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 그런 날도 있는 법이지
로드 2024-03-02 5
※ 약 1년 전 플롯
※ 세평문 스토리를 거치지 않고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 되었더라면의 전개 if물
“후우…….”
애리가 심호흡을 골랐다. 심호흡까지 고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게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라도 하는 걸까……. 고작 딸기를 케이크에 얹는 정도일 뿐인 건데. 옆에서 방청하고 있던 은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마지막 딸기를 케이크 위에 장식하는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케이크는 단순해보였지만,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심플한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기술을 요구한다는 말. 애리가 루시와 함께 만들던 케이크는 매장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였다. 특이할 점이 있다면 마치 한가운데에 뭐라도 쓸 만한 것이 있는지 딸기를 케이크의 경계 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한 것 정도였다.
애리는 옆에서 상당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시에게 물어보았다.
“어때요? 괜찮나요?”
“네에……. 오히려 너무 잘 하셔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예요.”
어디에서 따로 배워온 건 아니죠? 라는 루시의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에 애리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오늘 처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루시 씨가 워낙에 잘 가르쳐주셔서 그렇게 보였나 봐요.”
“아하하……. 그, 그런가요?”
그렇게 의문을 가지면서 루시는 방금 전 애리와 같이 한 케이크 만들기를 회상했다. 지시할 것도 없이 바로 눈치껏 있게 재료를 씻는다든지, 케이크에 생크림을 능숙하게 바르는 솜씨라든지……. 절대로 루시가 보기엔 애리는 케이크를 이전에도 몇 번이나 만들어보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하니까. 루시의 이런 눈총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어느 정도 알아차린 애리는 계속 웃고만 있었다.
루시의 저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예전에 케이크를 취미로 구워본 적은 있기는 했다. 케이크 만들기가 취미인 게 아니라 그냥 요리하는 것이 취미였던 것이었지만. 요리를 비롯해 자수 놓기, 난(蘭) 치기, 하프 연주하기, 발레, 리듬 체조, 승마, 펜싱 등등……. 그때에는 그런 것들을 닥치는 대로 무감하게 수도승이 수행하듯이 했었고, 지금에 와서도 저 많은 것들 중에서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끌리는 게 없었기에 이걸 딱히 밝힐 필요는 없어 보였다.
게다가 저 많은 것들 중에서 결국 지금의 애리가 두고두고 쓸 만한 기술 따위는 없었다. 활을 진즉에 배웠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간혹 했지만, 그건 그냥 가정일 뿐이었다. 이런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계속 곱씹으면서 의미 없는 이프(IF)만 하는 건 좋은 사고방식은 아니었으니까.
요즘의 애리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사는 것이 즐거웠고, 그 즐거움을 같이 누릴 소중한 가족들도 만났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스몰스몰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의 잔재와는 더 이상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씩 생각나는 건 애리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게 분야가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때는 재빨리 다른 생각으로 의식의 흐름을 이동시키면 된다. 그래서 애리가 고른 주제는 케이크를 만들 때부터 계속 신경 쓰였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걸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네? 무, 무슨 말인가요?!”
“케이크를 조금 더 꾸며도 될 거 같은데……. 아! 혹시 실례가 안 되면 저기 가운데에 제가 저수지를 그려도 될까요? 저수지의 얼굴을 그리면 딱 알맞을 거 같은데…….”
“안돼요, 그것만은 절대 안돼요!”
애리의 폭탄(!) 선언에 루시가 기겁을 하면서 온몸으로 거대한 X자를 만들면서 강경하게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무언가를 숨기는 기색 정도로만 난처함을 표하던 루시가 이렇게 대차게 반대를 한다는 건……. 애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계획이 있으신 거구나?’
그리고 그 계획에 약간의 차질이 생긴 건, 아마 자신이 케이크 만들기에 동참해도 되냐는 제안을 했을 때부터였겠지. 하지만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기엔, 은하 씨는 딱히 케이크를 만들고 싶어 하는 분위기며 눈치도 아니라서…….
그래서 애리는 이번에도 못 본 척,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일명 시치미 뚝 작전.
