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오세린편- : 제저씨의 시점(1)

Maintain 2015-04-19 10

"이, 이 녀석들...굳이 올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안경을 쓰지 않기 시작한 이후부터였을까. 요즘 들어 나도 모르게 흥분을 했던 탓일까? 평소보다 몸을 좀 많이 쓰는 거 아닌가 나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는데, 결국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전쟁 때 하루가 끝나면 그런 기분이었는데, 오랜만에 그 기분을 다시 느껴 보니 기분이 묘했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고, 내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몸은 불덩어리. 그래서 애들에겐 미안하지만, 나중에 보충으로 휴일 하루 반납하기로 하고 오늘은 하루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독감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냐고 말들 많이 하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니까. 서글픈 일이지만, 지금의 내 몸상태로는, 이 독감도 꽤나 위험할 수 있다고.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것저것 약을 있는대로 들이킨 덕분에 몸이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점이다. 유통기한 아슬아슬했던 약까지 다 섞어서 만든 수제 약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약을 먹고 저녁 때까지 하루종일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번에 홈쇼핑 보고 싸게 샀던 건강식품이 드디어 온 건가, 기대하고 문을 열었지만, 문 앞에 있는 건 택배 배달원이 아닌 애들하고, 그리고 세린이었다. 다들 손에 뭔가를 하나씩 들고 오는데, 이건 뭐 병문안이 따로 없다. 뭐, 병문안 때문에 온 거 맞긴 하지만.

 

"내가 걱정돼서 와 준건 고맙지만...걱정 말라구..이 형님과 오빠는 아직 건재핟...우왁, 쿨럭케헥"

 

참 폼 안 나는군. 하필 이럴 때. 재채기 할 때마다 가래 섞인 피가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걸 본 세린이는 기겁을 하며 내 입과 바닥을 닦아 줬다. 그나저나 세린이 이 녀석, 애들이야 그렇다 쳐도 이 녀석은 여긴 어쩐 일이지?

 

"아까 전에 사무실에 왔었어요. 전근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시락을 주고 싶으시다면서. 그러다가 아저씨가 앓아 누웠다는 거 듣고 여기까지 와 주신 거에요."

 

세하 동생이 식탁 위에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놓으며 말했다.

 

"으이구, 맨날 건강 건강 노래부르던 아저씨가...이게 뭔 꼴이에요? 말이랑 행동이 하나도 안 맞잖아요."
"하하...그러게 말이다..."
"엄마도 걱정 많이 하셨어요. 건강 잘 챙기라고 죽도 좀 쒀 주셨으니까, 나중에 드세요. 세린이 누나 도시락도 같이 놔 둘 테니까, 같이 드시면 되겠네요."
"누님이...? 하하...그 누님이 설마 요리를 할 거라곤 상상도 못...케헥"
"히익! 서, 선배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야 금방 낫는다고. 얼굴이 새파래진 세린이한테 엄지를 세워 줬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는지 나를 침대에 다시 눕히는 세린이였다.

 

"함부로 움직이시지 마시고, 누워서 푹 쉬세요. 너무 무리하시면 독감이 더 심해질 거에요."
"걱정하지 마...뭐 이 정도 가지고...이 정도야 약 먹고 그러면..."
"어서요! 자, 이불 덮으시고."

 

평소엔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세린이가 저런 무서운 표정으로 말하니 왠지 박력까지 느껴져서, 시키는 데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얌전히 침대에 눕자, 머리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세린이가 물수건을 짜서 내 머리에 얹어준 거다. 으, 살 거 같다...그러고 보면, 이렇게 아팠을 때 누군가한테 간호 받아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그나저나 아저씨 집...생각보다 깨끗하네요?"

 

주변을 둘러다본 대장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본다. 왜, 남자 집이 깨끗한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이니?

 

"보통 드라마 같은 데 보면 남자 집은 다 더럽고 그렇잖아요. 특히나 아저씨 같은 분은 더 그럴 줄 알았는데."
"대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구나... 세상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지는 않다고..."
"아저씨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은데 말이죠. 후훗. 아무튼, 주스는 어디다 두면 돼죠?"
"그.. 주방 쪽 가 보면 냉장고가 있을 거야...거기 오른쪽 문 열어서... 거기 야채칸에 넣어 두고...혹시 목마르면 냉장고 안에 건강차 만들어 놓은 거 있으니까...그거 따라서 마시면 돼..."
"알겠어요. ...테인아! 그거 마시는 거 아니야!"

 

주방으로 간 대장이 기겁하듯 외쳤다. 우웅? 하고, 잘 모르겟다는 막내의 입버릇이 들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맥주라도 딴 거 같다. 으, 만약 정말 그렇다면, 속 좀 쓰리겠군. 그게 마지막 맥주였는데.

 

"아저씨, 아저씨! 과일 좀 깎아 왔어요! 좀 드셔 보세요!"

 

유리는 아까부터 뭘 하고 있나 싶었는데, 접시에 사과를 깎아서 내게 가져다 줬다. 이 녀석, 평소에는 워낙 먹방 찍는 일이 많아서 주방에는 가지도 않을 이미지인데. 생각보다 사과깎는 솜씨가 대단한데?

