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Eiranel 2015-05-19 0

만약, 세상이 멸망하게 된다면….

 

우리가, 더 나아가 인간이 새겨놓은 흔적은 어떻게 되는 걸까?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실물로 확인한 나는 문득 그런 의문을 품었다.

 

처음 차원종을 조우했을 때,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차원종을 조우했을 때는 소중한 친구들을 잃을 뻔했다. 아버지를 억울하게 잃었다는 생각에 줄곧 친구한테 엉뚱한 화풀이를 하면서도,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가려는 차원종이 원망스러웠다.

 

게다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친구를 사지로 몰아넣은 나 자신조차,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 아이들과 다르지만 같은 위치에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니온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캐롤 씨가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조금이라도 그 바보들의 힘이 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것. 그 바보들을 향해 내가 내딛을 수 있는 첫 걸음.

 

그렇게, 드디어 제대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너무하잖아….”

 

막상 강남에 도착한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특경대 측에서 마련된 차를 타고 오면서도 느꼈지만, 소란의 중심지는 세상이 멸망한 뒤를 연상시킬 정도로 무서웠다.

 

언젠가 흐릿하게 기억하는 고층 빌딩은 마치 구부러진 빨대 마냥 휘어져 있었고, 도로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이 무너진 빌딩과 콘크리트 잔해로 뒤덮인 강남은, 마치 인류의 멸망을 단편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겨우 유리가 학교를 떠나고 며칠 만에 일어난 참상이야?”

 

사망자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단순히 교과서로 보던 것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그때 백화점에서 차원종이 나타났을 때처럼, 이미 사건이 전부 끝났는데도 근본적인 공포가 전신을 엄습해왔다.

 

‘하아, 진정하자. 겁먹지 말고, 진정하는 거야, 우정미.’

 

과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전쟁은 또 얼마나 처참했을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콘크리트 잔해 너머에 유리가 있는 것 또한 변치 않는 사실이다.

 

“정말, 다 끝난 걸까…?”

 

우습게도, 싸늘하고 참담한 거리와 달리 하늘은 무척이나 맑고, 참새들이 짹짹이면서 날아다닐 정도로 활기찼다.

 

그 평화로운 광경에 애써 미소를 지은 나는 곧장 경비를 서는 특경대의 안내를 받아 재해복구지역의 본부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처음엔 나를 보며 관계자는 출입금지라고 제지하던 특경대원이었지만, 유니온에서 발급한 민간인 지원자격증을 보여주자 그는 화색을 표하며 나를 정중히 안내해주었다.

 

“유리네는 어디 있지…?”

 

재해복구지역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찾은 건 당연하게도 유리가 속한 검은양 팀이었다. 이런 폐허더미에서 그들이 차원종과 싸웠고, 무사하다는 사실은 이미 캐롤 씨를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애초에 전쟁터랑 다를 바가 없는 곳에 친구들이 있는데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래, 오히려 걱정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야.

 

유리네를 찾고자 나는 타인에게 보였으면 굉장히 창피할 정도로 부산을 떨며 본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다행히 본부는 그리 넓지 않았고, 금방 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의 무사한 모습을 보자 내심 안도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나는 곧장 그들한테 달려갔고, 한창 즐겁게 떠들고 있던 세 사람은 나를 발견하고는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우정미?”

“무슨 소리야 이세하. 정미가 왜 여기에 있… 네?”

“어? 진짜네! 정미정미가 이곳엔 어떻게?”

 

예상치 못한 나의 등장에 놀란 표정을 짓는 세 사람. 팀원답게 붕어빵같은 반응에 웃음이 나올 법도 했지만, 나는 웃음을 꾹 눌러 안에 담고는 말없이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아직 사과할 제이 오… 아저씨와 미스틸 테인이란 꼬마는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 또래인 이 셋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건지 주변에 인스턴트 식품으로 보이는 포장지가 널려 있었다.

 

세 사람은 요상한 차원종의 심장을 찾으러 올 때보단 밝은 얼굴이었지만, 그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딱 보아도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에 머리에 붕대까지 감고 있는 이세하는 부상자인 주제에 손에서 게임기를 놓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세하는 정말 평소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모양새라 조금 안심했다. 혹시라도 어떻게 되었으면….

