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기다릴게

분홍깨두유 2015-04-04 8

세하는 어느 공터의 바위에 앉아 땅 아래로 지는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쓸쓸한 맘에 태양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세하야, 너 여기 앉아서 뭐 하는 거야?”


돌아본 곳에는 과자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서유리가 있었다. 서유리가 세하에게 과자라도 하나 먹으라며 비닐봉지에서 초코바를 꺼냈지만, 그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저기 세하야, 사람 얼굴을 보고 그렇게 놀라는 건 좀. 아무리 친구라도 살짝 기분 나쁜데.”


유리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세하는 당황해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여러 가지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 입만 우물쭈물거렸다. 그것도 잠시 이내 세하는 고개를 돌리고는 깊은 한숨만 쉬었다.


보기 드문 세하의 풀 죽어있는 모습에 유리가 뭔 일 있나 싶어 그의 옆자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뭘 그렇게 힘겨워 하는 표정이나 짓고 있어. 슬비가 또 게임기라도 집어던졌어? 제이 아저씨가 이상한 약이라도 추천했어? 자자, 이 누님이 다 들어줄 테니까 속 시원하게 풀어보라고.”


“…그냥.”


세하는 그 말만 하고 고개를 유리에게서 홱 돌렸다. 곁에 있는 유리는 혼자 놔둔 채 세하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다.


세하에게 없는 사람취급 당한 서유리는 기분이 상해 양 볼을 부풀렸다. 세하의 뒤쪽으로 살그머니 이동해서는 그의 목 뒤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조물닥, 조물닥


무심한 세하의 얼굴을 찰떡 빚어내듯이 이리 늘리고 저리 뭉개며 가지고 놀았다. 세하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삐딱한 눈매로 유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유리는 찰흙으로 공예작품 만드는 것처럼 세하의 얼굴을 계속 매만졌다. 양손가락으로 세하의 볼을 주욱 늘려 강제로 웃게 만들었는데, 마치 얼굴이 두꺼비가 웃는 것처럼 못 생겨서 유리는 소리 내어 웃으며 그를 놀려댔다.


“하하, 이렇게 보니까 세하 너 진짜 못 생겼다. 아이고, 배꼽이야.”


세하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유리를 노려봤다.


“남의 얼굴 가지고 장난치면 재미있냐.”


“응.”


당당하게 내뱉는 즉답에 세하는 뭐라 하지도 못 했다. 서유리는 코가 닿을 정도로 세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갖다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볼에 쓸려서 간지러운 세하가 몸을 비틀자 유리는 허리를 다리로 감싸 단단히 붙들었다. 유리는 자기 눈에 세하의 눈을 담았다.


“좀 같이 놀아주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것저것 안 하면 손해잖아.”


유리는 어디서 꺼내왔는지 모를 글러브와 야구공을 세하 얼굴 위에 얹었다. 세하는 숨쉬기 불편한 터라 글러브를 손에 들었다. 그 행동을 서유리는 동의 의사로 착각했는지 ‘으이구 나랑 공놀이 하고 싶어쪄요.’라며 세하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공 잘못 던지거나 놓치는 사람이 벌칙 받기로 하고 둘이서 캐치볼하자.”


말 끝나기 무섭게 서유리는 그를 잡아당겼다. 공터에 일직선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선 두 사람. 서유리는 복싱처럼 청코너 서유리, 홍코너 이세하라며 아무도 없는 관객석에 대고 둘을 소개하더니 입으로 시합 벨 치는 소리를 흉내 냈다.


“땡, 시합 시작. 서유리님의 유리마구를 보여줄 테니 각오하라고.”


서유리가 유리마구를 외치며 공을 던졌는데 세하의 키를 2배나 훌쩍 넘기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첫판부터 나온 폭투에 서유리가 변명거리를 찾아 말을 더듬거렸다. 


“지, 지금 건 말이지…에 또, 그래 연습이야, 연습. 공이 얼마나 가벼운 건지 확인해본 거야. 본게임은 이제부터니까 각오 단단히 하라고.”


캐치볼이 다시 재개되었다. 남이 잡지 못하는 공은 반칙이라 캐치볼 자체는 어떠한 기교도 없이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세하 너 힘이 많이 좋아졌는데. 글러브로 받는 데도 손이 다 쩌릿쩌릿할 지경이야.”


대화도 섞어가면서 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날 이후로 운동 많이 했으니까.”


“너 따로 시간 내서 운동을 다 한 거야. 게임폐인 세하 인간 다 되었네. 운동을 다하고 말이야.”


“차원종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세지니 놀고만 수만은 없잖아.”


