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송은이편: 3장: 에필로그-

Maintain 2015-04-12 8

"건배~!"
"건배."

시간은 흘러, 벌써 늦은 밤이 되었다.

뭐, 임무는 항상 그렇듯 성공적이었다. 미숙한 특경대 녀석들이 내는 몇 번의 오발사고를 빼곤, 민간인의 피해도 없었고. 뭣보다 그 다쳤던 신참이 무사할 수 있엇다는 게 다행이었다. 의사 말로는 지혈을 최대한 빨리 한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지. 그 신참을 병원까지 보낸 후, 은이도 집에 데려다 줄 겸 하다가 마지막으로 한강 둔치에 나왔다.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강 둔치를 가로등만이 희미하게나마 밝혀주고 있고, 한강물은 밤하늘을 먹기라도 한듯 새까만 색으로 변해 정적을 깨는 약간의 물소리를 내며 고요하게 흐르고 있다. 저 너머에 보이는 신서울의 야경이, 쓸데없이 아름답다. 

그것을 보며, 은이와 나는 풀밭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메뉴는 캔맥주 몇 개와 소주 한 병, 그리고 오징어와 과자로 이루어진 술안주 몇 개. 참 무드없군. 여자랑 같이 놀러 나왔으면서 마시는 술이 고작 이런 거냐.

"미안하군...좀 더 분위기 좋은 데로 데려가 줬어야 하는데."
"에이, 아니에요. 저도 그런 데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뭣보다, 우리 둘 다 이런 꼴이 돼선 거기 가기도 좀 그렇잖아요?"

하긴 그건 그렇지. 남자 쪽은 한쪽 팔이 훤이 드러나고 여기저기 찢어진 셔츠를 입고 있고, 여자 쪽도 옷 여기저기가 찢어진 데다 머리는 다 헝클어지고. 거기다 화약 내 풀풀 나고 먼지께나 뒤집어쓴 이런 커플을 받아줄 데가 어디 있을까. 설명하고 나니 왠지 꼴이 우스워져서, 나도 모르게 슬쩍 웃고 말았다. 은이도 마찬가지였는지, 따라서 웃었다.

"그나저나 은이, 오늘도 수고 많았어. 베테랑 특경대는 뭐가 달라도 다르더군."
"에이, 아니에요. 아저씨야말로 오늘 고생 많이 하셨죠. 저야 아저씨 고생하시는 거에 숟가락만 살짝 얹었을 뿐인데요 뭐."

 그렇게 말하는 은이의 눈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아마 오늘 하루를 충분히 즐기지 못한 거에 대한 아쉬움이겠지. 이제 오늘 하루만 지나면, 다시 평소같은 임무의 연속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그 아쉬움. 나도 그런 걸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그래서 뭐라고 해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시간 나면 또 놀러 가자고. 그때는 더 잘 대해 줄 테니까."

이런 말밖에는 해 줄수 없는 내가 참 한심하다. 은이는 그런 내게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는, 한강을 바라보며 다시 술을 마셨다. 

 다시 찾아온 침묵. 이럴 때 누구 한 명이라도 말을 걸어 줘야 하겠지, 그 역할을, 내가 하기로 했다. 하고 싶은 말도 있었고. 나는 맥주를 한 번 더 들이킨 다음에, 말을 꺼냈다.

"은이...아까 말했었지? 자기는 리더 실격이라고."
"예? ...아, 예."
"물론 넌 성실한 리더는 아니야...부하에게 똑 부러지지 못하고, 항상 낮잠이나 자고. 귀찮은 일은 채민우 경정에게 떠넘겨 버리고. 성실하긴커녕 당장 쫒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라고."
"우우...그렇...겠죠?"
"하지만 말이야...그런 리더라도 부하들이 널 믿고 따르고 있고, 또 넌 부하들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지. 그런 것들만 보더라도 넌 절대 실패한 리더가 아니야. 실패한 리더는...따로 있지."
"...아저씨...?"

 아까 은이가 팀을 이끄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 곳이 편치 못했던 건, 아마 옛날 그 일들이 떠올라서 그랫던 걸 거다. 별로 생각하지는 않고 싶은 기억이지만...이왕 말 꺼낸 거, 술기운을 빌어서 최대한 간단하게나마 말해줘 볼까.

"얘기 하나 얘기해 줄까? ...어떤 꼬맹이가 하나 있었어. 그 꼬맹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전의 용사라고 불리면서 전쟁터에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지. 죽을 뻔한 적도 많이 있었어.

그러다 어느 날이었어. 그 꼬맹이는 그 전적을 높이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팀의 리더가 돼서 어떤 위험한 작전에 투입됐지. 차원종 무리 한 가운데 추락한 헬기에 타고 있던 높으신 분을 구출해 오는 그런 임무였어.      

