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송은이편: 2-1장: 평소와는 다르게-
Maintain 2015-04-08 8
약속을 잡은 이후로, 시간은 평소와 같이 흘러갔다. 아침에 일어나고, 차원종을 잡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 쓰러지듯이 잠에 들고. 지루한 반복의 연속이지. 동생이 그렇게 매달리는 게임 속 아이템 맞추기나 대장이 즐겨보는 드라마 속 패턴처럼.
뭐, 달라진 점도 적잖아 있긴 했다. 아니, 내가 실수로 안경을 부숴버린 그 날 이후로, 이것저것 바뀐 점들이 상당히 많았다. 날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아졌다는 것과, 내가 점점 더 거기에 익숙해져 간다는 것.
그리고 뭣보다, 내 주변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들이 많이 바뀌었다는 게 가장 큰 변화였다. 유정 씨와 애들은 여전히 날, 뭐랄까, 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어려워한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저번에 헥사부사를 탔던 때가 떠오른다. 평소 같았으면 질주하는 내내 폭주족스런 기성을 내지르던 란이 녀석이었는데, 그 날은 하루종일 조용했지. 달리는 속도도 많이 죽었었고. 뭐랄까, 날 배려하는 듯한? 속도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란이 녀석이 속도를 죽이다니. 차원전쟁이 이제 끝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지금서야 많이 예전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내가 탈 때마다 조용해지는 건 변함없다. 다른 애들 탈 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으면서.
뭐, 하지만 그런 일들이 싫지는 않다. 내가 싫어서 피하는 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고, 언제부턴지 나도 그런 상황을 즐기게 되었으니. 아니, 오히려 잘된 일 아닐까? 아직은 많이 부담스럽긴 해도, 사람들이 내게 보내는 시선들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엇으니. 원래는 이러는 게 정상일 텐데. 사람이 한 평생 남들과 눈 마주치지 않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인데. 남들은 그냥 쉽게쉽게 하는 그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다니. 전쟁의 후유증이라는 건, 생각보다 꽤 컸던 모양이다.
"...에이, 계속 우울해져 봐야 나만 손해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원래 그게 주특기 아니냐, 나란 녀석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밝게 행동하는 건 내 주특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나는 이걸로 다섯 개째의 사탕을 입에 물며 은이 녀석을 기다렸다. 공공장소니까. 담배를 피울 순 없잖아. 나중에 혈당약 좀 먹어야겠어.
약속 시간까진 한 10분 정도 남은 상황. 원래 이럴 때에는 남자가 먼저 나와줘서 기다려야 한다고, 경험이 아닌 동생의 게임을 통한 지식을 통해 배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일찍 나온 감도 있긴 하다. 뭐, 마지막으로 옷이나 한 번 가다듬을까.
"...으음..."
볼록거울을 통해 본 나는, 평소의 나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아니, 이 정도면 거의 환골탈태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울 속의 나는 평소의 요원복이 아닌, 지퍼 달린 몸에 착 붙은 청바지에 가슴까지 단추가 풀리고 팔을 반쯤 접은 흰색 와이셔츠, 그리고 속에는 검은 민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다. 거기에 검정 가죽끈 손목시계와 십자가 모양 목걸이까지. 통넓은 티셔츠같은 편한 옷을 고집하는 평소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옷차림이다. 그리고 뭣보다.
"......"
왠지 옛날 생각 나는걸. 예전에는 나도, 동생이나 유리처럼 머리가 까맿던 적이 있었지. 그때 나는 아직 젊었었어. 아무리 그래도 사람 많은 데를 원래 머리색으로 다니는 건 좀 그런 거 같아서, 한 번 이렇게 염색해 봤다. 그리고 덤으로, 머리 스타일도 조금은 바꿔 봤고. 그...울프컷이라고 하나? 요즘 젊은 애들이 많이 하고 한다고 해서.
대장과 유리한테 고맙게 생각한다. 역시 그 둘에게 조언을 구하긴 잘 한거 같아. 저번에 그 둘한테 만약 내가 누구랑 만나야 하는데, 여기서 뭐가 더 바뀌면 좋겠니 하고 물어봤더니, 둘이 합심해서 날 이렇게 만들었다.
