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핀오프 중편] 그 때 우리가 배운 것 -프롤로그, 1화-
햝햝몬다이나이햝햝 2015-03-12 1
00.
중학교 1학년 때 까지 나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지구 멸망의 위기를 걸고 싸우는 선택받은 소년의 이야기, 혹은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피로 물든 싸움에 뛰어든 소년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구는 최소한 내가 죽을 때 까지는 멸망 할 생각이 없어보였고, 나에게는 특별한 가치관도 없었다.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그런 로망이 깨질 때 쯤, 나는 더 이상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않게 됐다. 처음엔 좀 아쉬웠지만,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니 묘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기왕 어른이 된 김에 아메리카노라는 것도 마셔봤다.
한 입 먹고 바로 버렸던 것 같다.
제법 오랫동안, ‘특별함’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부끄러웠다. 로망이 가득 찬 눈빛으로 오글거리는 생각을 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잊으려 노력했다. 고등학생이 됐을 때는 특별하다는 단어 자체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 때는 공부를 잘 하는 정도의 특별함은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별함에 대한 동경은 다른 친구들과 같이 조용히 지워지고 있었다.
어느새 쓴 커피보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더 씁쓸해졌다. 내 주변의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싸우는 애인이 있었다. 이제 슬슬 독립을 하라고 압박을 주는 가족이 있었다.
“난리도 아니야. 올해는 폭발사고나 테러 뉴스가 유난히 많네.”
나의 애인이 신문지면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말 했다.
확실히, 사건사고가 많은 해였다. 특히 테러는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부분은 미심쩍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테러에 대해, 전 세계의 어느 나라도 제대로 된 대처는 하고 있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 숨기는 게 있어. 국가단위의 은폐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의심도 많아. 물론 지금 상황이 엄청 수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너처럼 만사를 **로 몰아가는 것도 분명 문제가 있어. 걱정이 많아서 숨은 어떻게 쉬고 다닌대?”
그녀는 빨대로 내 윗입술을 꾹꾹 누르며 반론을 하려는 내 입을 막았다.
나만 느끼는 걸까?
금방이라도 땅이 꺼질 것 같은 이 느낌은 나만 느끼는 걸까?
분명히 졸업했다고 생각한 특별함에 대한 환상이 이제 와서 부활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 하는 쪽이 오히려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느껴진 것은 미적지근한 중2병 같은 것이 아니었다.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집중을 하면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와 난생 처음 들어보는 괴성이 섞여서 내 귓가를 계속 서성였다
나는 빨대를 밀어내고 그대로 탁자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민지현. 그녀의 이름을 빠르게 읽어도 보고, 그녀가 읽고 있는 신문지에 젖은 빨대로 낙서도 해봤다.
일상과 비일상은 고작 한 글자 차이라는 것을 차마 생각하지 못 했다. 비정상적인 상황들을 애써 무시한 채, 나는 매일 매일을 억지로 일상에 끼워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때까지도 나는 어른이 되지 못 한 것이었다. 커피의 쓴맛에 익숙해졌다고 어른이 됐다고 믿은 것은 분명 나의 착각이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뒷걸음질을 치는 방법을 잊어가는 과정에 대한 일종의 우화 같은 것이다. 내용은 참전용사의 자서전 같은 것과 다를 바가 없고, 이 이야기를 듣는다고 도망을 잘 치는 다리 같은 것이 생기는 건 절대 아니겠지만, 적어도 말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어 늘어놓는 길고 긴 넋두리 같은 것이다.
01
이야기는 방금 전의 독백에서 이어진다. 물기를 먹은 빨대로 신문지에 낙서를 하는 부분부터다.
내가 주문한 딸기 스무디는 아직 나오지를 않았고,
지현이는 딸기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매도하고 있었으며,
그녀 앞의 신문지는 물기 때문에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땅바닥이 흔들렸다. 폭발음이 들려오는 곳에서부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잠깐사이, 주위는 난장판이 돼있었다. 바람이 간판을 떨어트렸다. 떨어진 간판에 맞은 건물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몇몇 사람들은 바람에 날려 온 물건에 부딪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내 옆에 앉은 남자는 휴대전화를 붙잡고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나는 지현이를 찾았다. 그녀는 좀 떨어진 곳에서부터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뭐야?”
“폭발, 폭발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겠어.”
그녀의 질문에 나는 멍청한 대답을 했다. 폭발이 있었다는 것은 애초에 누구나 알고 있잖아.
그녀가 내 팔에 매달렸다. 나는 그녀의 휴대전화를 달라고 했다.
“네 건 어디에 두고?”
만나기 전에 너무 열심히 게임을 한 나머지 배터리가 없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집에 두고 왔어.”
정석이었다. 그녀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어디에 전화 할 건데?”
“119”
“119라면 저 옆의 아저씨가 이미 연락 하고 있잖아.”
“저래서 오겠어?”
그녀는 말없이 옆자리의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하는 동안, 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폭발소리, 멀지 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아까 전부터 더 강하게 느껴지는 진동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괴성. 어떤 것도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용했다.
