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son - 2 - (完)
외국인코스프레 2015-04-24 4
“아직 멀었나?”
“…시스템을 점검하는 중인 모양이에요.”
“…정말 저들이면 가능할까?”
“그렇게 믿을 수밖에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
강남의 한 지역, 유니온의 거점 중 한 곳에서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인 유정과, 그 팀에 소속된 클로저인 제이였다.
벌써 네 번째인 물음과 함께, 불안한지 큐브를 흘끔흘끔 보는 제이. 그에 비해 유정은 많이 차분해 보였지만, 실상은 다를 바 없었다.
이미 차원종과의 싸움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큐브에 연결된 노트북은 요란한 노이즈로 위험성을 알리고 있었고, 당연히 세하는 여전히 큐브 내에 있었다. 유정이 사용하던 노트북은 물론, 그들의 옆에 위치한 큐브의 곳곳에는 유니온 거점에서 파견 나온 처리반들이 위치해 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그들이었지만, 사태는 나아질 생각이 없었다.
비록 생각 없고 마이페이스로 보이는 세하라지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함부로 큐브를 부숴버릴 애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안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지금, 두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었다.
큐브를 지켜보는 제이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능청스럽고 엉뚱한 남**만, 그 눈은 날이 잘 서 있었다. 그에 비해 그 주먹은 여전히 힘이 들어간 채 강하게 쥐어져 있었다. 일이 틀어질 것 같으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제이와, 그런 그를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는 유정이었다.
다시금 제이를 흘끗 보는 유정이, 처음으로 큐브가 아닌 딴 곳을 보는 그의 모습에 의아해졌다. 그에 유정 또한 시선을 돌리자, 그 시선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사방이 막힌 큐브 내에서 발생했던 폭음은, 한동안 큐브 전체를 뒤흔들고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중앙엔 여전히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세하가 쓰러져 있었다, 주변을 붉게 물들인 채로. 모든 상황이 끝난 듯 잠잠했지만 남자의 표정에선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세하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가만히 주시하던 그의 눈이 이내 가늘어졌다.
“…흠.”
미묘하게 웃으며, 쓰러진 세하를 내려다본다. 그와 동시에, 오만상을 쓰며 세하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포격을 머리에 맞았는데도, 살아 있었다. 비록 얼굴의 절반이 피투성이였지만. 이내 세하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선다. 그런 세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남자가 그을려진 자신의 팔을 적당히 허공에 휘젓는다.
“…재밌네. 그 한순간에, 발포로 내 팔을 날려버릴 줄은.”
말 그대로였다. 남자의 건 블레이드가 폭발을 일으키기 직전에, 필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린 세하가 남자의 속박을 떨쳐낸 것이었다. 그 때문에 각도가 엇갈려,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비록 머리 한 쪽이 심하게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숨을 헐떡이는 세하를 주시하면서도 남자는 기분 나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세하 또한 숨을 고를 뿐, 남자에게 다가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남자는 그저, 생각과는 다른 상황이 재밌어서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세하는, 발이 얼어붙어 정신을 붙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온 몸이 떨렸다. 사시나무 떠는 듯 하다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방금 공격은 분명히, 머리 절반이 날아갔을 포격이었다. 운이 좋아 빗나가긴 했지만, 지금 상처도 만만찮았다. 피가 시야를 방해했고, 출혈 때문인지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면서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까지, 아직까지도 공포는 자신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더욱 거세게.
“아직까지 하려고?”
그런 세하를 보며, 남자는 비꼬듯이 말했다.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악마처럼 보였다.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악마라고 칭하기엔 떨떠름했지만.
“아무리 해도 안 돼. 네가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게임과 같은 거야. 스테이터스가 높은 쪽이 유리한 거지.”
확실히 녀석의 말이 맞았다. 세하 자신이 손에서 놓지 않던 게임기 또한 같은 이치였다. 같은 성능의 캐릭터라면 더 실력이 좋은 쪽이 유리하듯, 녀석이 자신과 같은 이세하 본인이라면 당연히 더 강한 쪽이 유리한 것이었다.
분하지만 녀석은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났다. 힘도, 속도도, 기술도, 경험도. 게다가…자신과 달리, 확고했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잖아? 물론 세이브도, 리셋도 없지만 말이야.”
“…게임이라고?”
녀석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아냐.”
누구나 이유는 있다. 자신의 주변엔 많은 클로저들이 있고, 이유 없이 그곳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웃는 유리도, 괜스레 무게 잡는 제이도, 순진한 테인도, 그리고 그 녀석도.
하지만, 누구도 이 일을 게임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나지막이 내뱉었던 세하의 말을 들었던지, 다시금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내 그가 손가락 두 개를 펴더니, 세하에게 선택지를 내던졌다.
“…자, 그럼 마지막 선택지. ‘미래의 나’가 차원종이 되라고 권유한다! 어떻게 할까? 1. 받아들인다, 2. 거절한다. 물론 그에 따른 결과는 알고 있겠지?”
다시금 세하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선택지가 부딪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거절한다면 녀석이 덤벼들 거고, 지면 죽는다. 그리고 실력 차이는 확고하다. 사실 차원종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굳이 도박을 할 바에는, 일단 살아야 뭐라도 될 테니까. 게다가 저 녀석이 정말 미래의 자신이라 해도, 이 곳은 큐브이고 저 녀석은 단순한 입체영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든 말든 한 번쯤 질 생각으로, 오기를 부릴 문제가 아니었다. 용기를 내서 싸운다 한들, 죽으면 입만 살았었다는 얘깃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굳이 다른 길이 있음에도 도박을 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그는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다. 세하의 입이 일순 벌어졌다가, 다시금 굳게 닫힌다. 이내 심호흡을 한 그가 천천히 대답한다.
“…거절한다.”
