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페이퍼를 쓰자! 완결
삼촌 2015-04-2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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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제이의 롤링 페이퍼를 읽은지 벌써 30분도 넘었다. 더 이상 지체되었다간 차량에 있는 음식들이 전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시식하는 검은양팀의 혀를 농락할 것이다.
"자, 자. 마지막은 유리구나. 어서 종이를 주렴. 유리야."
만일 이 곳이 군대였다면 특AAA급 관심병사는 따논 당상이 되었을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의 세하를 간신히 자리에 앉혀놓은 제이는 그 말을 듣고 기겁해버렸다.
이 지옥같은 롤링 페이퍼의 발안자는 유리였으며, 평소에도 순진무구의 탈을 쓰고 제이를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을 시도때도 없이 발생시키던 소녀가 바로 서유리 아니던가.
제이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갈것같은 옥돌 자기력을 간신히 자제하며 부드럽게 말을 꺼내보았다. 김유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음식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데, 그 점을 이용해서 유리의 롤링페이퍼는 일단은 음식을 먹은 다음으로 미루던가 아님 아예 생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고생의 행동력을 간과하고 있었다.
"네! 4급에 준하는 국가공무원 서유리!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아 참, 마지막이니 만큼 이번에는 제가 직접 읽을게요. 괜찮죠 언니? 네? 네?"
아직까지도 발랄한 기세를 잃지 않은 유리는 어느 새 종이를 들고 김유정이 낭독하던 위치까지 이동해 있었던 것이다.
공간을 제압하는 자가 주도권을 제압하게 된다던가. 제이의 바램과는 달리 김유정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그래, 사실 아까부터 계속 말을 했더니 목이 좀 아파오기도 하니까 이번에는 유리 네가 직접 읽어주렴."
"히히! 고마워요 언니!"
님아, 그 자리를 비키지 마오.
제이는 그 말이 목구멍을 넘어 입 천장까지 닿았으나 결국은 말하지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갈 때까지 가보자구.
"음, 아…. 으으, 막상 말하려니까 조금 부끄럽네, 헤헤"
"그럼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음식을…"
"아니요, 지금 말할게요!"
김유정의 말을 자르고 황급히 유리가 롤링 페이퍼를 읽기 시작한다.
"아아, 흠흠. 일단은 제저씨, 아니아니, 제이 아저씨부터."
드디어 제저씨에서 탈피하는군. 아쉽게도 제이 오빠는 아니지만 벌써부터 기뻐지는걸.
"제이 아저씨! 평소에는 아저씨라고 부를만큼 힘 없고 노티나게 생활하지만, 막상 작전에 들어가면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세심하게 모두를 보살피고 있다는거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랑 세하, 슬비랑 테인이도 아저씨가 힘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무 우리들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도 우리들 못지 않게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아저씨 선글라스 벗은거 보니까 제법 생겼던데요? 나중에 옷도 잘 입고 머리도 스타일 살아나게 바꾸면 오빠라고 불러줄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유정 언니가 아깝지 않게 노력하세요. 파이팅!"
"…마지막 줄만 빼면 완벽했을텐데 말이야. 아무튼 고맙군."
그래, 이것이 롤링 페이퍼지!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사실 제이는 예상을 뒤엎고 나온 정상적인 내용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이 오빠는 웬만해서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인데 눈물이 나오네. 나중에 용돈이라도 챙겨주마 유리야.
"어머 참, 얘는! 그게 무슨 소리니!"
한편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김유정이 유리 앞에서 손을 파닥거려**만, 유리는 배시시 웃으며 "응? 아니에요?"라며 더욱 골려댄다.
"응. 좋은 지적이었어. 서유리. 유정 언니. 저도 빨리 제이 씨와 언니의 사이에 진전이 있어야 된다고 봐요."
그리고 더없이 진지한 슬비의 지원사격에 김유정은 괴이한 소리를 내며 점점 더 늪에 빠져가고 있었지만, 그녀를 구한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리였다.
"그리고 슬비야! 팀의 리더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고도 항상 팀을 생각하며 노력하고 있는 너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너무 임무를 중요하게 여기는건지 상대적으로 팀원들과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는 듯해보여 약간 서운하기도 했어. 그래서 네가 같이 드라마를 보자고 했을 때는 정말 기뻤어! 너도 이젠 팀원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같아서 정말 좋아! 그리고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가지고도 옷을 그렇게 입는 건 범죄야! 나중에 꼭 같이 쇼핑하러 가자! 정미정미도 끼워서!"
