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샴푸

각혈포 2015-03-20 3

어느 화창한 아침,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잠에서 깬 나는 베게에서 머리를 뗀 순간 뒤통수에 축축한 위화감을 느낀다.


"...땀인가? 아니, 딱히 덥다거나 하진 않았는데..."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베게에는 물결모양과 비슷한 머리자국 문양이 세겨져 있었다.


약간 구리구리한 냄새도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손을 대보니 물에 젖은 것처럼 축축했다. 물인가? 아니, 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맨질맨질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내가 머리를 언제 감았더라... 며칠째 게임만 해서 원...'

그런고로, 오랜만에 머리나 감아볼까 하며 욕실에 발을 디딘 순간, 샴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음, 새로 사야 할텐데. 되도록이면 좋은걸로 쓰고 싶은걸?



--



"슬비야, 머리 감을때 무슨 샴푸 써?"


"뭐?"

뜬금없고도 어이없는 질문에 대한 슬비에 반응은 참으로 간결하고 무심했다.


들고 있던 소설책에서 시선을 떼고, 나의 눈을 응시한다. 아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말이다.


"...너..."


슬비는 말을 끊고,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오오, 혹시 내 머릿결 상태와 두피의 자극성을 고려해서 최적의 샴푸를 권해주려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을 때, 슬비의 입이 천천히 다시 열렸다.


"혹시 변/태?"


"...에?"



--



뜻 밖에 반응에 당황한 나는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조금 전 슬비의 눈빛이 뇌리를 스치고, 기름이 좔좔 흐르는 머리카락을 감싸 안으며 탄식한다.


"아아, 이게 아닌데에에..."


딱 그때였다.


"뭐야 동생, 안색이 안좋은데. 청심환 하나 줄까?"


"끼아아!!"


눈 앞으로 갑작스럽게 들이밀어진 아저씨 얼굴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중심을 잃고 엉덩이를 길바닥에 강하게 찧었다.


"아야얏... 뭐, 뭐에요!! 갑자기 들이밀지 말라구요!! 그 얼굴!!"


"어어, 너무 그렇게 섭섭하게 굴진 말아달라구 동생, 이 형도 나름 네가 걱정되서 그런거라구."


왠지 모르게 시무룩해진 아저씨를 보며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그때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아 그래, 아저씨 샴푸 어떤거 써요?"


"음? 난 샴푸 안해."


"아?"


"대신, 쌀뜨물을 버리지 않고 동백꽃 기름과 함께 섞어서 조금씩 찍어 바르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관리가 된다구. 어때 너도


한번... 응?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렇게 안좋아? 역시 청심환을..."


입을 딱 벌린채 아연실색해 있던 나는 떨리는 입술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역시 아저씨 답다고나 할까..."


뭐랄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라고 생각하며 그자리에서 사이킥 무브를 사용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어어 동생!! 어디가?!"


"급한 용무!! 급용! 급용!!"


알 수 없는 줄임말을 남겨두고 사라진 이세하의 잔상을 바라보며, 머리가 하얗게 샌 아저씨는 뒷늦게 중얼거렸다.


"처, 청심환은..."



--



건설 중인 빌딩, 나는 꼭대기에 비어져 나온 철골 끝자리에 가볍게 착지했다.


"으음, 이번엔 누구한테..."


제이 아저씨, 이슬비, 서유리... 그래 서유리.


"그래, 서유리."


유리는 슬비랑 다르니까. 많이. 어떤 의미로 많이.


"괜찮겠지."


그래, 서유리니까.



--



그렇게 이세하는 서유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마침 인근에서 놀고 있다던 서유리를 직접 찾아갔다.


"단도 직입적으로 물을께, 너 샴푸 뭐 사용해?"


"응? 그때마다 다르긴 한데... 굳이 뽑자면 메이x이 x필로x 스x니언x?"

"... 메이... 뭐?"


"왜, 네가 쓰게?"


"아니 뭐, ...응."