어째선지, 아직까지 입만 산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전혀 후회가 되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몸보다, 살짝 부어있던 뺨의 통증이 더 선명히 느껴졌다.
“…유감이네.”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금 무표정이 된 그가 한 발을 강하게 내딛는다. 그와 동시에, 양 쪽의 신형이 총알처럼 서로에게로 달려들었다.
건 블레이드가 두어 번 마찰을 일으켰다. 이내 한 신형이 균형을 잃는데, 완력이 밀리는 세하 쪽이었다.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자의 건 블레이드가 직선으로 내뻗어져서는 세하의 어깻죽지를 겨눈다. 확실하게 살을 도려낼 포격이 검에 장전되었다.
그 다음 순간, 구태여 목을 비튼 남자가 검을 거두고는 재빠르게 물러선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의 포격이 불을 뿜으려는 순간, 세하의 건 블레이드가 남자의 얼굴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을 주고 뼈를 치려는 듯이.
‘설마, 영거리 포격을 따라한 건가…?’
한 순간 경계했지만, 이내 허세임을 깨닫고는 다시금 달려든다. 여전히 차이는 극명했다. 남자는 왼팔에 화상을 입었을 뿐 그 외엔 별 문제가 없었고, 그에 비해 세하는 만신창이였다. 이대로 밀어붙이기만 해도 남자가 질 이유는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세하는 최대한 남자와의 접촉을 피하며 뒤로 물러선다. 허를 찌르려는 의도겠지만…
‘어설퍼.’
분명 허점을 잡힌다면 차이가 좁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고, 남자는 자신이 쉽게 말려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당연하다. 상대는 과거의 자신이고, 그 모든 기술은 이미 그가 예전에 익혔던 기술이었다. 어디까지나 남자는 세하의 가능성 중 하나지만, 지금까지의 싸움으로 숨겨둔 수는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남자가 대응하지 못한 채 지금 이 상황을 뒤집을만한 기술은…없었다.
카앙! 남자의 건 블레이드가 불꽃을 내뿜으며, 그 추진력으로 세하를 날려 버린다. 가까스로 그 공격을 막아낸 세하가 이를 악물며 균형을 잡는다
“여전히 조심성 없는 걸?”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이 실룩거리며, 조롱하듯 말해왔다. 그에 흠칫한 세하가 급히 뒤를 돌아보나, 이미 그의 등은 큐브의 구석에 근접해 있었다.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이 된 것이었다. 발을 뻗어 벽에 착지했지만, 이미 남자는 한껏 위상력을 모은 채 세하에게로 뛰어들고 있었다. 끝이다, 세하가 가진 기술 중에서 남자에게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기술은 없었다. 이는 모든 기술을 파악하고 있는 남자의 확신이었다.
단 한순간만, 말이다.
남자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세하의 건 블레이드에,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의 위상력이 모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했다. 반격할 기술이 없는 이상, 저런 큰 기술은 오히려 빈틈을 유발하기 쉬웠다. 하물며 자신의 기술을 꿰고 있는 남자에게, 그 같은 대응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분명 세하의 기술은 유성검이었다. 그렇기에 반사적으로 남자의 머릿속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유성검의 단점은, 방향 전환이 불가능한 점과 기술이 발동하기 전에 공중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 체공 시간이었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벽에 올라선 채 위상력을 모은다면?
‘설마, 유성검의 체공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일부러 구석으로…!’
그 다음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쏜살같이 세하의 건 블레이드가 쇄도했다. 거친 신음과 함께 남자의 몸이 세하에 의해 튕겨져 날아갔다. 곧바로 몸을 추스른 세하와, 한참을 밀려나서는 이를 악물며 일어서는 남자의 모습은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한 차례 격통에 얼굴을 찌푸린 남자가, 자신의 몸을 본다. 왼쪽 상반신 전체가 유성검에 의해 불타 있었고, 어깻죽지에 커다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만약 제대로 막지 못했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을 것이다.
남자의 시선이 다시금 세하를 향했다. 분명 기세를 잡았음에도,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남자에게 한 방 먹였다지만, 세하 또한 좋은 상황은 아니었기에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괜히 자만했다가, 남자가 크게 당한 것뿐이었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상대는 자신보다 약하지만, 얕볼 수는 없게 되었다.
썩어도 자신이었으니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다시금 건 블레이드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에 호응하듯, 건 블레이드가 다시금 푸른빛으로 감싸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마치 모든 위상력을 검에 담듯, 세하로선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힘과, 그에 비례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런 그를 다독이듯,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너무 긴장하지 마,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끝내줄 테니까.”
“…‘나’는 지금이든, 미래든 간에 여전히 재미없는 캐릭터인 모양이네.”
남자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런 세하의 말을 묵인하고는, 남자가 양 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본 세하가 자신 또한 같은 자세를 취한다.
위상 집속검, 검에 위상력을 집중시켜 위력을 증가시키는 기술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서로의 건 블레이드에 위상력이 만연하게 되었고, 그것을 증명하듯 위상력이 검의 형상을 띠며 건 블레이드의 리치를 증가시킨다. 여기서 차이를 직감한 것은 세하였다. 남자의 건 블레이드가, 세하의 것보다 더 길고 위상력이 선명했다.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남자가 뛰어든다.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것이 없음을 알기에, 세하 또한 뛰어들었다.
여전히 남자의 건 블레이드엔, 위상 집속검과 별개로 응축된 위상력이 번들거렸다. 분명 세하로서는 꿈도 못 꿀 기술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눈살을 찌푸린 세하가, 남자가 크게 휘두른 건 블레이드에 맞선다.
1타, 건 블레이드를 움켜쥔 손바닥이 찢어지며, 장갑을 붉게 적셨다.
2타, 격통을 견디지 못한 뇌가 감각을 차단한 듯, 팔이 마비된 느낌이 들었다.
