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단장 이세하] 운증용변 STD(雲蒸龍變 Seha The Dragon) 【 4 】
휘영청 2015-03-16 13
[ 1 ] 별빛에 잠겨라(4)
베게에 얼굴을 묻은 체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별다른 생각도, 후회도 없었다. 잠을 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니 엎드려 있기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띠리링 하는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하 있니?”
엄마의 목소리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온 몸에 힘이 빠져, 목소리가 나오지도, 몸이 움직여지지도 않아서 대답하지 못했다.
신발은 있는데 대답이 없자 엄마가 내 방 문을 열었다.
“자니?”
“…아니.”
이번에는 어떻게든 목소리가 나왔다.
내 목소리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목이 쉰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
“있었으면 대답을 하지 그랬니. 오늘 호출 있었지? 어땠니?”
“데이비드 아저씨가 임무를 전달했어. 데미플레인에 쳐들어가서 둥지라는 곳을 부수고 오래.”
“그래서?”
“위험한 임무라 거부권이 있다고 해서 거부했어.”
“그렇구나.”
내 대답을 들으며 엄마는 내 방 바로 앞의 주방에서 냉장고를 뒤지며 이것저것 꺼내고 있었다.
“화 안 내?”
“화를 왜 내.”
“그야… 엄마가 늘 말하던 클로저의 의무를 다 하지 않았으니까.”
클로저의 의무. 엄마가 몇 번이고 내게 했던 말이자, 김기태의 경우를 통해 뼈저리게 느낀 것.
“세하야. 네가 잘 모르는 게 있는데, 한국은 민주주의국가잖니? 의무는 권리와 함께 따라오는 거야. 너는 클로저가 된 이후 지금까지 뭔가 권리를 누린 게 있니?”
“…돈을 벌었어.”
“그것 말고. 그건 대려다가 앉혀만 놓고서도 줘야 할 돈이야. 그리고 그 돈도, 네가 한 일에 비해 충분하게 받았니?”
“…아니.”
돈을 충분하게 받은 기억은 없다. 강남에서 A급 차원종인 말렉을 쓰러트렸을 때도, 칼바크 턱스를 체포했을 때도, 우리 학교의 때도 수습요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일에 비해 훨씬 적은 액수의 돈을 받았었다.
난 그게 적은지도 몰랐는데 제이아저씨가 말 해 줬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유정누나가 날뛰었던 기억이 난다.
“너는 겨우 훈련생인 상태에서 현장훈련을 위해 강남에 배치되었었고, 그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A급 차원종을 상대해야만 했어. 그 뒤에는 A급 차원종과 다를 바 없는 흉악 범죄자인 칼바크 턱스를 체포해야 했고. 너희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수습해야만 했어. 거기다가 얼마 전에는 S급 차원종까지 둘이나 해치워야 했지. 헤카톤케일와 아스타로트.”
군사비밀의 일종이라며 외부 누설이 금지되었기에 엄마에게도 말 한 적 없었다. 그런대도 어떻게 된 건지 엄마는 늘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지원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유니온 상부는 자신들의 책임을 막기 위해 너희를 정식요원으로만 승급시켰어. 그마저도 심사를 거쳐 가면서. 그 과정에서 문제가 또 생겼고, 그 문제를 해결한 것도 너희야.”
정식요원 승급심사 때는 큐브가 폭주하지 않도록 그 에너지를 전부 소진시켜야만 했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었다.
…그리고 그 큐브를 폭주시켰던 탓에 지금의 용이 생겨나고 말았다.
“본래라면 S급 차원종을 쓰러트리면 그가 설령 문제요원이라도 A급 클로저로 인정하는 게 정상이야.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심사를 거치지 않고 S급 요원이 되는 게 맞지. S급 차원종을 쓰러트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급심사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너희는 그저 C급인 정식요원이, 그마저도 유니온의 책임전가를 위해 되었을 뿐이야.”
그 이야기를 유정누나에게 들었을 때에는 그냥 정식요원이 되지 않으려고 했었다. 차라리 승급심사를 거부하고 큐브에 들어가지 않았었다면 지금의 용은 나타나지 않았지 않을까.