 

‘내,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람.’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내고는 이어서 이슬비의 행색을 살폈다. 상처는 세하보다 덜했지만 다리랑 팔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어 안쓰러움이 고스란히 엿보였고, 우리보다 어려 보이는 앳된 외모라 유독 눈에 띄었다.

 

적어도, 평범한 미성년자가 취하고 있을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유리는….

 

“정미정미!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서유리, 너….”

 

평소부터 산발이지만 윤기가 넘쳤던 머리카락은 털어낸 것처럼 보여도 온갖 먼지가 시멘트 조각으로 보이는 하얀 가루가 군데군데 묻어 본래 색을 잃고 있었다. 얼굴엔 슬비처럼 또래 소녀답지 않은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고, 같은 여자로서 분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예쁜 얼굴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나머지 두 사람의 상처도 분명 가볍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내 눈엔 유리의 상처가 유독 심해 보였다. 아니, 실제로 유리의 상처는 그 두 사람보다 심했다.

 

“헤헤, 정미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혹시 또 캐롤 언니의 부탁이라도 받은 거야?”

 

헤실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적이는 유리의 모습은 퍽이나 해맑아 보였다. 여태까지 내가 걱정한 게 허탈할 정도로, 그녀는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정말, 누구는 걱정되어서 급하게 달려왔는데….

“서유리 이 바보야.”

 

하지만 그것과 화가 나는 건 별개다.

 

“흐엑? 갑자기 매도부터 하기야?”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났는데 제대로 응급처치도 안 하고 뭐하는 거야.”

“어? 그, 그게 모두 바쁘다보니….”

“바쁘면 치료를 미뤄도 되는 거야? 최전선에서 싸운 건 너희들이잖아.”

 

그들의 대우에 나도 모르게 유리의 팔에 난 상처를 매만지며 아랫입술을 깨물자 유리는 곧장 제이 씨가 의료반을 찾으러 갔다며 횡설수설 둘러대기 시작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방책인 듯하지만, 나는 무시하며 두 손으로 유리의 얼굴을 꽉 붙들었다.

 

“읍!? 저, 정미야?”

“가만히 있어.”

 

유리의 얼굴을 이리저리 틀어보며 상처의 깊이와 부위를 얼추 파악하고는 가방에 따로 챙겨둔 약품과 붕대를 꺼내들었다.

 

“저기, 혹시 그거 설마…?”

“됐으니까 똑바로 있어봐!”

 

내 차가운 답변에 우물쭈물거리며 대놓고 다른 두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유리였지만, 그 둘은 쓴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지켜보기만 할 뿐, 별다른 개입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은근한 배려에 내심 감사하며 나는 유리를 멋대로 간이의자에 앉히곤 봉지 안에 따로 밀봉해두었던 집게로 소독약을 묻힌 솜털을 집었다.

 

“자, 잠깐! 정미야, 우리 대화로 해결하자!”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는데 왜 대화가 필요해?”

“지, 진정하자 정미정미! 나, 소독약은 방금 전에도 잔뜩 발랐다구!”

“무슨 소리니? 다시 새 약을 바를 거니까 소독은 필수야.”

 

차원종 앞에서는 겁나는 척도 하지 않던 주제에 소독약을 겁내는 유리의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심각한 분위기를 고려해 애써 참으며 힘으로 밀어붙였다.

 

“자, 잠까으으아아안! 꺄읏! 꺄항!”

“좀 가만히 있어봐! 소독약이 이상한 데 묻잖아!”

 

이 계집은 뭐 이리 엄살을 떤담!

 

“이세하, 고개 돌리고 눈 감아.”

“그, 그게 더 상상돼서 위험할 거 같은데….”

“뭐라고 했니?”

“며, 명을 받듭니다.”

 

외야에서 두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본의 아닌 힘겨루기 때문에 미처 듣지 못했다. 무엇보다, 서유리 이 바보, 생각보다 훨씬 끈질겨!

 

“자, 잠깐! 방금 소독약이 가슴에 떨어졌… 꺄아아앗!?”