견원지간...까진 아니더라도 둘이 원래 잘 못 어울리는 기분이었는데, 그걸 보니 또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아무튼 그 둘이 날 하루종일 쇼핑몰하고 미용실에 끌고 다닌 결과가 지금 내 모습이다.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평가를 부탁했지만. 정작 날 그렇게 만든 당사자 둘은 아무 말도 안 했으니. 사무실로 돌아갈 때까지. 뭐...결론은 좋은 일 아니었을까 싶다. 영수증 받았을 땐 문자 그대로 피를 토했지만, 모종의 계약으로 공짜로 받아갈 수 있었지. ...모자이크 처리, 확실해 해줬으면 하는데. 박심현이 때도 말했지만, 난 초상권 어기고 함부로 내 얼굴 쓰는 건 싫어한다고.
뭐, 괜찮나. 곧 은이가 평가해 주겠지. 그러고 보니 은이 녀석, 평소엔 전투복만 입고 다녀서 사복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떤 모습일지 조금은 기대되는데. 그렇게 벽에 기대서 얼마를 더 기다렸을까.
"아, 제이 아저씨!"
멀리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눈에 익은 짧은 갈색머리 여자가 이 쪽을 향해 오고 있다.
"여, 왔군, 은이."
오래 기다렸다고.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은이 앞에 마주섰다. 나만큼이나, 은이 녀석도 평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흰색 와이셔츠, 체크무늬 치마와 검은색 단화. 그리고 데님 자켓. 평소의 그 남자같은 모습과는 거리가 먼, 충분히 여성스런 옷차림이다. 보기 싫지 않게 화장도 잘 했고, 머리도 충분히 손질한 게 눈에 보인다. 전에 녀석이 자기도 벗으면 굉장하다고 했었는데, 뭐, 거짓말은 아니었군.
"어...잘 어울려요? 어디 이상한 데 없죠?"
"그럼. 충분히 잘 어울리지. 순간 여자로 보일 뻔했어."
"뭐, 뭐라구요! 저 여자 맞거든요?! 여자니까 이렇게 치마도 입고 나왔죠!"
"그래? 난 아닌 줄 알았지. 전투 때에는 항상 듬직하게 믿을 수 있어서."
"...뭐에요 그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살짝 쳐 본 장난에, 평소답지 않게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는 은이 녀석이었다. 이 녀석도 이렇게 보니, 여자는 여자 맞구먼. 귀엽네.
"그나저나 은이 너. 신서울을 지키는 특경대답지 않아. 약속시간을 어기다니."
그 모습을 보니 조금은 재밌어져서, 조금 더 놀려볼까 싶어졌다. 그래서 인상을 쓰며 시계를 보았다. 고작 10분 정도 늦은 것뿐이었지만.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 녀석들한테 군기 좀 잡아주고 오느라..."
"응? 그 녀석들? 누구?"
"누구긴 누구겠어요? 특경대 애들이지. 이 녀석들, 어떻게 제가 아저씨를 만나는 걸 안 건지... 아침부터 저한테 이제야 봄이 왔느니, 너무 멀리까지 진도 나가지 마시라느니 계속 놀려대잖아요. 그래서 완전군장으로 저 올 때까지 연병장 돌고 있으라고 했죠. 거기다 채민우 놈..."
"민우 경정? 걔도 그랬었단 말이야?"
"아휴, 말도 마요!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제이 요원님 말입니까? 그 분이라면 믿을 수 있는 분이시죠. 누구와는 다르게 임무에도 충실하시고 매사에 성실한 분이시니까. 분명, 선배님을 잘 리드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휴 진짜...같은 계급이라 옛날처럼 갈굴 수도 없고..."
"하하. 역시 채민우 경정.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그쯤 해둬요. 창피해니까. 그나저나..."
그제서야 내 모습에 눈이 간 건가.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얼굴이 빨개지는 은이 녀석이었다.
"음...어때, 어울리나?"
"어울리냐고요? ...예. 어울려요... 진짜로요."
"아, ...그, 그래."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서 말하지 마라.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지니까. 그래서, 이제 그만 놀리고 입장하기로 했다.
"자, 가자고. 언제까지고 계속 여기서 서 있을 순 없잖아."
"네? 아, 네!"
이럴 땐 남자가 에스코트를 하는 거랬지? 나는 은이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고, 잠시 망설이던 은이 녀석은 내 손을 잡았다. ...여자 손다운 부드러운 느낌과 같이 느껴지는, 딱딱한 굳은 살의 감촉에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
에구, 안녕하세요. 상당히 오랜만에 돌아온 기분이네요.
그 동안 조금 바빴네요. 시험준비 때문에 접속할 시간도 부족해서... 최대한 빠른 텀으로 써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제 본격적으로 송은이 루트, 돌입하게 되겠네요. 이번 2장은 1부 2부로 나눠지게 됐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