“루시 씨는 루시 씨만의 케이크 철학이 있으신 거군요. 이럴 땐 프로의 말에 경청해야지요.”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케이크는 이 케이크 그대로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후후, 그러네요. 동양에 여백의 미 같은 개념이라는 거지요?”
“그거랑 다른 의미지만, 어쨌든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루시는 겨우 한 고비 넘겼다는 것처럼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애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얼른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지금 옆에서 원래 루시와 케이크 만들기를 같이 하려고 했던 은하가 굉장히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이쪽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슬슬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쯤은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 케이크는 다른 분들이 돌아오면 먹는 건가요?”
“아, 네! 아마도?”
“기대 되네요. 루시 씨의 케이크, 정말 맛있거든요.”
“아하하…….”
루시는 애써 애리와 시선을 피했다. 불과 얼마 전에도 루시에 의해 루시의 케이크를 먹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형식상의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또 케이크를 먹자는 건……. 누가 봐도 목적이 뻔한 전개이긴 했다.
그래서 일부러 몰래 만들려고 했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은하와 애리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루시에게, 루시에게 케이크 만들기 조수 역할에 당첨된 은하가 귓속말을 했다.
-지금 방금 인기척이 느껴진 거 같은데.
-네? 인기척이라고 한다면…….
-이 발자국 소리로 봐서는 아마도 악마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 은하 씨, 루시 씨!
……이렇게 본인 생일 케이크 만드는 현장을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그 뒤로는 형식상의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가다가, 애리가 먼저 제안했다.
-괜찮으면 저도 같이 만들어도 될까요? 루시 씨 생일에 먹은 루시 씨의 생일 케이크……. 루시 씨가 만드신 거라면서요?
-아, 네, 맞아요. 제가 빵집을 해서 그런지, 케이크 같은 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제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어머, 이제 보니 장인이셨군요? 그러면 한 수 가르침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본인 생일 케이크를 본인이 만들게 된 애리였다. 이렇게 눈치가 빠름에도 못 본 척 하지 않았던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옆에서 루시의 케이크 만들기 조수로 낙점된 은하가 누가 봐도 자신이 케이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상당한 압박감 및 사명감마저 가진 상태 같아가지고 배려 차원에서 자기가 대신 만들어도 되겠냐고 제안을 했던 것인데.
……그런 배려도 하지 말고 그냥 못 본 척 지나가야 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계속 케이크를 만들면서 눈치를 이리저리 보던 루시 때문이었다.
“얼른 미래 씨 일행이 돌아오면 좋겠네요.”
이건 진심이었다. 그래야만 루시가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소질에 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될 테니까. 루시도 그건 동조하는 듯 보였다.
“그, 그러게요? 새벽부터 외출했으니 아마 일찍 돌아오지 않을까요?”
“부지런하신 분들이에요.”
애리는 그럼 기대하고 있겠다며 조리실에서 나갔다. 애리의 발자국 소리와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루시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심장 부근을 붙잡으면서 이렇게 호소했다.
“윽,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을 잔뜩 하고 나니 양심의 가책이…….”
“누가 보면 중범죄라도 지른 줄 알겠다.”
“은하 씨……. 이제 제 입에선 쓴맛만이 느껴지겠죠?! 거짓말을 그렇게 많이 해댔으니…….”
“어이~ 내 말은 듣고 있는 거야, 꼬마 아가씨?”
저의 노고를 좀 알아차리고 동조해주시라고요! 은하 씨는 계속 아무 말도 안 해서, 저 혼자만 애리 씨와 대화했잖아요! 루시의 뾰루퉁한 반응에 은하는 아까 루시가 애리의 시선을 피했던 것처럼, 루시의 시선을 최선을 다해 피했다.
루시가 이마를 훔치며 아주 당당하고 뿌듯하게 말했다.
“그래도 일단 들키지 않은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글쎄다…….’
루시의 다행이라는 말과 달리 은하는 그 발언 자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은하가 보기엔 애리는 이미 자기들이 무엇을 벌이고 있는지 눈치를 깐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아마 애리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것까지는 모르고, 어쨌든 간에 애리 본인을 깜짝 놀라게 할 ‘무언가’라는 것까지는 눈치 챈 모양이었다. 뭐, 그렇게 따지면 ‘애리의 생일 축하 파티’까지는 들키지 않았으니 괜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너희들, 설마 들킨 거야?!”
