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준비 - 교주의 일탈 (3/3) 完
Frieren 2024-06-14 1
※ 날조 설정 有
※ 「교주의 일탈」이라는 주제의 3부작 마지막 편
불꽃의 딸이 특히나 귀애하게 여기는 재보 중에는 니토크리스의 거울이 있었다.
거울이라고 함은 보통 사물을 비추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이다. 그 말마따나 니토크리스의 거울 또한 사물을 비춘다는 자신의 소명을 착실히, 최선을 다해 다 하고 있었다.
다만 여타의 거울과는 달리, 이 거울에는 조금 특별한 기능이 있었다.
보통의 거울은 거울 앞에 선 상(像)만 비춘다면, 니토크리스의 거울은 거울에서 물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진 공간에 있는 일들을 비출 수 있었다. 심지어 모습만 비추는 것이 아닌 거울에 보이는 인물들의 목소리 또한 도청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보고 싶은 것만 볼 수는 없었다. 어디를 보고 싶은지에 관한 세부 조정은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지만, 그래도 막상 익숙해지니 이만큼 또 편리한 도구가 없었다. 불꽃의 딸은 그래서 인이어 같은 물건보다 니토크리의 거울을 애용했다. 내부차원의 기계는 어째서인지 복잡하기만 하고 그런 주제에 정석적인 사용법만 있는지라, 대략적으로 감으로 때려 맞춰서 사용할 때보다 덜 한 성취감이 있었다.
감각이란 아주 중요한 요건이거늘. 그녀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지만 괜히 웃음이 터져서 웃어버렸다.
요컨대 저 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불꽃의 딸이 크게 여기는 이유는, 어느 날 ‘어쩐지 이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라는 감 하나만으로 아주 멀지 않은 미래의 풍경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녀가 말하는 그녀 본인의 감은 많은 정보를 취합하여 아주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였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아는 정보가 아주 방대하여 그런지 그런 예감들은 보통이라면 대체적으로 잘 들어맞았다.
오늘도 그랬다. 그저 거울을 보고 있자니 또 하나의 장면이 거울에서 비춰졌다. 다만 여태와 달리 다른 점이 있다면 거울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 실제 인물의 모습이 아닌 화상 통화를 통해 보는 터라 말하고 있는 인물의 얼굴이 노이즈가 낀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꽃의 딸은 바로 이 장면이 머지않은 미래임을 직감했다. 왜냐하면 직전에 불꽃의 딸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자신이 아주 마음에 들어 한 클로저들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 클로저들과 어떻게 조우를 해야 할까, 하는 지극히 사적인 바람이었다.
전체적인 상은 뿌옇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잘 들려서 다행이었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한 시간이 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신서울 지부의 클로저 제군, 자네들은 금일부로 ‘연예 방송’에 출연해 줘야겠어.
이 짧은 말에서도 불꽃의 딸은 저 말을 한 화자가 누구인지 간단하게 추론했다.
클로저들을 연예 방송에 출연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면 유니온 관계자라는 뜻. 적어도 현장 요원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간부급이다. 그리고 말은 신서울 지부의 클로저들이라고 했지만 그 앞에 호명했던 팀들은 모두 김유정 신서울 임시지부장 휘하의 팀들이다. 그렇다는 건, 그들에게 저런 명령을 내린 건 김유정 신서울 임시지부장일까? 아니다. 불꽃의 딸은 다른 건 몰라도 김유정의 목소리를 정확히 알았다. 또한 그녀의 말투도 숙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유니온 내에서 엘리트라고는 하더라도, 단기간에 임시지부장의 위치까지 오른 그녀가 곧바로 저렇게 위압적인 말투를 쓸 위인은 아니라고 불꽃의 딸은 그렇게 단언했다.
그렇다는 건? 남은 인물은 딱 한 명이었다. 김유정이 속한 파벌은 유니온 내에서 그렇게 큰 인지도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불과 얼마 전까지 유니온의 총장이었던 미하엘 폰 키스크와 정반대 파벌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그 미하엘 폰 키스크의 반대 파벌의 수장 격인 인물이라고 함은.
