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와 호감도 안경(7)
사일로시빈 2015-03-25 10
-이세하 이 잠퉁아! 또 밤늦게까지 게임했지?
유리에게 아침에 걸려오는 전화는 보통 이런식으로 시작했다. 동생이 많아서 그런가 남들을 자주 챙기려고 한다.
세간에서는 그런 것을 오지랖이라고 표현하는데, 유리는 굳이 '위대한 서유리님의 기세좋은 아량'이란 식으로 포장했다.
네가 무슨 우리 엄마도 담임 선생님도 아닌데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따지면 "친구니까!"라며 일축하곤 했다.
내가 물이 고이지도 않고 빠져나가는 세면대같다면 유리는 지하수가 콸콸 용솟음치는 온천같은 아이었다.
녀석은 언제나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었다. 무척 바보같은 일이다.
하지만 그 바보가 물을 붓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간 빠져나간 물이 바다가 될 것이다. 그런 점은 동경할만 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유리가 전화를 하지 않았다.
녀석이 갑자기 똑똑해져서 나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엄마의 여래신장으로 시작하는 아침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위대한 전쟁영웅께선 아들의 몸이 차원종보다 약하다는걸 가끔 까먹고 있는 것 같다.
단추를 제대로 채웠는지도 모를 정도로 엉망으로 교복을 주워입으면서 폰을 살폈다. 문자 하나 오지 않았다.
이쯤되면 걱정이 된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다행히도 학교에선 유리를 만날 수 있었다.
평소 이쪽이 먼저 인사를 건넬 일은 없었다. 유리가 언제나 먼저 손을 흔들어주었다.
몇몇 남자놈들은 그런 관계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유리는 집안 장식장의 틀어박힌 곰인형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오늘 유리는 나에게 인사해주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녀석은 의식적으로 피했다.
녀석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곰곰히 따져보았다. 호감도 안경으로 갑자기 수치가 폭락했는지를 확인도 해보았다.
호감도도 70이라는 높은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는데 왜 이쪽을 굳이 무시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몰래 카메라인가? 아니면 깜짝파티? 혹시 내 생일인가? 하지만 유리는 몰래하기보단 정면돌파하는 스타일이다. 그럴리는 없다.
이제 거의 완성권에 들어선 '안정된 교우관계 프로젝트'가 완성을 코앞에 두고 무너지려 하고있다.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물어보는 것이다.
"야, 서유리."
'으, 응?"
"너 오늘 이상하다? 나한테 뭐 화난 거 있냐?"
"어? 응? 아, 아냐. 화난 거 없어."
녀석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웃음이 어쩐지 수상하다.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유리는 거짓말을 못하는 축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아니 이유를 알아야 내가..."
"저기! 선생님이 부르셔서! 가볼게!"
유리는 육상부에서 당장 스카웃을 권유할법한 속도로 달려가버렸다.
.....그보다 교무실은 반대편이잖아 바보야.
점심시간에 다시 접선을 시도했다. 옆에 앉자마자 녀석은 식판을 들고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일어났다.
한 술 더 떠서 이젠 쉬는 시간에조차 보이질 않았다.
늘 모퉁이 끝에서 긴 머리가 찰라이는 걸 보고 따라가면 다음 순간에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너무 빠르잖아. 아니 빠른 것도 정도가 있다.
이 기묘한 추격전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마침내는 정미가 찾아왔다. 어쩐지 또 화가 나있다.
"너네 대체 뭐 하니?"
".....그... 내가 묻고싶은데..."
"유리가 왜 너만 보면 도망가는데? 너 뭐 했니?"
"그치? 역시 도망가는 거처럼 보이지?"
정미가 기가 막힌듯 코웃음쳤다.
"니들이 계속 그래서 다들 시끄럽게 쫑알거리고 있잖아."
"아니 그래서 왜 그러는지 묻고싶어서 말 좀 걸어보려는데 계속 도망가잖아."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응."
"그러시겠지. 어제는 이슬비랑 놀았을테니까."
"슬비 얘기는 왜 나오냐?"
"아무튼, 유리한테 뭔 일 있으면 너라도 가만 안 둘테니까."
"진정해라 야. 유리도 내 친구인데."
"너야말로 진정하는게 어때? 교과서로 계속 종이학을 접고있잖아."