"…흠,흠흠! 고,고마워. 서유리. 하지만 딱히 대화에 관심이 없었던것이 아니라…"
"에이, 지나간 얘기는 됐어! 난 지금의 슬비가 좋으니까!"
"……그래."
얼굴에 홍조를 띈 채 슬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유리같은 타입에 약하구만, 우리의 성실하신 대장은.
평범한 소녀같은 모습을 보이는 슬비의 모습에 제이와 김유정은 작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세하야, 너를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흔한 게임 폐인인줄 알았는데, 네가 그 유명한 알파퀸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진짜로 놀랬어. 우리 학교에 있다곤 했지만 너인 줄은 몰랐었거든. 그래서 알파퀸의 아들답지 않아보이는 겉모습에 솔직히 아쉽기도 했었지만, 이젠 너가 사실은 마음이 따뜻하고 착한 애라는 거 알아. 그리고 나도 한 때 검도부의 유망주로 살았었던 만큼, 주위의 시선이 얼마나 부담감이 되는 지도 잘 알고 있어."
거기까지 쉬지않고 읽은 유리는 심호흡을 잠깐 하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으…. 그러니까 네가 신경쓰지 않는 척을 하지만 알파퀸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에 무진장 신경쓰고 있는 걸 나는 알 수 있어. 하지만 남들이 뭐라하건 중요한건 너 자신이잖아? 분명 너네 아주머니도 네가 자신의 이름에 휘둘리는건 바라지 않으실거야. 그리고 위상력가지고 놀리면 좀 어때! 이젠 우리가 있잖아! 그러니까 게임 속 세상에만 빠지지 말고, 슬비랑 나랑 같이 놀러가자! 응? 추신. 그리고 최소한 게임기보다는 나를 중요하게 여기라고!"
유리는 예전 훈프 때의 대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반 장난식으로 쓴 추신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다들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유리와 세하를 번갈아 쳐다보게된다.
그리고 오늘 밤. 갖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상처 받아왔던 소년은 처음으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유리를 바라보며
"좋아합니다. 사귀어주세요."
마치 천사의 강림을 목격한 독실한 신자처럼 무릎을 꿇었다.
"에, 에? 그게 무, 무슨 소리야 세하야!"
물론 자각이 전혀 없는 유리는 뜬금포로 터진 세하의 발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케헥!"
다시 한번 동아리방에 일대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제이는 재빠르게 세하에게 진압용 꿀밤을 먹여 조용하게 만들었다.
근래에 농구만화라도 읽었는지 아까부터 그쪽 관련 대사만 읊어대는구만.
제이는 세하의 머리와 부딪힌 주먹을 털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까부터 세하의 정신이 정상이 아닌거 같아서 말이야. 방금의 말은 신경쓰지 말라고, 유리야."
"아,하하하…. 역시 그런거죠? 난 또 참…."
그럼 그렇지,하며 유리는 안심한다.
"그것보다 소년과 유정씨에 대해서 빨리 읊어달라고. 유정씨의 표정을 보니 곧 음식이 회생불가능의 수준에 도달할것 같은데 말이야."
제 표정이 어때서요,라고 반박하려는 유정씨보다 한 발 빠르게 유리가 발언을 시작했다.
"하,하,하.. 그게요.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내 여기까지 적었지만, 그 시간과 예산의 부족으로 더 이상은 쓰지 못했다고 할까나, 하,하,하…. 미안해요 언니! 테인아!"
"우웅… 괜찮아요. 이젠 편집이 당연한 이 캐릭터에도 익숙해졌으니까요."
묘하게 달관한듯한 독일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보였던 건지, 섭섭함을 토로하려던 김유정은 물론 슬비와 유리는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무언의 합의를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거 처음과 끝은 귀여운 우리 테인이가 맡아야 하지 않겠니 얘들아? 그렇죠 제이 씨?"
"네. 저도 맞는 말이라 생각해요."
"응, 테인아! 아까 마저 못 읽었던거 이 누나는 궁금해서 미치겠어! 그러니까 빨리 읽어주라!"
"유정 누나, 슬비 누나, 유리 누나…."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눈물샘이라도 자극 받았던 걸까. 눈가에 눈물이 조금씩 맺혀가는 미스틸은 마지막 확답이라도 구하듯 제이를 바라본다.