“그러니까 얌전히 좀 있으라니깐!”

 

어떻게든 아등바등 힘쓰며 소독약을 바르는 나였지만, 힘이 나보다 무식하게 센 유리를 제압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과정이 험난해서 잠시 몸가짐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소독약을 전부 바를 수 있었다.

 

“후으으, 더럽혀졌어.”

“얘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웅얼거리는 서유리를 타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유니온에서 지급한다는 클로저 전용 약품이라면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나을 수 있다고 캐롤 씨가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난 여전히 이기적인 애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여튼, 여전히 정신없구나,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 그런가?”

 

에헤헤, 하고 어린애처럼 실실 웃는 유리를 보며 나 역시 옅게 웃었다.

 

“아참! 소독약 때문에 까먹을 뻔했네. 정미정미가 여기엔 어쩐 일이야?”

“자원봉사야. 나 말고도 다른 민간인도 많이 와 있을걸?”

 

게다가, 이미 반쯤 민간인이 아니게 되었고. 아르바이트나 마찬가지지만, 캐롤 씨의 조수이자 대행으로서 오게 되었다고 덧붙이자 유리가 반색하며 나를 껴안았다.

 

“자, 잠ㄲ…!”

“꺄아아! 이제 우리 정미정미랑 같이 일할 수 있는 거구나! 나 완전 기뻐!”

 

왠지 예전보다 더욱 커진 듯한 가슴에 압박당하는 게 고통스러우면서도, 나는 유리를 떨쳐내지 못했다. 조금 답답하지만, 그녀와 다시 관계를 회복했다는 게, 드디어 실감이 나서 한편으론 행복했다.

 

무엇보다, 나를 껴안으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순수한 유리의 미소를 보면, 저항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다.

 

“저기, 유리야? 정미가 꽤 괴로워 보이는데.”

“어? 으아아앗! 미, 미안! 기쁜 나머지 너무 꽉 껴안아버렸어!”

“괘, 괜찮아….”

 

그보다 네 가슴이 전보다 더 커진 게 조금 신경 쓰이는데….

 

혹시 클로저가 된다면서 빡센 훈련을 거친 게 원인일까? 아니면 그녀의 위상력이 가슴을 크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라도 갖추고 있는 걸까?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나를 질식시킬 뻔한 유리의 가슴에 대해 심각한 고찰을 하고 있자니 게임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세하가 말을 걸어왔다.

 

“야 서유리, 네 가슴은 흉기나 마찬가지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걸.”

“무, 뭣!? 이세하 너 지금 말 다했어!?”

“방금 그 말은 나도 여성으로서 참견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네.”

 

조금 성희롱이 담겨 있지만 딱히 틀린 발언은 아니라 침묵하는 나와 달리 두 사람은 꽤 격하게 반응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이슬비가….

 

“어, 잠깐! 이슬비 너 분명 다른 걸로 화난 거지? 그치!?”

“아니? 나는 겨우 가슴이 작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쪼잔한 성격이 아니니까.”

“자기 입으로 다 불고 있잖아!?”

“그런 의미에서 이세하, 검은양 팀의 리더로서 네게 유언을 남길 시간 정도는 주겠어.”

“자, 잠깐만! 간신히 40시간 넘게 날아간 게임 데이터를 다시 복구했는데!”

 

이세하의 게임기를 빼앗으며 당당히 협박하는 이슬비를 보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쟤들은 항상 저래?”

“응! 되게 사이좋지?”

“… 응, 그러네.”

 

조금 부러울 정도로. 뒷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뒷짐을 지고는 나란히 옆에 선 유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웃을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너.

 

역시, 너는 이렇게 웃는 게 제일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언제쯤 돼서야 나도 너희처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걸까, 하고 나는 여전히 맹추격전을 벌이는 두 사람을 같이 구경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늘은, 환하게 웃고 있는 검은양처럼 여전히 맑게 개여 있었다.




아는 형이 정미랑 유리 써달라고 해서 귀찮음 감수하고 조금씩 끄적이다 그냥 오늘 완성.

옛날엔 백합도 잘만 썼는데 이젠 안 되는듯.

2024-10-24 22:27:1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