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와 호감도 안경(6)
사일로시빈 2015-03-24 10
처음에는 목줄도 싫어해서 매번 몸을 흔들었지만, 이제는 적응했는지 산책갈 때도 별로 반항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리광이 심하다. 너무 활발해서 조금 놀아줘도 만족하지 못하고 낑낑거리질 않나, 밥을 달라고 울질 않나.
나보다 체력도 좋고 활동량도 많은 녀석인지라 평범한 놀아주기로는 성에 안 차는듯하다.
최근에는 특히 비눗방울을 좋아한다는걸 깨달았다. 아직도 비눗방울을 잡으려고 뛰어다니고 있다.
유리는 쓰다듬어주는걸 특히 좋아한다. 자동으로 쓰다듬어주는 기계가 필요할 정도로 매번 꼬리를 흔들며 머리를 들이밀어온다.
특히 배를 쓰다듬는걸 좋아한다. 그 분홍색의 말랑말랑한 배를 슥슥 문질러주면 만족스러운듯 고개를 젖히는 것이다.
귀여운 녀석.
"그래서 세하야."
"응?"
"왜 개 이름이랑 내 이름이 똑같아?"
유리가 게임기 안에서 폴짝폴짝 뛰고있는 토실토실한 허스키를 바라본다.
화면을 핥고있는 전자강아지의 코에 손을 뻗으면서 등을 압박하고 있다.
"그야 널 닮았으니까 그렇지."
"내가 개 같다는 거야?!"
"뭔가 어감이 좀 이상하지 않냐."
"개 같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거네?!"
묵직한 물풍선으로 어깨뼈를 누르며 볼을 부풀리던 유리의 머리카락이 쏟아져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이 녀석은 언제나 너무 가까이 붙어온다. 밀착취재란 말을 현실에 구현하면 이런 모습이 되는건가?
개라는 표현은 어감이 좋지 않으니, 강아지라고 하자. 그렇다. 서유리는 많은 부분에서 강아지와 닮았다.
"세하야 놀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어깨에 달라붙는 유리.
"저거 먹자 세하야!" 등을 긁으며 애처롭게 침을 흘리는 유리.
"졸려어..." 선생님이 보든말든 거침없이 엎드리는 유리.
유리는 이쪽에서 잊을만하면 근처에 있었다. 녀석과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알던 소굽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유리는 장식장 한구석을 차지하는 오래된 곰인형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의 한조각을 차지하고 있다.
유리가 볼을 쿡쿡 찔러왔다.
"그래서, 우리 세하 슬비랑 데이트는 잘하고 온 거야?"
"데, 데이트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오구오구, 그랬쪄요? 이 누나가 다 알고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매셔!"
"하나도 모르고 있잖아....."
"그런데 옷도 쫙 빼입고 가더라? 기왕 신상을 갖췄으면 누님한테 먼저 보여주는게 예의 아냐?"
"실은 너한테 부탁하려다 말았어."
"왜에?"
"이렇게 놀려대니까."
"흐응. 하여간 아량이 부족하다니까. 좀 솔직해지는게 어때?"
"뭘."
유리는 뭐라고 말을 하려는듯 입을 벌렸다가, 살짝 덧니가 보이기 전에 입을 닫았다.
입술이 잠시간 물결을 그리다가, 이내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다가, 자갈처럼 단단해졌다가, 마침내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보다."
"응?"
"이걸 보시라!"
의외로 이 녀석이 게임 화제를 들고왔다. 그 유명한 온 몸을 움직여 화살표를 밟는 리듬게임이다.
과거에 한 시대를 평정하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개량되어 사랑받아온 오락실의 간판 마스코트가 아니던가.
대다수의 리듬게임은 손으로 플레이를 하지만 이 게임은 발을 쓰기 때문에 운동효과가 상당하다.
그런 게임이 근처에서 대회가 열리는 모양이다.
내 게임실력은 손가락에만 국한되어 있던 탓에, 그다지 흥미가 생기진 않았다.
"내가 게임은 뭐든 잘하는줄 아냐."
"그게 아니라, 이걸 봐!"
1등 상금에 한우가 걸려있다. 과연.
"나 이거 나갈래!"
"야. 너 이거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냐. 예선 통과도 못할 거라고. 전국구로 괴물같은 플레이어들이 모인단말야."
"우리 세하가 잊은 모양인데, 난 검도로 전국을 평정할 뻔했어."
"이거랑 그건 다르지. 네가 아무리 반사신경이 좋아도, 해본 적도 없는 걸 어떻게...."
