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와 슬비와 유리가, 거실에서
사일로시빈 2015-03-09 22
"여기서 긴급 질문타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시끄러워 서유리."
유리가 불쑥 손을 들어 질문타임을 선포하자 방송을 가만히 관찰하던 슬비가 조용히 눈길을 흘긴다.
그러거나말거나 유리는 어쩐지 대리시험을 쳐줄것처럼 보이는 초록색 공룡인형을 껴안은채 힘차게 말했다.
"저거말야. 소스로 그림 그리는거!"
지금 하고있는 방송은 실력있는 두 요리사가 제한된 재료로 제한된 시간 안에 서로의 요리를 겨루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젊은 쪽의 쉐프가 당근 소스로 혜성을 형상화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저건 요리사들이 소스를 흘렸는데 대충 그림이라고 얼버무리는 거지?"
유리가 단언하자 슬비가 화면에서 1도도 시선을 기울이지 않은채 건조하게 말했다.
"저건 플레이팅이라고 해서, 요리를 꾸미는 기법 중 하나야.
단순히 접시에 그림을 그리는게 아니라, 위에 올려진 요리와도 밸런스를 맞추는게 중요해.
케이크 위에 딸기나 못 먹는 플라스틱 판을 올리는 것과 같은 거야."
유리가 강아지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진하게 묻는다.
"저게 이쁜 거야?"
".......음....."
"그리고 요리랍시고 저렇게 쥐꼬리만큼 주는데 배가 불러?"
접시들 위에는 각각 사슴고기 스테이크, 조개관자튀김, 구운 헤이즐넛 등이 차례로 놓여진다.
슬비가 슬쩍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안 먹어봐서 잘 모르지만, 저건 여러가지 맛있는 것을 맛보라는 거니까, 먹다보면 배가 부를 거라 생각해."
"그럼 저거 먹는 사람들은 짬뽕 한 그릇도 배불러서 못 먹겠다? 그치?"
쾌활하게 웃으며 유리가 옆구리를 푹 찌르자 슬비가 부들부들 떨며 기침을 했다.
누워있던 내게 슬비가 발끝으로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이세하, 보여줘."
"야, 왜 불똥이 나한테 튀냐."
"너한테서 인정할만한 부분은 요리밖에 없어."
"나 라면밖에 할 줄 모르는데."
"이젠 거짓말조차 불성실한걸?"
"꾹꾹 밟지마라."
"저번엔 더스트한테 밟혀서 좋아하지 않았니?"
"보란듯이 죽을 뻔했거든요?"
발끝에 살짝 간지럼을 태워주니 까르르 웃으며 유리쪽으로 풀썩 엎어졌다.
유리의 천연 에어백 덕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슬비가 서늘한 푸른 눈으로 레일건을 날렸다.
어쩐지 반짝하고 전류가 모공을 관통하는 기분이 들어 게임기로 얼굴을 가렸다.
한숨을 내쉰 슬비가 팔짱을 꼈다.
"리더의 명령이야. 서유리에게 코스 요리가 배부른지 알려주도록 해."
"야, 나도 안 먹어본걸.... 아, 먹어본 적이 있나? 그게 뷔페였는지 레스토랑이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 엄마의 뒤를 따라 어떤 높으신 분을 만나는 자리였다. 하지만 워낙 어렸을 때라 기억이 희미하다.
잠자코 듣고있던 유리가 발끈해선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삿대질을 시전했다.
"먹었겠다?! 부르주아! 서민의 적!"
"아니, 잘 모르겠다니까 그러네. 그런데 호텔은 맞았을 거야. 엄마가 비싸보이는 포크 하나 몰래 들고오라고 그랬거든."
이번에는 슬비가 발끈하며 멱살을 잡을 기세로 쏘아붙였다.
"내 알파 퀸께서 그런 천박한 일을 지시할리가 없어. 사과해."
"아니... 야... 우리 엄마거든요?"
"내 서지수님은 그렇지 않아."
"우리 엄마라니까?!"
슬비의 불합리한 공격에 쩔쩔 매고있자니 유리가 안고있던 인형을 꽈악 품에 안으며 툴툴거렸다.