폭풍과도 같은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또 루시와 은하를 제외한 제3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리가 케이크에 얼굴을 그려놓고 싶다고 말한 당사자 저수지였다.
“방금 전 애리가 여기 조리실에서 나간 걸 얼핏 본 거 같았는데…….”
“네, 언니. 당사자에게 아주 그냥 단단히 적발되었어요.”
“그럼 다 도루묵 된 거 아니야?!”
“아직 모르죠. 우리가 뭔가를 준비하는 건 확실히 눈치 깐 거 같은데, 그게 본인 생일 기념인지까지는 모르는 듯 해요.”
“아, 그럼 다행이네…….”
애리 빼고 다 아는 애리의 생일 기념이라는 걸, 왜 당사자인 애리는 눈치 채지 못하는 걸까. 시궁쥐 팀이 애리의 생일이라고 정하는 건, 애리가 직접 자신의 생일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아닌, ‘집행자 시절의 주애리’의 프로필에 기재된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궁쥐 팀의 소속되어 있는 ‘애리’도 일단 프로필 상 생일은 이전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렇게 기재되어 있었다.
그렇게 싫어하는 자기 과거의 생일을 챙겨도 되는 거야?! 라며 처음 이 계획안이 제출되었을 때 저수지가 먼저 그렇게 반박했다. 그러자 은하는 이렇게 대꾸했다.
-어쩔 수 없죠. 본인이 본인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봐도 죽어도 안 알려주는데.
정확히는 이런 논지였지만.
시궁쥐 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누군가가 애리의 생일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애리는 이렇게 대답했고.
-제 생일이요? 음……. 이왕이면 제가 저수지를 만난 날을 생일로 삼고 싶은데, 정확한 날짜를 모르겠네요.
-그럼 대충 그 날짜쯤에 정하자. 그럼 괜찮지?
-하지만 전 정한다고 한다면, 좀 더 정확한 날짜로 정하고 싶다고요! 그리고 전 딱히 생일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아요. 저는 괜찮으니 여러분도 괜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이러한 애리의 의견은 시궁쥐 팀으로 같이 지낸지 1년 만에 묵살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은하가 아주 잘 투덜거려주었다.
“말로는 그러면서, 정작 우리 생일은 끔찍이도 챙기는 주제에…….”
“그래서 은하 씨가 복수하겠다면서 생일 계획을 먼저 준비하셨잖아요?”
“그러게. 가만 보면 은하는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빚은 꼭 갚아야 하는 성격이라서.”
저 점이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렇다니까요! 거기 두 사람, 다 들리거든요?
이렇게 생일 케이크는 준비되었고, 이제 남은 건…….
“그래서 선물은 다 준비 했어요?”
“응! 애리 몰래 준비하느라 나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러게요. 악마 언니가 저수지 언니를 여간 좋아해야 말이죠.”
하도 딱 붙어 있어야 말이지요. 그래서 새벽에 몰래 만들었어. 모르겠지만 애리 잠귀도 밝아서 새벽에 만드는 것도 일이었다니까?! 그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는지 루시도 선물을 준비했냐는 은하의 물음에 산더미만한 쿠키를 냉장고에서 꺼내오면서 당당히 말했다.
“물론 저도 준비 다 했어요!”
어마어마한 양의 쿠키에 은하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저수지 또한 그 압도할 만한 양의 쿠키에 감탄을 내비쳤다.
“루시가 제일 고생이었겠다. 케이크 준비하면서 또 따로 준비도 하고…….”
“케이크는 케이크! 제 선물은 제 선물! 서로 다른 분야라고요.”
“그럼 미래랑 아저씨가 돌아올 때까지 파티장 꾸미기를 하러 갈까?”
“전 케이크를 마저 데코레이션 할게요.”