"바로 그거야!"
"응?"
"내 연습상대가 되어줘! 아니지, 사부님이라고 해야하나?"
"질 걸 알고 게임을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닌데."
"이기면 되잖아!"
이 녀석은 언제나 이렇다. 티하나 없이 투명한 얼굴에서 화사한 광채를 발하면서, 그 커다란 눈으로 상대를 압도한다.
자신의 미모를 자각하던 자각하고 있지 못하던, 아무튼 녀석은 타고난 장점을 확실히 써먹고 있는 중이다.
물론 난 녀석에게 면역을 가지고 있었다.
"싫어. 정미정미한테나 부탁하지 그래?'
무심히 말하며 게임기를 두드리는데 유리가 어깨를 붙잡는다.
그리고는 꼬집듯이 손아귀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
"정미를 정미정미라 부를 수 있는 건 나뿐인데....?"
"레, 렉 걸려서 두 번 부른 거야... 놔라...."
"아냐 세하야. 이건 안마야. 아저씨도 안마를 좋아하시던데? 어때? 시원해?"
"이게 시원해....? 야, 위상력 쓰지마라."
"정미정미는 내 거니까 건드리지마! 알겠어?"
"넌 그렇게 정미를 좋아해서 어떡하냐. 나중에 정미가 결혼이라도 하면 울겠다 야."
가볍게 놀리듯이 던진 말이었는데, 순간 어깨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는 추위라도 타는양 자신의 팔을 문지르며, 약간 의기소침해진 태도로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유리야?"
"뭐, 아무튼! 좀생이에 겁쟁이인 세하가 못 도와주겠다니까 석봉이나 만나러 가봐야겠다."
"석봉이는 왜. 애 괴롭히지 마라."
"아, 안 괴롭혀! 같은 게임폐인이라도 석봉이가 너보다 게임은 억만배 잘하잖아?"
"야. 계산 안 서냐? 억만배는 아니거든?"
"그럼 만억배쯤."
"너 수학 안 배웠냐.... 만억이라는 말은 없다고. 그럼 천만보다 높은 단위가 만만이 되잖아."
"음...... 그거 지금 개그라고 한 거야?"
"아오....."
석봉이는 가뜩이나 아르바이트 때문에 몸이 남아나질 않는 녀석이다.
썰매개마냥 힘이 넘치는 유리에게 휘둘리다간 내일 걸어다니지 못할지도 모른다.
"기다려."
나가려던 유리는 손목을 붙잡히자 무척 놀란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손목이 가늘다.
녀석은 얼굴을 붉히며 난처한 표정으로 손목을 부드럽게 비틀어 빼냈다.
"마, 말로 해."
"가자."
"에? 가주는 거야?"
"뭐, 경험 정도는 시켜줄 수 있겠지. 일단은 연습이나 좀 해보자고."
"세하는 이거 못하는 거 아니었어?"
"야. 내가 모든 게임을 다 잘 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어휴. 허세."
"너한테 듣고싶지 않다."
난 오락실 세대는 아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PC방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어느새 온라인 게임시장조차 시나브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누구나 가방에 휴대용 게임기를 넣고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수도권을 비롯한 일부지역은 오락실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나마 가까운 곳이 어딘지 알고있다.
"여, 영화관....?"
"응. 멀리 갈 필요도 없고, 오락실이 안에 있는 영화관들이 있더라고. 그리 넓진 않지만."
"그럼 세하가 겸사겸사 영화도 보여주는 거야?"
"너 주객전도라는 말 아냐?"
"영화관에서 게임을 하는게 오히려 주객전도 아냐?"
"올.... 너 아저씨한테 이상한 약이라도 받았냐? ALZ-113이라던가."
"그게 뭔데?"
"원숭이도 똑똑하게 만들어주는 약."
말하자마자 도망쳤지만 바로 잡혔다. 친구를 상대로 시프트를 쓰다니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보라며 보디블로를 먹일 기세로 옆구리를 찌르는 유리에게 영혼을 담아 살려달라고 호소해야했다.
오락실은 매표소와 대기실 맞은 편에 위치했는데, 멀리서 봐도 혼자 조명이 남다른 것으로 존재감을 피력하고 있다.
어두운 공간을 가로지르는 알록달록한 광선들에 의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윤곽을 잃어버린다..
얼마 전에 도플갱어같은 것들과 맞붙은 입장에서 그런 풍경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물론 유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동전을 좀 바꿔왔더니 인형뽑기를 뚫어져라 보고있다.
"이거 봐 세하야. 멜론 위에 햄이 얹혀져 있어."