제이는 말 없이 엄지를 치켜들어보였다.
그 모습에, 구원이라도 받은 듯 고개를 떨군 미스틸은 손으로눈가를 훔친다.
"제이 형…."
드디어 형이라고 불러주는군. 것 참. 막판에 훈훈하게 만들긴….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시큰해진 콧잔등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 압도적인 귀여움에 본능적으로 폰을 꺼내 촬영모드에 들어간 세 여자를 바라보며, 미스틸은 창에 꽂아두었던 자신의 종이를 꺼내 두 손으로 잡아 읽을 준비를 한다.
본인은 물론, 보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드는 표정으로 미스틸테인은 자신의 글을 큰 소리로 읽어내려갔다.
드디어 미스틸의 롤링페이퍼 낭독회가 끝나고, 김유정이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가지러 동방을 나가면서 쪼그려 앉아있던 송은이를 발견하고-본인이 실토하기를, 이런 학부모참관회같은 분위기의 공간은 처음이기에 어쩔줄 몰라 밖에서 스탠바이 하고 있었다고 한다-그녀를 붙잡아 같이 음식을 나르고,
마침내 제이가 꿈꿔왔던 화목한 '파티'가 이루어진 짧은 행복이 지나간 후.
늘 그래왔던 것처럼 검은 양팀의 당직을 맡았던 제이는 어느 새 밖에서 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직 햇살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새가 지저귄다는 것은 곧 머지않아 태양이 떠오른다는 신호.
뭐, 파티도 했던 날이기도 하고, 간만에 분위기를 내서 해돋이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제이는 자신의 발상에 스스로 감탄하곤,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아까부터 눈길도 주지 않았던 TV를 끄고 제이는 동아리 방을 나서 옥상으로 향한다.
옥상문이 잠겨져 있어서 순간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서면 남자가 아니지. 제이는 약간 힘을 줘서 문고리를 돌렸다.
호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옥상 문이 고장나는거야 세상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상 아니겠어? 나는 모르는 일이지, 암.
제이는 괜시리 휘파람을 불며 옥상에서 해가 떠오를 법한 방향으로 이동한다.
누군가 말하기를,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꾸준히 가지고 살아라는 뜻…이었나?
물론 현실에선, 해가 뜨기 직전이 되면 이미 보일건 다 보이는 밝기가 된다. 그러니 될 떡잎은 이미 싹수가 보인다는 말이 더욱 현실적이겠지…만.
"엇,흠. 내가 왜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지?"
제이는 알수없는 멋쩍음에 머리를 벅벅 긁어버렸다.
새벽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꽤 공기가 차가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라도 가져올걸 그랬나.
그럼 영화의 한 장면처럼 커피를 마시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도시 남자를 연출 할 수 있었을텐데.
"쩝. 역시 세상은 생각하는 대로만은 되지 않는군. 뭐, 그것이 인생의 참맛이지만 말이야."
"인생의 참맛을 따지기 전에 본인이 어떤 모습인지나 좀 자각하시죠?"
갑자기 등 뒤에서 날라오는 일침에 제이는 깜짝 놀란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뜻밖이어서 더욱 그랬다.
"쿨럭, 유, 유정씨?"
"왜 귀신이라도 보는 표정으로 절 보는 거죠?"
저도 그런 반응엔 상처받아버린다구요? 힐난하는 어투로 그렇게 말하며 김유정이 제이에게 다가왔다.
"자요. 이 추운 댓바람에 무슨 고민이 있길래 옥상으로 온 거에요?"
"하,하,하. 그게 말이지. 이래저래 시끌벅적한 밤이었잖아? 그 드라마나 만화에서도 그렇듯이, 이런 날의 엔딩은 옥상같은 곳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아야 제대로 된 결말 아니겠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김유정은 얼토당토 않은 말을 들었단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보았지만, 제이의 선글라스에는 한치의 농담도 서리지 않았다.
"…어휴, 정말 못말리겠네요. 이러신 분이 차원전쟁 땐 어떻게 살아남았담."
"글쎄, 차원종들도 못말려서 살아남은게 아닐까?"
"됐고, 이거나 마시면서 조용히 있어요."
나름대로 비장의 조크였건만, 제이는 적잖게 상처받은 기색으로 김유정이 건네는 종이컵을 받는다.
"응? 이거… 커피인가? 유정씨, 난 아메리카노 아니면 안 마시는거 알지?"