임무는 성공했어. 그 꼬맹이는 그 임무의 성공을 인정받아 많은 보상을 받았고.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꼬맹이와 같이 돌아온 팀원은 단 한 명도 없었어. 그 동안 명령만 받아오며 수동적으로 살아왓던 그 꼬맹이에게, 리더란 자리는 너무 무거웠던 거야. 팀원을 제대로 믿지 못했고,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이럴 땐 무슨 명령을 내려야하는지조차도 알지 못했어.

 결국 한 순간의 잘못된 명령으로 그들은 전부 몰살당했지. 자기 탓에 자기 팀원이 순식간에 죽어가는 그 광경을 오롯이 봐야만 했던 꼬맹이는, 자기는 팀을 이끌 자격이 없는 녀석이다, 평생동안 잊혀지지 못할 상처를 갖게 됐고. 공식 기록에는 그 사실은 철저히 묻혀져 버렸지. 세간에는 한 명의 클로저 소년이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 그렇게 알려져 버렸어. 결국 그 죄 없는 팀원들은 영영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버렸고.

그 벌이었던 거겠지... 나중에 그 꼬맹이도 여기저기 굴려진 후에 버려졌고, 무슨 업보인지 시간이 흘러서 다시 리더가 될 기회가 주어졌어. 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 무서웟던 거야. 자기같은 실패한 리더가 다시 팀을 이끌었다간, 그 날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자기는 영원한 실패한 리더, 팀원 하나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한심한 리더라는 사실을, 알아도 너무 제대로 알아버린 거지. 도망쳐 버린 거야. 하지만 그런 꼬맹이하고 다르게, 은이 넌 지금도 특경대의 리더가 되어서 팀원들을 제대로 이끌어가고 있지. 넌 그 꼬맹히고는 달라..."

처음에 누님에게서 팀의 보호자가 되어 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여러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 제일 무서워서 거절했던 것도 있다. 누님도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제가 얼마나 실패한 리더였는지. 오죽하면, 누님조차 그 말에 한 마디도 뭐라고 하지 못하셨을까. 

결국 팀의 리더가 다른 사람...슬비로 정해지고 나서야' 간신히 팀에 들어오는 걸 수락할 수 있엇다. 슬비는 똑 부러진 아이니까. 나보다는 훨씬 애들을 잘 이끌어 줄 테고 더욱 의지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아직 채 성인도 되지 못한 그런 어린아이에게 팀의 리더라는 책임을 지운 건 정말 죄스럽게 생각한다. 미안하다, 슬비야. 용서해 다오. 날 얼마든지 원망해도 괜찮아. 욕을 하든 기분이 풀릴 때까지 날 마음껏 치든, 상관하지 않을게. 하지만 이런 실패한 어른이 너희의 리더가 되면, 그것만큼 더 위험한 일도 없을 거야...

"...아저씨."

은이의 한 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는 무릎을 껴안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꼴사납군. 이제 이런 자세는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술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걸까. 괜히 멋쩍어져서 일부러 소리내서 웃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얼굴에 느껴지는 따스함과 부드러움. 은이는, 내 머리를 자기 품에 안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마세요...아저씨도 그 때 최선을 다하셨을 거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그 꼬맹이가 나라고 했던 적은 없는데 말이지."
"하나만 여쭤볼게요. 그때 그 팀원들은...아저씨를 원망했었나요? 왜 자기를 버리고 도망가느냐, 넌 리더 자격이 없는 녀석이다, 그렇게 원망하며 죽어가던가요?"
"..."

원망했었냐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팀원 중 한 명이었던 아저씨 한 분이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은 떠오른다. 
-넌 아직 죽기엔 너무 어려.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그렇게 말했었지.  

"팀원이 죽어가면서 자기를 원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훌륭한 리더라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마 제가 겪었던 일은, 아저씨의 그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말이죠, 그런 저라도 아저씨한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는 말이죠, 특경대 애들을 이끌면서 힘이 들 때마다, 먼저 죽어간 애들을 떠올려요. 저희들을 이끌어 주셔서 고마웠다고, 그 한 마디...그 한 마디에 다시 정신을 차리죠. 나는 실패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걸 생각하며 정신을 차린다고요. 먼저 죽어간 다른 애들한테 부끄럽지 않으려고...더 좋은 리더가 되어 주겠다, 항상 그렇게 다짐한다고요."
"..."
"그리고 아저씨, 지금도 아저씨를 충분히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많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저희 특경대 애도 그렇고, 검은양의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고요."
"그 애들이...?"
"아저씨 앞에서야 당연히 말 안 하죠, 하지만 전 알 수 있어요. 그 애들은 아직 어리잖아요. 자기같은 어린애들하고 어울려 주고 고민도 같이 들어주고 또 앞장서서 싸워주는 그런 기댈 수 있을 만한 어른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죠. 아저씨하고 같이 임무 나가는 애들 표정 보셨어요? 애들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그것만으로도, 아저씨는 이미 좋은 리더라는 뜻 아닐까요?"