3타, 어깨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힘줄이 끊어진 듯한 격통에 휩싸인 채,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4타, 온 몸이 삐걱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남자의 검은 크게 휘둘러지기만 할 뿐이었다. 여전히 위상력을 눌러 담은 채로 말이다.
당장이라도 건 블레이드가 포격을 내뿜어도 이상한 것이 없는데, 두 명은 서로 검을 휘두르기만 하였다. 단 한순간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검게 타 버릴 것임에도, 세하는 직감에 의지한 채 검을 맞대었다. 그 다음 순간, 세하의 움직임이 크게 동요했다.
위상 집속검이 해제된 것이었다.
“말했지? 스테이터스가 다르다고!”
남자의 검은 여전히 위상력이 모여 있었다. 무방비가 된 세하를 비웃듯, 그제야 건 블레이드가 빛을 내뿜었다. 폭령검 전소, 남자의 최대 기술이었다. 마치 파도처럼 위협적인 불꽃이, 세하 한 명만을 말소시키기 위해 몰아쳤다.
그 한 순간, 세하가 크게 한 발을 내딛었다. 물러서지도, 막지도 않은 채 남자에게로 뛰어든 것이었다.
‘자기 기술의 장단점도 모르냐고…?’
“모를 리가 없잖아!”
남자의 품으로 달려든 세하가, 소리치며 왼손으로 건 블레이드의 검신을 짚었다. 남자의 건 블레이드는, 자신의 측면에 맞닿은 세하의 검에 의해 옆으로 밀려났다. 선명하게 타오르던 푸른 위상력이, 마치 쥐불놀이를 연상케 하듯 호선을 그리며 튕겨졌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애초에 세하는 남자와 힘겨루기 따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그가, 자신보다 능력치가 높은 상대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이익이 아님을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그는 그저, 남자의 동작이 커짐을 노린 것뿐이었다.
남자의 건 블레이드를 밀어낸 세하가, 곧바로 몸을 비틀며 왼발을 뻗어 올렸다. 위상력을 담은 발길질이, 남자의 복부를 걷어차 머리 위로 공을 올리듯 차올렸다. 남자가 하늘에 뜬 채 세하를 내려다보는, 기묘한 자세가 되었다.
“네가 나라고 했지? 그렇다면…”
말을 하며, 자신의 건 블레이드를 재빨리 들어 올리는 세하. 정확히 남자의 상반신을 겨누며, 말을 이었다.
“하늘을 나는 재주는 없겠지?”
세하의 건 블레이드엔, 남자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위상력이 모여 있었다.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세하 또한 자신의 최대 기술을 준비 했었으니까.
“좀 뜨거울 거야.”
“무슨…!”
비록 상대가 강하다지만, 공중에 뜬 무방비한 상태일 때라면 분명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세하가 건 블레이드를 꽉 쥐었다. 사실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남자를 쓰러뜨릴 일격일지는 몰라도, 이런 근거리에서 이 정도의 포격을 행한다면 자신 또한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런 만신창이인 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알 게 뭐야!’
세하의 건 블레이드에서, 두 번의 포격 음이 울려 퍼졌다. 큐브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폭음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포격에 의한 반동으로 세하의 몸이 거세게 큐브에 처박혔다. 한 번 땅에 패대기쳐 치고는, 그 반발력으로 다시금 몸이 떠올랐다. 기대 이상의 충격이었다. 아프지만 오히려 의식은 흐릿해져 갔다. 마치 무중력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초가 10초처럼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세하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 정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의식의 끈을 놓치는 그였다.
*
정신이 들었을 때, 세하는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느낌으로 평소와 같이 푹신한 침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병원 침대일 것이었다. 아직 눈은 뜨지 않은 채라,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눈을 뜨기는 싫었다. 정신이 들었을 뿐인데 온 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아무것도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이대로 한숨 더 잘까 싶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보통 게임이나 에니메이션을 보면, 이렇게 피떡이 되도록 터지고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면 옆에 여주인공이 울면서 뜨거운 포옹을 하지 않았나? 물론 현실과 2D의 차이란 건 진즉에 인식하고 있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어쩐지 이런 상황이 되자 일말의 기대감이 들었다.
만약 눈을 떴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는다면 엄청난 소외감이 밀려들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서는 누군가 있는 모양이었다.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눈만을 떠서 옆을 보았다.
“어, 동생. 깨어났어?”
“…….”
굳이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도 없이, 목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왠지 실망감이 몰려들었지만, 그 이유까진 일일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뭐야, 아저씨에요?”
“기껏 자리를 지켜준 사람한테 무슨 소리야, 동생. 몸매 좋은 여성이 아니라 실망했어?”
“너무 앞서갔는데요.”
“너무 실망하진 마, 곧 누님도 오실 테니까 말이지.”
그렇게 말한 제이가, 다시금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 한 장을 꺼내든다. 이내 그것을 주시하며, 적힌 글들을 읽어갔다. 평소와 같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병실 내에서 퍼져갔다.
“양팔 관절 실금, 전신 타박상, 상반신 2도 화상, 두부 창상, 어깨 탈골…환상적인걸, 동생.”
세하가 들으라는 듯 진료 기록지를 읽은 제이가, 진심이 들어가 있지 않은 감탄과 함께 세하를 보았다. 당사자가 듣기엔 복잡 미묘한 설명이었지만, 세하는 그런 제이의 말에 대답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직까지, 지금 상황이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눈 한 번 감았다 떴는데 배경이 바뀐 것처럼, 자신이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토록 치열한 싸움을 거쳤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이란 점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진료 기록지를 덮은 제이가, 그런 세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이.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제야 세하가 제이를 돌아보았다.
“아저씨가 절 데려오신 거예요?”