"안됐지만 이거 여성용인데..."


"...엑?!"


...




...




... 이제 남은건 미스틸, 너 하나뿐이다.




--




미스틸과 만나기 위해 그가 있을 검은양 회의실로 향하던 도중, 길고양이와 놀아주던 제이 아저씨와 마주쳤다.


"여어, 동생. 청심환..."


"/사이킥 무브"




--




그래, 미스틸이라면 정상일거야. 아니, 그 이상으로 깨끗할지도 몰라. 라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회의실 문을 기세좋게 열었다.


"미스틸 있어?"


"브앗!! 세하형?!"


"...?!"


눈 앞에 펼쳐진 기괴한 풍경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 스틸... 지금 머리에 감싸고 있는거..."


"에에, 에에에에..."


양 팔을 양쪽으로 파닥파닥 흔들던 미스틸은 이내 '들켜버렸으니 어쩔수 없군요.' 라고 말하는 듯한 완전 무표정을 짓더니.


"네. 우로보로스가 탈피해놓은 허물입니다."


그렇게 귀여운 얼굴로 그런 말 하지마... 미스틸...


지금껏 말 안해왔는데... 나 네한테서 나는 냄새 좋아했다고... 무슨 냄새인지는 몰랐지만 굉장히 향기로웠는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혀, 형?!"


소리치는 미스틸을 무시하고, 나는 울음을 터트리며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동안에 그 아이와 겪었던 추억들이 머릿속에 필름처럼 재생된다.


<테인아, 이 형이랑 떡볶이 먹으러 안갈래?>


<와!! 턱뽀끼!! 턱뽀끼!!>

킁카 킁카


<테인아, 너 머리에 벌레 앉았다!>


<에, 에에에?!>


<가만 있어봐, 내가 떼어내 줄께!>


킁카 킁카



...



...



그렇게 향기로웠던 냄새가, 더러운 차원 파충류의 허물 냄새였다니.


이게 바로 미스틸테인이라는 시각적인 버프... 때문인 것일까.



--



하늘에 노을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벌써 얼마나 돌아다닌 것일까.  안그래도 기름에 쩔어 축축한 머리에는 땀이 더해져 찝찝함이 극대화 되어간다.


"아아, 우로보로, 스 우로보, 로스 우로, 보로스 우,로보로스."


"동생!!"


길을 걷던 나의 발걸음이 뚝 끊기고, 뒤에서 뭔가 잡아당기듯 빠르게 끌려가기 시작한다.


"...?! 뭐, 뭐야 이거!!"


그때, 무언가 내 가죽 자켓 모자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까는 왜 도망친거지? 설마 내가 싫어진거야?"


"아, 저씨?"


날 붙잡은게 이 아저씨라면, 아마 내가 끌려온 힘의 정체는 옥돌 자기력일 것이다.


나참, 그런 기술은 차원종한테나 써달라구요.


"쿨럭, 이것좀 놔줘요!!"


"안돼, 그 전에."


나의 어깨 너머에서 아저씨의 왼팔이 쑥 들어왔다. 그 손에 들려있는 것은 황금색 종이로 둥글게 포장되어있는 청심환.


분명히 아까까진 이것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뭐, 지금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 내 판단은 틀린적이 없다니까."


청심환을 건내받은 나는 가볍게 돌아서는 아저씨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거 조금씩만 먹어라, 부작용 일어난다."


"네, 고마워요 아저씨."


"아, 그리고."


골목길 모퉁이에 도달한 아저씨는 나를 향해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아니다. 형이다."


이내 아저씨가 사라진 골목길 모퉁이를 보며, 나는 자동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샴푸나 사러 갈까."




나에게 오늘이란, 왠지 평생 잊지 못할 하루가 되어버린 것 같다.


뭐, 기억하기 싫은 부분도 있지만...






--



세하는 모자를 쓰고 돌아다녔습니다.



/수퍼 심심작


2024-10-24 22:24:4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