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페이퍼를 쓰자! 2

삼촌 2015-04-08 8

싸늘하다. 가슴에 비트가 날아와 꽂히는거 같다. 제이는 눈을 게슴츠레 떠 주변을 살펴보았다.


배달이 오기전에 롤링 페이퍼를 끝내고 싶은 건 같은 마음인지, 삭막한 방의 분위기는 뒤로한 채 다들 빠르게 글을 써내려간다.


제이도 대충이나마 검은 양의 일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적었다. 그런데 잠깐, 롤링 페이퍼가 이렇게 하는게 맞았던가?


"이봐들, 잠깐 이 형이 할 말이 있는데…"


"아핫! 저 다썼어요! 저부터 읽을래요!"


제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스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글을 발표하고 싶어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에서 뿜어져나오는 귀여움에 유리가 또 폰을 꺼낸다.


"저기, 소년. 롤링 페이퍼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니라"


"제이 씨."


슬비의 제지에 제이는 말을 멈추고 슬비를 바라보았다.


제이가 전쟁터에서 먹어온 눈치밥만 따져도 혼자 대대급인데다, 슬비와는 이미 사선을 수번도 더 넘은 사이다. 눈빛만으로도 슬비의 의도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미스틸은 지금 자신의 학부모가 수업에 참관하러 온 것을 본 아이의 마음일지도 몰라요.'


'지금은 그냥 미스틸이 하고 싶은데로 놔두는게 좋을거 같아요.'


정말이지, 이런 때는 배려심이 넘치는 리더로군.


제이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스틸을 바라보았다.


"우웅?"


"아니야, 계속하라고 소년."


"네! …저는 미스틸테인입니다. 그리고 여기 제 창의 이름도 미스틸테인이고요!"


자신을 뽐내듯 옆의 거대한 창이 우웅-하고 공명한다. 볼 때마다 신기한 창이라니까. 무슨 '요괴의 창'이라도 되나?


"저는 독일에서 왔습니다! 하지만 턱-포키도 좋아해요! **장의 매운맛으로 만든 음식은 다 맛있는거 같아요!"


그렇게 시작된 미스틸의 자기소개는 장황하게 지속된다. 조금 지루한 면도 있었지만, 제이를 포함해 모두 학부모참관 수업에서 자기 자식이 가장 똑부러지게 말하는 것을 본 학부모마냥 그저 흐뭇하게 지켜볼 뿐이다. 유리의 폰은 아예 동영상 촬영모드로 들어간 듯 했다.


"-그래서 그 때 훈련을 끝내고 제이 아저씨랑 같이 모교탕이란 곳을 갔어요! 거기선 다들 완전히 발가벗고 있어서 정말 신기했어요!"


아무래도 목욕탕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렇군. 구로역의 훈련 프로그램 일정을 소화하던 날들 중 소년과 목욕탕을 간 적이 있었더랬지.


"그 때 제이형의 알몸을 처음 봤는데 그림을 그리기에 딱 알맞는 몸 같았어요! 그래서 그 날 제이 형 집에서 제이 형과 같이 그림을 그렸어요."


"쿠,쿨럭! 그, 그랬나?"


"네! 제저씨의 그건 정말로 크고 아름다웠는걸요! 그래서 그리는게 정말 재밌었어요!"


"무, 무슨…!"


"그게 무슨 소리죠 제이씨!"


순식간에 뒤집어진 동아리방을 제압한건, 분명 어딘가 부서졌을 위력으로 열린 문 너머로 등장한 관리요원 김유정이었다.


"부,불결하군요! 아니, 이건 범죄에요! 제이씨!"


"유, 유정씨?!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오해야! 소년! 그런 말을 하면 못써!"


분노 버프를 받은 엘리트 요원이 클로저들도 감히 흉내못할 속도로 제이의 앞까지 걸어와 총구를 들이댄다. 물론 제이에겐 통하지 않을 일반적인 화약식 권총이지만 김유정의 분노를 나타내기엔 충분했다.


"어쩐지 제이씨가 내게 관심이 없어서 수상하다 여겼는데, 남자를 좋아할 줄이야…! 울프팩의 명성에 먹칠을 할 셈인가요, 제이씨!"