“뭐, 그렇지.”
“그…큐브는…어떻게 되었죠?”
“무슨 말이지?”
“안에…이상한 건 없었나요?”
“아무것도. 동생이 쓰러져 있는 건 봤지만…뭐라도 있었나?”
제이의 말이 거짓으로 보이진 않았다. 역시 영상일 뿐이었나, 싶은 세하가 제이의 물음에 못을 박듯 고개를 살살 저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었으니까,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기로 하였다.
“…미안해요, 폐를 끼쳤네요.”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나보다는, 동생의 모습을 본 누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나 신경 써두는 게 좋을 거야.”
“…기껏 잊고 있었는데, 친절하시네요.”
그 머릿속에 자신의 어머니인, 알파퀸의 모습이 떠올린 세하의 입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확실히 큰일은 큰일이었다만, 그 또한 와 닿지는 않았다. 자신을 본 엄마가 화를 낼지, 슬퍼할지, 아니면…별 관심도 갖지 않을지 확신이 가지 않았기에.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이런 일에 내보낸 사람이니만큼, 만약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농담도 받을 줄 아는 모양이니, 괜찮은 모양이군.”
다시금 심란해지는 와중에, 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세하의 눈이, 자신을 빤히 보는 제이의 눈에 못 박혔다.
“…유리 동생이 얘길 해줬지만, 워낙 허둥대서 제대로 이해가 안 되었거든.”
표정이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
“…그랬군.”
세하의 얘기가 끝나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제이. 이내 그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눈은 여전히 세하를 주시한다. 세하로서는 제이의 반응이 뜻밖이었기에, 가만히 그를 보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작게 한숨을 내쉰 제이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 말을 해두자면, 동생의 생각은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어. 애초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도 마찬가지인걸. 게다가 얼마 살지도 않은, 고등학생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애초에, 그런 아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이 세상이 이상한 거야.”
“…….”
“동생도 봤겠지만, 같은 나이인 리더나 유리, 그보다 더 어린 테인도 싸우고 있어.”
“…그렇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과 같은 또래거나, 그보다도 더 어린 아이들이 어째서 자신이 싸워야 하냐는 생각을 안 해봤을까. 그리고 그들은, 언제부턴가 그런 의문들을 지우고 지금까지 싸워온 것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채로.
자신과 다르게, 말이다.
“너무 주눅 들지 말라고, 동생. 비교하라는 게 아니니까. 알고 있겠지만, 이 검은양 팀은 날 제외하고는 동생과 같거나 그보다 어린 아이들 뿐이야. 그들이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겠어? 아니겠지. 그럼, 동생은 그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고 있다고 생각해?”
“…싸울 이유가…있어서…?”
“그렇지.”
생각보다 쉽게 대답하는 세하가 의외였는지, 살짝 텀을 두고서 고개를 끄덕이는 제이였다.
“리더는 차원종들을 막기 위해, 유리는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테인은 사명이라고 여기기에.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그것들이 있기에 싸우는 거지.”
그렇게 말한 제이가, 다시금 조용해진다. 무언가 간을 보듯, 세하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가를 반복하던 그가, 이내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동생, 알고 있겠지만, 난 오래 전에 클로저 일을 그만뒀었어. 아니, 못 하게 되었었다는 편이 더 어울리려나?”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에 의아해진 세하였지만, 가만히 경청한다.
“그런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아?”
“…글쎄요.”
“…뭐,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예전에 내가 겪었던 전쟁들을, 너희 세대가 다시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였어.”
예전에 들었던 얘기였다. 하지만 제이가 그 일을 잊은 것도 아닐 텐데, 새삼스레 말을 꺼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하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애초에 제이가 알 리는 없었기에 자연스레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왜 내가 하필이면 검은양 팀에 있는지 알아?”
그것까진 모른다. 그렇기에 가만히 있었다.
“누님…동생의 어머니가 부탁했었기 때문이야.”
일순, 세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매우 알아보기 힘든 미미한 변화였지만, 한층 가늘어진 제이의 눈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어째 후환이 두려웠는지 잠시 무언가 고심하고는, 스스로 팔짱을 끼며 말을 잇는다.
“별로 내키진 않았어. 게다가, 누님이 스스로 하면 될 것을 나한테 부탁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처음엔 거절했었지. 그랬더니 뭐라고 하는지 알아? 자신이 동생 곁에 있으면, 동생만을 신경 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라더군.”
“…….”
“동생이 했던 고민들은, 누님도 알고 있던 것들이었어.”
“알고 있었다고요…?”
“그래. 그렇지만 알다시피 누님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않았지. 동생의 그 얘기들은 나도 들은 적이 있었기에, 직접 물어봤었어. 그랬더니 의외로 간단히 대답해주더군. 누님은, 동생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어.”
‘스스로?’
“알고 있겠지만, 동생은 클로저 이세하보다는 알파퀸의 아들이란 쪽으로 훨씬 더 많이 알려졌지. 그렇기 때문에, 직접 그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어. 솔직히 힘들었겠지. 아무리 날고 기어본들 최강이라 불려 졌던 클로저의 아들이란 명성을 가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녀를 따라잡겠다는 말이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노력하고 몇 번이나 칭찬받으면서도, 언젠가는 이 귀찮은 기대감을 떨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심은 끊어지질 않았었으니까. 자신이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로.
“하지만 동생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열심히 노력했고, 한 명의 클로저로서 인정받았었지. 그렇기 때문에 확신하게 되었다는군. 자신이 만들었던 그림자를, 언젠가 동생이 스스로 벗어날 거라고 말이야.”