애리 씨가 있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작업을 못했거든요. 은하와 저수지를 먼저 내보내고 루시는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애리가 지적했던 케이크의 빈 부분. 하얀 생크림만이 칠해져 있는 그건 마치 아무 것도 그려진 것이 없는 흰 도화지 같았다. 이런 것을 마주할 때마다 루시는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까. 고민하던 루시는 애리가 아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수지의 얼굴을 그려 넣어도 되겠냐고 했던 말. 비어 있는 문서창을 보는 작가랑, 빈 캠퍼스를 바라보는 화가의 기분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잠깐 그 아이디어에 혹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들어줄 수 없겠지……. 그러면 케이크의 주인공이 애리가 아니라 저수지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어떤 걸 아이싱(Icing)해야할 지는 윤곽이 잡혔다.
애리는 높은 곳을 선호했다.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이걸 좋아한다고 해야 하는지는 애매해가지고. 만약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좋아했다면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했겠지만, 단순히 저격 포인트를 잡기 좋은 위치라서 좋아하는 것이기에 선호한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 했다.
아무튼 지금 애리는 시궁쥐 팀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오피스텔의 옥상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있었다. 귀에는 헤드셋을 장착한 채로.
그리고 헤드셋 사이로는 요즘 가요가 무작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주 흐릿한 과거에 하곤 했던 취미 중에 하나에는 음악 감상도 있었다. 음악은 무료한 시간을 보낼 때 귀를 심심하지 않게 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많이 듣는 건 청력에 좋지 않으니 알아서 조절해야 하지만, 그건 애리가 알아서 잘 조절하고 있었다.
조절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요즘 나오는 가요들은 애리에게 있어서 상당한 충격이라서 조절하려고는 노력하지만 조절이 잘 안 되는 것이었지만.
애리가 옥상으로 대피한 이유는 자기가 숙소에 있으면 시궁쥐 팀원들이 꾸미고 있는 ‘무언가’가 자꾸만 밟혀서 괜히 참견할까 싶어서였다. 만약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가 아니라면 그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길 이유도 없었으니까.
애리는 자신들의 가족을 믿었다. 그러니 가족들이 자신에게 숨기고 하는 일이 못된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자신만 빼고 무언가 작당 모의 하는 것 같은 것에서도 소외감도 느끼지 않았다. 루시가 케이크를 만들고 있던 것에서부터 대강 어떤 것인지는 눈치를 챘지만.
케이크를 만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알아차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얼마 전에도 케이크 먹지 않았나요?
-그, 그런 날도 있는 거죠. 또 케이크를 먹고 싶은 날이!
참고로 루시는 거짓말을 무척 서툴게 했다. 아니면 그냥 자기가 눈치가 지나치게 빠른 것인지도. 얼마 전에 루시 생일이어서 루시가 직접 만든 루시의 생일 케이크를 같이 먹었다. 그 날은 2월 28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날짜는 아마도…….
아무리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자기 생일이 언제쯤인지는 애리는 당연히 숙지하고 있었다. 너무 루시의 생일이랑 붙어 있는 거 같아서 일부러 다른 날로 고르려고 했는데, 아직 적당한 날짜를 물색하지 못해서 그냥 자기 생일은 챙기지 말아달라고 하게 되었다.
사실 자신의 생일은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애리의 스탠스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걸 저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정도로 애리는 사람이 모나지 않았다. 하물며 가족에게 그런 모진 말이라니. 절대로 하지 못한다.
듣고 있던 노래에서 문득 이런 가사가 들렸다.
-후회는~ 없었어~
하필 이런 사단과 버물려져서, 애리는 ‘후회’라고 하는, 정확히는 ‘자신의 후회’에 대해 곱씹게 되었다. 그리고 애리에게 있어 자신의 후회 거리란 집행자 시절뿐이었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과거의 우울함에 애리는 잠깐 눈을 위로 흘겼다. 청량한 하늘만이 보였다. 구름은 몇 점 정도 있는.
애리는 애리 본인에게 중얼거렸다.
……후회는 없었을 텐데. 후회 따위는 없어.
만약 그때에 계속 사무쳐있으면, 자기는 과거에 갇힌 채로 나아가지 못한 채 팀의 발목만 잡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 다만 피할 생각만 하는 건 이제 해서는 나쁜 버릇이겠지.
그런데 오늘만큼은 이대로 깊은 구렁 속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
“애리야!”