"멜론에 돼지 캐릭터라니 처참한데."
"이게 바로 전설의 햄메론인가봐."
"햄메론은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이탈리아에 있는 음식이라고. 멜론 프로슈토. TV도 안 보냐?"
"나 햄메론에 꽂힌 거 같아."
"좀 멀쩡한 거에 꽂혀주면 안 되냐."
"세하가 이걸 만들어주던가 뽑아주지 않으면 난 햄메론 병에 걸려버릴지도 몰라."
"이미 걸려있잖아...."
모든 게임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며 부정한 게임을 뽑자면 인형뽑기를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인형뽑기의 핵심은 집게가 달린 크레인인데, 이것은 관절부가 무척 허약해서 뭔가를 꽉 집을 수가 없다.
거기에다가 대부분의 뽑기용 경품은 봉제인형으로, 플라스틱 집게와는 궁합이 좋지 않아 미끄러지기 일수다.
심지어 더 악랄하게도 인형들은 집기 어렵도록 배치되어 있거나, 비싼 물건은 무게추같은 것을 달아놓기도 한다.
게임이란 이름 아래의 벌어지는 악랄한 사기의 현장인 것이다.
하지만 난 치사한 어른들의 상술에 당할만큼 호락호락한 게이머가 아니다.
"좋아. 해주지."
"진짜?! 아냐. 농담해본 거야 세하야. 잘 하지도 못하면서!"
"후..... 우선 그 환상을 부숴주지."
솔직히 조금 긴장되지만 허세를 부려봤다. 요령이라면 알고있다.
인형에 붙어있는 가격표 끈이나 반고리형 태그에 집게 끝을 밀어넣는 것이다.
이후 조바심 내지않고 차근차근 움직여서 잘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약간의 시간 후에 뽑은 인형을 건넸다.
"자."
"........"
"훗, 너무 놀랐냐. 이게 바로..."
"뭐, 뭐가 훗이야! 햄메론이 아니잖아!"
"이, 이게 훨씬 귀엽다고."
햄메론은 위치가 좋지 않았다. 아니 왜, 머리에 아이스크림이 얹혀진 와플무늬의 고래도 충분히 귀엽지 않나?
싫지는 않은 눈치인지 유리는 냅다 인형을 껴안긴 했지만 어쩐지 부루퉁한 표정이다.
숨막혀 보이는 인형을 안은 상태 그대로 유리는 한차례 한숨을 내쉬고는, 허리를 비틀며 몸을 풀었다.
"뭐하냐?"
"세하를 믿은 내가 바보였어. 내가 햄메론을 뽑는걸 보여주지."
"네가? 뭐, 바보인건 부정하지 않...."
인형이 입을 막고있었다. 좀 더 세게 누르면 질식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인형 너머로 도끼눈을 뜬 유리가 오락실의 소음에 지지않으려는듯 소리쳤다.
"잘 보고있어!"
처음에는 이 녀석이 재화에 대한 가치를 상실하진 않았나 의심이 되었다.
오락실의 열기가 평소에도 흐릿했던 판단력을 더 흐릿하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고는 패가망신해서 거리에 박스 한장 두르고 주저앉아 그때 왜 말리지 않았냐고 울며불며 내 멱살을 잡는 전개겠지.
하지만 유리는 인형뽑기에 동전을 밀어넣지 않았다. 오락실에는 아르바이트생이 있다.
고장난 게임을 손보거나, 동전을 바꿔주거나, 안내를 해주거나, 줄을 만들어주거나, 기계가 동전을 먹었을 때 봐주던가 하는 것이다.
유리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다가가, 허리를 살짝 숙여 성대가 녹아내릴법한 무척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오빠! 저 저거 뽑고싶은데, 어떻게 안될까요?"
효과는 굉장했다. 통한의 일격에 얹어맞은 알바는 심장에 무리가 온 것인지 휘청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게임기를 열어 인형을 아주 뽑기 좋게 재배치를 해준 것이다.
유리는 고맙다며 윙크를 한 후, 무척 간단하게 인형을 툭 굴려서 출구로 떨어뜨렸다.
그렇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기본은 내부의 간수를 매수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웃기지마! 야! 이건 치트야!"
"흐흥. 사기에 사기로 맞대응하는 거야말로 정의구현이 아닐까? 우리 어린 세하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야, 비겁하지 않냐. 그럼 나도 너처럼 귀엽고 가슴크면 모든 오락실을 재패할 수 있는 거냐?"
"뭐, 뭐래?"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로 유리의 얼굴이 좀 더 짙어진 것처럼 보였다.
