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목표 확인. 적을 섬멸합니다.'
인센디어리 2015-04-22 4
오늘도, 이슬비는 훈련에 임한다.
*
사고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찾아온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전까지 벌어졌던 모든 사고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사고는 평범하게 지나가고 있던 일상 속에 예고 없이 난입했다. 강남 GGV에서도 그랬다. 이전 구로역에서도 그랬다. 신강 고등학교에서도 그랬다. G 타워에서도 그랬다.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사고인건가.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 일어나서는 안 되고,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하지만,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터지는 것. 사고.
사실, 사전적 정의로 따지면, 내가 겪어온 일들 전부가 사고라고 표현하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불행하기만 했던 일만 있었던게 아니었으니까. 새옹지마라고 해야 하나. 타인의 아픔을 알게 되고, 본인의 약한 곳을 자각하는 건 분명 힘든 일이지만, 얻는 게 있다. 사고라는 단어 대신에 사건. 그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과는 다른 특별한 일. 그렇게 표현하는 게 좋겠다.
[사용자 정보 : 유니온 정식 요원 이슬비. 인증되었습니다. 이슬비 요원 전용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백그라운드 시뮬레이트 진행 중.]
감정이 없는 무감각한 기계음이 귓가에 장착되어 있는 이어폰 형태의 통신기를 통해 전해져오는 것을 신호로, 이 곳의 공간이 무언가에 침식되어가는 것처럼 변해간다. 체육관, 그리고 돔경기장을 섞어놓은 것 같은 밀폐된 분위기. 발생하는 즉시 수리하긴 하지만 완벽히 지우지 못해 차원 압력과 위상력을 버티지 못하고 곳곳에 균열이 가 있는 흔적. 엄중히 내부를 격리시키고 있는, 한 눈에 봐도 두꺼워보이는 잠겨진 출입문들. 유니온의 특수훈련장, 통칭 '큐브'라고 불리우는 시설이다. 훈련을 위한 시설이기에 안전성을 최우선해서 그런지, 미적 센스는 전혀 반영이 되어 있지 않은 듯 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흐르던 시간도 죽어버린 것 같은 이 곳이 변화하여, 폐허가 된 도시로 바뀐다. 본래는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위풍당당하게 기능하고 있어야 할 도시인 신서울. 그러나 차원종들의 습격으로 인해 황폐화되었다ㅡ라는 설정으로 세팅해두었다. 실제로 신서울의 일부는 이런 모습이다. 부서진 도로들. 무너져버린 건물.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여있는 가로등과 불타고 있는 주택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찾을 수도 없다.
[차원종 시뮬레이트 진행 중.]
곧 훈련이 시작된다. 복장은 조금 더 편한 복장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항상 난 유니온의 정식 요원 차림 그대로 훈련에 임했다. 하얀색 셔츠에다가 파란색 넥타이, 그리고 검정 재킷. 활동성을 중시하기 위해 바지 대신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만 빼면 말 그대로 정장이다. 물론 명찰도 가슴에 반듯하게 달았다. 훈련도 실전처럼이라는 모토 때문이기도 했지만, 검은 양팀의 리더로서 책임감을 항시 놓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사실을 명심했다. 복장이 흐트러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키에에에에에에엑ㅡ!
오래지 않아, 이 살풍경한 장소를 만들어낸 주범들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출현하고, 뒤이어 그것들의 포효가 사납게 공기를 진동시킨다. 그것들의 이름은 차원종. 울음소리도 가지각색이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는 게 있는가 하면, 가수나 악기 뺨칠 정도로 굵거나 풍부한 소리를 내는 개체도 있었다. 단 하나의 공통점은, 듣는 모든 인간들에게 본능적으로 공포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둘씩 나타나는 차원종들을 보면서, 가볍게 숨을 들이마쉬며 단검들을 양 손에 쥐었다.
"목표 확인. 적을 섬멸합니다."
매번 작전을 수행할 때마다 되뇌이는 이 말도, 이제는 밥을 먹기 위해 수저를 드는 것처럼 당연한 절차가 되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부모님을 살해한 차원종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적을 죽이기 전에 내가 죽지 않게. 차원종이란 존재가 다시는 이런 비극을 일으키지 않도록. 본격적인 전투 전에 몸 안팎에 흐르는 위상력을 조정하는 동안,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을 잠시 떠올린다.
*
"슬비야, 오늘도니?"
"네, 유정 언니."
"조금 더 쉬지 그래.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다들 휴식을 취하고 있잖아? 아스타로트도 물리치고 아직 재해 복구 프로젝트가 시작하려면 더 시간이 있어야 하니까. 그동안만이라도..."