힐데가르트 베이르만 현 총장. 얼마 전에야 간신히 총장 직함을 달 수 있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 명령이 전 총장과 무수히 정치적으로 대립한 전직 부총장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불꽃의 딸의 머리가 더욱 빨리 회전되었다.
“흐응~ 그런 수로군요.”
클로저들을 연예 방송에 출연코자 하는 것, 즉 대중에게 보인다고 한다는 지점은 유니온의 적수인 불꽃의 딸이 보아도 나름 적절한 수였다.
그렇기에 저 힐데가르트 베이르만 총장의 말 한 마디는 불꽃의 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미래는 아니었다.
다만 놀란 지점을 굳이 찾는다면 그녀로서는 그 수많은 대안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확률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는 대안을 제시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아는 유니온의 초대 수뇌부들은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막말로 전 총장인 미하엘 폰 키스크가 그랬다. 게다가 지금 총장인 힐데가르트 베이르만도 그런 미하엘 폰 키스크와 젊었을 적 함께 뜻을 해왔다는 걸로 안다.
미하엘 폰 키스크가 그녀를 인류의 발전을 위한 명목으로 따로 기관을 만들어 유배했다고 했는데, 그 기관이 외부차원의 재보들을 관측하는 기관이다 보니 바라보게 된 시각이 조금 더 넓어지게 되었던 걸까?
아무튼 이런 사소한 건 지금으로썬 별 일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지금과 같이 신서울 곳곳에 교단의 눈이 매섭게 퍼져 있는 이 판국에, 보안에 철저하게 신경 써야 할 시점에 여러 사람들과 접촉이 많은 연예 방송 출연이라는, 저런 초강수를 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아무리 시민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속뜻을 추론하자면 여러 개가 있었다.
하나, 남아 있는 미하엘 폰 키스크 파벌과의 싸움에 더 한눈이 팔려 아직 교단이 신서울에 세력을 펼치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쪽. 이 가설도 믿을만한 게 유니온은 불꽃의 딸이 아는 한, 언제나 그런 집단이었다.
하나, 교단에 정보가 유출되는 것보다 시민들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게 더 중대한 사안이라고 보는 쪽. 우매한 시민들이라면, 겉으로 핥는 청렴함으로 맛보기만 보여주기만 해도 신뢰 회복은 급증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몇몇 방송 관련 사람들에게 세례를 내려준 것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왜 시민들의 유니온에 대한 신뢰 회복을 더 중점으로 두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을 한 근거가 부족해진다. 유니온은 팬텀 나이트에 대해 아직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고 판명되는 노릇이었는데. ‘유니온은 팬텀 나이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이 정보는 다시 교차 검증하기로 했다.
하나, 클로저들의 연예 방송 찬조 출연은 어디까지나 대의적인 명분이라는 쪽. 이중 임무라고 하는 것이 있다. 보통 실력 있는 스파이들이나 하는 임무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힐데가르트 베이르만 총장이 호명한 팀들이 검은양, 늑대개, 사냥터지기, 시궁쥐 팀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평범한 클로저 팀이라고 볼 수 없었으니까. 그럼 그 이중 임무라고 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거느리는 교단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거리라고 본다.
이 클로저들의 연예 방송 출연에 대한 추론만으로도 벌써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났다.
유니온, 아니 프로비던스 집단은 그분의 적의, ‘팬텀 나이트’가 단순히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이제야 겨우 알아차리고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시민들의 지지와 신뢰가 필요하다는 저 요상한 전제가 뭘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것에 기특해야할까, 아니면 위기를 느껴야할까.
여기까지 생각에 그쳤을 때, 불꽃의 딸은 한탄했다.
……정보가 미처 부족해.
그 한탄은 곧 납득으로 바뀌었다.
