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이슬비가 내리는 날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alxn96 2014-12-15 1
남자와 여자 연구원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이슬비의 기억 소거는 잘 되고 있습니까?”
의자에 앉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네. 그 기억이라면, 기억 추출 후에 매일 약물 투여로 기억 삭제 작업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연구원은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남자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어떤 행동을 하는데 준비 시간이 필요한 듯이 다만,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남자는 연구원의 눈을 올려보았다. 잠깐 본 남자의 악의적인 시선이 온 몸에 중압감을 들게 했다. 연구원은 눈을 깔아 바닥을 보았다.
“당신은 유니온의 개입니다. 괴수와의 전쟁고아로 오갈 데 없는 당신을 길러준 유니온에 대한 경의를 표하진 못 할망정 배신하는 건 아니겠죠?”
남자는 ‘유니온의 개’라는 부분에서 억양을 강조했다.
“이슬비는 아주 유능해요. 당신과 같은 미천한 고아지만 능력이 있어요. 마음에 듭니다.”
그는 책상에 놓인 로봇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장난감? 그래요. 장난감은 서민들의 물건이지만 그중에서도 고급 장난감을 산 느낌이랄까요. 가끔 그런 유희도 나쁘지 않군요.”
그는 고의로 힘을 줘 장난감 로봇의 팔뚝을 부러트렸다.
“아이코, 실수. 이래서 서민들의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고급이든 저급이든 싸구려잖아요. 안 그래요?”
“......”
남자는 쓰레기통에 로봇을 던졌다.
“이제 당신이 할 일을 하세요. 유니온을 위해서.”
연구원은 남자의 방을 나오자마자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케이스에 담긴 알약을 한동안 바라보던 연구원은 결심을 굳힌 듯 어디론가 향했다.
둥그런 달이 주변의 어둠을 작게 살라 먹었다. 연구원은 시계를 보더니 슬비의 방문을 열었다. 문 틈새로 흘러드는 복도의 빛이 가느다란 막대를 만든다.
“슬비야.”
연구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작고 낮았다. 슬비는 어둠 속에서 흐릿한 형체를 바라보았다.
“연구원 언니?”
“나가야 해.”
“무슨 소리에요?”
“긴 말 할 시간 없어.”
그녀는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알약이 담긴 케이스였다.
“이걸 삼켜.”
“이거, 오늘 이미 먹은 약 아니에요?”
“다른 약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그동안 먹은 약을 해독할 약이야.”
“해독요?”
“그 약을 먹으면 자연스레 깨달을 거야.”
연구원은 슬비에게 알약을 쥐여주었다. 슬비는 손바닥을 펴 알약을 보았다. 알약이 커 보일 만큼 슬비의 손바닥이 작았다. 단검을 쥐어왔던 손바닥 마디가 희미할 정도로 투박하지만 하얗고, 여렸다.
‘유니온, 아니 그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어린아이를 전쟁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사상을 용서할 수 없다. 유니온 자체는 ‘이로운 것’이다. 세계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다. 하지만 조금씩 평화를 찾으면서 그것에 내부는 썩어 들어가고 있다.’
“내가 시작점이야.”
그는 문득 말했다.
“네?”
“아냐, 혼잣말이야.”
‘나를 불사 질러 썩은 내부를 태울 수 있다면.’
슬비는 연구원의 얼굴을 잠시 보더니 알약을 삼켰다.
“슬비야.”
눈을 떴다.
‘말도 안 돼.’
눈을 비볐다. 확실했다.
‘엄마? 엄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응.”
누군가 대답했다.
‘저건, 옛날의 나?’
혼란스러웠다.
“넌 절대, 클로저가 되지 마.”
‘뭐라고? 엄마. 엄마! 뭐라고 대답해!’
엄마의 복수를 하기 위해 클로저가 되려고 했었다. 괴수를 모두 죽이면 엄마가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것을 위해 달려왔다. 휘두르는 단검에 베여 피가 나와도, 힘들어서 입에서 단물이 나오고 팔뚝이 끊어질 듯 아파서 때로는 포기하고 싶어도. 그때마다 속으로 엄마를 되새겼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늘게 내리는 비였다. 아주 가늘지는 않아 팔뚝이 떨어지는 비의 감각은 또렷하고 부드러웠다.
