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이슬비편: 신강고, 입성-

Maintain 2015-05-12 6

우리 집에서 신강고등학교까지는 제법 거리가 된다. 사실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가는 방법이라면 역시 란이의 헥사부사를 이용하는 거지만...오늘은 그걸 타면 안 될 거 같다. 대장 앞에서 헬쓱하게 질린 데다가 옷매무새는 다 흐트러진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테니까.

"야~안녕하세요, 아저씨!"

버스를 타기 위해 정거장으로 가는 길. 재해복구 구역을 지나가다가, 항상 보는 낮익은 얼굴이 내게 인사한다.

"여. 어제는 잘 돌아갔나?"
"덕분에요.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에요?"
"좀 귀찮은 일을 맡아버려서 말이야. 그 일을 하러 신강고로 가고 있는 중이지."
"그래요? 왜요, 어디 면담이라도 가시는 거에요? 안 입던 정장까지 입고."
"아, 그게 말이야..."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이한테야 말해줘도 되겠지.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지만, 나는 대충 사정을 은이에게 설명했다.

"흥...그래서 그렇게 쫙 빼 입고 가시는 거였군요?"
"음...잘 안 어울리나? 역시 그냥 평상시대로 입고 가는 게 좋았으려나..."
"아, 아니요! 잘 어울려요. 그 정도면 분명 첫인상은 좋게 먹힐 거에요. 근데...손에 그건 뭐에요?"

은이가 내 손에 들려있는 것-주스 세트를 가리킨다. 이거? 어찌됐든 대장을 가르쳐주시는 담임선생님이시잖아. 항상 고생하시는 분에게 이 정도 성의는 보여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말이야. 원래는 더 크게 홍삼세트나 하나 사다 드릴까 했는데, 그건 내 자금 사정 때문에 말이지.

"에이, 안 돼요! 요즘 그런 거 얼마나 엄격해졌는데."
"그래? 나 때는 이런 거 흔했던 걸로 아는데."
"옛날이야 그랬겠죠. 하지만 요즘에 공무원 및 교사에 관한 법이 강화돼서, 아무리 작은 선물만 받아도 그 교사에게 이것저것 위에서 질문 들어온다고요. 잘못해서 촌지라도 받다 들키면 최소 한 달 무급에 최대 면직까지 가능하다던데요? 그 준 사람한테도 경찰에서 이것저것 조사 들어가고. 저야 특경대 쪽이니까 그쪽 관련은 잘 모르지만, 요즘 그런 식으로 경찰서 정모하는 사람 많다고 다른 부서 동료한테 들었었어요."
"그렇군..."

헛돈 쓴 건가. 조금 아깝긴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던가 하지는 않다. 아무리 작은 거라도, 촌지나 뇌물은 근절해야 할 것들 중 하나니까. 이런 법을 유니온의 윗머리들에게도 적용해야 할 텐데. 정작 윗머리 녀석들은 잘만 빠져나가고 있으니...씁쓸하군.

"그럼 이 주스는 너희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군. 잘 마시라고."
"땡큐, 아저씨! 잘 마실게요. 그나저나...이제 슬슬 가 보셔야 하지 않아요? 버스 떠나려고 그러는데."
"뭣...!"

뒤를 돌아보니, 신강고로 가는 버스가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서둘러 뛰어가서 잡으려 했지만, 하필 중요한 순간에 지병인 무릎관절염이 도져서...저 정도 거리면 사이킥 무브로도 따라잡기 무리다. 

으, 안 돼. 땅에 손을 짚은 채로 좌절하고 있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헤이...맨...당신만을 위한...쾌적하고 편안한... 뒷좌석..."

그 특유의 무표정과 함께 엄지로 헥사부사를 가리키는 란이 녀석. 크...어쩔 수 없나...

"안전운전...부탁한다. 대충 사정은 들었지..."
"오케이, 맨...최대한...노력해 볼게요..."




"으, 우웨엑..."

란이 녀석 덕분에 그래도 여유롭게 신강고에 올 수는 있었지만, 역시 이놈의 승차감은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골목길로 들어가서(이하생략) ...미안합니다, 집주인 분. 하지만 괜찮을 거에요. 몸에 좋은 건 다 넣고 갈아 만든 선식이라, 아마 비둘기들도 잘 먹을 겁니다.

다시 한번 더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골목길을 나왔다. 골목길을 나와서 조금 더 걷자, 신강고가 눈앞에 보인다. 