"응? 너 대체 뭔 소리를......으억?! 이게 뭐야?"
"심지어 창문 밖으로 던지더라. 종이학은 못 날아 바보야."
"내가?! 엑?!"
정미의 말에 의하면 4교시 이후 계속 교과서의 남는 페이지를 찢어서 종이학을 접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무서워서 다들 말을 못 걸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어째 의식이 한 시간 정도 날아갔더라니.
시계가 빠른게 아니었군. 다행히 체육 교과서를 뜯었다. 학업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보다 화단에 떨어진 엉망진창인 종이학들도 회수해야 하는데. 선생님한테 들키면 골치아파진다.
아래쪽에서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이거 누구야아아!"
....우리 학교엔 청소에 열심인 교감 선생님이나 깐깐한 학생주임 선생님 같은 직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없어 없어. 우리 학교엔 그런 사람 없어요.
하하, 나도 참 환청이 들리고. 제이 아저씨 닮아서 귀가 많이 늙었나 보네.
기왕 현실을 도피하는 김에 정미에게 말을 걸었다.
"유리가 어제 내 얘기는 안 했어? 내가 또 뭐 잘못했나?"
"평소에 잘못한다는 자각은 있나봐?"
정미는 앞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겨 제 자리마냥 당당하게 앉았다.
필통을 들고 자리로 복귀하던 원 주인이 정미를 보고 움찔하더니 다시 정처없이 뒷문으로 나갔다.
야.... 왜 내 자리라고 말을 못해... 정미는 비스듬하게 벽에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이쪽을 바라본다.
마치 당장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목을 날려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붉은 여왕같은 자태다.
고개를 내리니 비탈을 따라 경사진 교복치마 아래의 그늘과 사이하이삭스에 감싸인 허벅지가 보였다.
어느샌가 책상을 장악한 종이학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냐. 별 말 없었어. 그냥 노래방이나 가자느니, 늘 하는 소리를 했어."
"그렇게 노래방 가달라고 하면 좀 같이 가주라."
"유리랑 가면 피곤해. 내가 노래 부를 때 너무 열심히 탬버린을 친단말야."
"아, 알지."
"너무 시끄러워서 그만 좀 하라 그러면 뭐라고?라면서 묻는데 그게 더 시끄러."
"음."
"그런데 너 유리랑 노래방도 가니?"
"응?! 아니, 그, 검은양 팀 뒷풀이 한다고 간 적은 있지. 난 노래 부르는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저번에는 기껏 한 곡 불렀더니 슬비가 "중2병다운 선곡이었어."라고 한마디 하자마자 모두 맞다고 추임새를 넣었지.
미스틸테인, 너마저.... 노래방은 내게 큰 모욕감을 주었다.
역시 노래는 듣는게 최고지. 이어폰은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다.
게임기 다음으로.
얼른 말을 돌린다.
"그럼 너도 나랑 노래방이라고 가면 되지."
이번엔 녀석이 화들짝 놀라 가디건을 끌어당겨 뺨을 감췄다.
"에?! 내, 내가 왜 너같은 애랑 노래방같은 데를 가야하는데?"
"아니, 아니 너랑 나랑 둘이서만 가는게 아니라 당연히 유리랑..."
"나, 나랑 둘이서만 가는 건 싫다는 거야?"
"야, 아니 왜 그렇게 되는...."
어쩐지 둘이 횡설수설하고 있는 동안 누군가가 곁에 다가와 의자를 끌었다.
저 낡은 의자 끝이 바닥을 긁을 때는 기묘하게도 분필을 칠판을 긁을 때와 비슷한 소음이 났다.
의자의 정령이 노해서 비명을 지르기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녀석이 무게를 싣자 고무패킹 한쪽이 빠진 탓에 균형이 맞지않는 의자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슬비다.
"이세하. 유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까 정미한테도 말했지만, 아무 일 없었다니까."
체육복을 들고 돌아오던 원래 자리의 주인이 앉아있는 슬비를 발견했다. 또 뻘뻘 식은 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친다.
니들 뭐라고 말 좀 해라... 사내자식들이 왜 여자만 보면 도망가는 거야. 얘네가 그렇게 무섭...
무섭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평화에 찌들어서 닭장 안에 있는 동안 난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암탉이 분명 이런 기분이리라.