“이슬비네.”
“엄마?”
엄마는 눈을 감고 이슬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비가 이슬비야. 넌 그런 사람이 돼야 해. 비가 오면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도록, 고개 숙이지 않도록.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그러니까 클로저는 되면 안 돼. 넌 너무 어리잖니?”
“난 어리지 않아!”
“그런 소리가 아니야. 마음이 어리다는 거야. 넌 쉽게 상처받으니까.”
어린 슬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빗방울이 된 것 같았다. 몸을 수천, 수만 방울로 나누어 가벼워진 마음으로 공기를 가르고, 낙하하는 기분.
“알았어.”
어린 슬비가 대답했다. 엄마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면 돼.”
엄마는 그 뒤로 나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눈물이 나온다. 참으려고 했는데 끅끅,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때 누군가 슬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의 손길과 닮았다.
“연구원……. 언니.”
“나가자. 지금이면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어.”
슬비는 눈물을 닦아냈다.
“아니 가지 않아.”
“뭐?
“연구원 언니는 내 기억을 본 거야?”
연구원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으로 한 일은 내 손으로.”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 추출 장치로 네 기억을 보고 유니온의 일에 방해될 만한 기억은 삭제했어. 아, 물론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은 아니야!"
연구원은 잠시 문밖을 쳐다보더니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가 너무 컸어. 슬비야. 나가려면 지금밖에 없어. 그들은 네가 기억이 살아났다는 걸 금방 눈치챌 거야.”
“아니. 엄마는 말했어. 최대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라고. 내 이름같이, 이슬비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러니까 나가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클로저가 될 거야.”
“훌륭합니다.”
누군가 끼어들었다. 사무실의 남자였다. 남자가 몸짓을 취하자 방의 불이 켜졌다.
“당신과 전혀 다르죠. 무척 훌륭해요. 맞아요. 우리 유니온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 그에 따른 불가피한 희생은 감수한다.”
연구원이 끼어들었다.
“그건 유니온의 목적이지 결코 당신의 목적이 될 수…….”
“입 다물어.”
남자가 총을 꺼내 총구를 겨눴다. 정확히 그녀의 이마를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못 맞추고 싶어도 못 맞출 수가 없겠는 걸요?”
남자는 웃으면서 방아쇠를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
“잠깐!”
슬비가 그녀의 앞에 서 가로막았다.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악의적인 눈빛으로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남자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연구원 언니를 죽이면 나를 유니온에 가둬두려는 생각은 하지 마.”
“어쭙잖군요. 다시 기억소거를 하면 그만입니다.”
“그래? 당신이 나를 기억소거 하는 게 빠를까, 내가 이 단검으로 내 목숨을 끊는 게 빠를까.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하는걸.”
슬비가 단검을 꺼내들자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래요? 당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 있다는 건가요?”
“물론.”
“조금 아쉽지만, 당신과 유니온의 개를 모두 죽이고 새로 구하면 그만. 대체 자원은 많으니까요.”
“마음대로 하시지.”
남자가 한동안 슬비를 바라보더니 총구를 내렸다. 그리고 실성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당신이 유니온을 위해 일한다면 연구원은 살려주죠, 물론 당신의 기억은 더 이상 소거하지 않습니다. 만족합니까?”
“좋아.”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소란은 참지 않습니다. 그땐 당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방을 나갔다.
“슬비야. 나 때문에.”
연구원이 말했다.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원해서 된 거야. 언니 탓이 아니야. 이게 내가 가진, 클로저로서의 정체성, 존재 의의야”
창밖에서 비가 내렸다.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비, 이슬비. 그래서 맞으면 기분 좋은 비. 슬비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떨어지는 비가 손에 떨어지고 다시 한 번 튀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엄마가 칭찬해주는 거겠지. 그렇지? 엄마.”
오늘도 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더 이상 울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