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긴급점검
기뢰소녀 2014-12-14 0
"으음… 본부하고 연락이 안되네."
최신형 PDA를 든 채 거기서 띄워진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눌러보다가, 결국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20XX년 모 월 13일.
오후 10시를 기점으로 갑자기 강남 GGV 일대 대부분의 통신기기가 먹통이다.
정전이라면 일반적으로 단파 라디오는 가능할텐데, 그마저도 왜인지 작동하지 않는다. 설마 건물 안이라 전파가 잘 안터져서 그런가 싶어, 밖에 나와 보았지만… 그대로다.
"혹시 근처에 재머라도 있는게 아닐까요?"
'권 외 지역'이라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알림을 보며 '대체 이유가 뭐지?' 하고 머리를 싸매고 골몰히 생각하던 중,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야의 아랫 부분에 있는 분홍색의 머리가 LED 가로등의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보이는 건 여우를 닮은 날카로운 눈매와 푸른색의 눈. 언뜻 보면 도도해 보이지만 실상은 묘하게 순수하고 올곧은 여자아이.
클로저스 '검은양'의 현장 리더, 이슬비였다.
"아닐거야. 재머라도 이 만큼이나 광역으로 전파 방해 장치를 썼다면 확실히 눈에 띄니까, 설치하기도 전에 본부에서 연락이 왔을 걸?"
자신을 도와주려는 모습이 기특하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은 하달 받은 임무도 없고─ 연락이 안된다는 사실을 본부에서도 알아차렸을 테니까, 길어지면 다른 요원을 보내던지 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연락해 올 것이다. 거기다 위상변곡률의 상승도 없으니, 차원종이 원인도 아닐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좀 특별한 정전 비스무리한 것이지 않을까.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해결될거야. 그러니까 슬비는 노트북이라도 보면서 시간이라도 때우면 되요~"
말꼬리를 늘이고, 슬비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쳐주면서 웃어 보인다. 어린애였다면 이런 시간에는 일찍 들어가 자라고 했을 테지만, 18살이면 미성년이긴 해도 거의 어른에 가깝다.
게다가 웬만하면 이 때 쯤엔 성장판 닫혔으니까 말이지. 일찍 자서 클 시기는 이미 지났어. 어른 되도 큰다는 소리는 거짓말이야! 성장은 유전이야! 유전이라고! 우유 먹어도 안크더만! 어떤 도시의 무X시노 우유를 먹어야 했던건가?! 그랬으면 지금 나는 남자 친구의 팔짱을 끼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을까?
갑자기 정상적인 길에서 일탈해 폭주하려는 뇌내망상을 붙잡고, 슬비를 바라본다.
응, 유리한텐 졌지만 슬비한텐 이겼어.
★
9시 55분.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사랑과 차원전쟁'을 노트북으로 지난 회 분을 다운 받고 있었습니다. 클로저스 임무를 나갈 때 은이 언니가 본방 사수하겠다는 말을 듣고 녹화해주기를 내심 바랬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우… 저의 몇 되지 않는 기쁨이었는데 말이죠. 확실하게 표현하지 않은 건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들리게 말은 했는데…….
하아,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니, 다운로드 속도가 생각보다 느립니다.
예상 시간이 36년 4개월 18시간 27분 21초……. 예?! 뭐죠 이건? 이거 하나 보려면 제가 지금의 제이보다 더 커야 된다는 말이잖아요! 이건 사랑과 차원전쟁의 팬인 저를 시험해보려는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 시련 달게 받아들이겠어요…! 배경이 된 장소에 성지 순례도 갔다온 저입니다. 이정도 고난 따위-
-극복할 수 있을 리가 없죠. 36년이라니, 그게 어디 쉬운 말입니까.
어차피 예상 시간따윈 믿을게 못됩니다. 밤산책이라도 갔다 오면 전부 받아져 있을 거에요.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날씨가 좀 쌀쌀했기에,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갑니다. 30분 정도면 충분하겠죠.
"하아-"
스치는 바람에, 그렇게 춥지는 않은데도 무심코 소리를 냈습니다. 입김이 하얀 연기처럼 퍼져갑니다.
음, 그런데 어디로 갈까요.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김유정 요원님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늦은 시간에 밖에서 뭘하시고 계시는 걸까요.
말을 걸어보려다, 표정이 심각해 보이셔서 그만두었습니다. 차원종이라도 출현할 걸까요? 하지만 그랬다면 바로 우리쪽에 연락이 왔을 겁니다. 대체 무슨 일인걸까요. 꽤나 가까이에 다가갔는데도 저를 눈치채지 못한 듯 PDA만 꾹꾹. 음, 그냥 옆에서 지켜 보기로 할까요.
김유정 요원님이 이렇게나 창의적이신 분이라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어쩐지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엄청나군요.
'호잇!'이라고 외치면서 PDA를 두 손에 쥔 채 팔을 쭉 뻗어 하늘 높이 들어올리더니 다시 내려서 꾹꾹.