“하긴 강남사태에서 시간이 많이 지났지. 그때는 우리 둘 다 수습요원이라 어떻게 할 줄 몰라 어버버 댔는데 지금은 정식요원이라 세월 참 빠르네.”


세하가 던진 공을 받은 서유리가 행동을 멈추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세하만 이렇게 늠름하게 성장해버리고. 인생이란 참 불공평해.”


“그래 참 불공평하지.”


세하의 화답에 서유리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어쩐 일이래. 내 말에 맞장구도 다 쳐주고. 옛날 같았으면 애늙은이 같은 생각이냐며 놀렸을 텐데. 세하는 확실히 많이 변했구나. 옛 모습 따위는 하나도 남아있지가 않네.”


“때 묻었다는 소리야?”


“얘는 그걸 또 그렇게 받아 들이냐. 성장했다고. 그것도 아주 좋은 쪽으로. 그러니까….”


서유리가 마운드에 오른 투수처럼 자세를 잡더니 일부러 세하랑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강속구를 던졌다. 아까 폭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르기와 위치였지만, 저것보다 수십 배나 빠른 차원종도 수차례나 상대해본 세하가 잡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세하는 간단한 몸놀림만으로 쫓아가 강속구를 글러브로 잡았다. 사력을 다해 던진 공을 너무나도 쉽게 잡아낸 세하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공도 쉽게 잡는 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을 어떻게 잡을 수 있냐며 서로 많이 다투었는데. 이제는 우기지도 못할 만큼 강해졌구나.”


한바탕 땀을 흘린 서유리가 옷을 털며 안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서유리는 지쳤다며 그대로 땅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공을 가지고 서유리에게 걸어온 세하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 맺혀있지 않았다. 힘든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세하의 얼굴은 지금 가쁜 숨을 몰아쉬는 유리보다 안 좋았다.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처럼 쓸쓸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내가 놀자고 하고 먼저 지쳐서 삐친 거야?”


“아니, 아니야. 너랑 오랜만에 같이 놀아서 재미있었어.”


“근데 왜 초죽음상이야?”


“글세 나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얼굴이 축축 처지는지.”


“기분이 우울할 때는 단 걸 먹는 게 최고야. 초코렛 하나 줄 테니까 먹고 기운 차리라고.”


서유리가 비닐봉지에서 초콜렛 하나를 까서 세하에게 주었다. 유리가 주는 초콜렛을 세하가 받아들고 입으로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지. 그거 내가 한정판매로 애 있는 아줌마들 뚫고 겨우 가지고 나온 거야. 입에서 살살 녹지. 응? 응?”


“…맛있어.”


세하는 초콜릿을 아무 맛도 안 나는 영양제 먹듯이 목구멍으로 삼켰다. 세하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서유리에게 두 팔을 벌렸다. 떨리는 손은 서유리의 어깨를 지나 등 뒤를 향했다. 안기 직전에


카톡


“세하 너 카톡 왔는데.”


카톡이 날아오는 바람에 서유리를 둘렀던 팔을 풀었다. 세하가 카톡을 확인해보니 오늘 작전 검토로 회의할 게 있다며 슬비가 부르는 내용이었다. 


“슬비가 부르는 거야? 작전 검토할 거라도 있데?”


“그런가 봐.”


“그럼 여기 있지 말고 빨리 가봐. 슬비가 너 기다리느라 마음 졸이고 있겠다. 아무튼 작전검토 중에 지겹다고 게임할 생각하지 말고. 너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 우리 슬비 마음에 상처 쌓이니까. 애 울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알았지.”


“응, 약속할 게.”


유리가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개구쟁이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올 법한 푸근한 미소로 세하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때까지 마음속에 날 간직해줘서 고마워.”


유리가 그의 볼에 키스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다음에 또 만나자.”


주위 모든 것이 새까매지더니 이윽고 서유리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큐브 종료


전등의 불빛이 하나둘 돌아오며 주변을 밝혔다. 승급심사 때문에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던 큐브 안이었다.


세하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세상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까까지 함께 대화했던 서유리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하는 아직도 생생하게 볼에 남아있는 여운을 쓰다듬었다. 단순한 질량이 아닌 진한 감정이 세하의 볼에 묻어있었다. 


“언제까지고 널 기억할게. 그러니 여기서 또 만나자.”


허공에 대고 한 말이었지만, 마치 누군가가 앞에서 그 말을 듣고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 세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큐브를 나갔다.


‘기다릴게.’


큐브는 두 사람의 엇나간 시간이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2024-10-24 22:25:1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