생각도 못했다. 그저 알파퀸의, 최강의 클로저의 아들이었기에 노력했었다. 자신에게 멋대로 실망하는 사람들이 불편했기에, 관심도 없던 일들을 어떻게든 해내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는 그에 대해 칭찬했었다. 그것이 못마땅했다, 마치 내 아들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엄마 때문이라고,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저 엄마의,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위해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뭐, 그런 일이 있었긴 했지만, 아직 동생은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지.”
한참을 생각하던 중에, 제이의 말이 절묘하게 파고들어 퍼뜩 정신을 차리는 세하였다. 어느새 제이는, 자신의 선글라스를 벗고는 알을 닦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의식하지 못했던 눈매가 보였다. 그가 어째선지 낮아진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유를 찾는 것은, 개인마다 또는 상황마다 달라. 게다가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더더욱 힘들겠지. 무엇을 선택하든 그건 네 선택이야, 동생.”
‘선택…인가.’
한결같이 두드리던 게임기에 뜨던 선택지들처럼, 매일같이 봐오던 문구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달랐다. 게임마냥 보기 같은 건 없고, 자신이 직접 답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려운 거고.
“이런 일에 함부로 참견하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면…먼저 동생이, 지금 어디 서 있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해.”
“지금 어디에…말인가요?”
“동생도 무언가 원했으니까 지금 클로저를 하고 있고, 이 병원에 있는 거겠지. 서둘 필요는 없어.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답을 찾아보도록 해. 공교롭게도 시간은 많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세하의 진료기록지를 들어서는 다른 손으로 보란 듯이 두드리는 제이였다. 그 모습에 세하가 쓴웃음을 짓는다.
“…만약 동생이 정말 힘들다면, 전선에서 물러나도록 해. 잘 하면 클로저를 그만둘 수도 있을 거야.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아, 원망하지도 않을 거고. 만약 알파퀸의 아들답지 않은 겁쟁이라고 매도하는 녀석들이 있다면, 내가 쓴맛을 보여주도록 하지.”
“…별로 못 미더운 말이네요.”
“이런, 팀에 대한 내 신뢰도가 언제 이렇게 떨어진 건지 모르겠군.”
“…그래도 고마워요, 아저씨. 그렇게 말해주셔서.”
“그거 다행이군.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라고 불러주면 더욱 기뻤겠지만 말이지.”
“그건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요.”
“후우!”
제이가 난감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본 세하가 눈에 띄게 웃어대지만, 제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세하가 다시금 저렇게 웃고 있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기에.
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제이가, 지나가듯 말한다.
“혹시나 시간이 지나도 답을 찾기 힘들다면, 다른 멤버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해봐.”
“도움이요? 하지만…”
“물론 그러지 않는 편이 가장 좋겠지. 하지만 그러라고 있는 동료들이니까, 혼자서 해결하기 힘들면 다른 사람들을 믿어보기라도 하란 얘기야. 물론 나한테만 말해도 되고. 적어도, 혼자 붙잡고 있다가 후회할 생각은 마.”
세하를 빤히 보고 있는 그 눈은, 마치 돌멩이를 던져 놓은 물웅덩이를 보는 듯 옅게 떨리고 있었다. 세하를 보고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이. 이내 그가 시선을 돌리며, 자연스레 독백한다.
“…나처럼 말이지.”
“네?”
“아무것도 아냐.”
너무 작은 목소리라 듣지 못한 세하가 반문하지만, 적당히 넘겨버리는 제이였다. 이내 작게 한숨을 쉰 그가, 몸을 일으키며 다시금 화제를 돌려놓는다.
“…고민하는 게 아이들이라면, 그에 대해 조언해 주는 게 어른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제이. 진료기록지를 놓은 그가 빙글, 하고 돌아서고는 혼잣말하듯 말한다.
“그만 가보도록 할게. 몸조리 잘 하라고, 동생. 일단 스크린은 쳐 둘게.”
“네, 가 보세요.”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고, 누님.’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미소를 짓는 제이였지만, 뒤돌아 서 있는 상태라 세하가 그것을 알아채는 일은 없었다.
이내 소리 나게 커튼이 쳐지고는 벌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하가 서랍장 위에 있던 게임기를 짚은 순간, 문이 닫힌다. 일순 찾아오는 침묵과 함께, 한동안 조용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이가 문을 닫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눈과 귀를 게임기에 집중하고 있던 세하였지만, 목소리를 듣고 나니 그쪽으로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안 했지?”
“뭐, 그런가?”
“…알았어, 와 줘서 고마워. 다음에 보도록 해.”
왔구나, 싶은 세하가 순간 움츠러들었다. 그냥 자는 척이나 할까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자니, 프라이버시고 뭐고 갔다버렸는지 거침없이 커튼을 여는 손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하를 내려다보는 것은 알파퀸…아니, 자신의 어머니인 서지수였다.
“…다행히, 괜찮아 보이네.”
“…그렇죠.”
세하를 힐끗 보고는, 나직이 말하는 지수. 울면서 아들을 끌어안는다는 드라마 같은 전개는 없었다. 그에 세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곧바로 매일같이 늦잠 잘 때에나 맛보던 여래신장을 복부에 가격 당했다. 한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정말, 넌 왜 매일같이 엄마 걱정만 시키니?!”
통증에 몸을 웅크리고 골골거리자니, 이내 안 그래도 멍한 고막을 정신없이 헤집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에 자신을 클로저로 만든 건 엄마 아니었냐고 변명도 해볼까 싶었지만, 쓴웃음과 함께 묻어 두었다. 역시나 강하고 엄격한 모습이었지만, 그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음을 모르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결국, 어머니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고, 사과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알긴 아네!”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금 손을 들어 올리는 지수. 그에 찔끔한 세하가 고개를 숙이지만, 아픔이 느껴지진 않았다. 어느새 지수의 손은 세하의 배가 아닌,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편안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이 나이 먹고 뭐하는 짓이냐며 수선을 떨었을 테지만, 어째선지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지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웃으며 세하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한동안 모자는, 그렇게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소소한 대화를 마친 서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내 과일 바구니를 올려놓으며 함부로 싸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 그녀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면서 말한다.