"그런 소수성**를 차별하는 말을 하는건 어른으로써 잘못된 자세라고 유정씨. 그리고 무엇보다 난 소년과 아무런 일도 없었어! 나에게 해명의 기회를 줘…!"


당황한 탓에 무리하게 말을 빨리 쏟아내서일까, 제이는 몸에 격통이 오는 것을 느꼈다.


차원전쟁의 영웅이 하기엔 굉장히 안쓰러운 자세를 취하는 제이를 보고 김유정은 조금씩 평정심을 되찾아간다.


"5초 드릴게요. 저를 납득시켜봐요."


평정심은 개뿔, 숨겨왔던 위상력을 개방한거 같은데?


"그런데 언니, 여긴 어쩐일이에요?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유리가 김유정의 앞을 막아서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제이를 위함은 아니다. 그녀가 김유정의 시야를 막은 사이, 제자리에 앉은 슬비는 일생일대의 집중력을 발휘해 염동력으로 남겨진 음식 포장지들을 김유정 시야의 사각지대로 옮긴 후 압축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압축할 때 나는 소리를 막고자, 세하는 건 블레이드를 꺼내 자신의 '제2의 생명'에 어딘가 흠집이라도 난건 아닌지 정비하는 척하며 가능한 크게 소리만 키운 발포를 허공에 쏘는 중이었다.


"응? 아아, 아까 작전 보고가 끝나고 은이씨와 한 잔하러 가고 있었는데, 글쎄 도로에서 배달 알바생이 웬 패거리들에게 구타당하고 있질 뭐니? 정말, 아직 신서울의 밤은 데미플레인의 여파로 치안이 예전같질 않다니까. 그래서 은이씨랑 가서 패거리들을 현장 검거하고 119를 불러 알바생을 도와주려고했는데, 알바생이 흘린 주문서의 주소가 여기 동아리방인거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와봤는데… 어쩜 제이씨가 이렇게!"


마침 타이밍 좋게도 그 부분을 듣게 되고 말았다 이거군.


제이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 제이씨. 어서 빨리 해명해봐요. 그 대량의 야식은 무엇이고 방금 제 귀로 똑똑히 들은 테인이의 증언은 무엇이죠?!"


"우웅, 전 증언을 한 적이 없어요. 누나."


자신의 발표가 중간에 끊겨 상심했는지 미스틸의 어조엔 슬픔이 가득했다. 그 슬픔이 김유정의 뜨거워진 이성을 조금 식혀주었다.


"그, 그러니? 그런데 그 종이는 또 뭐야? 음? 다들 종이에 뭘 쓴 모양이네? 응?"


드디어 김유정은 주위를 둘러볼 여유까지 갖출 수 있었다. 유리는 그런 김유정을 살펴보다가 살며시 등을 돌려 슬비를 응시했다.


슬비는 팔짱 낀 자세에서 몰래 엄지를 든다.


건 블레이드를 넣는 가방을 찾는 척하며 쓰레기가 압축된 작은 구체를 집어든 세하도 정색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인다.


유리는 그 둘에게 엄지로 답례를 보냈다.


좋았어, 검은양팀 역사상 가장 완벽한 뒷처리야.


"킁킁, 게다가 이 냄새는…, XXXX의 생크림에서만 나는 냄새와 ㅁㅁㅁㅁㅁ 커피의 시즌 한정 블렌드 커피. ㅇㅇㅇㅇㅇㅇ의 스페셜 버블 아이스크림에 넣는 향신료까지?"


이 언니는 사실 데이비드 아저씨가 준비한 검은양의 마지막 클로저 요원이 아닐까?


유리와 슬비는 서로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생긴 김유정에 대한 경외감을 공유했다.


한편 김유정에 대한 경외심보단 자신의 어머니와 유사한,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더 크게 느낀 세하는 적당히 둘러대고자 김유정에게 말을 걸려고 한 찰나.


"아핫, 맞아요! 누나! 우리들 파티했어요! 누나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독일산 폭격기가 지옥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저기, 진정하라고 유정씨. 그리고 변명은 아니지만 말이야. 난 분명히 유정씨를 부르자고 했었어. 정말이야."


