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Dimension-Conflict] 백린의 앨리스 (Prologue)
AngryTeinn 2015-04-22 0
어떤 아이가 기절한 체 서 있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눈꺼풀의 묵직함을 천천히 떨쳐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잠에든지 꽤 오래됐단 걸 눈치챈 아이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겨우겨우 눈꺼풀을 들러 올려 시야가 조금이나마 트이자 조급한 맘에 얼른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안타깝게도 목 주변이 너무나 따가워서 구석구석 살펴보진 못했다. 목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따가워 조금만 움직여도 살가죽을 벗겨지는 것만큼 아팠고, 또 가슴과 배 부근은 축축하게 젖어있기까지 했다. 몸이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다. 음료수처럼 고통과 찐득찐득한 짜증이 한데 섞이자 아이는 더 초조해졌다.
아이가 눈을 떴을 때 본 세상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어둡고 탁한 심해 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맑은 진주 알 같은 아이는 본인이 심해 같은 현실과는 몇 동이나 떨어진, 무의식과 고뇌로 가득 찬 우주 속에 갇혀 있었다. 지금 이 아이는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린 것이 너무나 많다; 이런 아이의 순진무구함에 반한 현실은 지금까지 계속 아이를 탐할 궁리만 해왔던 것이다.
‘어떤 욕심쟁이가 달님을 한 조각 남김 없이 다 삼켜버렸나? 바닥엔 빛이 티끌만큼도 걸쳐져 있지 않고, 까만 하늘은 쪽빛을 잃은 지 오래고, 거기엔 구름 한 점 걸려있지 않아.’
텅 빈 아이의 두 눈엔 서리 낀 바람의 감촉이 매만져졌다; 아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아이만의 결정적인 확신이었다. 어둠 속에선 아이의 두 눈만 반짝였다. 아이를 감싸고 있는 우주엔 온통 검은색, 멀찍이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불어오는 서리바람, 은은한 시냇물 소리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아이는, 몹시 불안해했다. 헌데 아이는, 몹시 불안해했다.
조금 겁이 난 아이는 몸의 통증이 약간 가시자 마자 (그래도 몸은 불에 지져진 것마냥 화끈거렸다) 행여나 통증이 다시 심해질까 봐 두려워 퍼뜩 주변을 훑어 보았다. 좌, 우엔 아무것도 없었다. 위, 아래도 마찬가지. 용을 써서 뒤쪽도 간신히 쳐다 보았지만,
‘다행이야.’
불행히도 아이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헌데,
‘그럼 앞쪽에도 당연히?’
고개를 간신히 들어 확인했다. 불행히도 그곳엔 작은 점 하나가 찍혀있었다. 하얀색 티끌이 사방팔방 정신 없이 돌아다니자 순간 아이의 가슴이 덜컥 멈춰 섰다. 몇 분 동안이나 심하게 울렁이던 심신의 물결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생각해보니, 저 작고 보잘 것 없는 티끌이 아이에게 해를 끼칠 리는 없었다. 잠시나마 안도하던 아이는 또다시 티끌에게 겁을 먹고 말았다. 갑자기 사방팔방 알짱거리던 티끌이 우뚝, 한곳에 박혔다.
‘…’
갑작스런 행동에 긴장 하다가, 티끌이 다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이는 경계를 낮추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적이 가득하고 모든 것이 멈췄거나 존재하지 않는 이 죽은 우주에선, 아이 이외에 살아있는 것은 매우 기괴한 것이었다.
진정되고 나서 아이는 눈을 스르르 감아보았다.
‘생각을 해봐야 되,’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망각한 아이. 헌데 이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아이에겐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활발하던 티끌의 움직임은 아예 멎었고, 따라서 은은하던 서리바람도 멎고, 들려오던 귀뚜라미 소리도 죽어버렸다. 주르륵, 주르륵, 후드득. 오직 시냇물 소리만은 멎지 않았다. 불현듯 몸이 다시 아파옴을 느끼자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아야…’
몸을 여전히 축축한 배 앞쪽으로 살짝 숙이자 발 밑 근처에서 비린내가 올라왔다. 발을 살짝 뒤로 뺐더니 찰랑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욱,’
비린내 치곤 웅덩이의 냄새가 끔찍하게 역겨웠다. 냄새라는 소리와 색깔 이외의 것을 발견하였으니 아이는 탐탁지 않았으나 그것을 대견하게 여겨줘야만 했다; 뭔가 새로운 정보를 가르쳐주진 않았기 때문이다. 웅덩이는 바람이 멎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찰랑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냄새일까?’
그 웅덩이의 정체가 궁금했었나 냄새를 계속 맡고 싶진 않았다. 최대한 맡지 않으려고 노력했거니와 그런 악취 따위에 이곳에 관련된 실마리쯤에 준하는 의의를 두고 싶진 않았다; 실로 현명한 판단 이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류의 비린내는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채진 못했다. 만약 그것의 정체를 미리 알아냈더라면, 아이는 제 혀를 베어내 지 풀에 꺾였을 것이다.