“내 정신 좀 봐, 슬비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슬비가요?”
“그래, 제이가 있을 때부터 기다렸던 모양이더라. 아직 있으려나.”
정말 슬비가 있었다면, 아마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답답할 정도로 철저한 소녀였으니까. 그 점을 예상한 세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묵묵히 납득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지수가 슬쩍 병실 문을 열자 다소곳한 자세로 슬비가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지수가 재빨리 거듭 사과를 하고는, 곧 나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다시금 세하에게로 왔다.
“혹시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호호, 잘 해보렴. 좋은 며느리감이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바짝 다가가며 그렇게 말하자, 빽 소리를 질러 부정하는 세하였다. 그런 세하의 머리를 세게 쓰다듬어 주고는, 곧바로 짐을 챙겨 나서는 지수. 그런 그녀를 보며 왜이래 주책인지, 하고 생각하던 세하였지만, 슬비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고개를 홱 돌린다.
“…나야, 이슬비. 잠시 괜찮겠어?”
“…들어 와.”
세하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침대를 가리고 있던 커튼이 쳐졌다. 이내 슬비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런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게임기에 한껏 집중하고 있던 세하의 옆모습뿐이었다.
“…입원해서도 게임은 하는구나.”
“새삼스럽지도 않잖아?”
한숨을 쉬며 입을 여는 슬비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이 돌아온다. 그에 작게 고개를 젓고는, 부가 설명을 덧붙이는 슬비였다.
“깁스를 하고 있는데도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야.”
“한 손으로도 할 수는 있어.”
“사람을 앞에 두고? 말은 어떻게 들으려고?”
“한 귀로도 들을 수 있어.”
“무슨 말이야?”
“게임 소리를 듣는 귀랑 말 듣는 귀가 따로 있으니까.”
“…그래? 그럼 한쪽 귀를 없애버리면 되겠네.”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세하였지만, 그 순간만은 게임기에서 눈을 뗄 수밖에 없었다. 불길한 느낌에 웬 차원종이 등장했나 싶어 옆을 보니, 차라리 차원종이면 나았을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어느새 버릇마냥 나이프를 한 손으로 돌려대던 슬비가, 세하와 눈이 마주치자 나이프를 보란 듯이 잡아챈다. 재주도 좋네, 하는 생각과 함께 굳어진 세하에게, 여전히 차가운 안광을 빛내며 그 마녀는 서 있었다.
“…참아주라, 입원 기간을 더 늘리려고?”
장난이겠거니 싶지만, 이 목석같은 리더님께서는 농담을 좋아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슬쩍 게임기의 전원을 끄는 세하였다. 그에 한숨을 쉰 슬비가, 정갈한 움직임으로 의자에 앉았다.
슬비는 세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세하는 그런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곁눈질로 시선을 피했다. 무언가 얘기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지금 당장은 여전히 심란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일부러 대화를 피하려 했지만, 역시 눈앞의 소녀는 타협 따위 없이 그대로 밀고 들어왔기에 무어라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답답하고 화가 날 법하기도 했지만, 워낙 표정이 없는 슬비였기에 심정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이 리더가 라스베가스 같은 곳에 간다면 저 포커페이스로 한몫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실없는 생각과 함께,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타이밍 좋게, 꼿꼿이 서 있던 머리가 숙여지며 핑크색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미안해.”
갑작스런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세하. 그에 아랑곳 않고 고개를 든 슬비가, 이번엔 본인이 시선을 피하며 나직이 말하기 시작한다.
“네가 고민이 있는 건 짐작했었어. 그런데도 그걸 알려고 하지 않고, 내 할 말만 하고 질책만 했어. 네가 어떤 기분인지 이해했어야 했는데. 게다가…”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오른손을 슬쩍 보는 슬비. 그 행동에 다음 말을 짐작한 세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에 의미가 전해졌음을 눈치 챘는지, 슬비의 말이 이어진다.
“…정말, 리더 실격이야.”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더 미안한 걸.”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일순 슬비의 눈이 똥그래진다. 그런 슬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세하가,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 시선은 아래를 향했지만, 그 눈에 담긴 것은 그 너머의 무언가였다.
“…별로 할 얘기가 아니라 말은 안 했었지만, 난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 채 클로저가 되었었어. 처음엔 엄마의, 알파퀸의 아들이라는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어.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노력했고, 결국엔 지금까지 왔어.”
다시금 전에 있던 일들이 떠올랐다. 자신을 보는 어른들의 시선, 그에 길들여진 자신과, 이끌려져 걸어갔던 길, 그리고 그에 따른 노력들. 몇 번이나 되새겼고, 몇 번이나 부정했으며, 그리고 몇 번이나 동경해왔던, 그런 모습들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네가 부러웠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에 서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주저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넌 조금도 주저 않고, 확고한…신념이라 해야 할까, 그런 걸 갖고 있는 채 이 일을 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난 이 일을 싫어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한 채 너와 비교만 했었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양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으로 자신의 다리를 압박하면서도, 그 입은 쉬지 않고 말들을 내뱉었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해도 될까, 긁어 부스럼이 되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기에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그 때…너한테 도움을 받았을 때, 그 차이를 절실히 느꼈어. 그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납득해버렸어. 차원종들이 네 부모님을 해쳤기에, 그들을 증오해서 클로저가 되었기에…그런 이유가 있었기에 네가 강한 거라고. 멍청한 소리였어. 너라고 좋아서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닐 텐데. 그런 이유 따위는, 처음부터 없는 게 나았을 텐데….”
“…너무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이세하, 잘 들어.”