저번 차원종 사태 때 이후로 복구작업을 이 곳을 우선으로 재개한 덕분에, 체육관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다. 여기저기 파여 있던 운동장도 반듯하게 메워졌고, 보아하니 학교 시설들도 잘 복구가 된 듯 하다. 등교하는 학생들도, 조금 피곤해 보이지만 아무 불안감이 없이 밝은 표정으로 삼삼오오 무리지어 들어가고 있다. 나도 정상적인 삶을 살았더라면 저런 학창 시절을 겪을 수 있었을까. 살짝 씁쓸한 마음을 안고,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 이거..."

역시나라고나 해야 할까. 아직 교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물론 교복 입은 여자애들이 날 바라봐 주는 거야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게 사람 지나가는 거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수군거리면서까지 바라보는 건 실례 아니니. 요즘 들어 익숙해진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아직 그러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거 빨리 들어가야겠어. 교문 앞 가건물에 계시는 나이든 수위 할아버지께 이곳에 온 목적을 설명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 저건..."

멀리서 걸어가고 있어서 전체적인 모습은 잘 보이진 않지만, 항상 피곤에 쩔은, 크림을 발라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로 진한 저 다크서클만은 아주 잘 보이는군. 그리고 저 다크서클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지. 

"어이, 석봉이. 이거 오랜만이야."

아는 얼굴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이쪽에서 먼저 와서 반갑게 인사했다.

"...어...누구...시죠...?"

...이거 충격인데. 그새 내가 누군지도 까먹어 버린 건가. 뭐 요즘 한동안 못봐서 그럴 수도 있기야 하지만, 이건 좀 상처받는데?

"이봐, 정신차려 석봉이. 자, 이 아저씨의 특제 포션을 먹고, 제정신을 차리라고."

나는 시중의 앵간한 각성제의 10배 효능을 자랑하는 수제 포션을 석봉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고 나서야, 석봉이는 내가 누군지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아저씨...였어요...? ...전혀 못 알아보겠어요..."

놀란 표정을 짓는 석봉이. 그 흐리멍덩한 눈이 미세하게나마 커지는 걸 보니 좀 신기했다.

"하하, 그래? 그거 칭찬으로 받아들여주마. 그럼 그 기념으로 그 특제 포션을 마셔주지 않겠니."
"에이, 싫어요...헤헤, 역시 아저씨는 아저씨네요."
"그럼. 사람 성격이 어디 가겠어. 십 년이 지나도 안 변하는 게 사람 성격인데. 아무튼, 오랜만에 다시 보니 반갑구나."
"저도요...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조금 일이 생겨서 말이야. 대장...슬비를 찾아왔어."
"에? 스, 스, 슬비를요...?"

이름만 입에 올렸을 뿐인데도, 석봉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아, 풋풋하구나, 짝사랑에 빠진 소년이란.

"응. 그래서 말인데, 너 혹시 슬비가 몇 반인지 아니?"
"어...예..."
"그럼 잘 됐네. 혹시 거기까지 안내해 줄 수 있을까?"
"예? 제, 제가요...? 으...창피한데..."
"창피해 할 거 없어. 싸나이라면 그냥 당당하게 가슴 펴고 슬비를 부르라고. 그게 연애의 첫 단계란다."
"아저씨는 연애 경험 없으시다면서요...못 믿겠는데..."
"...거 녀석, 사람이 충고하는데 정곡은. 아무튼, 안내해 줄 수 있지?"
"아, 예...알았어요..."

그렇게, 나는 석봉이의 안내를 받아 신강고 안으로 입성했다. 




신강고 안쪽도, 이제는 깔끔하게 대부분이 정리가 된 상태였다. 어지럽게 책상이 널부러져 있던 교실들은 이제 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고, 교실 여기저기에 있었던 유니온의 기계들도 이제는 다 철수한 상태였다. 다만 아직 구석구석 눈에 힘든 부분에 있는 깨진 타일과 벽에 가 있는 커다란 금 등은 남아 있어서,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게 한다.  

슬비의 교실은 2층, 그러니까 2학년 교실의 E반이었다. 유리와 동생이 아마 C반이었나 그랬지. 가는 김에 한 번 들렸다 가 볼까? 아마 애들도 지금쯤이면 등교했을 테니. 

"어, 아저씨잖아? 안녕하세요, 아저씨!"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유리가 날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동생은 뭐...교실 안쪽을 보니 책상에 앉아 게임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말을 걸기도 힘들겠군.