아, 마침 잘 왔다. 나의 구원자, 나의 시작점, 나의 가족. 헤드셋 사이로도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린 애리는 헤드셋을 벗고 곧장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자신의 뒤에 있는 건 저수지였다.
“저수지!”
저수지는 오늘따라 묘하게 자신을 부르는 애리의 목소리에서 기쁨이 넘실거리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앉은 채로 자신을 뒤돌아보는 애리가 너무도 걱정스러웠다.
“왜 거기에 앉아 있었어, 위험하게.”
“아, 걱정시킬 의도는 없었는데. 제가 너무 위험하게 있었나요? 음악에 심취해 있느라…….”
“아까보다 훨씬 더 위험해 보이잖아…….”
“알았어요. 이제부턴 안 할게요. 저수지가 걱정하니까요.”
애리는 능숙하게 난간을 봉 삼아 몸을 반 바퀴 돌려, 옥상 쪽 타일로 다리를 내려놓았다. 마치 리듬 체조 선수와도 같은 우아한 몸짓이었다. 위상능력자라고 하더라도 상당히 유연한 몸놀림에 저수지는 입을 떡 벌렸다. 그래서 애리의 재촉을 받을 때까지 자신이 여기 옥상에 온 이유, 정확히는 애리를 찾던 이유를 순간 잊어버렸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저를 찾을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그게…….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나을 거야.”
“직접 보는 거라니…….”
“일단 내려가자.”
저수지는 애리의 손을 잡고 일단 자신들의 숙소가 있는 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도 옥상 난간에 앉아서 바깥바람을 많이 쐬서 그런가. 저수지의 손이 평소보다 훨씬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숙소에서 애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제 생일 파티였던 건가요?”
형형색색의 풍선과 파티용 장식품이 요란스럽게 장식이 되어 있고, 그 앞으론 어쩐지 눈에 익은 케이크와 여러 가지 진수성찬이었다. 케이크에는 ‘AERI’로 배열되어 있는 초가 꽂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초코 아이싱으로 애리의 얼굴이 캐리커쳐로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저수지를 제외한 팀원들이 맞춘 듯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으면 100% 확률이었다.
놀라는 연기가 살짝 어색해 보이는 애리를 쏘아보며 은하가 역시 그랬던 거냐고 대꾸했다.
“뭐예요, 악마 언니. 역시 알고 있었던 거예요?”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여러분들이 들키고 싶어 하는 거 같지 않아서요.”
“은하랑 루시……. 들켰었어?”
“두 분 탓이 아니에요. 그냥 제가 거들고 싶었던 거예요.”
자기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생일 당사자라니, 이게 말이 되나. 팀원들과 깔맞춤으로 하기 위해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애리의 뒤로 안 들켰을 거라는 둥,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둥의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게 들렸다.
그리고 이럴 때 상황을 정리하는 건 미래였다. 미래는 애리에게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애리의 생일은 몰라서, 그냥 민수현이 데이터에 있는 애리의 생일로 결정하고 준비해 봤어.”
“촉박하셨을 거 같은데,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렇지 않아. 애리도 우리 생일마다 축하해 주었잖아.”
우리도 똑같이 그러고 싶었을 뿐이야. 미래의 담담한 발언에 애리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갑작스러운 고해성사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제가 나쁜 사람이었네요. 여러분들의 그런 배려를 무시했던 것이니까요.”
“참고로 가장 먼저 애리의 생일을 챙겨주자고 한 건 은하였어.”
“……미래, 그런 건 비밀로 부쳐주라고.”
옆에서 은하가 작게 핀잔을 주었다. 이번에는 은하와 미래의 시비(?)가 시작되었고, 저 시시비비가 한동안 계속 될 거라는 걸 눈치 챈 철수와 루시가 애리의 앞에 다가왔다. 철수는 애리의 앞으로 가게에서 포장해 온 것이 분명한 화려한 색의 포장지로 둘러싸인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생일이라고 하니 선물을 주도록 하겠다.”
“선물까지는 상상도 못 했어요. 그거 때문에 새벽부터 외출하셨던 건가요?”
“……참고로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군.”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애리가 철수에게 물어보았다.
“뜯어도 될까요?”
