. 발밑에 물컹한 게 밟혀서 봤더니 그게 사람 내장이었다던가, 천장에서 위층에 고여 있던 피가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그걸 뒤집어썼다던가... 그런 일들도 부지기수였으니까. 산전수전 다 겪었다던 베테랑들도, 그 사건에선 하나같이 치를 떨었어. 베테랑들이 그랬는데, 말단들은 어땠겠어. 기절하고 토하는 건 기본이었고, 그 사건으로 아예 요원 생활을 접어버린 사람들도 많았었지.

다행이 그런 난리통에서도, 생존자는 있었어. 그 중에 한 아기는, 부모님이 목숨을 걸고 잔해를 막아준 덕분에 살 수 있었지. 심하게 망가진 부모님의 시체 밑에서 아기는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고, 그 옆에 있던 폰에는 문자가 띄워져 있었어. 우리는 너를 사랑한단다, 혹시나 이 아이를 발견하신 분은 이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을 거야. 액정이 피에 물들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거든.

다들 그때 울었어. 그 울프팩의 리더였던 서지수...알파퀸조차 수습이 끝나고 혼자 술을 마시면서 목놓아 울었었지. 하지만 그때도, 그 아이는 그 모습을 무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어. 

몰랐으니까. 왜 다들 저렇게 슬퍼하는 걸까. 이유를 모르는데, 슬퍼할 까닭도, 눈물이 나올 일도 없었던 거지. 알파퀸은 그런 아이를 안으면서 말했어. 너도 나중에 네가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긴다면, 지금의 이걸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물론 그 아이는 그게 뭔 뜻인지 몰랐지. 아니, 지키고 싶은 사람은 있긴 있었어.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아이보다 훨씬 강했거든. 그러니까 그 아이가 지켜줄 필요도, 이유도 없었지. 

그러면 아들이나 딸이 있다면 그걸 알 수 있을까? 그 아이는 그 날 이후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지.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어. 그리고 그 아이는 시간이 지나서 어른이 되었고,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 하지만 불행 중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그 아이는 그제서야 깨달은 게 있었지. 감정이란 걸, 그리고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깨닫게 된 감정을, 그 아이는 낼 수가 없었어. 너무 늦어버린 거야. 그런 감정을 내버리기엔, 그 아이는 너무 많이 자라버렸거든..."




 ...말이 길어졌더니, 목이 마르군. 나는 마지막 남은 맥주 한 모금을 마저 들이키며 이야기를 끝냈다. 뭐, 그런 식으로 길기만 하고,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누군가의 인생사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재미없는 인생이었군. 이 누군가의 삶이란 건. 

"뭐, 대충 그렇게 된 거야. 그게 저기 묻힌 사람들의 인생이었고, 또 거기에 관련된 한 사람의 인생도 있고. 이제 궁금증이 풀렸..."

더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까부터 가만히 뭘 하나 싶었는데...대장의 눈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어깨는 살짝 떨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평소의 대장이라면 상상하지 못할 그런 모습이었다. ...하하. 이런 재미없는 인생담에도, 울어주는 사람이 있긴 있었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조금은 나쁜 어른이 되기로 했다. 

"대장...아니, 슬비야."

나는 슬비의 자그마한 몸을 안으며 말했다. 다행이, 슬비는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런 슬비에게, 나는 이런 부족한 어른이나마 예전부터 계속 해주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이 아저씨는 말이지...우리 슬비가, 조금은 솔직한 아이가 되어 줬으면 해. 재미있거나 기쁜 일이 있으면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울고, 때로는 화도 내고 짜증도 내면서...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는, 그런 아이 말이야..."
"...제이 씨..."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잊어버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그건 세상 그 어떤 걸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그런 슬픔이니까. 하지만 이 아저씨는, 우리 슬비가 그 슬픔에 파묻혀서 다른 감정을 잊어버리는 것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슬비는, 아직 어리잖아. 그런 어린 나이에 벌써 감정을 잊어버리면, 나중에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어... 후회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걸 몰랐던 어리석은 사람은, 그 아이 한명으로 이미 충분하니까..."