"…하지만 부르지 않았죠. 제이씨. 그렇죠, 저는 작전만 지시하고 윗사람들에게 가서 깨지면 되는 방패일 뿐인거죠. 흑."


"후, 아니라니까. 우리 아이들도 분명 유정씨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고. 그러니까 진정하고…"


패닉 상태에서 심각한 좌절 상태로 이행한 김유정을 복도로 데려가 열심히 제이가 위로를 건네는 사이, 나머지 미성년팀은 동아리방에 앉아 제이의 위로가 성공하길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테인아, 정말로 그... 본거니?"


슬비가 조심스럽게 미스틸에게 묻는다. 팀의 리더라는 책임감은 그녀에게 이 사건의 명명백백을 가려**다는 목표를 설정해주었다.


"우웅? 무엇을요?"


"제이씨의 … 그,그, 크고 아름다운게, 정확히 뭐니?"


대화를 듣고 있던 세하가 침을 꿀꺽 삼킨다. 앞으로 미스틸이 할 말을, 정말 들어도 되는 걸까. 혹시나 내가 예상하는 그것이 맞다면, 검은양팀은 이대로 돌아오지 못할 선을 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응? 유정 언니가 화냈던게 그거 때문이었어? 왜 화를 내지?"


유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세하에게 물어보자, 세하는 자기도 모르게 멸종된줄 알았던 희귀종을 발견한 듯한 표정이 되어 유리를 바라보게 되었다.  얘는 진짜 검도밖에 모르고 살아왔나?


"그거야... 어른들은 다 아는 그런 세계가 있는 거거든."


"뭐? 그럼 세하 네가 어른이라고? 하하하 무슨 소리하는거야?"


유리가 정말 즐거운 농담이라도 들었단 듯이 웃으며 세하를 툭 툭 친다. 세하는 구속구를 벗어던진 말렉에게서 거대한 앞발이 날라올 때 보다 더한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


세하가 살기 위해 유리의 주먹을 방어하는 사이 미스틸이 슬비의 질문에 대답한다.


"우웅? 제이 아저씨의 몸 말하는건데요?"


"그…그냥 몸일 뿐이니?"


"네! 제이 아저씨가 차원 전쟁의 영웅이라고 듣긴 했지만 긴가민가했었는데, 확실히 몸의 근육이 정말 예술적이었어요! 그 다비드인가 다비치인가 하는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는걸요!"


슬비랑 세하가 서로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가 '거봐! 내 예상이 맞았지?'하고 순진하게 으스대는 것을 보곤  둘은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


"제이 씨가 좀 불쌍하네."


"아저씨가 그렇게 말을 빨리하는건 처음 듣는거 같은데."


"그러고보니 유정 언니와 애정싸움은 이제 끝났으려나? 아니다, 내가 가서 보고 올게"


유리가 몸이 근질근질한지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그 전에 문이 열리며 제이와 김유정이 등장했다.


"제저씨! 유정 언니! 싸움은 끝난거에요? 이제 다시 러브러브에요?"


"유리야! 무, 무슨 소리니? 나랑 제이씨가 러브러브라니!"


평소와 다를바 없는 김유정을 보며 슬비는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이에게 해명의 눈빛을 보낸다.


유리에 말에 피를 뿜으며 다시 약을 찾던 제이는 슬비의 눈빛을 눈치채곤, 말없이 자세를 취했다. 자신의 아랫배 정도의 높이에 있는 구체를 들고 있는 듯한 동작.


'아, 녹즙!'


예전 검은양 요리배틀 작전에서 제이가 선보였던 비장의 기술이었다. 효능이 복부 지방의 빠른 분해..였던가?


그때 유정언니가 보여줬던 반응을 생각해보면, 협상 카드로서는 더할나위없이 완벽할테다.


'그런데 1년에 한번만 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이 씨?'


'…남자라면, 죽는다는 것을 알아도 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는 법이지.'


'제이 씨…!'