철수의 고개가 끄덕이자, 애리는 포장지부터 하나하나 조심스레 뜯기 시작했다. 포장지에 둘러싸여있던 상자를 열자, 나온 것은 손목 보호대였다. 애리는 그것이 바로 전투 때나 쓰는 전투용 손목 아대가 아닌, 일상에서도 착용 가능한 신축 좋은 소재로 만든 보호대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화답했다.
“센스 좋은 선물이네요.”
“네가 가끔씩 손목 통증을 호소하는 것 같아 보여서 일상에서도 사용하라고 준비한 것이다.”
“언제 거기까지 관찰하셨던 건지……. 관록이 부족했나 봐요.”
“애리, 그런 사소한 걸지라도 숨겨서는 안 된다.”
같은 팀이니까. 애리와 철수가 동시에 말했다. 둘이 똑같은 문장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자, 옆에서 경청하고 있던 루시가 잔뜩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무튼 철수는 헛기침을 하고 마저 말을 이었다.
“너의 지원 사격……. 항상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너는 이제 우리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고마워요, 김철수 씨.”
철수와 애리의 대화가 얼추 끝나자, 루시는 애리의 앞으로 이걸 내려놓았다. 그 쿠키 뭉치들은 내려놓을 때, 적지 않은 큰 소리를 내면서 애리의 앞에 대령되었다.
“저는 애리 씨가 먹을 쿠키를 준비했어요!”
“이렇게나 많은 양이라니…….”
“왜 다들 쿠키의 양에 우선적으로 놀라시는 거죠……?”
그야……양이 이렇게 많으니까요? 이 많은 양의 쿠키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가늠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단순한 동그라미 틀로만 찍었다고 해도 이걸 만드는 데는 꼬박 하루는 넘게 걸렸을 텐데……. 애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철수도 대충 그런 종류의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루시는 은하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애리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뒷이야기를 풀어주었다.
“원래는 애리 씨 모양으로 쿠키를 만들려고 했는데, 한 번 시범삼아서 은하 씨한테 보여줬는데 은하 씨가 엄청 기함하면서 이건 선물이 아니라 저주 인형 같은 거라는 험담을 해가지고……. 원래는 이것보다 더 많이 드리려고 했었는데…….”
“지금 이 양만으로도 충분한 걸요?”
나중에 들은 이 일과 관련된 은하의 주장은 이랬다. 루시가 만든 쿠키가 너무 실감나서, 애리가 이걸 먹을 때마다 자기 자신을 먹는 거 같은 뒤숭숭한 기분을 느낄 게 분명하다고. 사실 애리는 딱히 상관이 없었다. 자기는 그런 거는 일일이 잘 신경 쓰지 않으니까. 나중에 그렇게 반론하니 은하는 그건 애리가 그 쿠키의 시작품을 안 보았기에 그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라고, 지금 그 쿠키만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고 하였다.
아무튼 루시는 자신의 선물에 대한 추가 설명도 해주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에요! 항상 저희를 지원하실 때 멀리에서 대기하실 때가 많잖아요? 대기하다가 출출하실 때 드시라고 이렇게 만들었어요!”
“고마워요, 루시 씨. 하지만 루시 씨의 쿠키를 독점하는 건 큰 죄가 될 거 같으니 일부는 다른 분들과 나눠 먹어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그건 애리 씨 마음이지요.”
내년에는 꼭 사탕 만드는 법을 배워서, 쿠키가 아니라 사탕으로 드릴게요! 사탕이 더 휴대하고 다니기가 좋잖아요? 루시의 사탕이라니……. 내년이 기다려지는 말이었다.
다음은 은하 차례였다. 은하는 자기 선물이 애리에게 통해 기분 좋은 루시 쪽을 흘깃 보더니 뺨을 긁적였다.
“나도 꼬마 아가씨랑 비슷한 걸 준비했어요.”
“요깃거리인가요?”
“요깃거리는 아니고, 그냥 언니 취미와 연관된 거요.”
“취미라뇨?”
그러면서 애리의 손에 은하가 쥐어준 것은 무선 이어폰이었다.