아니다, 부족할 수밖에 없지. 방금 전에 확인한 그 장면은 분명 머지않은 미래일 게 분명하니까. 지금은 유니온이 팬텀 나이트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걸 ‘추론’한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녀는 또 마음을 바꿨다.
‘추론’만으로 확정할 순 없지. 그녀에게는 ‘확실함’만이 필요했다.
마치 그녀의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아이’인 것처럼.
정보는 교단의 충복한 신도들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불꽃의 딸이 원하는 건 누군가의 사견이 극히 배제된 오염도가 없는 순수한 정보였다. 그 객관적인 정보 하나만 찾겠다고 사람의 뇌를 끄집어서 볼 수도 없었고 말이다. 굳이 할 수 있냐 없느냐에 따지자면, 할 수는 있지만 딱히 그렇게까지 정보를 찾겠다고 혈안이 되어 그런 징그러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평범한 인간의 뇌에 무슨 값어치가 있다고 끄집어낸다는 건지. 끄집어내는 것보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더 힘에 부치는 일이라 괜히 여차하면 움직일 수 있는 신도들의 수를 줄이는 격이라 교주로서는 아주 당연하게 별로 하고 싶지 않는 방법이었다.
인도적이니 뭐니 하는 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럼 어떻게 적측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 좋으려나.
그러자 전에 신서울에 온 직후, 예배당을 만들 적절한 곳을 친히 물색할 겸 불꽃의 세례를 미욱한 자들에게 퍼뜨릴 때 신서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일이 떠올랐다.
교주는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외출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갑작스러운 교주의 어린 아이가 떼쓰는 것과 비슷한 외출 선고에, 강림은 심히 난처한 기색이었다.
그런 강림의 얼굴을 교주가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러자 교주가 상큼한 얼굴로 반문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 그것이…….”
“보내드리자고요, 강림 도사님.”
갑자기 강림과 교주의 대화에 제3자가 끼어들었다. 강림은 그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자마자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도사 비형.”
비형은 그런 강림의 자신을 향한 극도의 혐오를 아주 여유롭게 넘기며 자기 할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이쿠, 그렇게 인상 쓰지 마세요. 나중에 주름 생겨서 고생을 자처하지 마시고. 요즘은 동안이 대세라고, 하니까요?”
“타인을 타인의 얼굴로 지적하기 전에, 너의 그 경박한 말투부터 고쳐라. 나한테 행하는 건 상관없지만, 여기는 교주님의 앞이다.”
“아이고, 이런 깐깐쟁이가 보디가드라니……. 강림 도사님은 교주님이 가엾다는 생각을 안 하시나요?!”
“……지금 뭐라고 했지? 프로메테우스라고는 하나 한낱 도사에 지나지 않는 자가 지금, 교주님을 보고 가엾다고 하였느냐?”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교주는 이 둘을 그저 관망하고 있었다.
양손으로는 터져 나오기 직전인 웃음을 가린 채로.
이런 교주의 성원에 힘입어 비형은 목에 핏대가 세워지도록 연설했다.
“가엾다는 게 꼭 사전적인 의미로만 가엾다고 하겠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위대한 불꽃의 따님이신 우리 교주님도! 이 전지전능한 우리 교주님조차도! 아주 가끔은 기분 전환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지 못하냐는 겁니다! 그것도 우리 교주님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모시는 도사라는 작자가!”
“…….”
“자고로 아무리 초인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가끔은 기분전환을 해주는 게 좋다고요! 그것을 아주 가까이서 모시는 이는 모르고, 감히 저 같은 우자(愚者)가 알아차려서 얼마나 교주님의 상심이 크시겠냐고요! 꼭 이렇게 가르치려고 드려야만! 교주님의 저 썩어 들어가는 마음을 강림 도사님은 못 알아차리시는 거냐고요!”
“듣자듣자하니 못 들어주겠군. 경박하기 그지없구나!”
“진정하세요, 강림 도사님, 비형 도사님.”
이대로는 커다란 싸움으로 번질 거 같아, 싸움으로 번지기 직전 교주가 두 사람, 아니 강림만을 말렸다.
