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상냥함의 이유
손웰 2014-12-17 4
‘대단하네요. 어린 나이에 벌써 이정도까지-’
‘역시 클로저 요원의 아드님이라 실력이 남다르네요’
[스르륵-]
공중으로 들어 올려진 물건들은 원래 있던 자리에 맞춰 천천히 내려앉았다.
‘세하야, 이번엔 저기 있는 빨간컵과 파란컵을 반대쪽으로 옮겨볼래?’
흰 가운을 입은 어른 한명이 말했다.
다른 어른들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네모난 무언가를 들고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동물원에 놀러 온 아이들처럼 신기한 동물을 보듯이...
‘...세하야?’
아이는 겁이 났다.
“......엄마는요?”
‘엄마는 나쁜 괴물들을 무찌르러 가셨단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오실거야.’
‘엄마 오실 때까지 도와주지 않을래? 저것 좀 옮겨보렴’
아이에게 지시했던 어른이 다시 한 번 컵을 가리켰다.
아이는 앞에 놓인 컵들과 어른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
‘세하야?’
“......엄마 올 때까지 안 할거에요.”
부담스러웠다.
실력이 있다, 기대주다, 대단하다 등등...
솔직히 그런 건 아무상관 없었다.
처음엔 사람들의 칭찬을 듬뿍 받아서 너무 좋았다.
특히 엄마가 잘한다며 쓰다듬어 줬을 땐 정말 기뻤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곧 잘 해냈다.
그런데
‘세하야, 그러지 말고 그냥 재밌는 놀이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엄마도 분명 좋아하실 거야. 안 그러니? 세하야-’
“......”
시간이 지날수록 어른들이 시키는 일도 점점 어려워졌고,
엄마는 이 이상한 건물 안에 데려다놓고 멀리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더구나 집에선 일이 많다며 가족이 함께 모여 밥먹는 시간 조차
점점 줄어들었다.
“......싫어요.”
엄마는...
‘세하야, 왜그러니... ...를....’
‘....한 번만... .....보렴.’
엄마는 나쁜 괴물들을 무찌른다고 하셨는데,
괴물을 무찌르고 나면 얼른 올 거라고 했는데,
‘.......세하야.’
싫었다. 전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면 엄마가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엄마는 점점 보이지 않고, 봐주지도 않고
자신을 보는 건 같은 옷을 입은 수많은 어른들 뿐.
‘......세하...’
싫었다. 정말 싫었다.
이런 데에서 혼자 두고 가버린 엄마가 싫었고,
신기한 동물 보듯 쳐다보는 시선들도 싫었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싫었고,
평범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싫었다.
“......싫어요. 그만할래요.”
전부 싫었다.
“......그만하고 싶어요.”
‘세하야.’
“......그만...”
‘-야’
“......”
[쾅-]
“야! 이세하!! 당장 안 일어나!!!”
“으,응...?”
아침 햇살이 온기를 띄우는 오전 8시.
평범한 학생이라면 아침조회를 하고 있었을 시간에
세 명의 학생들이 좁은 방안에 모여 있었다.
“회의 시간에 누가 자도 된다고 했어!?”
“......아”
닦달같이 화내는 슬비 앞에 잠시 주위를 둘러본 세하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교실... 이 아니라 여기는 검은 양 팀의 임시 본부.
흡사 동아리방을 연성케 하는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조금 안심이 됐다.
적어도 선생님 앞에 혼나진 않아서 다행-
“너 또 밤새 게임 하다 잔거 아냐? 게임 좀 줄이라니까!”
다행일 리가 없지.
세하는 졸린 얼굴로 눈을 비비며 말했다.
“......좀 봐주라, 어제 겨우 신기록 세우고 잤는데.”
“어휴, 저 게임중독자 같으니”
“게임중독자 같은 게 아니라 게임중독 맞아. 그치? 세하야.”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는 슬비 옆에 유리가 활기찬 목소리로 정정해주었다.
“...... 뭐, 그건-”
“쉬는 시간만 되면 게임기만 들여다보던데 뭘~”
그건 반박할 수 없지만, 게임중독이라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게임 하는 건 맞긴 하지만 중독이라...