"알고 있어요. 내가 괜히 제이씨의 관리 요원인줄 알아요?"
김유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꾸하였지만, 곧 제이가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얼굴이 빨게졌다. 날이 어두운데다 선글라스를 낀 제이는 깨닫지 못했지만.
"뭐, 뭐에요? 저 정도 엘리트 요원이라면 담당 요원의 기호식품 정도는 꿰뚫고 있거든요? 따,딱히 제이씨의 기록부만 외우고 있다거나 그런게 아니라구요!"
"아, 음. 그게 아니라 말이지. 유정씨, 지금 이 시간에 웬 일이야?"
갑작스러운 등장에 질문하는 타이밍이 늦었지만 원래는 제일 먼저 물어봤어야 했던 말이었다.
김유정의 출근 시간은 보통 지금보다 2~3시간은 늦는 시간일텐데, 웬일로 오늘은 이렇게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온 것일까? 혹시 긴급사태라도?
그런 제이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김유정이 대답한다.
"다행스럽게도 긴급사태는 아니네요. 단지 은이씨랑 둘이 2차를 가기로 했는데 거기서 뭐랄까…. 시간을 생각보다 많이 소비했다고나 할까."
"아하, 건물 닫을때까지 마셔버렸구만?"
"으으, 이미 배부른 상태에서 갔는지 술이 오늘따라 유난히 잘 받아서…"
김유정은 후회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시간이 이래서.. 그냥 여기서 잠깐 눈 붙였다가 일어나는게 더 나을꺼라 생각했죠. 그래서 동방으로 왔는데 제이씨는 없고 옥상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길래 와 봤는데, 이렇게 폼 잡는 아이가 있었네요."
"쿨럭, 폼 잡는 아이라 미안하군. 그나저나, 이렇게 다 큰 처자가 함부로 집 밖에서 자면 큰일 난다고"
"무슨 애늙은이같은 사고방식이에요 그게? 그리고 여긴 제이 씨가 있을테니 괜찮잖아요."
"내가 있어서?"
제이는 그저 장난스럽게 놀릴 생각으로 말꼬리를 물은 거였지만, 김유정은 다시금 얼굴이 상기된다.
"아, 아니. 제이씨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거든요? 그런게 아니라, 그게. 어디까지나 남자가 옆에 있으면 든든하다는 거지, 아,아니아니아니! 아무 남자를 옆에 끼고 싶다는 것이 아니고! 아는 사람만 편한거지만 물론. 어, 그러니까 제 말은..."
"알겠어. 알겠어. 진정하라구 유정씨. 유정씨가 무슨 말 하고 싶어하는 지 알아. 내가 잘못했어."
이거 잘못하면 또 녹즙 한번 더 짜야겠구만. 그렇게 판단한 제이는 김유정의 말을 강제로 봉했다.
"우우…. 하여튼 제이씨가 나쁜거잖아요!"
그렇게 말한 김유정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제이의 등짝을 때린다.
"아얏! 진심으로 때리면 어떡해, 유정씨!"
"진심 아니었거든요?!"
내가 무슨 괴력녀인줄 아나, 그런 생각이 써져있는 표정으로 김유정이 제이를 흘겨봤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피곤할테니 들어가서 잠시라도 눈 붙이는게 어때, 유정씨? 가뜩이나 주말이라 일할 기분도 안 날텐데, 밤 새고 곧바로 작업이라니 더욱 능률이 안살거라고?"
"후우, 알았어요. 저는 들어가볼테니 제이씨는 여기서 떠오르는 해라도 구경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출입구로 걸어가던 김유정은 몇발자국 가지 않아, 다시 몸을 돌려 제이에게 다가왔다.
"아직 할 말이 남아있어, 유정씨?"
"제이씨가 자꾸 이상한 조크나 해대서 까먹었잖아요!"
"이상한 조크라니, 나의 조크는…"
다시 김유정의 손이 올라오고 있어서 제이는 말을 흐렸다.
가만히 볼을 긁는 제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김유정은 한숨을 쉬며 옆구리의 백을 뒤적거리더니 종이를 한장 꺼낸다.
"자요! 여기서 다 읽은 다음에 태워버리시거나, 저한테 돌려주셔야 해요, 꼭이에요?"
"이게 뭔데, 유정씨?"
의아해하는 제이의 질문은 무시한채 김유정은 그녀답지않게 매우 빠른 걸음으로 출입문을 향해 도망치듯 움직였다.