그리고 복날이 되서 손님이 오면 귀신같이 잡혀서 깃털을 뽑히는 거지. 공교롭게도 내 복날은 오늘이었다.
"그리고 정미 너. 여기는 너희 반이 아닌데 왜 자리를 점거하고 있는 거니?"
"다른 사람 의자에 앉아있는 네가 할 소리는 아니잖아?"
"나, 나는 잠시 빌린 거야."
"그럼 나도 잠시 빌린 거야."
"............"
"아, 세하도 유리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더라. 나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내가 한번 더 반복할 필요는 없어."
정미는 제법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슬비는 살짝 몸을 움찔하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난 검은 양팀의 리더니까 팀원들의 불화를 확인할 의무가..."
"여기는 학교야. 학교에서도 리더 행세니?"
"너만 서유리의 친구인 건 아니야."
"그럼 왜 유리한테 안 묻고 이리로 왔는데?"
"너야말로 유리의 절친이라는 애가 유리가 왜 저러는지 모르니?"
어라? 나 필요없는 거 아냐? 여기서 슬금슬금 퇴장하면 됩니까?
인간마다 어떤 날씨의 핵을 이루고 있고, 인간관계로 날씨가 결정되는 거라면 지금 여긴 저기압이 틀림없다.
장마가 몰려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산을 챙기는 것이 문명인다운 대처법이다.
답답한 기분에 슬쩍 의자를 빼니 정미와 슬비가 동시에 무겁게 누르듯이 말한다.
""앉아, 이세하.""
왜 둘이 노려보면서 날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아니 난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는데 말이 겹쳤잖아.
다들 실은 엄청 사이 좋은 거지? 왜 이 교실에서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 거냐. 우리 친구 아니었어?
정미가 슬쩍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러고보면 넌 모를만도 하구나. 어제 이런 애랑 노닥거리느라고 유리가 뭘 하든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지."
슬비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 그게 무슨 상관인데? 너야말로 세하랑.... 쇼핑하고 다니면서..."
이번엔 정미가 얼굴을 붉혔다.
"하아?! 내가? 얘랑? 왜 그런 착각을 하는데?"
"착각이라고? 뭐 다들 그렇게 말하곤하지. 드라마의 단골 대사 아니겠어?"
"까놓고 말해서 그건 무슨 상관인데?"
"아무 상관 없어. 내가 세하랑 다닌게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그렇지?"
슬비가 슬쩍 그을린 미소를 짓자 정미가 입술을 씹었다.
"그럼 넌 오늘 유리를 만나보긴 했어?"
"너는?"
"내가 먼저 묻고 있잖아."
"유리는 아무 일 없다고 했어."
"그래? 그건 당연히 거짓말이잖아."
"거짓말이야?"
"당연하지! 걔 거짓말 못하는 거 알면서!"
"거짓말을 못하는데 나한테 거짓말을 해?"
"아.... 내가 잠시 네가 이런 애인줄 잊고 있었어...."
"이런 애라는게 무슨 의미야?"
슬비가 유리랑 만나기는 했구나. 그런데 유리는 역시 아무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이슬비의 고지식한 사고방식대로라면 유리의 말을 믿었을 것이고, 졸지에 난 아무 이유없이 유리를 쫓아다니는 스토커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 엘리트 리더님께선 사회성이란게 한 조각 결여되서 이런 부분이 모자란 점이 있다.
드라마를 그렇게나 보는데도 이 사회성은 고쳐지질 않는다.
슬비가 입을 삐죽이며 정미에게 화살을 날린다.
"그럼 넌 왜 유리를 안 만났는데?"
"같은 클로저도 못 잡는 애를 일반인인 내가 어떻게 잡니?"
"그럼 유리가 너도 피했다는 뜻이야?"
"아냐, 바보야.... 내가 만나려고 하면 이미 이세하가 쫓아다니고 있어서..."
"그 말인즉슨, 역시 이세하가 서유리를 스토킹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역시 그렇게 되냐!?'
슬비가 도끼눈을 뜨며 정의롭게 쏘아붙였다.
"파렴치하구나 이세하. 넌 싫다는 여자애를 억지로 쫓아다니는 애였니?"
"매도하지 마라. 걔가 계속 날 피해서 이유를 물어보려 한 거였다고."
"너를 왜 피하는데?"
"모르지."
"역시 네가 쫓아다녀서 피하는 거잖아?"