“강림 도사님, 비형 도사님의 말이 맞아요.”
“교, 교주님?”
교주의 시인에 강림은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그 굳건한 군인과도 같은 얼굴을 상시 달고 사는 남자가 당황한 얼굴을 할 때만큼 재미난 건 없었다. 그걸 은연중에 같이 느꼈는지 비형의 얼굴이 교주 쪽으로 살짝 돌려지는 것을 보았다. 물론 지금 패닉에 한창 빠진 강림은 그런 두 사람의 은밀한 신호를 눈치 못 챈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서 교주는 강림을 아주 조금 더 곤혹스럽게 만들어보기로 했다.
“한창 교단이 세를 뻗어서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 기쁜 한편으로 제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는 것을 문득 느끼고 말았어요. 아, 그렇게 너무 걱정 어린 얼굴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래된 생각은 아니니까.”
“교주님…….”
“지금 교단의 세력 확장은 곧 일어날 성역을 만들기 위한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아요. 그리고 성역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클로저들의 반발은 분명히 있을 것이지요. 자신의 영토나 다름없던 곳을 저희가 손에 넣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을 테니까요. 이것은 전에 없을 대업이에요. 커다란 도박이죠. 그런 커다란 일을 앞에 두고 정작 제가 침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실패를 의미하죠.”
여기서 굳이 그녀의 거짓말을 하나 꼽자면 그녀는 감탄을 자주 하기는 하였으나 – 주로 그녀가 눈여겨보는 클로저들의 행적에 대해서 – 그것에 대한 벅차오름으로 일을 그르친 적은 없었다. 애초에 ‘현재’ 그녀의 목적은 클로저들이라고 하는 자신의 숙적들의 ‘보존’이 아닌 ‘타파’였기에. 만약 ‘현재의 그녀’가 클로저들의 보존을 우선으로 두었다면 저 침착하지 못할 거라는 말에 거짓은 없을 터였지만.
2년 후의 그녀라면 그랬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상시 침착하였다. 다소의 감정 굴곡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튼 이런 어설픈 거짓말로도 – 사실 교주의 뛰어난 연기력도 있었겠지만 – 강림은 결국 교주의 외출을 허락하였다. 다만 조건은 이랬다. 아주 먼 곳에서 그녀를 수호하는 임무를 계속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병원에서와 같이 클로저들을 아주 멀리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닌, 직접 접촉 – 그래야 기색이라든가 하는 그런 정보를 캘 수 있을 테니 – 을 하는 것이 이번 교주의 외출의 목적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일에 관해서는 어차피 일손도 부족할 터이니 임시 방송 스태프로 변장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라고 했다가 이렇게 강림이 여실히 반대를 한 것이었지만. 감히 교주님이 격렬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을 원치 않다느니 뭐니 하면서 말이다. 내심 방송 스태프의 신분으로 이세하의 서포트를 하는 그림을 그렸던 – 다른 말로는 사심 채우기 – 그녀로서는 아쉽기는 했지만 강림이 저러니 그녀로서도 강하게 밀고 부딪힐 수는 없었다. 결국은 그냥 일반 시민으로서 클로저들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교주의 클로저들과의 접촉에 심히 강박적인 반응을 보이는 강림은 재차 부탁했다.
“혹 그럴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거니와, 클로저들이 교주님에게 손 끝 하나 대는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것까지 물리칠 정도로 강림 도사님의 정성을 무시할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불꽃의 따님이시여.”
그렇게 일단락이 되고, 강림이 떠나 비형과 단둘이 남게 된 교주가 비형에게 말을 먼저 걸었다.
“그보다 감사드려요, 비형 도사님. 비형 도사님 덕분에 ”
“곤란해보이셔서 잠깐 참견을 하였는데, 괜한 참견이 아니었다니 감사합니다.”
“저런 점이 사랑스럽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가끔씩 곤란하네요.”
“하핫,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강림 도사님은 교주님을 어지간히 끔찍이도 여기니까요.”