"여, 좋은 아침. 아침에도 여전히 활기차구나 너는."
"하루의 시작이잖아요! 하루의 시작을, 우울하게 보낼 순 없잖아요. 그건 그렇고, 오늘이 그날이네요."
"음. 다짐은 했지만, 그래도 역시 긴장은 되는구나."
"걱정 마시라니까요! 아저씨는 충분히 잘 해내실 수 있을 거에요. 응원해 드릴게요!"
"하하, 고맙구나. 아, 그건 그렇고..."

어젯밤에 자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한 게 있었다. 생각한 대로 잘 되려면 애들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거에 대해서 유리에게 말하자, 유리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거 재밌겠는데요? 좋아요! 도와드릴게요. 세하도 억지로라도 끌고 올게요."
"그래, 부탁하마. 그럼, 난 슬슬 가 보마. 공부 열심히 하고, 졸지 마라. 수업 시간에 자는 모습 눈에 훤하다."
"아, 안 졸아요! 공부 못한다고 맨날 조는 줄만 아시나..."

역시, 약간의 도발에 순진하게 넘어온다. 놀리는 맛이 있는 녀석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알았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화이팅!"

유리의 응원을 뒤로 하며, 나는 슬비가 있는 교실로 향했다. 얼핏 유리가 친구들과 함께 내 얘기를 하는 게 들리는 거 같은데...궁금하지만, 일단 슬비가 있는 데로 가자.

"자, 석봉이. 이제 네 차례야, 어서 슬비를 부르라고."

슬비네 교실 앞. 석봉이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에, 제, 제가요...? 저, 저, 저, 전 자신 없어요..."
"이 녀석, 말했잖아. 여자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서 필요한 건 베짱과 용기라고."
"아저씨가 그런 말 해도 신용이 가야죠...아무튼 알았어요...한 번 가 볼게요..."

그렇게 석봉이가 교실로 들어갔고,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벽에 한 몇분은 기대어 서 있자니, 석봉이가 잘 익은 토마토같은 얼굴이 되어서 밖으로 나왔다. 

"저, 저기...슬비가 곧 나올 거에요...노트 정리만 하나 끝나고 나온다고 하니까...그, 그럼 전...가 볼게요..."
"그래, 수고했어 석봉이. 자, 받아라. 마시면 불끈불끈해질 이 아저씨의"
"됐다니까요...마시면 왠지 이상해질 거 같아요...가뜩이나 창피해 죽겠는데...그럼, 나중에 뵈요..."

거 녀석, 엄청 긴장했나 보군. 몸에서 김이라도 나는 거 같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누군가 내 등을 건드린다.

"...어쩐 일이세요?"

응? 뭐지? 낮익은 목소리는 들리는데,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걸. 귀신에라도 홀린 건가?

"...밑이에요, 밑."

다시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밑에서부터 들려온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대장이 나를 살짝 노려보고 있었다.

"하하,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구나 대장. 좋은 아침이야."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데, 왜 아저씨가 여기 계신 거죠?"

나를 바라보는 대장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누가 올지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라고, 유정 씨에게 신신당부했거든.

"오늘 면담 때문에 누가 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그게 아저씨였어요? 세상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대장은 날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신용이 안 가는 사람이었나. 새삼 반성하게 될 정도의 그런 표정이었다.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인걸, 대장.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대장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으며, 나는 단언했다.

"오늘 하루만은, 대장의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해 주겠어. 절대 대장에게 폐를 끼치진 않을 테니까, 믿어 달라고. 알겠지?"
"자신만만하시네요. 그럼 한 번 믿어 볼게요."
"고마워 대장. 한 번 대장을 위해 최선을 다 해 보도록 하지."

그렇게, 대장의 일일 보호자로서의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
 




예, 안녕하세요. 오늘도 돌아왔습니다. 
날씨가 영 좋지 못하네요. 아까 전만 해도 날씨가 맑더니만, 지금은 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런 날엔 감기 걸리기 딱 좋은 그런 날씨죠. 다들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예, 드디어 우리의 제저씨가 신강고에 입성했군요. 다음 편에는 슬비의 시점에서 바라본 제저씨의 활약(?)이 있을 예정입니다. 요즘 들어 글 속도가 부쩍 느려지긴 했지만,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다음 편을 올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2024-10-24 22:26:5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