“언니 가끔 저격 지점에서 대기하면서 음악 듣잖아요? 그런데 헤드셋은 아무래도 크고 불편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
“그렇지 않다고 해도 받아요. 내 선물이니까요.”
그리고 하나 더, 라면서 은하는 또 무언가를 애리에게 건넸다. 그런데 하필 그게 아주 광택이 나는 단검이라서 애리는 은하의 설명이 없었으면 오해할 뻔 했다.
“악마 언니, 가끔씩 단검도 쓰시던 거 같은데, 지금 단검 날이 많이 빠졌더라고요. 나는 몰라도 악마 언니는 날이 잘 드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아……. 언제 그런 건 또 관찰하셨던 건지.”
딱히 단검 꺼내 쓴 적은 별로 없었던 거 같은데. 같이 있던 시간을 무시하지 말아요. 애리와 은하 사이에서 티격태격 말이 오고 갔다.
애초의 애리의 단검은 화살을 통해 독을 주입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에서 가지고 다니는 거였다. 차원 전쟁 당시에는 생각보다 저격 지점을 자주 들켜서 단검에라도 독을 묻혀서 상대방의 몸에 쑤셔 넣어서 사용해야 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리가 자주 쓰는 단검은 날이 많이 빠져 있었다. 독에 의해 부식되는 영향도 있었고, 아무튼 쑤셔 넣기만 하는 대체제면 만사 오케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은하가 준 이 단검은 새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은하 나름대로 무선 이어폰과 더불어 공들여서 생각한 선물임은 틀림없었다.
“참고로 새 거로는 못 해드렸어요. 콩나물 사는 데 예산이 조금 오버가 되어서……. 제가 쓰던 것 중에서 가장 쓸 만한 걸로 드렸어요.”
“하지만 쓰시던 거라고 하기에는 거의 새 거 같은데요?”
“조금 날을 갈았죠.”
날을 갈았다는 은하의 말에 애리가 아닌 루시가 경악하였다. 루시는 벌벌 떨고 있었다.
“으, 은하 씨……. 설마 매일 밤마다 숫돌로 갈고 계셨던 게…….”
“어, 뭐야? 보고 있었어?”
“전 그게 선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원한을 풀려고 가려는 줄 준비 단계인 줄 알고…….”
“……나를 어떻게 바로 보는 거야.”
그런 일은 이제 안 해. 그리고 할 거였으면 이렇게 뒤가 밟힐 정도로 허술하게 하지도 않았어. 은, 은하 씨! 안 하신다면서요……! 안 하신다는 분이 만약을 가정해도 그렇게 구체적으로 계획까지 짜시냐고요!
한편, 애리는 은하가 준 단검을 소중하게 품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한 번 사용해야겠다고. 이건 그런 특별 취급을 받을 만한 물건이다. 날이 빠지면 왠지 서글퍼질게 분명한 단검이라서.
“나는 이걸 준비했어.”
미래는 여러 브랜드의 핸드크림을 뭉텅이로 애리의 품에 안겨주었다. 매장에서 직원이 추천해준 제품을 죄다 사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미래의 코멘트는 이러했다.
“애리 손 보면 많이 거칠어서. 이걸로 손 보호하라고.”
‘거친 건 미래 씨 손도 마찬가지인데.’
남의 손 상태는 생각해도 자기 손 상태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애리는 그래서 미래의 다음 생일에는 본인도 핸드크림을 선물로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애리는 혹시나 하고 저수지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저수지도 준비한 게 있나요?”
“어? 난 이거.”
저수지가 건네준 건 목도리였다. 누가 봐도 시중에서 파는 목도리는 아니고, 저수지가 직접 짠 목도리라는 게 확 티가 날 정도였다. 분명 애리한테는 최상의 선물이었다. 저수지가 직접, 자신을 위해 짜준, 이라고 하는 부분에서부터. 사실 애리는 저수지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애리에게 있어서 저수지 그 자체로도 하루하루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딱 한 명만이, 저수지의 목도리에 대해 이런 반응을 내비쳤다.
“저수지……. 아무리 그래도 곧 봄도 다가오는데 철 지난 목도리는 좀…….”
“내 목도리가 어때서?! 애리도 좋아하고 있잖아!”