"돌겠네?!"
"여기선 좀 명탐정 이슬비님의 천재적인 두뇌에 기대도 좋아."
"너 또 추리물 봤지? 그리고 날 범인으로 모는데 어떻게 기대냐!"
"그 말은 범인이 이 안에 있다는 뜻이지?"
"너말야, 실은 그냥 그 대사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지?"
슬비가 얼굴을 붉히며 발을 꼼지락거리는데 정미가 단두대마냥 치고 들어왔다.
"유리가 전화도 꺼둔 상태야. 분명 문제가 있는 거야."
슬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터리가 다 되었을 수도 있잖아? 그런 차원종이 나타났을 때 긴급소집할 수가 없어."
정미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너라는 애는....."
"내 추리에 의하면 유리는 며칠 전부터 이상했어."
"그건 추리가 아니라 관찰이잖아."
"시끄러 이세하."
"그럼 나 가도 되냐?"
"넌 지금 조사를 받고있어."
"집에 가고싶다...."
정미가 책상 아래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넌 유리가 저러는데 집 생각이 나니?"
"야, 뭘 그렇게 급하냐. 그냥 오늘 내가 보기 싫을 수도 있겠지. 며칠 뒤면 나아지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다. 나도 가끔 널 보기 싫어지거든."
"동감이야."
슬비 넌 거기서 추임새 넣지마라....
아니 그보다 둘이 거기서 입 맞추지 마.... 사람을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냐 얘네들은.
문득 떠올라 슬비에게 물어보았다.
"너 설마 우리끼리 찍은 사진 유리한테 보냈냐?"
슬비한테 물으니 다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남은 인원이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보고하는 건 중요해. 게다가 야간활동이니까 걱정하지 않게 해줘야지."
".....야. 유리는 외로움 많이 탄다고. 우리 둘이서만 그러면 겉으론 내색 안해도 삐질 수 있다니까?"
".......그래? 역시 셋이 같이 갔어야 할까? 그렇지만 유리가 됐다고 그랬는걸."
"넌 아직 모르겠지만, 유리가 거짓말을 할 때는...."
슬비한테 훈계를 좀 하려는데 정미가 끼어든다.
"두, 둘이 사진을 찍었어? 보여줘."
그러마하고 폰을 넘기려는데 슬비가 낚아챘다.
"....왜 보려는 건데?"
"....왜 보면 안 되는데?"
"너도 세하랑 사진 정도는 찍잖아."
"너 되게 속이 좁구나. 계속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
"난 그게 잘못되었다고 하진 않았어. 그러니 이 사진도 잘못되지 않았어."
"잘못되지 않았으면 보여줘."
둘의 시선이 다시 허공에서 부딪쳤다. 한쪽이 날카롭다면 한쪽은 차갑다.
내가 만약 파리라면 저 사이로 배짱좋게 날아가려는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 쉬는 시간이 끝나고 있었고, 교실은 어느새 고요해졌다. 화단의 상태에 경악했던 선생님 한 분이 올라왔다.
선생님은 누가 봐도 범인으로 보이는 날 발견했다. 책상에 놓여있는 종이학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동시에 모종의 이유로 서로 날을 세우고 있는 슬비와 정미를 발견했다.
선생님은 헛기침을 하고는 슬그머니 뒤로 발걸음을 돌렸다....
.... 왜 가는 거야!? 갈 타이밍 아니잖아! 선생님 뭘 하고 있는 거야!
쉬는 시간을 마치는 종이 울린다. 슬비와 정미가 점거하던 자리의 주인들도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아직 자리가 비지 않을걸 보고 다시 복도로 돌아갔다....
다음 과목의 영어 선생님도 앞문을 통해 들어왔다가 둘을 보았다. 그리고는 수업을 착각한 것 같다고 돌아갔다...
.....안 헷갈렸어! 시간표 멀쩡히 써있잖아! 영어 맞잖아! 누가 봐도 영어잖아!
대체 뭔데? 결계냐?
아니, 그러고보면 나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여기에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끝내기 전에 보험삼아 아이들의 호감도를 확인해보았다.
생각보다 지금 수치가 낮다면 "입** 이세하"란 대답이 돌아올테니까.
확인하고나니 괜한 걱정이었다고 생각했다. 75란 수치는 충분히 높은 수치였으니까.