"아, 부잣집 도련님께선 어릴 때부터 푸딩그라나 대게 같은 거만 먹고 자라셨겠지? 우리가 된장국에 밥 말아먹는 동안!"
"푸아그라야 유리야...."
"그, 그래 푸아그라! 나도 알아!"
이 흐름에서 야무지게 딴죽을 걸다니, 과연 이슬비. 깐깐한 리더같으니.
일단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니, 나도 너희랑 같은 급식 먹거든?"
"리더! 세하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접수했어."
아니나다를까 게임기가 보라빛 위상력에 휩싸여 두둥실 떠올랐다. 너무나 자주 보던 패턴인지라 당황스럽지도 않다.
"물론 이걸 두 조각 내도 부르주아 세하는 새로 하나 사면 되니까 아무렇지도 않겠지? 세이브데이터만 중요하니까말야."
"맞아맞아! 이 부르주아!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어!"
"서유리,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지금 얘기와는 관계가 없어."
니들 날 갈구고싶으면 단합 좀 해봐라. 하여간 어설프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다.
"아무튼 이세하. 피고는 나의 알파 퀸을 모독한 죄로...."
"아니, 우리 엄마라고."
"나에게 요리를 만들어줄 것을 명한다! 쉽게 말해서! 밥 해줘!"
"이거 불합리하지 않냐."
유리가 혀를 차며 우쭐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흐흥. 세하야. 설마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하기야?"
"아니, 난 한결같이 불합리하다고 말하고 있었거든."
"칫, 녹음해둘걸."
"녹음해도 결과 똑같다고. 너 바**?"
"또 날 보고 바보라고 했겠다!? 난 그 말이 좋아. 사실이니까.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날 바보라고 놀리는 건 참을 수 없다!"
"뭐, 뭐라는 거야!"
베개로 이쪽을 꾹꾹 누르며 달려드는 유리를 떨처내려 허둥거리는 동안 더 이상 방송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던 슬비가 헛기침을 했다.
너무 어설프기 짝이 없어서 비웃었더니 녀석이 또 도끼눈을 뜨며 뾰로퉁하게 입을 뾰족인다.
"그래서 우릴 위해서 그 정도도 못해주겠다는거니?"
어느샌가 슬비가 다소곳하게 내려와 팔짱을 기며 보드라운 뺨을 어깨에 폭 가져다댄다.
볼이 마치 떡이 눌린듯 사랑스러운 모양이 되었다. 유리가 지지않겠다는듯이 가슴에 머리를 비벼댄다.
완벽히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선 아직도 옅은 샴푸냄새가 났다.
"낭군님. 소녀는 대게가 먹고싶사옵니다."
"그거 이미 요리가 아니잖아. 아니 너 실은 부르주아지?"
"이세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친구한테 너무 매정한 거 아니니?"
"나보고 뭘 어쩌란 거냐 니들은. "
"아, 빨개졌다."
"빨개졌어."
결국 그 날은 둘의 어리광을 받아주기 위해 옷 갈아입히기 인형 역할을 해야만 했다.
위에 걸치는 천을 바꿀 뿐인데 꺅꺅거리는 여자애들의 심리란. 이후에 장을 보고 돌아온 정미와 세린 선배가 합류했다.
정미라면 좀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사진기를 들고와서 절망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상식인일 선배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선배는 어째선지 눈을 단 한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부끄러우니까 그만둬주세요.
역시 이 나라의 일부다처제는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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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완결이었지만 서비스적인 기분의 후일담입니다.
게임은 이미 접었지만 이런건 쓸 수 있는거군요...
분명 히로인인데 늘 분량이 없는 정미와 세린에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라.... 이거 이름만 바꿔서 역내청 팬픽으로 내도 위화감 적은 거 아닌가.
아무튼, 이번에도 감사합니다!
이전 시리즈는
1. 세하슬비
2. 세하유리
3. 유리세하슬비(1)
4. 유리세하슬비(2)
5. 세하정미
6. 세하세린
7. 세하슬비(2)
8. 세하유리(2)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223
9. 유리세하슬비(3)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244
10. 세하하렘(4)
이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