'맞기 싫으면 빨리 되거라!'라고 말하면서 왼손으로 PDA를 잡고, 오른손으로 딱밤을 치려는 모션을 취하더니 다시 꾹꾹.
오른손으로 공중에 떠있는 홀로그램을 만지려는 듯 하더니 갑자기 왼손으로 바꾸면서 '비빔면이다 이자식아!'라고 외치면서 꾹-하려다 떨어뜨리셨습니다. 네, 왼손으로 받치고 있었는데 그 손을 빼버리면 그렇게 되는건 당연하지요.
그 외에도 몇가지를 더 하시더니 결국 PDA를 끌어안고 머리를 푹 숙이더니 '되어주세요 PDA사마!'라고 중얼거리는 그 모습이 차마 안쓰러워, 제가 말을 걸었습니다. 솔직히 못본 척 그 자리를 떠날까 생각했습다만, 행여 다른 누가 김유정 요원님의 모습을 보기라도 하는 것 보단 이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PDA의 전파가 터지지 않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면 다른 PDA를 썼겠지요. 하지만 밖까지 나와 전파를 수신하기 위해 애쓰시는(…) 그 모습을 보면, 아마 모든 PDA가 전파가 터지지 않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자연적인 원인으로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올해는 태양의 흑점이 적은 해니까요. 태양풍 때문에 전자기기에 마비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따라서 분명 인공적인 원인일텐데,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혹시 근처에 재머라도 있는게 아닐까요?"
…네, 뭔가 앞뒤 잘라먹고 갑자기 말해버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 계획이라면 방금 전의 행동을 못본 척 하면서 우연히 막 만난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거였는데 이래서야 좀 전부터 보고 있었다는게 들통나 버렸지 않습니까.
'…봤니?'라는 말이 들려올까 조금 불안불안해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계획이고 뭐고 상관없이 방금 전의 김유정 요원님의 모습이 지금도 계속 아른거리고 있습니다. 꽤 귀엽달까, 웃기달까… 뇌내회로가 묘하게 마비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런 제 말에도 김유정 요원님은 생긋 웃으며 제 말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혹시 방금 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고 계시는 걸까요. 혹독한 훈련을 거치고, 메뉴얼을 완전히 숙지하신 엘리트 요원이지만 이런 곳에는 백치미가 있는 경우도 있는 거군요. 네,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슬비는 노트북이라도 보면서 시간이라도 때우면 되요~"
그 말을 하면서 김유정 요원님이 왜인지 모르게 제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은 건 기분탓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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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37분.
그 후 김유정 요원님과 여러 잡담을 나누다가 돌아왔습니다.
임무 중에 잡담은 금지지만, 이 때는 밤산책을 하는 사적인 시간이니까요.
신발을 벗어 정리한 뒤,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고 절전 모드로 들어간 노트북을 켜봅니다.
이 때 쯤이면 다 받아져 있겠지요. 이제 '사랑과 차원전쟁'을 경건한 자세로 정관(正觀)한 뒤, 수면을 취하면 되는 겁니다!
깜깜하던 노트북의 화면이 여명이 찾아오듯 밝아져 갑니다.
'다운로드 완료'라고 뜬 창을 기대하면서 무선 마우스를 움직이는데─
"어라?"
이 얼빠진 소리는 대체 누구의 목소리인가요.
'다운로드 실패'
원인 : 인터넷에 연결할 수 없습니다.
붉은색의 X자 표시와 함께 보이는 문구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던 제 예상을 뒤엎고, 제 정신과 마우스를 쥔 채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과 기타 여러가지를 빨아들여 수축하며 사라졌습니다.
다른 사이트를 찾아보아도 전부 인터넷에 연결할 수 없다는 문구가 뜰 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PDA도 전파 수신이 되지 않았었죠. 강남 일대의 모든 통신 시스템이 마비되었던 걸까요.
"대체… 무슨 일인건지……."
인위적인 행동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일을 벌인 주모자들을 찾아 '결전기 버스폭격'을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어도 이 상태 그대로라면, 뭔가 연락이 오겠지요.
왠지 모를 억울한 기분에, 잠을 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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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어젯밤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통신기기가 정상적으로 구동되고 있었습니다. 들어보니 어제 오후 10시부터 11시까지만 갑작스레 원인 모를 이유로 강남 일대의 전 통신 시스템이 마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피해는 일절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본부에 연락해보니 예전부터 가끔씩 이런 일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오히려 그 시간동안은 차원종도 전혀 나오지 않는 잠잠한 상태가 지속된다고 합니다.
원인을 모른다는게 미심쩍긴 합니다만, 그래도 차원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건 민간인들의 피해가 없다는 것이니 안심해도 된다는 걸까요. 소영 언니의 포장마차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생각해봅니다.
…단지 '사랑과 차원전쟁'을 다운로드 받는 도중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