둘 다 같은 수치를 유지한다는 점이 이상하긴 하다.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먼저 슬비에게 말을 걸었다.
"슬비야. 수업 시작했으니까 돌아가고 다음에 얘기해."
"......아? ....미안."
"정미 너도. 유리는 내가 찾아올테니까."
"에!? 아, 알았어."
슬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한테 휙 폰을 던져주고 뒷문으로 퇴장하자, 정미가 쫓듯이 뒤따라갔다.
원래 자리의 주인들이 조심스레 되돌아와 아직 온기가 식지않은 의자를 만지는동안 반장에게 말했다.
"반장. 선생님 불러와. 수업 시작해."
이 대목에서 몇몇 녀석들이 야유를 했다.
반장은 충실하게도 얼빠진 대답을 했다.
"어? 엉....."
"난 보건실 좀 다녀올게."
유리는 수업시간이 되었음에도 딱히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몸이 안 좋았다면 양호실로 갔을 터다.
물론 양호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꿏는 감기약만 받고 왔다. 동아리부실들은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잠겨있다.
매점 역시 여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수업이 땡땡이 치고 매점을 습격하는 무리를 막기 위한 교칙이다.
이 녀석이 무작정 학교를 탈출해 멀리 갔을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 아이는 아니다.
그렇다면 갈만한 곳은 하나다.
옥상은 안전상의 이유로 잠겨있지만, 우린 그런걸 신경쓰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으니까.
"세, 세하야!?"
"그깟 빵 몰래 먹으려고 여기까지 올라왔냐. 수업 종 쳤다고."
유리의 근처에는 적지 않은 양의 간식들이 보였다. 과자 두 봉지에 빵 하나. 음료수 한 병. 이미 다 비어있다.
어지간히도 먹성이 좋은 녀석인다. 그럼에도 살이 찌지 않는 걸 보면 축복받은 체질인 것이 틀림없다.
부스럭부스럭 요란한 소리를 내며 봉지를 숨긴 녀석이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닦았다.
"너, 너랑 관계 없잖아!"
"너 오늘 왜 그러냐. 다 먹었으면 가자."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러는데?"
"뭐가."
"평소엔 나한테 신경도 안 쓰면서, 왜 요즘 들어서 이렇게 잘해주는데?"
뭔가에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이 녀석도 의식하고 있었다.
호감도 안경을 착용한 뒤로, 의식적으로 호감도를 올릴만한 행동만을 조심조심 실행하고 있었다.
집에 가면 이런저런 게임을 연구해보면서, 심지어 책까지 **가며 어떻게 해야 애들이 좋아해주는가를 생각했다.
이쪽은 티 안나지 않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유리에게 네 호감도를 올리려고...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마른 혀를 축이고나서 입을 열었다.
"난 너한테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넌 언제나 날 신경썼으니까."
".........."
"그래서 되돌려주는 거야. 그게 이상한 일이야?"
"........."
"우린 친구니까."
"..........싫어."
"뭐가."
"친구로 지내는 거. 싫어."
가끔 방과 후에 교사들이 종종 여기 올라와서 담배를 피우곤 한다.
학교는 모두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을 긋는다고 모두가 그 선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유리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친구, 가족, 연인, 전우, 적, 모든 관계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는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그 선을 넘지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뒷걸음질치는 것도 무색하게 유리는 그 선을 손쉽게 넘어왔다.
유리의 눈은 무척 청명한 푸른색이었다. 맑은 날의 소금사막은 하늘과 땅의 경계가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런 빛깔이었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깨끗한 파랑색. 그럼에도 유리의 눈은 슬비와는 다른 온기가 있었다.
그 눈을 단단하게 만들면서, 평소보다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잇는다.
"이젠 그런 거 싫어. 그러니까, 이젠 나한테 신경쓰지마."
굳이 호감도 안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유리는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다.
"거짓말 진짜 못한다."
유리는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가끔은 거짓말을 잘하고 싶어."
"뭔진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 거야?"
"뭐가 미안해 이 바보야."
유리는 밀치듯이 이쪽을 때렸다. 녀석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서 끌어내렸다. 이렇게 보니 녀석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언제나 누나인척 허세를 부렸지만, 역시 거기엔 나와 똑같은 어린아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
"........."