확실히 우리 검은 양 팀은 대단한 일을 해냈다. 단기간에 이런 공적을 세운 클로저들이 차원전쟁 개시 후 몇이나 될까. 자부심을 가져도 되고, 또 충분히 느끼고 있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다. 아직 차원종들은 많이 남아있다. 내 힘으로 쓰러뜨릴 수 없는 차원종들, 가령 애쉬와 더스트도 아직 무리지 않은가. 그 둘보다 강한 차원종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버지....어머니....'
내버려두면, 또다시 나와 같은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그래서 여태까지 뼈를 깎는 노력과 연습을 반복했다. 나는 다른 검은 양 팀원들에 비해 위상 잠재력이 낮다. 다시 말해, 재능이 부족하다. 수행을 게을리 하면 순식간에 도태되고, 유리, 제이 씨나 미스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그리고.....
*
ㅡ와우, 형이랑 누나가 손 잡으셨다! 드디어 사이가 좋아지셨군요! 그럼 전 훈련하러 가볼게요. 계속 그렇게 손 잡고 있으세요, 아셨죠?ㅡ
ㅡ........ㅡ
ㅡ........ㅡ
지금 와서 그 때의 일이 왜 떠오르는 걸까. 나는 왜 그 녀석이 계속 신경 쓰이는 걸까. 처음 만났을 때의 첫 인상은 최악이었는데. 종일 게임기나 붙잡고 있고, 집중하라고 하면 자기까지는 진지해질 필요가 없다라는 말이나 하고. '알파 퀸'이라는, 전설적인 클로저의 아들로 태어나 엄청난 재능이랑 잠재력을 가졌는데도 그걸 썩히기만 하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동경하던 영웅의 아들이라고 해서 내심 기대하고, 또 질투했는데도, 그런 의외의 모습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싫어했었다. 하지만.
'이해하게 되었어.'
오랜 시간동안 '검은 양' 팀으로 활동하면서,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마치 링컨 대통령에 이어 미국 대통령에 즉위한 앤드루 존슨이 처했던 운명과도 같았다. 그에게 어머니의 이름은 축복이 아닌 족쇄였다.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져 주변의 기대를 어렸을 때부터 한 몸에 받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을 받을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비뚤어진 거고. 난 클로저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정말 피눈물을 흘리며 단련해서 역량을 끌어올렸는데. 생각해보면 나와 완전 극과극이다.
그래서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비뚤어짐을, 언제부터인가부터, 잡아주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빛에 가린 그림자 속에 과도하다 못해 상처까지 입히는 기대를 받으며 방황하던 도중에, 우리 검은 양을 만나게 되었다. 신서울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온갖 난관을 겪던 그에게, 처음의 그 철없고 나약한 어린 아이 같은 일면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머니와는 다른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남들의 시선과는 상관없니 스스로 노력하면서 꺾이지 않는 의지를 관철하는 그를 난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주고, 함께했다.
"나....정식 요원이 됐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정식 요원의 복장을 입고 나타난 그를 보고 난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유니온의 정식 요원 승급 심사를 통과했다. 더이상 훈련생 시절 같은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직접 마주하니 뭔가 여러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걸 감추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놀라움과 감탄, 그 다음에는 부러움, 그 다음에는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질투심. 마지막에는.....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이었다. 호감 그 이상으로 그에게 향하던 긍정적인 감정. 대견함과 칭찬 같은 그런 것들은 그게 원래부터 가식이었다고 누군가가 비웃기라도 한 듯이, 눈이 녹는 것처럼 거짓말 같이 사라져버렸다.
검은 양 팀을 지휘하는 리더로서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고 단련을 해왔지만, 언젠가는 남을, 세하의 짐이 되어 또 어떤 비극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도. 그러한 상실감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크기로 날 덮쳐왔다. 그건 동기 부여를 넘어서서 내 삶을 괴롭게 만드는 아픈 자극이었다.
*
짧은 회상을 끝낸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서, 고개를 살짝 흔들어 먼지를 털어내듯 내 약한 모습을 지워버린다. 그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앞으로 있을 훈련에는 방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안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이 잠깐 동안의 평화 동안 더 힘을 길러야 해요."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조심하고, 다칠 정도로 하면 안 된다?"