미심쩍은 부분은 분명히 있었다.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느껴지는 감각과, 무차별적인 테러,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잘 섞어보면, 국가단위로 숨기고 있는 어떤 사건이 이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 것도 문제의 형체를 알아보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진 일을 정확히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두 세 번의 폭발이 이어졌다. 폭발음이 가까워질 때 마다 머릿속에서 불쾌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혈관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속이 메스꺼웠다. 생각이 멎는 것이 느껴졌다. 신물이 입 밖으로 쏟아지자, 지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판단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시야가 흐려졌다.
쓰러지는 순간에 본 장면들은 처참했다. 뭔가 거대한 형상들, 가까운 곳에서 튀어온 아**트 파편들을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불투명한 기억 속에서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이 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은 분명히 지현이였다.
이윽고 눈을 떴을 때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라져있었다. 눈이 부셔서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내 손을 잡고 있는 부드럽고 따듯한 감촉만은 또렷이 느껴졌다.
지현인가.
손톱이 매끄러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도 희미하게 배어나왔다. 다만, 그 냄새 틈에 섞인 피와 화약의 비린내가 불쾌했다.
그리고 점점 내 눈은 주위를 파악 할 수 있게 됐다.
그녀의 손이 선명하게 보였다. 최근에 바른 엄지손톱의 검은 매니큐어가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팔 너머는 어디로 갔을까?
특경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시간이 꽤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현장에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고, 나는 지현이의 팔을 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뒤이어 온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유니온이라는 단체의 소속으로,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괴물들이 차원종이라 불린다는 사실과, 전 세계가 숨겨온 차원종의 습격에 대해서 설명했다. 물론 단 한 마디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사실 내가 살아있는 이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지현이의 팔을 보았다. 잘린 단면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내 몸은 완전히 붉게 물들어있었다. 내가 쓰러지기 전, 그녀가 나를 향해 달려왔었다. 거기까지는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왜 나는 살아있는데 그녀는 완전히 소멸한 것일까? 정확히 말 하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왜 나만은 멀쩡하게 남아서 이들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유니온 요원들은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나를 붙잡고 그들이 타고 온 차에 집어넣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지현이의 팔을 놓쳤다. 그녀의 팔이 도로 위로 떨어졌다.
미안해.
혀라도 깨물고 싶었지만, 어느새 내 입에는 두꺼운 재갈이 물려있었다.
“김진규씨”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당신은 유니온에 소속됩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연락을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차피 연락 할 수단도 없고, 연락을 받을 사람도 없을 테니.”
이제는 덤덤했다. 한 시간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고, 이제는 평범하게 내 주위를 지키고 있던 모든 것들이 애초에 없었던 것들 마냥 멀게 느껴졌다. 화도 나지 않았고, 더 이상 우울하지도 않았다. 다만 혈관이 거칠게 팽창하는 느낌이 조금 불쾌할 뿐이었다.
유니온의 사람들이 차를 멈춘 곳은 폐허가 된 한강 둔치였다.
“방금 전, 한강 북쪽 전체가 차원종에게 점령당했습니다. 군대는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군대와 특경대원들은 분명히 최선을 다해 차원종들을 막았습니다. 다만, 차원종들에게는 통상의 무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겠지요.”
말을 하던 사람은 선글라스를 벗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런 말하기도 뭐 하지만, 솔직히 답이 없어요. 이길 수 없는 상대라니, 이거 완전히 사기잖아요.”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완전히 단종된 줄 알았던 소프트케이스 담배였다. 얼마나 옛날 감성인걸까, 이 사람.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남의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 할 힘은 있나보네요.”
그가 내 입에서 재갈을 뺐다. 당황스러웠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있는 것일까.
“사기나 마찬가지인 적을 이기는 방법이 있어요. 같은 방법으로 역전을 노리는 것이지요. 저와 저 차 안의 친구는 위상능력자에요. 차원문이 열리면서 위상력에 각성한 사람들이지요. 쉽게 말하면 초능력자라 할까요? 아무튼 유니온에서는 우리와 같이 차원문을 닫기 위해 위상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클로저closer라고 부르지요.”
홀로 살아남은 나, 내가 잡고 있던 지현이의 팔이 남아있었던 일, 차원종의 무리가 가까워질 때 마다 느껴졌던 통증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위상력과 관계가 있다는 방향이 가장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웃기지도 않는 작명이지요. 닫는 사람임과 동시에 가까운 사람이라고도 읽을 수 있잖아요. 차원문을 닫는 가장 차원종 같은 사람이라는 점에선, 완전히 우리 같은 위상능력자들을 비꼬려고 만든 이름이거든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내 팔을 가볍게 들어보았다.
“말보다는 실전이 낫겠지요. 팔을 뻗어서, 저 한강의 한 가운데에 원을 그려봐요. 그리고 원의 가운데를 가볍게 톡 하고 눌러보세요. 각티슈 입구를 여는 것처럼 말이지요.”
나는 그의 말대로 움직였다. 조금 특이한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끝에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원의 가운데를 누르는 순간, 한강의 가운데에 구멍이 뚫렸다. 마치 그 부분만 떼어낸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그게 위상력이에요. 차원종을 뚫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창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