정말로 그럴까. 그런 소리를 갑자기 들은들,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고, 나는 고개를 들어 은이를 바라보았다. 술기운 탓이었을까, 살짝 홍조가 섞인 그 미소짓는 얼굴이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술냄새 섞인 서로의 숨이 섞이는 게 느껴졌다.

그 뒤에는 뭐... 반 정도 남아 있던 맥주는 김도 다 빠지고 다 식은 후에야 마저 비울 수 있었지만, 충분히 맛은 좋았다. 피곤했던 거겠지. 잠에 빠진 은이를 업고 가면서, 녀석의 의외의 면에 조금은 놀랐다. 이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통돌이 마왕 덕에 녀석이 이런 면이 있다는 건 조금이나마 알고는 있었지만. 그리고 또 고맙다고 생각했다. 너 덕분에, 조금이나마 마음 한 구석이 가벼워질 수 있었어. 

"하하...그나저나, 다행이네..."

오늘따라 한강이 더 어둡고, 마침 사람도 없었던 점이 다행이었다. 특경대 경정하고 클로저 요원이란 사람이, 한밤중에 경찰서로 가면 그것만큼 망신도 없을 테니까. 

"아이고, 등이야..."

뭐 때문에 등이 아픈지는, 하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세상에는 어른의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다. 힌트 하나만 주자면...솔직히 그렇게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야~어서들 와. 강남의 영웅들!"

며칠 후. 여느 때와 같이 재해복구현장에 나타난 차원종들을 없애러, 다른 애들과 함께 현장에 출동했다. 빛바랜 결정을 모아서 특경대 녀석들이 실수로 비운 창고에 몰래 채워놓는다, 그런 계획을 몰래 알려주는 녀석. 저런 모습만 봐도, 역시 은이는 좋은 리더야. 

"아, 아저씨!"

임무를 하러 가려고 하니, 은이가 뒤에서 날 부른다. 애들보고는 먼저 가 있으라고 말하고, 나는 은이에게 다가갔다.

"거 아저씨 아니라니까. 이제 슬슬 오빠라고 불러줘도 되지 않아?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
"그,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나이 30줄대에 들어간 사람한테 오빠는 무슨...아, 아무튼. 가기 전에 한 마디만 전해드리려고요."
"? 뭔데?"
"그, 저기... 오늘 하루도 힘내시라고요. 애들 잘 이끌어 주시고, 그리고...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작전 나갈 때마다."
"난 또 뭐라고. 그거야 당연하지.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리더'로서 말이지."
"그래요. 바로 그 마음가짐! 그럼 잘 다녀오세요. 제이 오..."
"오호ㅡ, 선배님, 요원님. 분위기 좋은데 말입니다?"

이봐, 채민우 경정.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놀래키지 말라고. 거기다 너답지 않은 그 표정은 뭔데?

"설마하니 그 송은이 선배님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이야...요원님, 제법이십니다. 뭐, 앞으로도 선배님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미덥지는 못해도, 팀원 하나만은 확실히 챙길 줄 아는 좋은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충성! 그럼, 임무 잘 다녀 오십시오."
"채민우 너 인마...많이 컸다?! 어휴 저걸 진짜...아무튼,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 임무 잘 다녀와요."

결국 오빠 소리는 끝까지 못 듣는구만. 뭐 할 수 없지. 오빠 소리 하나 듣자고, 뒤에서 날 기다리는 아이들의 시선을 무시할 순 없으니. 나는 미안하다고 손을 흔들며, 다시 아이들에게 갔다. 자 애들아 가보자. 너무 무리하진 말고. 건강이 제일이니까.






예 안녕하세요. 다시 찾아왔습니다.
으...송은이 루트가 드디어 끝을 맺었네요. 스토리도 진행도 날림이고 세부적인 묘사도 잘 하지 못한 졸작이었습니다만, 이런 졸작이나마 재밌게 즐겨주셨던 여러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다음에는 누구의 루트로 찾아오게 될까요. 한 가지 말씀을 드리자면, 별 계획이 없다면 슬비 루트는 4월 말에 나올 예정입니다. 30일이 설정상 슬비 생일이더라고요. 그러니 그 전에, 빨리 제저씨를 위로해줄 두번째 캐릭터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재밌게 봐 주시고, 다음 얘기에서 뵙죠.  
2024-10-24 22:25:3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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