뭐 별로 상관없지 않나-
세하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끄기로 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기엔 현실이 부정하고 있고, 귀찮기도 하고.
“아무튼, 세하 너는 게임 좀 줄이고, 유리는 아주 잘하고 있어.”
“히힛 고마워~ 아, 그치만 세하도 요즘엔 게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던데-”
슬비의 칭찬에 머쓱한 유리는 외면당한 세하를 챙겨주듯 말했다.
“노력하는게 아니라 노력하는‘척’ 하는 거겟지. 에휴, 유리의 반만 닮아도 좋을 텐데.”
...슬비가 유리의 반만 닮으면 차암 좋을 텐데.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킨 채, 세하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냈다.
슬슬 수업 시작할 시간인데.
“그래서, 회의 내용은 뭐였는데? 빨리 안 끝내면 전부 늦을걸.”
“네가 자느라 못 들은 거잖아.”
슬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에 유리가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유정 언니가 말 한 대로, 효율적인 팀 구성 방안을 생각해 보자는 거!”
“효율적인...?”
“우리 셋 다 싸우는 기술이나 방식이 다르니까, 데미지를 좀 더 효과적으로 내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보자는 것이 이번 회의의 주제였는데 네가 못 들은 거지.”
슬비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한 세하를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내려다볼 것 까진 없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음 회의 시간 때까지 각자 생각 해오는 거 잊지 말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슬비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특히 이세하. 아무 생각 없이 오면 죽을 줄 알아. 가자 유리야.”
“어, 으응! 이따 봐 세하야-”
둘 사이에 당황하던 유리는 슬비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게 된 세하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어물쩍 일어섰다.
기분 탓인가, 요즘 들어 부쩍 슬비랑 마찰이 잦은거 같다.
아마 기분 탓이겠지.
슬비는 워낙 완벽주의자였으니까.
엄마가 시켜서 억지로 검은 양 팀에 합류하게 된 세하는
당연하겠지만, 진심으로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게임에 살고 게임에 죽고. 한시도 게임기를 놓는 일이 없었는데
슬비는 달랐다.
첫인상은 매사에 진지한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싸울 때나, 회의를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열심이었고
이제껏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정도로 완벽했다. 슬비는.
***
“싫다고 했잖아요!”
‘세하야......’
“안 가요! 안 갈 거라구요!!”
평범한 가정집 불이 켜진 거실.
오랜만에 모두 모인 가족들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
어린 세하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2층 자기 방으로 뛰어 올라가버렸다.
‘아직 어린아이잖수, 이해해 줘야지.’
‘그치만...... 본부에선 벌써 ......’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세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게임기를 켰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게임만 하고 싶었다.
게임을 하는 동안엔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게임에 집중하면 할수록 현실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렇게
점점 현실과 멀어져 갔다.
***
“세하야-”
“......”
“세하야... 이세하~ ...일어나~ 얼른~”
“...으.음..?”
누군가가 세하의 어깨를 흔들며 일어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으음..... 헉,”
천천히 고개를 든 세하는 주위를 둘러보다 금세 눈이 커졌다.
반 아이들의 시선 모두가 일제히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까지도.
설마, 벌써 점심시간이 끝난 건가?
잠시 눈 좀 붙인 다는 게 그만 잠들어 버렸나 보다.
“아...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한 후 책상 속 교과서를 꺼내려는데, 옆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게 아니야 세하야...”
“?”
옆을 보니 유리가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러고보니 유리가 왜 옆에 있지? 뒷자리가 아닐 텐데...
“유정 언니한테 연락이 왔어. 차원종이 나타나서 지금 당장 와달라고......”
“......뭐?”
반 아이들의 시선이 유리에게서, 다시 내게로 향했다.
아 그래서 다들 그렇게 보고 있던 건가.
나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내가 잠들어 있어서... 그래서 유리가 깨워준,
아니 잠깐, 뭔가 이상한데
“정식 클로저 요원들은 뭘 하고? 굳이 우릴 부르는 이유가 뭔데?”