“너는 클로저로써의 의무를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다했어. 하지만 넌 그에 대한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했지. 권리는커녕 정작 중요한 유니온 상층부는 자신들의 의무조차 다하지 않았어. 물론 네가 정말로 클로저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나는 너를 혼냈겠지. 하지만 아니잖니? 그런데 누가 너를 탁하겠어.”
의무를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다했다. …아니, 다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는걸.
“좋아, 도시락 다 쌌다. 세하야. 나갈 준비 하렴.”
“…어디 가?”
“대피소로 가야지.”
대피소. 생각 해 본 적 없었다. 하긴, 차원경보가 발동됐으니 대피소로 가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내가 대피소로 가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 해 본 적도 없었다.
“오늘 저녁으로 먹을 도시락은 쌌고, 내일부터는 비상식량이나 급식으로 해결하자.”
급식. 대피소로 대피해 있는 동안에는 급식을 먹는 게 당연한 걸까. 그러고 보니 대피소는 어떻게 생긴 거지? 학교에서 하는 대피훈련조차 해 본 적이 없기에, 대피라는 행위 자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서 옷 갈아입으렴. 휴대전화랑 충전기 챙기고. 게임기도 챙기렴.”
“…게임기는 됐어.”
“그래?”
게임기가 됐다고 말 할 때, 나는 엄마가 틀림없이 ‘네가 웬 일이니?’라던가 ‘무슨 일 있니?’라고 물어볼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나갈 채비를 할 뿐이었다.
유니온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었다. 교복과 유니폼 외의 옷을 입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뭘 입어도 어색했다.
“아직 멀었니?”
“이제 됐어.”
결국 그나마 유니폼과 비슷한 청바지와 후드티를 골라 입은 뒤 밖으로 나가자, 엄마가 잠시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번에도 별다른 말없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괜히 이것저것 묻지 않는 건 고마웠지만, 조금쯤은 물어봐주길 바랬다. 마음 한 구석에서 엄마가 내 고민을 들어주고 전부 해결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자, 들어가자.”
도착한 곳은 비상시 대피소를 겸하고 있는 지하철역이었다.
대피소 안에는 익숙한 얼굴이 제법 많았다. 같은 반의 녀석들, 다른 반이지만 얼굴을 아는 녀석들, 잘은 모르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녀석들. 다들 하나 같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녀석들을 모르지만 녀석들은 나를 아는 거겠지.
주변이 시끄러운 탓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온 거지? 같은 대화를 하고 있으리라. 내가 클로저인 걸 알 테니까.
그 때 정말 익숙한 얼굴 한 명이 다가왔다.
“이세하!”
우정미였다.
“네가 왜 여기에…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놀란 표정으로 내게 말하다가 말을 끊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 그렇게 티 나는 얼굴 하고 있는 걸까.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응. 멀쩡해.”
“그래… 다행이다.”
클로저인 내가 작전구역이 아니라 이곳에 있으니 부상이라도 당한건줄 안 모양.
다른 팀원들은 어떻게 됐는지 묻고 싶은 듯,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지만 내게 물어오진 않았다. 역시 굉장히 티 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모양.
“이슬비랑 서유리랑 미스틸은 임무. 제이아저씨는 입원했어.”
“뭐? 아저씨가?”
말 하면서도 엄마가 놀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엄마는 침착했다. 이것도 이미 알고 있던 걸까.
“조금… 그런 일이 있었어. 자세한건 기밀사항이라 말 못해.”
“아… 응. 괜찮아.”
말과 동시에 다른 사람이 우정미를 불렀다.
“갈게요! 뭐 필요한 거나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말 해. 여기선 내가 더 잘 아니까. 그럼 쉬고 있어.”
달려가는 우정미의 어깨를 보니 뭔가 완장 같은 것을 차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같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자원봉사야. 대피소에는 상당한 인력이 필요하니까.”
엄마가 이야기 해 줬다. 묻지 않았는데도. 엄마에게 마음을 읽히는 걸까, 아니면 그렇게나 내 얼굴에 들어나는 걸까.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돗자리를 깐 뒤 엄마와 함께 앉았다. 그저 앉아있기가 멋쩍어서 핸드폰을 켰지만, 정작 할 일이 없었다. 인터넷을 통해 SNS를 보자, 이번 사태 관련으로 다들 난리였다.