"네 목소리를 듣는게 좋고, 네 옆에 있는게 좋고, 너랑 같이 걷는게 좋고, 너한테 기대는게 좋고, 널 생각하는게 좋아."
".........."
"넌 그냥 친구인데, 친구로 있기 싫어. 이상하잖아. 내가, 널 좋아한다는게."
".............."
"할 말 없어?"
"......그게... 왜 나한테서 도망치는 이유가 되는데?"
"슬비랑 정미도 널 좋아하니까 그러지 바보야!"
".........."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좋아해...."
난 그제서야 70이란 숫자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어떠한 임계점을 가리키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사실은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알고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란 것은 흑백으로 간단히 나뉘는 것이 아니다.
보기 싫은 편지를 병에 담아 바다 멀리 던졌더니, 파도를 타고 백사장에 묻혀있는 것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이란 내 욕심대로 움직이는게 아니다. 초등학생도 아는 이야기다.
이제는 많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안경으로 숫자를 처음 확인했던 그때부터, 이미 다시 게임으로 도망치기엔 늦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여자애한테 고백을 받았다. 잘못 들었다던가, 바쁘다던가, 나중에 대답하겠다고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다.
난 고백에 대해 나름대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고백이란 마음과 마음이 닿는 거니까.
뭔가 허공에선 종소리가 울리고, 심장은 발작하듯이 뛰고, 햇살이 눈부시고, 달큰하게 중탕된 초콜릿 안쪽에 있는 기분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당혹감만이 있었을 뿐이다. 우습게도 나도 좋아, 란 말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그릇 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아무리 물을 부어도 떨어지지 않을 때의 느낌이었다.
유리는 슬비와 정미가 날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고, 둘의 그런 마음을 알면서 날 좋아한다는 건 둘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을 터다.
그래서 하루종일 날 의식해 피하던 아이한테 좋아한다고 대답하든,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든 어느 쪽이든 상처가 될 것이다.
게임에는 명확한 공략이 존재했다. 아무리 공부했음에도 현실은 게임과 달랐다. 확실한 답이란 산수 문제에나 있는 것이다.
"정말로 슬비도, 정미도 날 좋아해? 그렇게 생각해?"
"....헤?"
"넌 내가 누굴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뭐, 뭐야... 그야 당연히, 슬비를...."
우물쭈물하는 유리가 시선을 피한다.
장작불 앞에서 오래 일한 새댁마냥 달아오른 얼굴에는 여러 표정이 교집합으로 겹쳐있었다.
만약 내가 지금이라도 입을 맞추려 한다면 이 녀석은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유리의 고백에 대답하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다른 답을 만들기로 했다.
"뭐, 뭐하는 거야...? 세하야?"
"둘이 네 걱정을 많이 해서, 그래서 문자했어. 찾았으니까 옥상으로 오라고."
"에? 에?"
가만히 유리의 손을 잡았다. 유리는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했지만, 애석하게도 힘은 내 쪽이 위였다.
물음표를 기관총마냥 발사해대는 유리를 보면서,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걔네도 네 마음을 알아야할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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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도연에몽의 솔루션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955
2화 : 그는 어떻게 플래그를 꺾는가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3&n4articlesn=1970
3화 : 봄봄은 점순이의 계절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2008
4화 : 그는 어떻게 플래그를 꽂는가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2029
5화 : 초속 162cm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3&n4articlesn=2043
6화 : 먼저 꼬리 친 개가 밥은 나중 먹는다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articlesn=2077
아니 이거 왜 이렇게 길어.... 이거저거 엄청 잘라냈는데도 길어...
아무튼 이제는 모든 것을 끝내야할 시간이군요.
세린이 분량을 빼니 10화까지도 가지 않네요. 잘 됐군 잘 됐어.
호감도 안경의 수치는 대충 이렇게 정리됩니다.
0 무심함
10 적의를 가지지 않음
30 친근감을 느낌
50 상대를 신뢰함
60 이성으로서 의식함
70 이성으로서 좋아함
80 이성으로서 사랑함
90 가족으로서 사랑함
100 궁극의 사랑
마이너스 수치는 비호감도로, 더스트편에서 나오려고 했는데 통편집을 해버렸으니 그냥 잊어버리는 걸로...
여담으로 오세린의 호감도는 59, 더스트의 호감도는 -100으로 설정했었습니다.
계속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