“아니, 네가 애리 씨를 생각해서 직접 짠 목도리가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냥 계절감을 생각하지 못해서 유감이라는 소리…….”
“그러는 민수현 넌! 네 선물은 다른 줄 알아?!”
저수지의 손가락은 수현 뒤에 있는 거대한 곰인형으로 향했다. 거의 애리와 맞먹을 정도의 크기도 크기거니와 생긴 것도 이상하게 생긴 곰인형이었다. 보통 곰인형이라고 한다면 상상하는 그런 포근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와 다르게, 포악스럽게 생긴, 방구석에 두어도 부피를 많이 차지할 거 같은 귀엽지도 않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만한 그런 곰인형.
그리고 그 곰인형을 왜 수현이 사왔는지 저수지를 뺀 나머지는 다들 알았다. 그야 바로 눈앞에 해당 사람이 있었으니까.
수현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봐도 애리한테 있어서는 탁월한 선택인 것을!
“곰인형이 어때서…….”
“센스 완전 최악! 최악! 최악이라고!”
“그렇게까지 심한 말을 할 것까지는…….”
“그럼 넌 여자 친구 생일에도 매번 곰인형을 선물해줄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미래가 슬쩍 의견을 내비쳤다.
“난 곰인형도 괜찮은데.”
“미래, 넌 가만히 있어!”
지금은 그게 논점이 아니잖아! 목도리는 봄이라고 해도 추울 때가 있으니 좋은 거 아니겠어!? 저 곰인형이 크기는 끌어안고 잘 수 있는 수준도 아니잖아! 거의 장식품 수준의 크기라고! 그러는 너야말로 아무리 애리 씨 생일 준비를 한 달 전부터 시작해도 늦겨울부터 목도리를 짜는 사람이 어디 있는데!!
점차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잠자코 있던 애리는 저수지가 짠 목도리를 들고, 수현이 사온 곰인형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인형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그 모습을 본 저수지와 수현의 언성이 잦아진 건 당연했다.
애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러면 되지 않을까요?”
“어?”
“겨울이 아닐 때는 이 아이가 저 대신 이 목도리를 지켜주는 거예요. 그리고 겨울이 되면 제가 다시 저수지가 준 목도리를 하고 다니는 거죠. 괜찮은 생각이죠?”
이 말의 뜻은 이제 그만 싸우라는 소리였다. 애리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에게 축하의 말이라든지 선물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여러분들이 내가 어떤 걸 좋아해줄까 생각해준 것 자체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이렇게 겸허하게 중재하는 애리의 앞에서 더 이상 말싸움을 지속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저수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저수지가 보기에는 저 곰인형은 평범한 귀여움과 거리가 멀었는데 애리는 왜 저렇게 기쁜 얼굴을 하면서 저 곰인형을 바라보는 것인지. 혹시 자신이 남들과 취향이 다른 게 아닐지 하는…….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애리는 그 곰인형을 향해 인사하길,
“그럼 잘 부탁해요, 저수지 곰인형 씨.”
그리고 곧장 저수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생각보다 행복한 날이었어…….’
그 날 밤, 애리는 침대에 누워서 반나절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여러 일들을 떠올리다 보니 애리는 자기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에 문득 깨달았다.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나날들이란 원래부터 행복하기 그지없는 것이거늘. 그 날이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날이든, 혹은 특별한 날이든지 간에.
‘그나저나 얼렁뚱땅 이렇게 생일이 고정되어 버렸네…….’
원래는 좀 더 그럴듯한 날짜를 정해서 그 날을 자신의 생일로 할까 하다가 흐지부지된 것을 이렇게 되살리다니. 뭐, ‘시궁쥐 팀의 저격수’ 애리의 생일이 이전의 위상능력자가 되기 전의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와 ‘집행자’ 주애리와 생일이 같은 게 조금 흠이라지만…….
‘원래 세상에는 생일이 같은 사람도 있는 걸.’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오늘 하루 보냈는데, 이제 와서 생일 날짜를 번복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앞뒤가 안 맞기도 했고.
아무튼 지금 애리의 기분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기대된다.’
앞으로의 생일이 아니라, 그냥 이 소중하고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보낼 나날들 그 자체가.