 

"동생들한테 자주 먹여 줬으니까요. 몇 년간 내공 좀 쌓았죠."
"하하...그렇군...그런데...어쩐지 양이 많이 줄은 거 같은 기분인데...?"
"예? 기, 기분 탓이에요, 기분. 절대 제가 가져오면서 먹었다던가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시 마세요. 헤헤헤."
"이 녀석...거짓말을 하더라도...입에 붙은 사과 조각은 떼고 하지 그래..."

 

어쩜 거짓말을 해도 이리 못할까...유리의 입에 붙은 사과 조각을 떼서, 깎아온 녀석의 정성도 있고 하고, 또 버리기는 아까운 마음에 내가 먹기로 했다. 작은 조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종일 메말라 있던 입에 수분하고 당분이 들어가니 조금은 기분이 좋아지는 기분이다. 그래, 이 맛이야.

 

"그런데...다들...반응이 왜 그래...?"

 

세린이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굳어 버렸고, 유리도 마찬가지로 굳긴 했지만 실시간으로 얼굴 아래서부터 위쪽 끝까지 빨간색으로 물들어 가는 신기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저거 누르면 빨간 물이 꾹 나오는 거 아냐?

 

"아, 아, 아...아저씨는..."
"음...? 나...? 나는 왜...?"

"아저씨는 눈치도 배려도 없어요?! 아저씨는 바보, 바보야!!!"

 

사과를 한웅큼 집어들더니, 그대로 내 입에 쑤셔박고는 신발도 안 신고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응...? 어째서...?!"

 

더 충격적인 건, 그런 나를 세린이가 쌔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절대 그럴 표정 안 지을 녀석이라고 믿고 있었던

터라, 충격은 배가 된 기분이다. 그리고 그걸 대장은 막내 눈을 가린 채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고, 동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다. 대체 다들 왜 그래?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하아...병문안 받았다가, 오히려 병이 더 생길 지경이군..."

 

입안에 가득 들어간 사과를 씹어먹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럼, 몸관리 잘 하세요."
"그래...잘 가렴...케헥"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임무는 저희에게 맡겨 주시고, 며칠 푹 쉬고 오세요. 김유정 언니에겐, 제가 잘 말씀드릴테니까."
"맞아요. 또 무리하다가 탈 나면 엄청 귀찮아진단 말이에요. 안 그러냐, 서유리?"
"으, 응? 어, 마, 맞아. 그러니까 아저씨, 몸 잘 추스리고 와요! 알겠죠? 눈치도 좀 챙겨 오시고!"
"제이 아저씨, Guten Tag! 안녕히 주무세요~"

 

 유리도 머잖아 다시 돌아왔다. 자꾸 내 눈치를 보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애들은 집에 갈 시간이 돌아왔다. 원래는 문앞까지 배웅해 주는 게 맞겠지만, 몸상태 탓에 그러지 못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린다. 휴...빨리 몸이 나아서 다시 저 애들 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건 그렇고...왜 계속 여기 있는 거지?"

 

주방에서 쟁반에 뭔가를 받쳐 들고 오는 세린이에게 물었다. 밤이 늦었다고. 너도 이제 들어가야지.

 

"괜찮아요...선배님이 아프신데, 제가 옆에서 보살펴 드려야죠."
"마음이야 고맙지만...굳이 귀찮게 그럴 필요 있어...? 나는 괜찮으니까..."
"귀찮지 않아요. 이런 식으로라도...전 선배님을 돕고 싶어요. 선배님은 절 많이 도와 주셧지만...전 그러지 못했으니까."

 

세린이 이 녀석. 그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그런 말을 듣고 나니, 나도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세린이가 가져온 죽을, 아무 말도 없이 받아 먹었다. ...음, 누님. 죽이 좀 짭니다. 역시 안 하시던 요리는, 계속 안 하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후...잘 먹었네. 그럼..."

 

세린이에게 부탁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바지만은 나 혼자 갈아입은 건, 얕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비밀이 있다.

 

"저기...어디 가시려는 건가요...?"
"아...약속 잡은 게 있거든. 캐롤네 사무실에서...진료 약속을..."
"의료요원님한테요? 잘 됐네요. 그 분이라면 선배님을 잘 치료해 주실 거에요."
"그러길 바래야지...그럼, 다녀 오겠네..."
"아, 호, 혼자 가시려고요? 제가 옆에서 도와 드려야..."
"괜찮아...그 정도 거리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그리고...남한테 독감 옮기고 싶지도 않고...그러니까...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줄래...? 금방 다녀올 테니까..."
"예...알겠어요, 선배님.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렇게 실망하는 표정 지으면 내가 다 미안하지는데 말이지. 나는 걱정 말라고 세린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후, 밖으로 나갔다. 다행이군. 날씨는 따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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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시 돌아왔습니다. 요즘 계속 바빠서 글쓰는 속도가 자꾸 늦어지네요.

이번에는 저번에 예고했던 대로, 제저씨의 시점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음...하지만 조금은 불만스럽기도 합니다. 분량 조절 때문에 이번에는 글이 좀 많이 짧네요. 원래 한꺼번에 쓸까 싶었는데,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짧게 자르기로 했습니다...언제야 저는 분량 조절을 잘 하게 되는 걸까요ㅠ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제저씨의 시점은 다음 편에서 끝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음...살짝 충격적인 일도 있을 거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오세린편이 다 끝나면 단편에 관한 설문조사가 있을 예정이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죠.

2024-10-24 22:25:5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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