처음에 슬비를 봤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그 아이는 무표정에, 차갑고 사무적인 말투였지. 막말로, 감정이라곤 하나 없는 기계 같은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그 모습을 보며 결심했다. 이 아이, 그리고 나아가 검은양의 아이들에게, 절대로 내가 겪었던 그런 일들을 두번 다시 겪게 만들지 않을 거라고. 분명 앞으로 그 아이들은 더 큰 일들에 휘말릴 거다. 아마 좌절도, 실패도 많이 겪겠지.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그런 좌절들 때문에 감정을 잃어버리며 싸우는 기계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할 거다. 내 몸이 어떻게 되더라도, 반드시. 그런 좌절을 맛보는 건, 이미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

"......."

슬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내 가슴에 이마를 기대었을 뿐. ...가슴팍이 점점 더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정의 둑이 터졌음에도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건, 이 아이답다고 해야 할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슬비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등을 토닥여 주며 계속 가만히 있었다. 

...그래, 슬비야. 울고 싶을 땐 그렇게 실컷 울면 되는 거야. 눈치 볼 필요 없어. 그리고 네 곁엔, 그 눈물을 받아줄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훌쩍, 죄송해요, 제이 씨."

꽤 시간이 지나서야, 슬비는 울음을 그쳤다. 덕분에 내 가슴은 땀이라도 흘린 것마냥 축축하게 젖었고, 슬비도 코와 눈가가 잔뜩 새빨개져 있었다.

"괜찮아. 이런 것도 보호자가 해야 할 일이니까. 아무튼, 일단 얼굴부터 닦자. 자."

나는 손수건을 꺼내 슬비의 눈가를 닦아 줬다. 딱히 별다른 저항은 없었지만, 그래도 코에 손수건을 대며 흥! 하라고 했을 땐, 솔직히 살짝 무서웠다. 결국엔 풀긴 풀었지만. 

"손수건...빨아서 다시 돌려 드릴게요.
"괜찮아, 이 정도는. 그것보다, 어느 정도 진정도 된 거 같으니...이제 슬슬 돌아갈까?"

나는 일어나서 슬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비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서는, 공원을 나갈 때까지 한 번도 놓지 않았고 결국 정류장 앞까지, 우리는 손을 잡은 채로 내려왔다. 

"이제 됐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갈 테니까... 오늘 하루, 정말 고마웠어요, 제이 씨."

나를 보며, 슬비는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자, 그럼 이제 작전 B로 넘어가야 하는 타이밍인가? 나는 최대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맙기는. 말했잖아. 오늘 하루는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할 거라고. 이 정도야 기본이지. 아, 그보다, 이번엔 이 아저씨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부탁이요? 말씀하세요."
"아, 다른 게 아니라 사실은 학교 오기 전에 유정 씨한테 연락을 받았거든...면담 끝나면 사무실로 와 달라고 말이야. 아무래도 이것저것 물어보려는 거 같은데..."
"예, 알겠어요. 같이 가 드릴게요."

선뜻 대답해 주는 슬비. ...일단 1단계는 성공인 것 같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대답해주니, 내가 미안해지는걸... 하지만 슬비야, 이게 다 너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거, 이해해 줫으면 한다. 아직 오늘의 메인 이벤트는 끝나지 않았거든.




아무튼, 그렇게 해서 땅거미가 내려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해서야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조용하기 짝이 없는 사무실 앞. 

"음...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요?"
"거 이상하네...그럴 리가 없는데...한번 들어가 볼래? 계속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다들 잘 하고 있는 모양이군. 나는 슬비가 먼저 들어가게 하려고 살짝 밑밥을 던졌다.

"이미 다들 퇴근해서 문이 열려 있을 리가...어라?"

예정대로, 손쉽게 열리는 문. 그리고.




 """어서 와, 슬비야!"""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방이 밝아졌고, 눈이 부신 건지 잠시 얼굴을 찡그리던 슬비 앞에 아이들과 유정 씨가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잘 차려진 다과와 음료들도.

"...이건...?"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슬비가 내게 물었다. 

"보시다시피. 축하 파티야. 대장의 성공적인 첫 면담을 기념하는."

전에 유정 씨와 통화했을 때, 만약 이번 면담이 잘 끝나면 뒤풀이 파티라도 해 주는게 어떻겠냐고, 다들 모여서 간단하게 먹고 마시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어 봤었다. 