“아하하 그게, 차원종이 나타난 장소가 우리 학교 근처고, 본부에선 지원을 안 해준다고...”
“......”
정말? 진짜로?
세하는 말문이 막혔다.
유니온 본부에서 검은 양 팀을 안 좋게 보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솔직히 본부가 뭘 어떻게 보든 별로 상관없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사람들의 목숨은?
그들조차 생각지 않고 멋대로 결정해버린 다는 건가
더러웠다.
어른들의 횡포가 더럽고 화가 났다.
“......가자.”
“괜찮겠어...?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얼른 끝내고 오자.”
세하는 자신의 무기가 든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이 더러운 기분을 빨리 떨쳐내고 싶었다.
차원종놈들을 처리하고 나서도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끝내고 오면서 신작 게임이나 살까, 그럼 좀 풀릴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교실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담임이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조심히 다녀와라. 다치지 말고.”
“무사히 다녀올게요~!”
“......금방 올게요.”
유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하며 밖으로 나갔고
세하는 마지못해 간다는 듯, 뒤를 보며 작게 말했다.
작게 말해도 교실 전체가 조용했기에 충분히 건너편 까지 들릴 정도였다.
수많은 시선들.
몇몇 아이들이 부럽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수업을 안 듣고 나갈 수 있다는 점이 부러운 거겠지.
정작 부러움의 대상인 세하 자신은 그 반대였다.
어릴 적 느꼈던 시선들과 지금의 것이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싫다기보단, 역겨웠다.
예나 지금이나 사라지지 않는 건 변함없는 걸까.
***
[ 키에에에-!! ]
콰직-
[ 키엑-- ]
이걸로 끝인가-
마지막 남은 차원종 한 마리를 힘있게 내려친 세하는 평소처럼 게임기를 꺼냈다.
“후... 모두 수고했어.”
“수고했어 애들아~”
건너편에서 슬비와 유리가 걸어 왔다.
“넌 이런 상황에서도 게임이니?”
“이미 상황 종료잖아. 신경 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선은 게임에 고정한 채, 대답만 들려왔다.
평소와 같은 세하의 모습이건만, 어쩐지 오늘은 조금 가라앉아 보였다.
기분 탓 일까
“후아아~ 이제 돌아갈까? 이미 수업은 끝났겠지만, 다음수업 시간까진 맞춰서 갈 수 있을 거 같아~”
“난 잠시 상황을 보고하고... ”
유정에게 연락 하려던 슬비는 잠시 멈추고 세하를 바라봤다.
웬일인지 게임기를 끄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금 의아했다. 평소라면 죽치고 게임하느라 다른건 안중에도 없을텐데
기분 탓이 아닌가?
“세하 넌...”
“난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먼저 가있어. 좀 늦게 갈게.”
“응? 어디가려고? 세하야~?”
세하는 유리의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저만치 걸어가 버렸다.
슬비는 자기 할 말만 한 채 학교 쪽이 아닌, 다른 길로 걸어가는 세하를 보며 소리쳤다.
“너 설마 게임방 가서 게임한다거나, 새 게임 산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멈칫.
멀쩡히 걸어가던 세하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럼 그렇지.
“너 정말!”
“...유리야, 담임쌤한텐 비밀로 해주라. 정말 금방 사갔고 올게. 요 근처거든? 금방 갔다 올게.”
“아하하 세하야, 아무래도 그건...”
저벅.
저벅 저벅. 저벅저벅저벅.
나 화나 있소를 온몸으로 표출하며 슬비가 세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세.하.”
“...하아아......”
그런 슬비 앞에 한숨이 절로 나온 세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너 평소에도 게임을 그렇게나 많이 하면서,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노력 조차 없는 거야?”
슬비가 팔짱을 끼며 따지듯 몰아부쳤다.
“......”
시선을 피하던 세하는 정면으로 슬비와 마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아니, 떠올리는 것도 이젠 귀찮았다.
매번 이런 식이었으니.
“그래.”
“......뭐?
“그래, 없어. 없다고.”
“...너.....”
말문이 막힌 슬비가 뭐라 채 묻기도 전에 세하가 감정 없는 눈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내가 게임을 하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야, 당연히 상관있지. 회의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게속 게임기만...”