두 인형을 품에 껴안은 채 코를 묻던 녀석이 종종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도착해보니 애초에 목표로 했던 게임기에선 이미 댄스 배틀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리에게 소식이 들어갈 정도였다면 이미 매니아들에게는 유명한 화제였을테니, 이제 와서 붐비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한참 기다려야할 거 같아서 멍하니 격투게임을 구경하고 있자니 유리가 쪼르르 다른 게임기를 향했다.
"차원종이 코 앞에 닥친 시대에 좀비를 잡는 게임이라니."
"공룡을 잡는 것보단 괜찮지 않냐?"
유리는 2인용으로 시작하려는듯 동전을 넣었다.
패기가 넘치는 표정을 짓고있다.
"야!?"
"나의 환상적인 사격실력을 선보일 때가 왔네!"
"한발만 맞으라면서 갈겨댈 때는 언제고?!"
"됐고 이 누님만 믿고 따라와!"
문이 열리자 좀비가 가득하다. 아니 이 집은 무슨 파티라도 한 거야. 뭐 이리 사람이 많아.
심지어 거의 다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나? 무슨 추수감사절 같은 거라도 열려서 가족끼리 모인 자리였나보다.
유리는 거침없이 총을 쏴대며 좀비들의 머리를 토마토마냥 터뜨렸다.
"쏜다! 벤다! 땅땅땅빵!"
"못 베잖아?!"
"어라, 왜 총이 안 나가?"
"장전을 해야지!"
"난 거의 장전 안 하고 쏜단말야!"
"하여간 총돌리기만 연습해대더니..."
"총 돌리는거 짱 멋있거든?!"
물론 이런 아수라장으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사이좋게 첫번째 보스에서 리타이어하자 유리가 슬쩍 고개를 젖혀 들이밀며 비아냥거렸다.
"잘 한다며?"
"PC판은 잘 한다고."
"다음엔 뭐 할까?!"
"너 잊은 거 아니냐. 넌 저 발로 뛰는 게임을..."
유리의 복장을 한번 확인했다.
"아니다. 오늘은 포기하자고."
"왜?"
"치마잖냐."
"아?"
녀석이 눈썹을 풀며 헤실헤실 웃었다.
"너무 편해서 잊고 있었네."
"그래서, 어떡할래?"
"기왕 세하랑 왔는데 그냥 가면 아쉽잖아. 뭐라도 좀 해봐!"
"그럼 이번엔 이거다."
강철 달팽이를 탄 용감한 군인들이 외계인을 때려잡는 심플한 게임이다.
옆에 앉은 유리는 포탄이 떨어져내릴 때쯤 비명을 질렀다.
"외계인 안 나오잖아!"
"나, 나와. 끝에."
"날 속였어!"
"죽으려면 수류탄이나 다 던지고 죽어라."
"외계인은 어떻게 생겼어?"
"해파리처럼 생겼어."
"왜 잘생긴 외계인은 없을까?"
"나처럼 잘 생기면 잡고싶지가 않잖냐."
"뭐래. 세하 닮은 외계인이면 파이를 만들어버릴 거야."
"얘가 또 무서운 소리를 하네."
보스를 간단히 격파했다.
"어때요, 참 쉽죠?"하고 읊어주고 싶었지만 이후 손이 미끄러짐과 동시에 주인공의 생명도 미끄러졌다.
변주곡마냥 다채로운 비명을 지르며 땅에서 튕겨나간 주인공이 애처롭게 추락해 나뒹군다.
그러고나선 북을 치거나 격투게임에서 되먹지도 않는 커맨드를 입력하거나, 슈팅게임에서 숨겨진 캐릭터를 찾는등 시간을 보냈다.
동전이 떨어지고나자 오락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유리가 걷던 와중 잊은 것이 있다며 빠르게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아까 뽑았던 고래 인형을 들고 나왔다. 다행히 의자 위에 그대로 있던 모양이다.
"뭐야. 지갑이라도 잃어버린줄 알았더니."
"기껏 세하가 준 건데 잃어버리면 아깝잖아!"
"그러셔."
"배고파."
"대신 저 어디 냉면이랑 고기를 같이 파는 가게가 있어."
"갈래."
"..........."
"그래."
유리와 나란히 사람들 사이를 걸을 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이랬던 것처럼 느껴졌다.
주변의 건물이 아직 높지 않고 나무가 좀 더 많고 사람이 좀 더 적을 때에도, 우리의 키가 좀 더 작았을 때에도.