마치 학생의 시험을 훼방 놓으려는 교사처럼, 아이에게 눈치를 챌 틈을 허락하지 않은 티끌이 점점 커져만 갔다. 마치 형광색의 개미들이 그 티끌을 중심으로 우글거리듯 천천히 아이의 코앞에 성인남성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래서 이제 우주엔 아이와 빛나는 형체, 이렇게 도합 둘.
환상을 보는듯했다, 웃기게도 아이가 서있는 공간 그 자체가 환상이지만. 그 형체는 아이가 전에 보았던 그 어떤 빛보다도 더 크고 밝게 빛났다. 헌데 이상하리만큼 아이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그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아이가 그 형체의 모습을 미쳐 파악하기도 전에 그것이 다짜고짜 질문을 날렸다.
“넌 누구니?”
“네?”
느닷없는 질문이 초람이는 조금 당황했다. 형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에게 다시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니?”
“…”
아이는 알 수 없는 질문에 조용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아직 본인에 대한 실마리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 초람이는, 답을 모르는 질문에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형체는 질문에 답하기 전까지 계속 내 앞에 우뚝 서있을 작정인가보다, 라고 아이는 생각했다. 자기 앞에 누가 서있다는 것이 조금 거슬렸다. 어느 순간부터 아픔도 말끔히 사라진 듯 했다, 언제 또다시 발병할지도 모를. 아픔에 벗어나는 건 아주 잠시, 또 아주 잠시 뿐이란 걸 아이는 깨닫지 못했다. 그래도 정신이 더 말끔해지니, 문득 아이는 깨달았다.
‘어쩌면 아주 간단한 대답만 해줘도 되는 것일지도 몰라. 어쩌면, 쉬운 질문을 내가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가?’
본래 초람이는 살아 생전엔, 혼자 고민하고 혼자 지내는 데에만 골똘하던 그런 아이였다; 물론 높으신 분들은 알지 못했었다. 항상 그래왔듯이 아이는 어느새 또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 아이는 무얼 말할 것인지를 결정했고 확신에 목소리로 그것을 말했다.
“천사님,”
“?”
형체는 다시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저는요.”
“…”
“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이의 말에 대답하는데 영겁의 시간이 걸렸다. 형체가 비로서 말문을 열었다.
“정말?”
매우 뜻밖이었다. 아이는 또 다른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다; 아이는 내심 “그렇다”, “정답이로구나”따위를 원했다. 질문에 또 질문이 잇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자니 슬슬 짜증이 났다.
“네가? 사람? 정말로?”
매우 짜증이 났다.
“…”
“아이 참,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넌 괴물이잖아? 넌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던 괴물이잖아?”
아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무어라 반박하려 했으나, 입이 반쯤 열리다가 다시 닫혀버렸다. 단순히 말문이 막혔던 것일까? 아이는 괴물이란 뜻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괴…물?”
“응.”
괴물이라고 그것이 아이에게 말해줬다. 왜? 그것이 아이가 괴물인 이유를 말해주기까지 또 반만년의 시간이 흘렀다.
일년, 이년, 삼년씩 흘러갈 때 마다 아이는 점점 더 창백해져만 갔다. 졸졸 흐르던 시냇물은 넘치는 폭포수로, 그렇게 폭포수는 잔잔한 바다로. 아이의 발 밑에 있던 웅덩이도 잔잔한 바다로, 이제 우주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또다시, 온몸에 고통이 맴돌기 시작했다. 아, 이게 몇 번이나 더 반복되려나? 형언할 수 없는 절박함에 이번엔 아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천사는 대꾸 없이 가만히 들어주었다.
“아니야, 난 사람이야. 난 괴물 따위가 아닌 그냥 사람일 뿐이야. 지금도 이렇게, 고통이란 게 뭔지 알고 초조함이란 게 뭔지 알고 있는 사람이란 말야. 괴물은 감정이 없다고 엄마, 아빠가 말해줬었어.”
또다시 신랄해지는 고통에 아이가 거의 절규하듯 내뱉었다. 그러나 형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듣다가,
“아니, 네가 틀렸단다. 넌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같은 괴물들도 삼켜대는 세상에서 가장 못된 괴물이야…세상에서 제일 뚜렷한 너의 정체성인데, 외우기 제일 쉬운 너의 존재를 망각해버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자신의 주장을 다시 반복할 뿐. 또다시 한차례의 침묵이 흐르고, 빛나는 형체가 또 말문을 열었다.
“슬슬 시간이 다 된 거 같아.”
“…”
뜬금없는 시간 타령. 아이는 겨우겨우 고통을 삼키며 태연하게 있으려 했지만, 조막만한 얼굴엔 이미 작은 구슬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무슨…시간?”
“무슨 시간이냐구?”
“응.”