무언가 말하려던, 세하의 말문이 막혔다. 분명 슬비의 목소리는 전과 같았다. 전처럼 차갑고 교과서적인 어투였지만, 그 안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기에 그대로 굳어졌던 세하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슬비가, 나직이 말을 이어간다.
“네 말대로야. 처음엔 부모님을 해친 차원종들을 용서할 수 없었어. 게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발현된 이 능력이 싫었어. 차라리 없는 게 나았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그렇기에 차원종들을 쓰러뜨릴 생각만 하게 되었었지.”
그렇게 말을 하던 슬비의 손에는, 어느새 서지수가 들고 왔던 바구니의 사과와 자신의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이내 한 손을 슬쩍 휘젓자, 어디서 온 것인지 접시가 둥실 떠서는 그녀의 다리 위에 놓여졌다.
“하지만 그건 예전 일이야. 언제까지나 복수심에 얽매여서는, 아무것도 안 될 것임을 알았으니까. 분명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은 슬프고, 그 일은 생각하기도 싫어. 하지만 이제 신경 쓰지 않아. 그 땐 그 때고, 나 또한 예전과 다르니까.”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는 능숙하게 사과의 껍질을 깎고 있었다. 그런 슬비의 눈은, 살짝 가늘어져 있었다.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무언가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는지, 아니면 무언가 고민이 생겼는지…
뭐가 되었든, 세하로서는 알 수 없는 생각들이었다.
“지금은 부모님의 복수를 한다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차원종들을 막겠다는 생각뿐이야. 그땐 이 힘을 싫어했지만, 나중에나마 이런 힘이라도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으니까.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부모님들을, 가족을 잃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어. 만약 그들 또한 나처럼 가족을 잃는다면 이 정도로 슬프겠지,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어느 샌가 슬비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세하는, 어째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이 괜한 말을 하게 했나 싶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을 막을 수도 없기에, 가만히 슬비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는 거야. 내가 힘낸다면, 그만큼 사람들이 나와 같은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될 테니까. 내가 싸우는 이유는 그뿐이야.”
“…하지만, 난 네 부모님이…”
“…아직도 모르겠어?”
슬비의 말을 부정하듯 무어라 말하려던 세하였지만, 그 또한 슬비의 말에 의해 가로막힌다. 다시금 자신이 들고 다니는 나이프마냥 눈이 날카로워진 슬비였지만, 세하로서는 그 모습이 더 안심이 되었다. 하도 보다 보니 익숙해졌던 것일까 싶었다.
“네가 부모님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았다 한들, 내가 괜찮다고 한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이 이상 네 언행에 화를 낸다면, 클로저를 하는 이유가 부모님의 죽음 때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럼에도 이 일을 들먹이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일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소리 죽여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말을 마친 슬비가, 다시금 세하와 눈을 마주쳤다. 어느새 그는 말이 없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슬비는 자신의 말에 납득했다고 생각했지만, 기실 세하의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전혀 몰랐지만, 슬비의 모습을 보며 떠오른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클로저를 선택한 것. 그 이유는…
‘차원종들을, 막기 위해…’
슬비의 말을 듣는 동안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말했다. 가족에 대한 복수를 위해 차원종을 쓰러뜨리는 게 아닌,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차원종을 막는다고. 단순한 단어의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 뜻은 달랐다. 그리고 제이는, 슬비가 싸우는 이유를 그렇게 칭했었다.
제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싸우는 이유를. 아니, 비단 제이만이 아닐 것이다. 테인도, 유리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겠지.’
“…알았어.”
자신이 너무나 우스워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세하를 보던 슬비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접시를 내밀었다. 방금 전 깎았던 사과가 슬비의 FM적인 생활을 나타내듯 정렬되어 있었다.
“…자, 먹어…뭐야, 그 표정은. 독은 안 넣었으니까.”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접시를 보며 멍하니 있던 세하가, 표독스런 슬비의 말에 퍼뜩 대답한다.
“아니, 그건 아니고…의외였거든.”
“이래봬도 혼자 살고 있는 몸이니까.”
‘…아니, 그게 아닌데.’
분명 솜씨 좋게 사과를 깎는 모습은 의외긴 했지만, 지금 세하가 신경 쓰는 주제는 그 쪽이 아니었다. 슬쩍 접시를 내려다 본 그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왜 토끼 모양인지는 무시하도록 했다.
“…알았어, 잘 먹을…”
그렇게 말하며, 그나마 성한 왼팔로 포크를 들어 올렸다. 이내 포크를 접시에 향하는 세하였지만, 어째선지 그 움직임이 멈췄다. 그것을 보던 슬비가 의아해졌다. 눈앞에 사과를 둔 채로 무언가 망설이는 듯 표정이 굳어지고, 어째선지 얼굴에 홍조를 띤 것 같기도 한 세하의 모습에 관한 의문이었다.
“…저기 말이야.”
평소와 달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에 괜스레 불안해진 슬비가, 가만히 세하의 말을 기다렸다.
“아깐 잘 몰랐는데, 사실 지금 팔이 엄청 불편해. 마비가 된 것 같아.”
“그게 왜?”
“그, 그러니까 말이야….”
분명 말은 슬비에게 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완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 무언가 안 좋은 일을 말할 거라는 증거였다.
여자의 감이란 거…생각보다 잘 맞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먹여줄 수 있을까?”
“…너무 많이 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진 거야?”
“아, 아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단순히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정도라면, 말 다 한 거겠지. 세하 본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진짜 자신이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래봬도 순수한 심정으로 하는 말이라고? 이런 상황에선 소소한 이벤트가…하긴 넌 말해도 모르겠구나. 아…배고프다.”
자신이 즐겨 하는 게임까지 들먹이며 설득하려던 그였지만, 어차피 씨도 안 먹힐 것 같다는 생각에 슬슬 포기할까 싶었다. 불필요하게 자신의 감정을 어필하며, 베개에 몸을 내맡겼다.