검은양 리더 이슬비, 처음으로 제이가 멋있는 어른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자자, 그럼 이번 작전… 아니지, 파티를 계속하도록 하겠어요. 다들 이의 없지?"


김유정이 주위를 둘러보자 찔리는 이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미스틸테인을 제외한 나머지가. 미스틸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으니 결국 전부 찬성한 셈이다.


"그리고 테인아, 앞으로 말을 할때는 좀더.. 그, 주의해서 말을 해주렴."


"우웅? 제가 뭘 잘못했나요 누나?"


으… 안돼, 그런 눈으로 날 **마. 내가 나쁜 사람이 된것 같잖니.


김유정은 이번에도 미스틸을 나무라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고 만다.


"흠, 흠. 주문했던 요리는 제가 차에 실어서 왔지만, 은이씨도 애들을 관할 서에 넘긴 다음에 곧바로 여기로 오기로 했으니 음식은 그때 먹도록 하겠어요.


그래서 아까 보았던 그 글.. 마음의 편지?"


'유정씨의 눈엔 그렇게 보일테지.'


제이는 그렇게 생각해서 김유정에 말에 태클걸지 않기로 했다.


"롤링 페이퍼에요!"


'전혀 아니지만.'


유리의 말에 딴지를 걸면 피곤해지기에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는다.


"롤링 페이퍼?어머, 정말? …그런데 그걸 나 빼고 너희들끼리 교환하기로 한거니?"


"자, 받으라고 유정씨."


제이가 재빨리 종이와 펜을 김유정에게 건넨다. 김유정은 그것들을 건네받을때 제이는 작게 속삭였다.


"녹즙"


"흡! …그래. 너희들이 일부러 날 빼진 않았을거라고는 믿고 있으니까. 더 이상 불평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나도 참가할거야. 그래도 괜찮지?"


"물론이죠 언니! 이렇게 된 이상 은이 언니도 오면 쓰게 하자구요!"


"은이 누나가 쓰면 무시무시한 전투일지가 나올거 같은데…"


"외국에서의 활동 기록은 앞으로 팀을 이끄는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는 은이 언니도 쓰는데 찬성이야."


"은이 누나는 독일에도 몇번 왔다고 들었어요! 나도 못 가본 곳에 가봤다던데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네요! 아핫, 기대된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아이들도 일부러-한명은 원래-활발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파티라고는 하지만 정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옆에 두고 있는거 같군. 아니, 지뢰밭이 더 어울리는 비유려나.'


어쩌면, 내일을 위해 이 파티가 끝나자마자 응급실로 가서 링거를 맞는게 낫지 않을까. 제이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김유정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테이블을 약하게 때렸다.


"좋아, 그럼 테인이의 차례가 끝났으니 다음은 제이씨의 차례네요. 제이 씨, 읽어주세요."


"우웅.. 저 아직 안끝났는데요."


"…그리고 롤링 페이퍼라는게 자신의 글을 자신이 읽는게 아니지 않아 유정씨?"


드디어 제대로 된 지식인이 등장했으니 빨리 이 난장판을 정리해달라구. 제이의 희망에 찬 눈빛이 김유정에게 쏘아졌다.


그 눈빛을 읽은 모양인지. 관리요원 김유정은 해맑게 대답한다.


"네? 이거 맞지 않나요? 제가 본 무진장 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하던거 같던...아!  알았다. 메인 MC가 읽어야 하는 거군요! 알았어요 제이 씨. 종이 이리 주세요."


여긴 지옥이야. 난 빨리 이 곳에서 나가야겠어.


제이는 힘이 쭉 빠져 자신의 종이가 미스틸과 세하의 손을 거쳐 김유정에게 도착한 것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자, 검은양 요원 제이의 롤링 페이퍼를 읽도록 하겠어요. 흠, 흠!"


"혹시라도 내 성대모사를 할 생각은 하지 말라구. 그렇게까진 안해도 되니까."


"앗! 힝! 엣! 훅! 아, 알거든요?!"


'분명 할 생각이었군.'


김유정은 목을 다시 가다듬는다. 그리고 작전을 프레젠테이션할때와 같이, 낭랑한 목소리로 제이의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2024-10-24 22:25:2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