“너의 시간말야, 네 시간.”
“…그게 무슨 말이야.”
“흐음…”
형체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아이에게 말했다.
“넌 정말 이 공간, 너, 너의 행적 그리고 나에 대해서조차 하나도 아는 게 없구나! 너도 참 어리석다.”
“…”
형체는 아이에게 뒤돌아서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네가 갈 길은 이미 정해졌으니. 애초에 넌 수백 개의 오솔길에 또 수백 개의 오솔길로 이어지는 끝없는 공간에 놓여있었지. 그 중에 제일 밑에 있는, 또 자꾸 똑 같은 검은색 오솔길만 고집해온 결과가 바로 이거야. 네가 자초한 거라고.”
형체가 갑자기 돌아서서 아이와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맞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형체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보기 무서웠다.
“넌 명백한 피해자야…그치만 하늘조차도 널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만큼 너의 존재는 애초부터 더러웠었던 거야.”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
“넌 순백의, 순수하고 저 높은 하늘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완벽주의적인 놈들로만 넘쳐나는지 모를 꺼야? 너희들이 신은 매우 까다로워서 툭하면 이렇게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나, 나가고 싶어…”
“그런데, 땅속조차도 널 받아들이기 꺼려하는 거 같아;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 넌 잘못한 게 조금도 없지만, 넌 그냥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에게 버림받고 소외될 운명 이였던 걸까.”
아이에게 천사의 말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결국엔 이런 곳에까지 버려지다니…어쩔 수 없지만 넌 내가 처리해줄게.”
형체는 다짜고짜 아이의 머리채를 낚아채곤, 어디선가 주워온 긴 작대기를 마치 찌르려는 것처럼 아이의 심장에다가 갖다 댔다. 조그마한 아이는 악, 그냥 힘없이 제압당했다. 조그마한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내가 이정도 선에서, 모두가 외면할 때 널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렇게까지 수고해주는 것에 고마워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넌, 영원히 이웃집 누나한테 괴롭힘 당해야 할 꺼야…이쁜 그 아이는 작고 어려보이는 널 끔찍할 정도로 소중히 여기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
아이는 형체가 하는 말이 무엇에 대한 비유인지, 아니면 본인이 실제로 겪었던 일들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누나한테 영원히 침대에 묶일 바에야, 차라리 이쯤에서 모든걸 놓는 게 더 쉽고 경제적인 방법이겠지? 그렇지 않아?”
“아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사는, 낭초람의 심장에 다짜고짜 막대기를 쑤셔 넣었다. 쇳물 같은 피가 벌컥벌컥 발 밑의 바다를 천천히 물들였다. 천사는 만족하지 못한 듯, 계속 발버둥치는 초람이의 심장에 막대기를 힘껏 밀어 넣었다. 새빨간 심장 조각들이 달처럼 가슴에서 허공으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초람이는 고통 때문에 숨쉬지도 못하고 계속 버둥거리다, 덜컥 몸이 굳혀져 버렸다. 축 처진 초람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천사의 모습, 다른 하나는 어릴 적 초람이의 목과 침대에 이쁜 매듭을 묶어주던 세상에서 가장 예쁜 누나의 모습.
피투성이의 초람이는 먼지가 뒤덮인 땅에 털썩 떨어졌다. 충격 때문에 깨긴 깼으나 여전히 몽롱한 아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로 물들어가는 웅덩이들로 뒤덮인 땅, 검게 그을린 하늘, 여기저기 내장을 쏟아낸 채 쓰러진 아이들, 여기저기 널린 팔 다리들.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는 기계들. 긴 여정 끝에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 아비규환을 본 초람이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웅얼거린다,
“…악마조차도 날 외면한 거야?”
손을 내려 배를 만져보았다. 물렁물렁한 이 느낌, 본인이 쏟아낸 비린내엔 익숙하지만 여전히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뱃가죽이 열리고 창자가 쏟아져 나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같은 아이들의 주검에다 고정시켰다.
한편 흰 군복을 입고 있는 아이가, 혹은 그렇게 입고 있는 일곱 명쯤이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반쯤 죽어버린 초람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애들이 누구더라?”
초람이는 멀찍이서 그 아이들을 힐끗 쳐다보곤, 다시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당분간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무리에서 두드러질 정도로 제일 작은 아이는, 얼굴이 거의 반쯤 찢겨졌었다. 아이들은 작은아이의 얼굴이 찢겨져도, 자신들의 앞에 주검들이 널려 있어도 태연했다; 피를 많이 흘린다는 것은 아이들한텐 전혀 놀랄만한 것이 못되었기에. 입술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아이는 따가움을 조용히 억누르며 체념하듯이 말했다.
“결국엔 이렇게 될 거면서…”
한차례의 폭격이 휩쓸고 간듯한 Orange castle의 한 해변가는, 자치구가 위치한 섬의 이름만큼이나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하늘마저 어둑어둑하니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