"걱정 마세요. 심려를 끼치게 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런 나를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지만, 끝까지 말리지는 못하는 유니온의 관리 요원, 김유정 언니. 임무를 받을 때마다, 그리고 같이 있으면서 항상 느꼈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다. 맡은 직무 그 이상으로 우리 검은 양 팀을 위해 발벗고 나서주고, 챙겨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유니온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내가 훈련을 위해 큐브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 반대를 흘리면서 금쪽같은 자신의 휴식 시간을 쪼개서 내 훈련을 모니터링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는 위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행여나 무슨 문제라도 일어날까봐. 특히나 지난번 정식 요원 심사 때 내가 무리한 이후로 한시도 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더더욱 노력하지 않을 수 없어."
각오를 다지듯,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
정식 요원이 되기 위해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더욱 더 노력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세하와는 다르게, 남들보다 한참 더 노력하지 않으면 금받 뒤처지는 게 나니까. 밖에서 보이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말릴 정도로, 그리고 안 보이는 곳에서도 쉬지 않고 단련을 했다. ** 듯이 차원종을 쓰러뜨리고, 작전을 수행하고, 끝내 유니온에서 2차 승급 제의가 왔을 때는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 결국 합격했다.
'드디어.....드디어....!'
유니온이 지급한 정식 요원 명찰을 손에 꼭 쥐고, 품에 안았을 때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절대로,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합격 통보를 듣고 정식 요원을 위한 보급품을 수령받았을 때는, 이제 되었다라는 생각에 그대로 쓰러질 뻔했지만, 아직은. 그 전에 해야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심사 직후, 그동안의 고생을 지켜본 유정 언니가 강제로라도 클로저를 위한 의료 시설에 나를 끌고 가려는 걸 피해서,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검은 양 팀의 대기실로 향했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간 그 곳에는, 임무를 마치고 쉬고 있는 세하가 있었다. 다른 이들은 각자의 사정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단 둘뿐이라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왠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다는 거에 안심하면서, 난 겨우 겨우 갈아입은 정식 요원 복장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누구....어라?"
나를 보자, 오늘도 게임기를 붙잡고 있던 세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0.1초의 망설임은 있었던 것 같지만, 게임기를 책상 위에 두고 일어서서 내게 다가오는 걸 보고, 그 정도면 만족해ㅡ라고, 나는 생각했다.
"너도 정식 요원이 된 거야? 오오,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결국 됐구나! 축하해! 정말 수고했어!"
밝은 웃음을 짓는 얼굴에 담겨있는 순수한 감탄이, 나를 향한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하게 여겼으니까. 나와 같은 나이의 또래가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남을 위해 기뻐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리가 말해주었던 것과 같아. 자신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즐기는 것 그 자체를 사랑하는 천진 난만한 모습.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머리 속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겨우 너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네."
"슬비야?"
비틀ㅡ
후에 반드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가슴 속에 꾹 참고 참아두었던 말을 토해내자, 둥근 실타래가 굴러가듯이 순식간에 몸을 지탱하던 정신의 끈이 스르르 풀렸다. 유니온이 합격 여부를 판단하는 거지만, 그의 웃음과 칭찬을 듣고 나서야 정식 요원으로 정말로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짐이 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과, 그 이상으로 따스하게 내 마음을 적셔주는 무언가의 감정으로 인해.
"야, 이슬비. 너,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정신 차려!"
'다행이야...'
세하의 말은 끝까지 듣지 못했다. 바로 정신을 잃었지만, 난 바닥에 넘어져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쓰러지려는 내 몸을, 그토록 옆에 서 있고 싶은 누군가가, 따뜻하게 받아주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제는, 곁에 서 있을 수 있어.
*
캬오오오!
두두두두두두두
마침내 이 자리에 현현한 진짜 차원종처럼 만들어진 입체영상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다시 괴성을 지른다. 이번에는 바닥을 울리는 둔중한 발걸음 소리까지 뒤따라온다. 여기 서 있는 나한테까지 그 진동이 전해질 정도다.
스윽ㅡ
고개를 돌려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그것들을 정면으로 쳐다본다. 거리가 시시각각 좁혀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 여유는 있다. 그런데도 저것들의 악의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정말 현실처럼 똑같이 구현화한 큐브의 힘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격렬한 증오가 끓어오른다. 이것이 훈련이고, 적이 입체영상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방금 전 밖에서 품었던 것과는 180도 다른 싸늘한 감정은 사그라들지 않고 휘몰아치는 격류처럼 내 마음을 휘젓는다.
으득.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차원종들이, 각자 들고 있는 무기, 혹은 몸을 이용해서 공격을 하려는 순간, 그것들이 내지르는 괴성과 포효 속에서 나는 똑똑히 들었다. 내가 내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가는 소리를. 그와 함께, 난 마음을 이미 가득 채운 증오심을 툭 던지듯이 내뱉었다.