“내가 게임하는 것 때문에 팀에 피해 준 적 있었나?”
“......”
둘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둘 다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사이에 끼어들 틈도 없이, 유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어쩔 줄 몰랐다.
“저..저기 애들아.. 싸우지 말자, 친구잖아? 하하..하..”
유리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둘은 또다시 말싸움을 시작했다.
“피해는 없지만, 네가 계속 게임에 빠져 산다면 결국 피해가 생기겠지.”
“아아, 그래서 없는 피해를 미리 방지하려고 그런거다?”
비꼬는 말투에도 지지 않겠다는 듯 슬비가 몰아세웟다.
“그래. 그러니 게임 좀 줄이라고. 이 중독자야.”
“하... 그래.”
세하는 어이없다는 듯이 슬비를 내려다봤다.
자신보다 키는 작지만 무엇하나 지지않는 완벽한 여자아이.
차라리 슬비였다면 좋았을텐데.
"니가 내 엄마라도 되냐?"
"하, 뭐? 나참 어이가 없어서-"
"아- 아니다. 적어도 우리 엄만 너처럼 잔소리가 심하진 않거든."
화가 날대로 잔뜩 난 슬비는 결국 더이상 못참겠다는 듯이 폭발해버렸다.
"아아 그러셔~? 잔소리가 많아서 참 미안하네요. 누구누구는 차원 전쟁을 종결시킨 전설적인 클로저 요원이 엄마라서 참 좋겠네-!"
털썩-
세하가 쥐고 있던 가방을 놓아버렸다.
제 주인 잃은 가방은 힘 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 하는 슬비를 향해 세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뭘 알아..."
"뭐? 잘 안들ㄹ-"
"네가 뭘 아냐고!!!"
휙-
떨어진 가방을 한 손으로 낚아챈 세하는 뒤도 안 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모습에 황당한 슬비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가버린 세하를 향해 분을 못 참는듯, 소리쳤다.
"하,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니가 게임에 빠져 살든 폐인이 되든 상관 안 할 테니까! 게임만 하다가 죽든 말든, 어디 니 맘대로 해보라고!!!"
슬비의 분노 섞인 외침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세하는 대꾸도 없이 점점 멀어져 갔다.
분했다.
차라리 말이라도 해주면 덜 속상할 텐데.
"...슬비야......."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처음 검은 양 팀의 멤버가 된 날부터 두 사람은 자주 부딪쳤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오늘처럼 터지게 될 것이란 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슬비야, 괜찮아..?"
유리가 옆으로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무,물론 세하도 잘못한 게 많지만, 너무 그렇게 화 내진 마. 일단은 같은 팀이잖아? 아하하..."
"......난 괜찮아."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을 내뱉은 슬비는 세하가 간 방향과 정 반대의 길로 걸어갔다.
"가자, 유리야. 수업 늦겠다."
"어, 으응. 가야지."
아아 정말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을 사이좋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아니, 아니지 일단은...
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슬비 기분을 풀어줘야지.
"슬비야, 같이 가~"
유리는 슬비에게 이런저런 위로의 말을 건네며 발걸음을 같이 했다.
***
"야아-!"
"......"
"야, 너- 파란머리-!"
"......"
"야 무사하냐?"
"한국말 모르나봐 킥킥"
"야 괴물아-"
"내가 왜 괴물이야!"
말없이 걷기만 하던 아이가 뒤돌아서서 소리쳤다.
한적한 골목길 노을 지는 저녁 무렵
집에 가는 어린아이 하나를 두고 아이들 대여섯 명이 무리 지어 뒤따라왔다.
"너 괴물 맞잖아! 눈도 파랗고 머리도 파랗잖아!"
"맞아 맞아"
"ㅋㅋㅋ"
"씨이... 그게 뭐 어때서!!"
분한 아이는 화를 내며 소리쳤지만, 무리 진 아이들은 되려 재밌는 구경한다는 듯 아이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울 엄마가 그랬는데 너랑 놀지 말라고~"
"울 엄마두 같이 놀지 말랬거든~"
"맞아. 파란 괴물아~"
"너랑 있으면 괴물들이 꼬인다며?"