언젠가, 구로역에서 같이 작전활동을 했을 때보다도 더욱 날쎄진 몸놀림에 제이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저 움직임이 진정 하이힐을 실은 여성에게서 나올 수 있다니. 머지않아 알파퀸을 이은 베타퀸이 나올지도 모르겠군.
"…음. 지금건 괜찮았어."
언젠가 누님한테 방금의 드립을 쳐보고 싶은걸.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갔다.
혹시나 어제 있었던 사건 때문에 시말서를 써야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종이에 써져 있었던건. 어제의 사건의 연장선에 있는 물건이었다. 다름아니라, 바로 김유정이 쓴 롤링 페이퍼.
"……."
제이는 선글라스를 벗은 뒤 주변을 둘러본다. 자재품들을 몰아둔 잔해에서 행사용 플라스틱 의자를 발견한 제이는 옥돌로 그것을 끌고와 대충 먼지를 털어낸 뒤, 한 손엔 김유정이 준 커피를, 한 손엔 롤링 페이퍼를 들고 의자에 앉았다.
"……훗."
말이 롤링 페이퍼지, 그녀 또한 다른 애들과 똑같이 롤링 페이퍼의 범주를 벗어난 글재주를 뽐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가 건네준 종이는 제이를 향한 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도 평범하다. 특별히 평소에 하던 말과 딱히 다를 것도 없다.
그렇지만 제이는 괜시리 커피를 들이마신다.
"또 이런건 언제 썼는지."
어제 아이들이 있었을 땐 당연히 쓸 시간이 없었겠지. 그런데 그 다음엔 곧바로 송은이와 2차를 갔다고 했으니 더욱 쓸 틈이 없다. 유정씨의 술버릇상 마시면서 이걸 쓸리가 없고, 무엇보다 송은이가 이 일생일대의 놀림감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을리가 없는데?
"아…어?"
문득 김유정의 술버릇을 상기해낸 제이는 곧바로 가정을 세워본다.
물론 그럴리가 없겠지만.
전설적인 전쟁영웅이자, 울프팩의 팀원이었던 제이의 육감은 소거법으로 단 하나 남은 가설의 신뢰도를 대차게 올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방금 유정씨의 얼굴에 다크써클이 유난히 짙었지.
"…하, 이거야 원. 답장이라도 써야하는건가. 피곤해 죽겠는데 말이야"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굳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알리바이를 숨기는 김유정의 의도는 모른다.
설사 술을 마셨다는게 거짓말이 아니라 해도, 그렇다면 더욱 더 잠자는 술버릇을 참아내면서까지 이렇게 평범한 글들을 써내려간 김유정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런데다가, 그렇게 다크써클인지 아이라인인지 분간도 안되는 눈을 하면서까지 일찍 회사로 출근하고, 자신을 찾아 종이를 건넨 김유정의 행동은 그야말로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래, 나는 몰라야 하는데.
자신은 그런 감정과는 전혀 연이 없어야 하는데.
"……."
제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마천루처럼 솟은 신서울의 건물들 사이에서, 드디어 어둠을 어그러뜨리며 붉은색 햇살들이 창문들 사이로 비쳐보이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해를 직접 보려면 몇시간은 더 있어야겠군. 제이는 건물들의 배치를 보며 그렇게 계산해본다.
"…그렇다면, 해를 보기전까진 여기에 있어보도록 할까."
재킷에 볼펜을 넣고 다니길 잘했군. 제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김유정이 준 종이를 뒤집어 뒷면을 응시했다.
"후, 하지만 뭐라고 적어야 할지…."
롤링페이퍼에 적은지 몇시간이 지났다고, 첩첩산중이로군.
그렇게 잠시 고민하다, 점점 강렬해지는 태양빛에 다시 선글라스를 쓰던 제이는 문득 떠올렸다.
…그렇지. 우리의 관리요원 김유정씨라면 자신이 관리하는 요원의 이름을 모른다는게 말이 안되지.
제이는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볼펜을 들어 힘찬 필체로 적는다.
이젠 세상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아는, 자신의 이름을.
중천에 걸린 해가 쨍쨍한 자신의 빛을 신서울에 고루 흩뿌리던 어느 날.
어떤 건물의 옥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여자를 위한 롤링 페이퍼를 쓰는 남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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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리 한복 헤어, 신발 삽니당. 팔아주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