"무릎 꿇어."
*
끼엑?!
콰앙ㅡ!!!!!!!!!!
막 슬비에게 도끼를 내리치려던 덩치 큰 트룹 대장이 그 자세 그대로 위로 뜨더니, 상하가 반전되어 꼴사납게 바닥에 처박힌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녀 주위에 생성된 푸른 원 모양의 장판 위에 있던 다른 차원종들도 달려오면서 낸 우렁찬 소리에 비해 힘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뒤집혔다.
그오오오오!
예상치 못한 일격에 화가 더 났는지, 몸을 일으키면서 트룹 대장은 성난 소리를 냈다. 역전된 중력의 힘을 이겨내기 위해 용쓰는 그것의 몸 여기저기에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진다. 비록 큐브가 만들어낸 입체영상일지라도, 그것 안에 세팅된 공격 프로그램은 실제 차원종의 인간을 향한 증오 못지 않았다. 포효를 지르고 이빨과 함께 적의를 드러내는 것도 모두 똑같았다. 가상이지만 현실의 법칙은 똑같이 적용되었다.
고오ㅡ
그러나, 현실의 법칙이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차원종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다운된 상태에서 기상하여 공격할 때까지의 틈은,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유니온의 '정식 요원'에게는 차고 넘치는 시간을 준 거나 다름없었다. 중력장이 사라지고, 트룹 대장이 다시 공격하기 위해 일어나서 도끼를 잡았을 때, 그것은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진 것을 느꼈다. 자신을 감싸듯 짙게 드리운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것은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다...."
이슬비는 어느샌가 허공 위로 떠올라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그림자로 우람한 체구의 트룹 대장을 가리기에는 너무나도 차이가 크다. 그리고, 트룹 대장의 눈은 슬비가 아닌, 그녀 위에 그림 같이 그려진 소환진에 가 있었다. 원 모양으로 점멸하던 소환진은, 곧 그것을 비집고 나오려는 그림자의 본모습을 보여주었다.
"짓눌러버리겠어."
쿠콰콰콰콰콰콰!!!!
나지막히 중얼거린 말과 함께 슬비가 들어올린 손을 밑으로 긋자, 트룹 대장도 삼켜버릴 거대한 크기의 시내 버스가 밑에 있는 차원종들을 덮쳤다.
*
"슬비 양.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무슨 일이시죠, 제이 씨?"
"매번 그렇게 훈련을 비롯한 단련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지? 내 생각에, 건강을 고려한다면 슬비 양은 조금 더 자신을 편하게 해줘도 될 것 같은데."
"그건....."
슬비가 말을 흐리며 대답을 주저하는 것을 보고, 제이는 내심 자신이 걱정하던 것이 맞았나싶었다. 이슬비. 검은 양의 리더인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리고 그녀의 과거사를 들었을 때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복수'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나약하다고 생각하며 채찍질하고 있다는 것을.
슬비를 보고 있으면, 제이는 가슴이 아파왔다. 그가 조금 더 강했으면, 이런 아이들이 하나라도 더 줄었을 텐데. 한창 꽃다운 나이에 오로지 복수만을 생각하는 소녀라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올라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과 노력을 했을지는 검은 양팀 중에서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다행히도, 그의 지도와 여러 난관을 거치면서 슬비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성장했지만, 그는 아직 그녀가 복수라는 목표만 보고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다가 끝내는 파멸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광기가 결국 망쳐버린, 차원전쟁 동안 그가 보아온 숱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자신처럼.
하지만.
"끝까지, 옆에서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에요. 노력하지 않으면 금방 뒤처져버린다구요?"
자신을 돌아보며, 싱긋 미소짓는 슬비를 보면서, 제이는 자신이 뭐라 말해도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조금은 다행이었다. 지금의 슬비에게서 보이는 감정은, 집착 같은 게 아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중에서 가장 축복받은 종류였으니까.
무엇보다 그녀의 아들이라면, 저 아이를 옆에서 든든하게 이끌어주고 지탱해줄 수 있을 테니까.
".....무리하지 마라, 슬비야. 건강이 제일이다."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고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말을 준비해왔지만, 끝에 제이가 꺼낼 수 있었던 말은, 입버릇처럼 그가 말하고 다니던 그 한 문장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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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슬비는 훈련에 임한다.
"목표 확인. 적을 섬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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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볼 수록 슬비는 챙겨주고 싶은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