"......"
"너도 막 괴물로 변하냐? 킼킼-"
[탁 탁 탁 탁.]
"어? 야 어디가냐?"
"재 도망간다"
"괴물이 도망간대! ㅋㅋㅋ"
달렸다. 아이들이 뭐라 하든 무시한 채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야 거기 서!"
"괴물 잡아라!"
"야- --!"
"-- -"
달렸다. 뒤도 돌아** 않고 계속 달렸다.
들리지 않을 때까지.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렸다.
[끼이익-]
[철컥-]
쾅-
털썩.
'하아.. 하아... 하.... 하아....'
집에 도착한 아이는 현관문을 걸어 잠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
한동안 숨을 고르던 아이는 그제야 일어서서 집안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집안은 아무런 기척도, 사람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엄마...?"
작게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알고 있었다. 엄마는 바쁘니까
하지만
"아빠......?"
이상하다. 그래도 아빠는 엄마처럼 바쁘진 않으셨는데
왜 아무도 없지? 혹시 화장실에 계시나 싶어서 가 보았지만 불 꺼진 화장실엔 적막만이 가득했다.
설마
설마 아빠도 엄마처럼 바쁜 일이 생겨서, 그래서, 집을 자주 나가서, 그래서...
나만 혼자 남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무서워졌다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두다다다-]
"아빠-!!!"
아이는 다급한 마음으로 아빠를 부르며 집안을 뛰어다녔다.
이윽고, 식탁 앞에서 멈춰 섰다.
네모난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저녁거리를 사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그동안 냉장고에서 간식 꺼내먹어도 된다. 너무 많이 먹지는 말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
아
다행이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빠마저 외면하는 줄 알았다.
'하아......'
아이는 그제야 안심하며 냉장고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려는 순간, 무심코 냉장고 문에 붙어있는 작은 거울을 들여다봤다.
투명하리만치 파란색.
선명하게 푸른 눈.
엄마는 여름 바다색 같다며 예쁘다고 했지만
아이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냥 맘에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었다.
짜증 나리만치 싫었다.
증오스러웠다.
'파란 괴물아-'
왜?
난 괴물이 아닌데 왜 괴물 취급 받아야하지?
난 아무 잘못 없는데 왜 눈도 머리도 파란색인 거야?
왜???
왜?????
아이는 냉장고 문에 붙어있는 거울을 떼서 식탁 위에 엎어놓았다.
그리고 곧장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스르륵-]
자기 방 안에 들어선 아이는 게임기 대신, 서랍 속 꼭꼭 숨겨둔 낡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엔 작은 저금통 하나가 들어있었다.
수많은 동전과 구겨진 지폐들을 보며 아이는 만족했다.
그동안 엄마 아빠한테 받은 용돈을 꼬물꼬물 모아서 쌓아논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염색이라는 걸 하면 머리색을 바꿀 수 있다고 들었다.
그걸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건 알았지만, 얼마가 필요한진 몰랐다.
다만 어림짐작으로 큰 돈이 필요할 거란 생각에 조금씩 아껴가며 모았다.
'조금만 더 모으면...'
조금만 더 모으면 상자가 가득 차게 된다.
한 상자를 가득 채울 정도면 꽤 큰돈이지 않을까
그럼 나도 더 이상 놀림받진 않겠지-
아이는 부푼 기대를 상자 속에 고이 넣고 서랍 안에 숨겨두었다.
***
"손님, 예약하신 렌즈 나왔습니다. 도수 없는 검은색 렌즈 맞으시죠?"
네-라고 짧게 대답하며 종이가방을 건네받은 세하는 굳이 그걸 말할 필요까지 있나 싶은 생각을 하며 렌즈를 꺼냈다.
도수 없는 검은색 렌즈.
안경점 구석 사람 없는 곳을 골라 거울 앞에 선 세하는 렌즈를 갈아끼웠다.
일하던 직원이 그를 보고 옆 직원에게 속삭였다.
'저기... 눈 원래 파란색 아냐?'