다른 애들은 면담 끝나고 나서 부모님과 얘기도 하고 칭찬 혹은 꾸중도 듣고, 그래도 '가족'하고 같이 있을 시간이 있었지만, 대장은 한 번도 그러지 못했을 테니까... 진짜 가족의 그것과는 비교하지 못하겠지만, 대장이 외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그래서, 유정 씨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막내와 유리한테도 내 계획을 얘기했고, 그 둘도 좋은 생각이라면서 찬성해 줬다. 동생이야 뭐, 미처 얘기는 못했지만 보니까 유리가 잘 데리고 온 것 같으니 다행이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솔직히 말하면 꽤나 부담이었다. 혹시나 내가 실수해서 면담을 망치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말 그대로 게도 구럭도 다 잃어버리게 되니까. 다행이 선생님께서 똑똑하신 분이라 이것저것 잘 이끌어 주신 덕분에 그런 일은 없었지만. 뭐...예상치 못한 사정으로 예정 시간보다 더 늦어지게 된 건,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아까 말했었지? 가끔은 감정에 솔직해지라고. 그 이유가 바로 이거야."

나는 입을 가린 채 가만히 서 있는 슬비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고,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마음껏 울고, 기쁜 일이 있으면 큰 소리 내서 웃으면 돼. 적어도 여기 있는 나...유정 씨...그리고 다른 애들까지... 여기에 검은양이라는 대장의 또다른 '가족'이 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슬비가 이것 하나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혼자서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리고 좀 더 나와 유정 씨, 그리고 다른 검은양의 애들을 믿어도 된다는 걸.

물론 대장이란 게 얼마나 책임감이 필요한 자리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 슬비 너는 어리다고. 어린애면 때로는 어린애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법이야. 그리고 그 어린애다운 모습을 받아줄 사람들...자랑스러운 대장의 팀, 검은양도 있고. 피가 이어져있다던거 그렇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미 대장을 한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대장. 결국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울고 있었지만, 동시에 웃고 있었던 것이다. 울다가 웃는다는게 이런 거였나. 저렇게까지 환하게 웃는 대장의 얼굴은, 처음 봤다. 대장은, 그렇게 기쁘게 우는 얼굴로,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우리 모두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다들...정말...정말 고마워..."

...다행이다. 저런 얼굴을 짓게 해 줄 수 있게 해 줘서. 적어도 이게 헛된 짓은 아니었구나. 

뭐, 말 안해도 알겠지. 그 이후로는,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밤샐 기세로 분위기가 올라가는 바람에, 나중에 해산시킬 때 고생 좀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놀랬던 건...슬비가 원래 저렇게 밝은 애였던가 했던 거다. 원래 사람이란 게 억눌렀던 게 터지면 걷잡을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재잘재잘 떠들고, 재밌는 얘기에 소리내서 웃고, 동생의 딴지에 표정도 찡그리는 그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좀 안타깝기도 했다. 저렇게 밝은 아이가 계속 그렇게 살아왔다니... 

그래, 슬비야. 넌 그런 얼굴이 잘 어울려. 물론 아까 학교에서도 말했지만, 앞으로 넌 더 큰 일도 많이 겪을 거야. 팀의 대장으로서도,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도. 아마 지금보다 훨씬 큰 좌절도 겪을 테고, 최악의 경우에는 주변의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 될지도 모르지. 전쟁이란 건, 잃고 싶지 않았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말이다, 그런 일들이 있더라도 지금의 그 모습만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마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나도 네가, 그리고 검은양의 모든 아이들이 그럴 수 있게 최선을 다하마. 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 어떻게 되더라도. 

그때는 내가 몰랐던, 누님이 말했던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사람들은... 바로 너희들과, 그리고 이 신서울의 사람들이니까.   







안녕하세요. 꽤나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요새 이것저것 바빠서 글을 잘 못썼네요. 빨리 일이 잘 끝나야 할텐데 말이죠.
날씨가 더워지고 있습니다. 곧 여름이 온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그래도 다들 건강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아마 다음 편이 슬비편의 에필로그가 될 거 같습니다. 아마 이 편이 끝나면 단편을 몇 개 쓴 후에 다시 본편을 쓸까 하네요. 단편에 대한 설문조사도 조만간 하도록 하겟습니다. 이제 본편에선 두 명이 남은 거 같은데...과연 마지막은 누가 장식을 할까요. 아, 참고로 저 위에 나오는 사건 둘은, 그냥 제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일 뿐 원래 스토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밝힙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2024-10-24 22:27:4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