“…알았어, 줘 봐.”
“그래, 뭐 역시…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던 세하였지만, 이미 그의 앞에 있던 접시는 슬비의 염동력으로 인해 허공에 떠 있었다. 이내 작은 손으로 포크를 들어 올린 슬비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자신을 보는 세하가 못마땅했는지 언성이 높아졌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는 거야?”
“아, 아니…조금 놀랐는데.”
“미리 말해두지만 네가 생각하는 게 뭐든 틀려. 기껏 깎아놓은 토…사과가 아까워서 도와주는 거니까, 알았으면 어서 입이나 벌려!”
그렇게 소리치는 슬비의 손은, 포크를 찌그러뜨릴 기세로 움켜쥐고 있었다. 적잖이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그에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세하가, 얌전히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이내 포크에 꽂힌 사과가, 까마귀의 배때지에 칼을 꽂듯이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세에 포크가 입 안을 관통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입 안에는 사과만이 남겨졌고,
분명 그랬는데…
“…저기요, 슬비 씨?”
“아직 불만이 남았어? 먹여 줬잖아.”
“…그건 그런데, 직접 먹이는 게 아니라 염동력으로 포크를 움직이는 것도 카운트 해 줘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세하의 눈에는, 폴터가이스트마냥 떠다니는 포크가 들어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슬비는, 이내 보란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정말 말 많네.”
“…아, 그래. 됐어.”
“뭐?”
“됐다고,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던 모양이네.”
‘기대한 내가 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세하. 역시 이 이상은 안 되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마지막 자존심을 위한 센 척을 마구 선보이고 있었다. 한편 갑작스레 태세가 변한 세하를 보며 얘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든 슬비였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팀원이라니까.”
이내 슬비의 손에 의해 다시금 포크에 사과가 꽂혔다.
“다시 입 벌려 봐, 제대로 먹여 줄게.”
“…정말이야?”
“자꾸 뜸들이면 그만둘 거야.”
“아, 알았어.”
다시금 세하의 입 속에 사과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번엔 이 얼음 같은 리더님께서 직접. 단맛과 신맛이 어우러진 사과의 맛이,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어딘가 석연찮으면서도, 기쁘기도 한 심정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다시금 그 때가 떠오른다.
“이세하, 신강고등학교 학생. 외동아들이며 같은 클로저인 서유리, 이슬비와 동급생이자 같은 팀 일원, 한석봉과는 게임 절친이며…석봉이의 추천으로 미연시를 하기도 했고, 아X마X를 하기도 했으며, 석봉에게 다른 작품이 더 있냐며 정보를 얻기도 했고…그리고 또…”
큐브 내에서 만났던, 미래의 자신이라 칭했던 남자. 그리고 그가 주절주절 읊어대었던, 본인이 미래의 세하 자신이라는 증거들.
“팀의 리더인 이슬비를 좋아한다…그렇지?”
녀석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아니,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녀석이 자신의 정보를 토대로 그런 추측들을 하는 거라면, 가능성에 불과한 그 녀석의 생각이 진실이라는 근거 또한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 가능성이었다. 그러니까 반대로 생각하자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겠지.
확신 하냐고 묻는다면 즉답은 못하지만 자신은 이미…그 가능성에 속한 것 같았다.
“…뭘 보는 거야?”
“아무것도.”
자신을 빤히 보는 세하가 거슬려서 표독스레 쏘아 붙이는 슬비였지만, 그 모습에 쿡, 하고 웃은 세하는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그에 비례하여 슬비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언제부터인지, 계기가 뭔지는 모른다. 큐브 내에서 그 가능성을 알게 됐고, 이 병실 안에서 깨달았을 뿐이다. 아마 훨씬 전부터…임무를 수행하던 나날의 하나일수도 있고, 아니면 처음 봤을 때부터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뭐, 천천히 생각하면 되겠지.’
자신은 검은양 팀의 일원이고ㅡ눈앞의,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는 그 팀의 리더니까. 아마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이 관계가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분명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그에 대한 소녀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옛 성인의 명언을 떠올리며, 그 때를 즐겁게 기다리기로 했다.
‘급할수록 천천히 돌아가라, 이건가….’
“머리는, 치료 때문에 밀어버린 모양이네.”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퍼뜩 슬비를 돌아본다. 이내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보고 있음을 깨달은 세하가, 지금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상처 부위를 쓰다듬는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붕대의 촉감이 느껴졌다.
“…뭐, 그렇지. 머리 한 쪽이 크게 찢어졌다나 봐. 붕대를 다시 감는 법은 모르니까, 보여줄 수는 없겠네.”
“…보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지.”
“그래? 왠지 유감스러운걸.”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세하. 슬비는 그에 아랑곳 않고, 한 손으로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못 박았다.
“전혀, 그보다 머리는 언제쯤 예전처럼 자랄지가 더 궁금한걸.”
“예전 머리가 마음에 들었어?”
이유 없이 생글거리며, 짓궂은 질문을 한다. 그런 세하를 뭐 이런 병1신이…하는 눈으로 보고 있던 슬비였지만, 이내 그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얜 왜 이러는 걸까? 무엇 때문에 웃는 걸까? 서로에게 하는 무언의 질문은, 대답 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아니, 빨리 자라지 않으면 가발을 준비해야 할 것 같으니까.”
“…너무한다, 야.”
이내 뭐가 그리 웃긴지, 고개를 돌리며 작게 웃어 보이는 두 명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한창 밤이 깊어졌던 병원은 조용했고 그 병실엔, 두 사람의 웃음소리만이 퍼져가고 있었다.
마치 텔레비전 속의 한 장면처럼, 누군가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한 부분처럼.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