'나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좀체 말 안 해주더라구,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래? 아깝네... 색 이쁜데-'
누님들, 죄송하지만 여기까지 다 들립니다-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킨 채 거울을 들여다봤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이젠 누가 봐도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보인다.
어릴 적 군것질거리를 참아가며 모은 용돈을
상자째 엄마한테 들이밀며 염색하게 해달라고 조르던 게 몇 살 때였더라-
울고불고 난리 쳐서 겨우 검은색으로 염색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엄마는 예쁜 머리색을 굳이 망치는 걸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아쉬운 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뻐했다고나 할까.
[띠링-]
'안녕히 가세요-'
안경점을 나온 세하는 몸을 움츠렸다.
'아, 슬슬 춥다'
바깥 하늘은 어느덧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건물 사이에 선 나무들도 잎이 다 떨어진 쌀쌀한 시기.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젠 바깥바람도 제법 차가웠다.
'그나저나, 내일은......'
내일은 뭐라 말해야 할까-
슬비와 한바탕 말싸움 한 뒤 한석봉이 추천해준 신작 게임들을 둘러보다가 학교에 도착했을 땐 마지막 수업이 거의 끝난 후였다.
왜 다른 애들보다 늦었냐며 한 소리 하는 담임에게 뒤처리 해야 할 게 있었다며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문제는......
'역시, 사과해야겠지...'
조금 지나쳤다.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해져서 그런지, 신경이 예민해진 거 같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평소처럼 넘어가도 될 문제였는데.
아니, 문제도 아닌 일인데 괜히 소리치고 가버린 게 문제였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바뀌는 것도 아니고.
일단 내일 만나면 사과부터 하자.
그런데
'... 어떻게 사과해야 되지...?'
무조건 만나자마자 잘못했다고 빌까?
아니면 게임을 줄이......는 건 어려운데
줄이는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줄일거라고 대충 설득하는 게 좋을까
그렇게 사과할 방법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세하는 문득 고개를 들고는
' -! '
눈이 동그래졌다.
'이슬비...?'
놀래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는 게 아니라 마주친 거라고 해야 하나
슬비는 맞은편 사거리 외각 빵집 앞에 서있었다.
유리문 안 케이크 진열장 앞에서 뭘 그리 생각하는지
도로 건너편에 세하가 있는지도, 누가 지나가는지조차도 모르는듯했다.
다행이다. 아직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 못했는데
살짝 안심한 세하는 이대로 그냥 집으로 갈지, 아니면 정면으로 맞서서 사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장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 됐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후...'
사과하자.
깔끔하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적어도 무시하진 않-
[ 툭- ]
일기예보에선 아직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 했다.
언제나 그렇듯, 기상청에서 알려주는 날씨는 때때로 잘 안 맞기도 했다.
오늘은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 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송이들은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듯 떨어지고 있었다.
"...... 이슬비."
새하얗게 부서지는 작은 빛깔들.
드문 드문 내리기 시작한 그것들은 땅에 닿자마자 흔적 없이 사라져갔다.
"......?"
첫눈이 무덤덤히 내리던 올해 겨울,
아기자기하게 꾸민 작은 빵집 케이크 진열장 앞에서
슬비는 울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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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설정>
*세하와 유리는 같은 반(C반)입니다. (슬비는 E반)
<이하 픽션 부분>
**원래 검은 양 멤버는 5명이지만 나머지 두 명이 (PRE-OBT기준) 플레이 불가능한 관계로 세 명의 이야기만 그렸습니다.(아직은 세명이지만 나중에 멤버 두 명이 더 온다더라~라는 느낌 입니다)
**위상 잠재력을 가진 인간은 머리색이나 눈 색이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공식) -> 이를 세하에 적용시켜, 지금과는 달리 어린 시절엔 머리색과 눈 색이 달랐다는 설정입니다.(현재는 검은색)(무슨 색으로 할까 하다가 세하가 쓰는 위상력이 파란색이라 파란색으로 했습니다)
**세하 위주의 이야기(특히 과거)가 많습니다.
**클로저스 정식 오픈은 방학 시즌에 했으면 좋겠습니다(바램)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