녀석은 나와 달리 허리를 곧게 피고 걸었다. 자세가 좋아서 가끔은 모델이 걷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 지나치게 발달한 흉부 덕에 균형을 맞추려고 일부러 등을 세우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녀석은 가끔 머리를 묶었다. 긴 머리를 정돈해 위로 올려묶을 때마다 아직 솜털이 자란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그러고는 머리끈을 방금 전까지 입에 물었단 것을 까먹은 채,
"어라? 세하야. 내 머리끈 못 봤어?"
하고 물어오는 것이다.
떨어졌다고 얘기해주면 머리를 올렸던 손을 내릴까 허리를 숙일까 안절부절하다가 마침내는 좀 주워달라고 투정을 부린다.
지금처럼. 주워주니 녀석이 머리를 마저 묶고 이제야 좀 먹기 편하겠다며 웃는다.
"어쩌다보니 오늘은 너랑 하루종일 있는 기분이네."
유리는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눈꼬리를 내리며 힘없이 웃었다.
"그러네. 또 이러고 있었네."
그렇게 말할 때의 유리는 어딘가가 굉장히 쓰린 것처럼 보였다. 녀석은 내 앞에서 뭘 먹을 때는 내숭을 떨지 않았다.
다람쥐마냥 입에 한가득 넣고, 양념이 묻으면 그제야 휴지로 대충 입가를 닦는다.
그리 많이 먹지 않았음에도 많이 먹는 것처럼 먹었다.
매끼 식사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먹는단 점에서도, 유리는 강아지와 많은 점이 닮아있다.
돌아가는 길에 유리는 조금 앞서서 걸었다. 그리고는 버스를 타기 직전에 이쪽을 어깨 너머로 힐끔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조심스럽다. 평소에는 직구만 날려대던 투수가 갑자기 변화구를 넣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모습이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선,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야, 이세하."
"뭐."
"한번만 안아줘봐."
"........엉?"
"프리허그야."
"...........너 졸리냐?"
"그, 그런 거 아냐! 한번만 해줘봐!"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음에도 난 주변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보고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딱히 어떠한 가치도, 의미도 부여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연히 얼굴이 달아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녀석이 눈을 꼭 감고 팔을 활짝 벌리고있기에 접히지 않는 날개를 접어주듯 조심스럽게 손을 밀어넣었다.
따뜻한 마시멜로같은 감촉이 품안에 들어왔다. 녀석은 내 등에 손을 얹었다가, 조금 힘을 주어 껴안아왔다.
그리고나서는 처음부터 떨어져있던 것처럼, 뒷걸음질치며 이쪽을 부드럽게 밀어내는 것이다.
녀석이 고개를 숙인채 중얼거린다.
"......역시 안되겠어."
".........아까부터 뭐야?"
"모르겠어."
유리는 그렇게 말하고나서 웃었다. 찡그린 얼굴에, 입꼬리는 한쪽만 올라가있고, 귀는 빨갛다.
유리는 수많은 웃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주사를 처음 맞을 때의 긴장과 아픔을, 웃음으로 어떻게든 무마해보려는 씩씩한 남자아이처럼 보였다.
그런 녀석의 뒤로 펼쳐진 흐릿한 풍경에 강렬한 색채가 칠해진다.
순간 위에서 치고올라온 바람 덕에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버스의 문이 열리자마자 유리는 내일 보자는 짧은 인사와 함께 도망치듯 훌쩍 올라 떠나버렸다.
하루 종일 느꼈던 온기에 비하면 무척 이상한 작별인사였다. 버스가 떠나니 다시 바람만이 남았다.
의자에 앉아 전광판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아직 차에 타지도 않았는데 멀미가 나서, 눈을 감았다.
.....나도 모르겠다.
++
1화 : 도연에몽의 솔루션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955
2화 : 그는 어떻게 플래그를 꺾는가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3&n4articlesn=1970
3화 : 봄봄은 점순이의 계절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2008
4화 : 그는 어떻게 플래그를 꽂는가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2029
5화 : 초속 162cm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3&n4articlesn=2043
어느새 6화입니다. 세하유리 특집입니다. 유리의 심리가 잘 표현되었다면 좋겠군요.
시작은 개그였는데 진지한 연애물이 되버렸습니다. 다 제가 멍청한 탓입니다.
세린이를 기대한 분들에게는 할 말이 없네요... 세린이나 더스트는 원래 예정에 있었는데,
분량이 너무 늘어나서 아예 빼버렸습니다. 다른 글에서 만나는걸로!
아직까지 읽어주시는 분들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