“맞아요, 가끔 보면 제가 강림 도사님의 동생 같을 때가 있다니까요.”
강림의 비밀을 아는 자와 이런 농담을 태연히 나누는 그녀는 전혀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다. 비형이 미처 참견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유창한 그녀의 말솜씨로 강림을 지금과 별반 다름없는 상태로 설득시켰을 것이다.
물론 비형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 왜 굳이 쓸데없는 참견을 하였냐고 한다면…….
“그러고 보니…….”
불꽃의 딸이 비형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벗겼다. 가면을 벗기려는 그 손길은 무척이나 느긋하여서 그 가면을 벗기려는 손을 아주 쉽게 저지할 수 있었겠다만, 비형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리고 불꽃의 딸에 의해 드러난 비형의 맨얼굴은 가면과 달리 강림과 비슷한 결의 차분한 얼굴이었다. 이 아이러니함을 불꽃의 딸은 참 좋아했다.
정확하게는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그 결함을 절실히 표현해내는 그 얼굴이.
아무튼 그 우울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똑바로 보며 불꽃의 딸이 말을 이었다.
“비형 도사님한테는 저랑 비슷한 나이대의 따님 분이 계시다고 하셨던가요?”
“……그걸 어찌.”
“제가 기억력이 좋잖아요.”
그러자 이번에는 비형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쓸데없는 옛날 기억이 불쑥 떠올라버려서.
그때의 비형은 클로저 신분이었다.
-너 같은 애가……교주라고?
-나이가 어려도 교주를 할 수 있잖아요.
-아니, 그렇다고 해도 내 딸이랑 별로 나이 차이가 없을 것 같은…….
그런데 그건 처음 불꽃의 딸을 만났을 때 경악해하며 했던, 그냥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었다. 그냥 듣고 흘려버릴 수도 있는데 이걸 지독히 끌어올리다니.
“방금 전 비형 도사님의 오지랖에서 아버지의 오지랖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절 비형 도사님의 따님 분과 투영하는 것이 아닌지 하고…….”
“그럴, 리가…….”
그럴 수가, 없다. 자신의 딸은 이렇지 않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다 알면서 그걸 정성껏 골리는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가면을 벗은 비형의 뇌는 잠시 맑아졌다. 그 맑아진 정신에서 그는 그렇게 무섭도록 휘몰아치고 있었다.
더 비형을 제정신인 상태로 두기 싫었던 불꽃의 딸은 가면을 벗길 때와는 다르게 아주 재빠르게 가면을 다시 비형에게 씌웠다. 그러면서 그 상황에서 아주 예쁘게 웃었다.
“방금 전 한 말은 농담이에요.”
“……하핫,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교주님께도 사람을 웃기는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닐는지.”
“그렇게 ‘진심으로’ 말씀해주시는 분은 비형 도사님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도 칭찬 고마워요~ 라며 교주는 곧 있을 외출에서 입을 사복을 준비하러 간다고 했었다. 유독 예쁘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서. 혹시 교주님의 마음에 둔 사람입니까? 라고 장난이라는 이름하에 반박을 걸 수도 있었지만 비형은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그래봤자 더 영악한 자는 자신을 더 짓누를 수 있는 구실을 하나 얻을 뿐이었다.
대신 비형은 불꽃의 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뇌었다.
‘진심으로’ 웃기는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을 거라니.
비형은 가면을 써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서 아주 마음 편하게 비소를 날렸다. 정말이지, 깜찍하다고 해야 할지 끔찍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랑스러운 교주님.
저는 당신의 그 말이 하나도 웃기지 않았습니다만, 그건 교주님 당신도 아주 잘 알고 있겠죠. 그냥 나도 당신에게 있어서 하나의 장난감, 유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그나마 위안을 삼을 점은 비형 같은 처지의 인물들이 교단 내에는 수두룩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비형 자신 정도면 상당히 나은 축이라는 것도.
그 점이 못내……아니다,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더 생각해봐야 즐겁지 아니하거니와 재미도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