[하늘의 천장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몇 일 전에 찍은 사진이랑 비교하니까 확실히 가까워졌어.]
두 장의 사진과 함께 올라온 글이 한참 난리였다. 그 글에 답글들도 잔뜩 달려 있었다.
[클로저들은 뭘 하는 거야? 이럴 때 막으라고 세금 써 가면서 유지한 거잖아?]
[정작 진짜 위험할 때는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한 클로저들]
[그보다 지금까지 뭘 하긴 했어? 차원전쟁 이후로 쭉 평화로웠잖아?]
[몇 번인가 차원종이 나타난 적 있어. 신서울에도. 근데 대부분 금방 경보가 해제된 걸 보면 의외로 별 일 아니었을 지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떠들어댄다. 너희가 아무것도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클로저들이 죽었었다. 자신들이 평화롭게 살아왔다고 해서 세상이 정말 평화로운줄 아는 멍청이들.
이런 놈들을 위해 싸워왔다니.
“저기, 이세하. 잠깐 얘기 좀 하자.”
SNS를 보며 짜증을 내고 있던 무렵, 우정미가 다가와서 나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분위기가 안 좋아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역시 안 되겠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우정미가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분한 표정 짓고 있을 거면 뭐라도 해 ** 그래?”
분한 표정? 음침하고 찌질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걸까?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지? 근데 그걸 포기하고 도망친 것 맞지? 그게 어떤 일인지 나는 몰라. 아마 정말로 위험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겠지. 그런 일을 하라고 할 생각은 없어. 포기하려면 포기해. 무서우면 도망쳐. 죽고 싶지 않은 건 누구다 똑같으니까.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면 되는 데까지라도 해 보란 말이야. 할 수 있는 데 까지 하고, 그 뒤에 위험하면 도망쳐. 그러면 똑같이 분하더라도 후회는 남지 않을 거 아냐?”
할 수 있는 일. 그 말 대로다. 솔직히 그 용을 다시 만나서 살아서 도망칠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도망치는 건 나답지 못하다.
─애초에 나다운 게 뭐지? 혼자 멋대로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아니, 아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하거나, 혼자서 잘난 척을 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그 때 그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충실할 뿐이다.
─하고 싶은 일? 죽고 싶은 건가?
죽고 싶은 게 아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건, 포기하지 않는 거다.
지금이라면 알 것 같다. 아스타로트에게 맞설 때의 내 기분을. 그 때의 내 생각을.
나는 포기하기 싫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손을 놓고 구경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싸우고 있는 거지? 그러면 당장 가서 그 애들만이라도 대리고 와. 안 그러면 너, 엄청 후회할 거잖아? 좀 더 자신한테 솔직해져.”
“─고마워, 정미야.”
“어, 어?”
정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뭔가 개운해졌다. 그래,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나는 누군가가 이 말을 해 주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엄마가 나를 혼내기를 기다렸었다.
내가 갑자기 고맙다고 하자 당황한 정미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따, 딱히 너한테 감사받으려고 한 건 아니… 그보다 감사 할 일이 아니잖아? 난 지금 너한테 죽으러 가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네가 그런 생각으로 말 하는 게 아니란 건 알아.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 채고 말 해 준 거잖아?”
“내,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난 그냥… 그러니까… 빠, 빨리 서유리를 구해오라고 말 한 것뿐이야!”
“…그렇게까지 말 할 건 없잖아?”
조금 실망했다. 그게 또 표정에 들어난 걸까, 정미가 다시 당황해서 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나는 그런 의미로 말 한 게 아니라…!”
물론 그런 의미로 말 한 게 아니라는 건 잘 안다. 그러니까─
“고마워.”
“어?”
“덕분에 후련해졌어. 나 이제 가볼게.”
정미에게 인사를 한 뒤 엄마에게 달려왔다.
“엄마! 나…!”
내가 엄마에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엄마는 잔뜩 챙겨온 짐 중 하나인 기다란 가방을 툭툭 치며 내게 밀었다.
“내 건블레이드!”
가방을 열어보자 그 안에는 내 건블레이드가 들어 있었다.
“갈 생각이지?”
“─응!”
“다녀오렴.”
엄마가 싱긋 웃으며 내게 작은 주먹밥 하나를 내밀었다. 그걸 한 입에 털어넣고는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